메노르카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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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노르카섬 해전은 1756년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전투로, 7년 전쟁의 발발과 관련된 사건이다.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영국령이 된 메노르카섬을 공격하여 점령하려 했고, 영국은 존 빙 제독을 파견하여 이를 막으려 했다. 전투는 양측 모두 뚜렷한 승리 없이 끝났지만, 빙 제독은 소극적인 전술로 인해 비난받고 군법회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이 전투로 영국은 메노르카섬을 상실했고, 이는 해군 전략과 리더십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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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노르카섬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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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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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7년 전쟁 |
날짜 | 1756년 5월 20일 |
장소 | 지중해, 메노르카섬 근처, 현재의 스페인 |
결과 | 프랑스-스페인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왕국 |
교전국 2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지휘관 및 병력 | |
프랑스 지휘관 | 가릴소니에르 후작 |
영국 지휘관 | 존 빙 |
프랑스 병력 | 전열함 12척, 프리깃함 5척 |
영국 병력 | 전열함 12척, 프리깃함 7척 |
사상자 | |
프랑스 사상자 | 전사 38명, 부상 184명 |
영국 사상자 | 함대 절반 손상, 전사 45명, 부상 162명 |
2. 배경
1708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이 메노르카섬을 점령한 이후, 프랑스는 이 섬을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1754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을 시작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신대륙의 식민지를 놓고 이미 교전을 시작했으며, 이 전쟁에서 영국은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이 본국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가 영국 본토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자코바이트의 난을 지원한 전례가 있었다.[1]
프랑스군의 메노르카섬 침공은 오랫동안 예상되었으나, 영국 정부의 대응은 늦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지브롤터에서 존 빙 제독(원래는 부제독이었으나 메노르카 구원을 위해 제독으로 승진) 지휘 하의 전열함 10척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빙 제독에게 주어진 함대는 수리가 필요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고, 선원들 역시 충분히 승선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영국 정부가 툴롱에 배치된 프랑스 함대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이었다.[1]
2. 1. 7년 전쟁의 발발과 유럽 정세
프랑스 함대는 1708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부터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메노르카섬을 공략하여 이 곳의 영국군을 몰아내려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신대륙의 식민지를 놓고 1754년 초기에 이미 교전을 시작했고(프렌치-인디언 전쟁) 이 시점에서 영국은 고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이 본국에까지 퍼지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으며, 혹시 프랑스가 영국 본토를 공략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자코바이트의 난을 지원한 바 있었다.)[1]프랑스군의 메노르카섬에 대한 장기적인 움직임은 비록 늦기는 하였으나 결국 영국 정부로 하여금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결국 지브롤터로부터 존 빙 제독 지휘하의(원래는 부제독이었으나 메노르카 구원을 위해 제독으로 승진하였다.) 전열함 10척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비록 메노르카 공략을 위해 툴롱에 배치된 프랑스 함대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빙 제독에게 인도된 함대는 모두 수리가 필요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고, 선원들 역시 승선하지 않은 상태였다.[1]
2. 2. 메노르카섬의 전략적 중요성
1756년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1708년 영국이 점령한 메노르카섬을 위협하고 있었다. 1754년에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은 프랑스와 자코바이트가 협력하여 그레이트브리튼섬에 침공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메노르카섬 대신 본국 주변의 방비를 강화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영국군의 허를 찔러 리슐리외 공이 이끄는 육군이 메노르카섬 상륙에 성공한다.프랑스의 메노르카섬 침공은 예상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뒤늦게 대응에 나섰다. 존 빙(중장이었으나, 곧 대장으로 승진)이 이끄는 10척의 전열함을 지브롤터에서 파견했다. 영국 정부는 프랑스 함대의 규모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빙에게는 상태가 좋지 않고 인원이 부족한 군함만 준비했다.[1]
2. 3. 프랑스의 메노르카섬 침공 계획
