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모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개는 후한 말, 위나라 초기의 인물로, 젊은 시절 청렴하고 공정한 평가를 받았다. 조조를 섬기며 관리 선발을 담당했고, 청렴과 절검을 중시했다. 최염 처형에 불만을 품었다가 투옥되었지만, 화흡 등의 변호로 죽음은 면했지만 면직되었다.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한 후 아들 모기를 낭중으로 임명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국의 자살한 정치인 - 리리싼
    리리산은 중국 공산당 초기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극좌적 모험주의 노선으로 몰락했고,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노동부장을 역임했으나 문화대혁명 때 숙청당한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정치인이다.
  • 중국의 자살한 정치인 - 양기
    양기는 후한 시대 순제, 충제, 질제, 환제 4대에 걸쳐 권력을 휘두른 권신으로, 여동생이 황후가 되면서 외척으로서 권력을 잡고 황제 옹립에 관여하며 횡포를 부렸으나, 환제에 의해 몰락하여 자결한 인물이다.
  • 조위의 정치인 - 정무
    정무는 중국 삼국시대 인물로, 정사 삼국지에는 정욱의 아들로 조비를 섬겼다는 기록만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무의 참군으로 촉한의 제1차 북벌 때 조운을 상대로 계책을 내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묘사되지만, 관흥과 장포의 지원으로 실패하고 남안으로 퇴각한 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 조위의 정치인 - 하후무
    하후무는 위나라의 무장으로 하후돈의 아들이며 조조의 사위였고, 조비의 총애를 받아 안서장군에 임명되어 관중을 방어했으나 군사적 재능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제갈량의 북벌 당시 탄핵을 받았지만 복귀하여 진동장군에 이르렀다.
  • 조조 휘하의 정치인 - 동소
    동소는 후한 말부터 위나라 초까지 활동한 정치가이자 책사로서, 원소 휘하에서 활동하다 조조에게 천거된 후 헌제 천도, 관도대전, 오환 정벌 등 중요한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위나라 건국과 안정에 공헌했다.
  • 조조 휘하의 정치인 - 사마의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모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모개
원어 이름毛玠
효선 (孝先, Xiàoxiān)
출생지연주진류군 평구현 (平丘縣)
사망 년도216년
직책상서복야
생애
섬긴 군주조조
활동 시기후한 말기
임관조조가 연주를 다스릴 때 임관
주요 공적인재 천거, 검소한 생활
가족 관계
아들모기 (毛幾)
관직 경력
초기동조연 (東曹掾)
기도위 (騎都尉)
이후상서랑 (尚書郎)
선조상서 (選曹尚書)
상서복야
평가
조조의 평가짐은 모개의 청렴함을 알고 있다. 짐의 아들들은 마땅히 모개를 본받아야 한다.
모개는 관직을 천거함에 있어 마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시듯 신중하다.
기타청렴하고 검소한 관리로 명성이 높았으며, 인재를 천거하는 데 힘썼다.

2. 생애

모개는 젊어서 현의 관리가 되어, 청렴하고 공정한 일 처리로 명성을 얻었다. 형주로 피난하려 했으나, 형주 유표의 정치가 미흡하다는 소식을 듣고 형주 북쪽 노양에 머물렀다. 이후 연주를 장악한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 조조가 사공승상을 역임할 때 동조연이 되어 최염과 함께 관리 선발을 담당했다. 이들은 청렴함과 검소함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여, 선비들은 청렴해지려 노력했고 고관과 총신들도 법도를 준수하게 되었다. 모개는 청탁을 받지 않아 불만을 품은 이들이 동조를 없앨 것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조조는 오히려 모개를 비호하며 서조를 없앴다.[6] 그러나 화흡 등은 절검만을 법도로 삼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5]

위나라 건국 후 상서복야가 되어서도 인재 선발을 계속 담당했다. 당시 태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치후 조식이 총애를 받자, 조조에게 적서의 구분을 명확히 할 것을 강조하며 원소의 예를 들어 간언했다.[6]

216년, 최염이 처형당하자 모개는 내심 불만을 품었다. 이를 안 누군가가 조조에게 밀고하여, 크게 노한 조조는 모개를 투옥했다. 대리 종요의 심문에도 결백을 주장했고, 환계화흡의 변호로 죽음은 면했으나 면직되어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6] 화흡은 조조에게 모개와 고발자 양쪽 모두를 엄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았다.[5] 손성은 이를 두고 "위무(조조)가 형벌의 원칙을 잃었다"고 비판했다.[7]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한 후, 모개의 아들 모기를 낭중으로 임명했다.[8]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모개는 젊어서 현의 관리가 되어, 청렴하고 공정한 일 처리로 명성을 얻었다. 전란을 피해 형주로 피난하려 했으나, 형주 유표의 정치가 미흡하다는 소식을 듣고 형주 북쪽 노양에 머물렀다. 이후 연주를 장악한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 조조가 사공승상을 역임할 때 동조연이 되어 최염과 함께 관리 선발을 담당했다. 이들은 청렴함과 검소함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여, 선비들은 청렴해지려 노력했고 고관과 총신들도 법도를 준수하게 되었다.