프랑스 함대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중인 1708년부터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메노르카섬을 공격하여 영국군을 몰아내려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신대륙의 식민지를 놓고 1754년 초 프렌치-인디언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 전쟁에서 영국은 고전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이 본국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가 영국 본토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자코바이트의 난을 지원한 적이 있었다.[1]프랑스군의 메노르카섬에 대한 공격은 오랫동안 예상되었으나, 영국 정부의 대응은 늦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지브롤터에서 존 빙 제독(원래는 부제독이었으나 메노르카 구원을 위해 제독으로 승진) 지휘 하의 전열함 10척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빙 제독에게 주어진 함대는 수리가 필요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고, 선원들 역시 충분히 승선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영국 정부가 툴롱에 배치된 프랑스 함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이었다.[1]
영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1708년에 메노르카섬을 점령한 이후 이 섬을 지배해 왔지만, 메노르카섬은 항상 프랑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1754년에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은 프랑스와 자코바이트가 협력하여 그레이트브리튼섬에 침공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메노르카섬이 아닌 본국 주변의 방비를 강화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1756년에 영국군의 허를 찔러 리슐리외 공이 이끄는 육군이 메노르카섬 상륙에 성공했다.[1]
2. 4. 영국의 대응과 존 빙 제독의 파견
1708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영국이 메노르카섬을 점령한 이후, 프랑스는 메노르카섬을 공략하여 영국군을 몰아내려 하였다. 1754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을 시작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신대륙의 식민지를 놓고 이미 교전을 시작했으며, 이 시점에서 영국은 고전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프랑스가 영국 본토를 공략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본국 방위에 집중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자코바이트의 난을 지원한 바 있었다.)[1]영국 정부는 프랑스의 메노르카섬 침공에 대한 장기적인 움직임에 늦게나마 대응하여, 지브롤터에서 존 빙 제독(원래 부제독이었으나 메노르카 구원을 위해 제독으로 승진)이 지휘하는 전열함 10척을 파견했다. 영국 정부는 메노르카 공략을 위해 툴롱에 배치된 프랑스 함대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빙 제독에게 주어진 함대는 수리가 필요했고 선원도 부족한 상태였다.[1]
3. 전투의 전개
빙 제독이 지휘하는 소규모 함대는 메노르카섬에서 탈출한 함대와 합류하여 전열함 13척으로 전력이 증강되었다.[1] 5월 19일 메노르카섬에 도착했을 때, 섬의 대부분은 이미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고, 마온의 성 필립 요새 수비대만이 포트 마혼에서 저항하고 있었다. 빙 제독에게는 수비대를 구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오후에 전열함 12척과 프리깃함 5척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가 나타나면서 전투가 불가피해졌다.[1]
3. 1. 양측 함대의 조우와 전투 준비
빙 제독이 지휘하는 소규모 함대는 섬에서 탈출해 온 메노르카 함대와 합류하였다. 이들은 5월 19일 메노르카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군이 섬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오직 성 필립 항구(St. Philip)의 수비병들만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빙 제독은 성 필립 항구의 수비병들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정오가 지나자 프랑스 함대 소속 전열함 12척과 프리깃함 5척이 영국 함대에 공격을 가했다. 양 함대는 서로 마주 보며 전투 준비를 시작했고, 다음 날 아침 전투가 시작되었다.[1]3. 2. 영국 함대의 전술적 문제점
빙은 12척의 함선을 전투 대형으로 구성하고 풍상을 유지하며 프랑스 함대의 선두에 접근했다. 이후 함선에 방향을 바꾸어 프랑스 함대 맞은편 함선에 접근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의 열악한 신호 체계는 혼란과 지연을 일으켰다. 영국 선봉은 더 강력한 화력을 가진 프랑스 함대에게 상당한 타격을 받았고, 빙의 기함을 포함한 함대 후미는 효과적인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1] 빙은 정규 전술에 고집하여, 결과적으로 적 함대에 큰 손상을 입히지 못하고 자군 함선 몇 척만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3]3. 3. 전투의 경과와 무승부
12척의 프랑스 전열함에 맞서, 빙 제독은 자신의 가장 큰 함선 12척을 전투 대형으로 구성하고 풍상을 유지하며 프랑스 함대의 선두에 접근했다. 이후 그는 함선에 방향을 바꾸어 프랑스 함대의 맞은편 함선에 접근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의 열악한 신호 능력으로 인해 근접전에 혼란과 지연이 발생했다. 영국 선봉은 더 강력하게 무장한 프랑스 함대에게 상당한 타격을 받았고, 빙 제독의 기함을 포함한 함대 후미는 효과적인 사정거리 내에 들어오지 못했다. 전투 중에 빙 제독은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표준적인 전투 절차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그의 함선 중 여러 척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 측은 손실된 함선이 없었다. 모든 참석한 고위 장교들이 동의한 군사 회의 후에, 함대가 더 이상 프랑스 함선에 피해를 입히거나 주둔군을 구원할 기회가 없다는 데 동의했다. 따라서 빙 제독은 지브롤터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4. 전투의 결과와 영향
메노르카섬 해전은 무승부로 볼 수 있지만, 존 빙은 요새 지원과 프랑스 함대 추격에 모두 실패하여 거센 비난을 받았다. 영국 해군 본부는 "요새 지원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며 빙을 영국 해군 군법 위반으로 기소했지만, 이는 해군 본부 자신의 패전 책임을 숨기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빙은 군법 회의 결과 총살형이 선고되었고, 1757년 5월 14일 포츠머스 항구의 전열함 모나크에서 처형되었다.
윌리엄 피트는 섬을 되찾고자 했으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 원정대는 파견되지 않았다. 결국 메노르카섬은 파리 조약 이후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및 벨 일과의 교환을 통해 영국으로 반환되었다.[4]
4. 1. 존 빙 제독의 몰락과 처형
전투는 무승부로 여겨지나, 수비병을 구원하는 데 실패하고 프랑스 함대를 더 밀어붙이는 데 실패한 존 빙의 행동은 무수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4] 해군본부는 이 비참한 원정에 대한 자신들의 부실한 준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빙에게 주어진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고 수비병을 지원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군율 위반의 책임을 물었다. 빙은 군법회의에 소환되었고, 유죄로 판결되어 총살당했다. 총살형은 1757년 3월 14일 포츠머스 항에 정박한 전함 모나크에서 집행되었다.
빙의 처형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서 "이 나라에서는 이따금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제독을 죽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여긴다."라는 구절로 언급되었다.[4]
4. 2. 볼테르의 풍자와 비판
전투는 무승부로 여겨지나, 수비병을 구원하는 데 실패하고 프랑스 함대를 더 밀어붙이는 데 실패한 존 빙의 행동은 무수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해군본부는 빙에게 주어진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고 수비병을 지원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군율 위반의 책임을 물었다. 빙은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아 총살당했다. 총살형은 1757년 5월 14일 포츠머스 항에 정박한 전함 모나크에서 집행되었다.[4]볼테르는 그의 소설 《캉디드》에서 빙의 처형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이는 프랑스어 원문으로 "Dans ce pays-ci, il est bon de tuer de temps en temps un amiral pour encourager les autres|이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때때로 제독을 죽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프랑스어"로 표현되었다.[4]
4. 3. 메노르카섬의 상실과 전략적 손실
이 해전은 빙 제독이 수비대를 구원하거나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는 데 실패하면서 프랑스의 승리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소극적인 행위는 심한 비판을 받았다.[4] 해군성은 이 재앙적인 모험에 대한 자체적인 준비 부족에서 주의를 돌리기 위해, 빙 제독이 명령을 수행하고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 않아 군법을 위반했다고 기소했다.[4] 그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사면 요청에도 불구하고 1757년 3월 14일 포츠머스 항구에서 처형되었다.[4]빙 제독의 처형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서 "Dans ce pays-ci, il est bon de tuer de temps en temps un amiral pour encourager les autres" – "이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때때로 제독을 죽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라는 구절로 언급된다.[4]
윌리엄 피트가 섬을 되찾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섬을 탈환하기 위한 영국 원정대는 파견되지 않았다.[4] 결국 이 섬은 파리 조약 이후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와 벨 일과 교환하여 영국으로 반환되었다.[4]
5. 전투 이후의 역사적 평가와 교훈
(이전 출력이 비어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 정보가 제공되면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6. 전투 서열
John Byng영어 제독의 보고서에 따르면, 메노르카섬 해전에 참전한 양측 함대의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다.[1]
존 빙이 이끄는 영국 함대와 롤랑-미셸 바랭 드 라 갈리소니에르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맞붙었다. 양측 모두 다양한 크기의 전열함과 프리깃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위 섹션에서 각 함대의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6. 1. 영국 (존 빙 제독)
존 빙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함선명 | 대포 (문) | 비고 |
---|---|---|
디파이언스 | 60 | |
포틀랜드 | 50 | |
랭커스터 | 66 | |
버킹엄 | 70 | 부지휘관 템플 웨스트의 기함 |
캡틴 | 70 | |
인트레피드 | 64 | |
리벤지 | 64 | |
프린세스 루이사 | 60 | |
트라이던트 | 64 | |
라밀리스 | 90 | 빙 제독의 기함 |
컬로든 | 74 | |
킹스턴 | 60 | |
뎁트포드 (48/50문)와 돌핀 (22문)을 포함한 기타 6척 |
각 함선의 지휘관, 등급, 사상자 수는 아래 표와 같다.