모개는 청탁을 받지 않아 불만을 품은 이들이 동조를 없앨 것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조조는 오히려 모개를 비호하며 서조를 없앴다.[6] 그러나 화흡 등은 절검만을 법도로 삼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5]

위나라 건국 후 상서복야가 되어서도 인재 선발을 계속 담당했다. 당시 태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치후 조식이 총애를 받자, 조조에게 적서의 구분을 명확히 할 것을 강조하며 원소의 예를 들어 간언했다.[6]

216년, 최염이 처형당하자 모개는 내심 불만을 품었다. 이를 안 누군가가 조조에게 밀고하여, 크게 노한 조조는 모개를 투옥했다. 대리 종요의 심문에도 결백을 주장했고, 환계화흡의 변호로 죽음은 면했으나 면직되어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6] 화흡은 조조에게 모개와 고발자 양쪽 모두를 엄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았다.[5] 손성은 이를 두고 "위무(조조)가 형벌의 원칙을 잃었다"고 비판했다.[7]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한 후, 모개의 아들 모기를 낭중으로 임명했다.[8]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동

모개는 젊어서 현리를 지내며 청렴하고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형주로 피란하려 했으나, 형주 유표의 정치가 명확하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 형주 북쪽의 노양에 머물렀다. 이후 연주를 손에 넣은 조조의 휘하에 들어갔다. 조조가 사공 · 승상을 역임하면서, 모개는 동조연이 되어 최염과 함께 관리 선발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청렴과 절약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선비들은 청렴에 힘썼고 고관과 총신들도 법도를 준수하였다. 모개는 청탁을 받지 않아,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모개가 속한 동조를 없앨 것을 건의했으나, 조조는 도리어 모개를 비호하여 서조를 없앴다.[6] 그러나 화흡 등은 단지 절약만을 법도로 삼는 것이 과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5]

위나라가 건국된 후 상서복야가 되었으며 여전히 인재 선발을 맡았다. 당시 태자가 정해지지 않고 임치후 조식이 총애를 받자, 조조에게 적자와 서자의 구분을 하지 않았다가 집안이 망한 원소의 예를 들어 간언했다.[6]

216년, 최염이 처형당하자 내심 불만을 품었으나, 누군가가 이를 조조에게 비밀리에 고했다. 크게 노한 조조에게 투옥당했으며, 대리 종요의 심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환계 · 화흡의 변호로 죽음은 면하였지만 면직되고 집에서 죽었다.[6] 특히 화흡은 조조에게 모개와 모개를 고발한 사람 양쪽을 모두 엄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고 했으나, 조조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5] 손성은 “위무(조조)는 이로 인해 형벌의 원칙을 잃었다.”라며 비난했다.[7]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하고서, 아들 모기를 낭중으로 임명했다.[8]

2. 3. 위나라 건국 이후

위나라가 건국된 후, 모개는 상서복야가 되어 계속해서 인재 선발을 맡았다. 당시 태자가 정해지지 않고 임치후 조식이 총애를 받자, 모개는 조조에게 적서의 구분을 하지 않아 집안이 망한 원소의 예를 들어 간언했다.[6]

216년, 최염이 처형당하자 모개는 내심 불만을 품었다. 누군가가 이를 조조에게 비밀리에 고했고, 크게 노한 조조는 모개를 투옥시켰다. 대리 종요의 심문을 받았으나 모개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환계화흡의 변호로 죽음은 면했으나 면직되었고, 집에서 죽었다.[6] 특히 화흡은 조조에게 모개와 모개를 고발한 사람 양쪽을 모두 엄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고 했으나, 조조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5] 손성은 “위무(조조)는 이로 인해 형벌의 원칙을 잃었다.”라며 비난했다.[7]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하고서, 모개의 아들 모기를 낭중으로 임명했다.[8]

2. 4. 최염과의 관계 및 죽음

216년, 최염이 처형되자 모개는 내심 불만을 품었다.[6] 누군가가 이를 조조에게 비밀리에 고했고, 분노한 조조는 모개를 투옥했다. 대리 종요가 모개를 심문했으나, 모개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6] 환계화흡이 모개를 변호하여 죽음은 면했지만, 면직되었다.[6] 특히 화흡은 조조에게 모개와 모개를 고발한 사람 양쪽을 모두 엄밀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고 했으나, 조조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5] 결국 모개는 집에서 죽었다.[6] 손성은 “위무(조조)는 이로 인해 형벌의 원칙을 잃었다.”라며 비난했다.[7]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한 후, 아들 모기를 낭중으로 임명했다.[8]

3. 《삼국지연의》에서의 모개

만총, 여건조조에게 추천하여 섬기게 되었고, 적벽 대전에서는 우금과 함께 수군 도독을 맡았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들모기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위키문헌 삼국지 권23 화상양두조배전 :zh:三國志/卷23
[6] 위키문헌 삼국지 권12 최모형포사마전 :zh:三國志/卷12
[7] 문서
[8] 서적 삼국지 주석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