함선 | 등급 | 포 (문) | 지휘관 | 사망 | 부상 | 총계 | 비고 |
---|---|---|---|---|---|---|---|
디파이언스 | 3급 전열함 | 60 | 토머스 앤드루스 함장 | 14 | 45 | 59 | |
포틀랜드 | 4급 전열함 | 50 | 패트릭 베어드 함장 | 6 | 20 | 26 | |
랭커스터 | 3급 전열함 | 66 | 조지 에지컴 함장 | 1 | 14 | 15 | |
버킹엄 | 3급 전열함 | 68 | 템플 웨스트 소장, 마이클 에버릿 함장 | 3 | 7 | 10 | |
캡틴 | 3급 전열함 | 64 | 찰스 캣퍼드 함장 | 6 | 30 | 36 | |
인트레피드 | 3급 전열함 | 64 | 제임스 영 함장 | 9 | 39 | 48 | |
리벤지 | 3급 전열함 | 64 | 프레데릭 콘월 함장 | 0 | 0 | 0 | |
프린세스 루이사 | 3급 전열함 | 60 | 토머스 노엘 함장 | 3 | 13 | 16 | |
트라이던트 | 3급 전열함 | 64 | 필립 듀렐 함장 | 0 | 0 | 0 | |
라밀리스 | 2급 전열함 | 90 | 존 빙 제독, 아서 가디너 함장 | 0 | 0 | 0 | |
컬로든 | 3급 전열함 | 74 | 헨리 워드 함장 | 0 | 0 | 0 | |
킹스턴 | 3급 전열함 | 60 | 윌리엄 패리 함장 | 0 | 0 | 0 | |
뎁트포드 | 4급 전열함 | 50 | 존 앰허스트 함장 | 0 | 0 | 0 | |
사상자 요약 | 42 | 168 | 210 |
6. 2. 프랑스(가릴소니에르 후작)
함선명 | 대포 | 지휘관 | 사망 | 부상 | 합계 | 비고 | |
---|---|---|---|---|---|---|---|
오르페 | 64 | 피에르-앙투안 드 레이몬디 드 에우 | 10 | 9 | 19 | ||
이포포탐 | 50 | 앙리 드 로슈모르 | 2 | 10 | 12 | ||
르두터블 | 74 | 함대 사령관 피에르-앙드레 드 글랑데베 드 카스텔레 | 12 | 39 | 51 | ||
사제 | 64 | 뒤렝 선장 | 0 | 8 | 8 | ||
게리에 | 74 | 르네 빌라르 드 라 브로스-라킨 | 0 | 43 | 43 | ||
피에르 | 50 | 데르빌 선장 | 0 | 4 | 4 | ||
푸드루아 | 84 | 해군 중장 롤랑-미셸 바랭 드 라 갈리소니에르 | 2 | 10 | 12 | 기함 | |
테메레 | 74 | 보몽 선장 | 0 | 15 | 15 | ||
콩탕 | 64 | 조제프 드 사브랑 | 5 | 19 | 24 | ||
리옹 | 64 | 폴-이폴리트 드 보빌리에-생-아냥 | 2 | 7 | 9 | ||
코론 | 74 | 함대 사령관 장-프랑수아 드 라 클뤼-사브랑 | 0 | 3 | 3 | ||
트리통 | 64 | 메르시에 선장 | 5 | 14 | 19 | ||
총계 | 38 | 181 | 219 | ||||
5척 프리깃함 |
7. 사소한 이야기
이 전투에 참여한 전함 중 하나인 HMS 돌핀은 훗날 존 바이런 함장의 지휘 아래 처음으로 세계일주를 하였고, 이후 사무엘 월리스 함장의 지휘 아래 두 번째 세계일주를 함으로써 처음으로 두 번이나 세계 일주를 한 함선이 되었다.[1]
영국 측에서 전투에 참여한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당시 18세의 사관후보생이었던 아더 필립이 있었다.[1] 그는 나중에 1787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보타니 만에 상륙한 최초의 함대를 지휘하여 시드니에 범죄자 식민지를 만들었으며, 아마도 오스트레일리아에 최초로 유럽인 거주지를 건설한 인물일 것이다.[1]
참조
[1]
서적
Dull
[2]
서적
Lambert
[3]
서적
McGuffie
1951
[4]
서적
Hamley
[5]
서적
Dull
[6]
서적
Lambert
[7]
서적
Ham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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