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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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금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조조 휘하의 장수로, 황건적의 난 진압에 참여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관도 대전에서 선봉으로 활약하고 유비의 공격을 방어하는 등 공을 세워 좌장군까지 올랐다. 그러나 219년 번성 전투에서 관우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고, 오나라에서 억류된 후 위나라로 돌아갔다. 조조의 묘에서 과거의 패배를 그린 그림을 보고 병사하여 여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삼국지》에서 진수는 우금을 오대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했지만, 배송지는 그의 엄격한 성품과 말년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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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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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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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금 |
로마자 표기 | Yu Jin |
원어 이름 | 于禁 |
병음 | Yú Jìn |
자 | 문칙(文則) |
시호 | 여후(厲侯) |
작위 | 익수정후(益壽亭侯) |
관직 | 안원장군(安遠將軍) |
생년 | 미상 |
출생지 | 산둥 성타이안 시태산군 거평현 |
사망년도 | 221년 |
사인 | 분사 |
국적 | 후한 → 위나라 |
주군 | 포신 → 조조 → 조비 |
경력 | |
초기 관직 | 군사마(軍司馬) |
주요 관직 변동 | 함진도위(陷陣都尉) → 평로교위(平虜校尉) → 비장군(裨將軍) → 편장군(偏將軍) → 호위장군(護威將軍) → 좌장군(左將軍) → 안원장군(安遠將軍) |
가족 | |
자녀 | 유괴, 최소 1명 이상의 다른 아들 |
주요 전투 | |
참여 전투 | 조조의 서주 정벌 복양 전투 완성 전투 관도 대전 박망 전투 첨산 전투 번성 전투 |
2. 생애
우금은 후한 말 태산군 거평현(현재의 타이안시, 산둥성)에서 태어났다.[3] 180년대 초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의용군으로 입대하여 반란 진압을 도왔다.[4] 192년(初平|초평중국어 3년), 포신이 전사하자 왕랑[54]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군사마가 되었다.[5] 조조의 서주 정벌에 종군하여 광위(廣威)를 함락시키고 함진도위(陷陣都尉)로 승진했다.[6]
197년 완성 전투에서 장수가 배신했을 때 꿋꿋이 싸우며 철수했고, 청주병의 약탈을 막아 조조의 칭찬을 받고 익수정후(益壽亭侯)에 봉해졌다. 198년 여포 정벌에도 참전하였다. 199년 사환, 조인과 함께 수고(휴고)를 격파하였다.[6]
200년 관도 대전에서는 연진을 방어하며 원소의 공격을 막아냈고, 이후 악진과 함께 원소의 야영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26] 이러한 공으로 비장군(裨將軍)으로 승진했다.[27]
206년에는 창희의 반란을 진압하여 호위장군(虎威―)이 되었고,[34] 209년에는 진란과 매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좌장군(左將軍)으로 승진하고 황제의 권한을 받았다.[34]
219년 번성 전투에서 관우에게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221년 조위로 돌아왔다.[40] 조비는 우금을 위로하며 안원장군()으로 임명했지만,[42] 조조의 묘에 그려진 자신의 항복 장면을 보고 분하고 부끄러워 병을 얻어 사망했다.[43] 시호는 '''여후'''(厲侯)로, '가혹한 후작'이라는 뜻이다.[43]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임용
우금은 후한 말 태산군 거평현(현재의 타이안시, 산둥성)에서 태어났다.[3] 180년대 초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의용군으로 입대하여 반란 진압을 도왔다. 그는 포신의 부하가 되었으며,[4] 포신은 연주 (현재의 산둥성 남서부 및 허난성 동부)에 주둔하고 있었다.192년(初平|초평중국어 3년), 포신이 연주를 침입한 청주의 황건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도백(都伯)이 되어 왕랑[54]에 속하였다. 왕랑은 우금이 비범하고 훌륭한 장군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여 조조에게 우금을 추천했다.[5] 조조는 우금을 면접한 후 군사마로 임명하고, 도겸이 다스리는 서주의 광위(廣威)를 공격하도록 보냈다. 우금은 광위를 성공적으로 정복하고, 함진도위(陷陣都尉)로 승진했다.[6]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초평 3년(192년), 포신이 황건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왕랑[54]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군사마가 되었다. 조조의 서주 정벌에 종군하여 광척(廣戚)[55]을 함락시키고 함진도위(陷陳都尉)로 승진했다.조조가 연주를 비운 사이, 장막·장초 형제가 여포를 끌어들여 난을 일으켰다. 우금은 조조를 따라 복양, 수창(須昌, 지금의 산둥성 둥핑 현), 수장(壽張), 정도, 이호(離狐), 옹구(雍丘, 지금의 허난성 치현) 등에서 싸워 연주 탈환에 공을 세웠다. 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영천의 황건 잔당 황소·유벽 등을 토벌할 때도 활약하여 평로교위(平虜校尉)로 승진하였다.
197년 장수(張繡) 정벌에 참여, 장수가 항복했다가 다시 배신하여 기습했을 때, 우금은 수백 명을 거느리고 꿋꿋이 싸우며 철수했다. 그 길에 청주병 일부가 약탈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토벌하였다. 청주병들이 조조에게 고소하였으나, 우금은 보루부터 쌓고 조조에게 진술하여 칭찬을 받고 익수정후(益壽亭侯)에 봉해졌다.
198년 조조가 장수를 다시 공격할 때와 여포 정벌에도 참전하였다. 199년 사환, 조인과 함께 장양 사후 원소에 속한 수고(휴고)를 사견(射犬, 지금의 허난성 보아이 현)에서 격파하였다. 197년 9월(음력)에는 원술이 진국 호현(苦縣)을 공략하고 남겨놓은 교유·이풍·양강·악취를 조조가 격파할 때도 종군하였다.[56]
2. 3. 관도 대전에서의 공헌
200년 초, 조조와 북쪽의 경쟁자 원소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원소가 초기에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우금은 선봉을 이끌고 원소의 군대와 교전할 것을 자원했다.[22] 조조는 우금의 용기에 감명을 받아 보병과 기병 2,000명을 우금에게 지휘하게 하여 연진(延津; 현재 허난성 연진현)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관도(官渡; 현재 허난성 중모현 북동쪽)로 향했다.[23]유비가 서주에서 반역했으므로 조조는 유비를 정벌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지만, 우금의 수비는 굳건하여 원소는 함락시킬 수 없었다.[25]
이후 우금과 악진은 보병과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연진 남서쪽의 황하를 따라 원소의 야영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지(汲; 현재 웨이후이 남서쪽) 및 후오자(獲嘉; 현재 후오자현 남동쪽) 현까지 진군했다. 그들은 적의 야영지 30곳 이상에 불을 지르고, 수천 명의 적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하모(何茂)와 왕모(王摩)를 포함한 원소의 장수 20명 이상을 항복시켰다.[26] 조조는 이후 우금에게 원무현(原武縣; 현재 위안양현)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우금은 독시의 전투(杜氏津)에서 원소의 야영지를 공격하여 파괴했다.[26]
우금은 그의 업적으로 비장군(裨將軍)으로 승진했고, 이후 관도에 있는 조조의 야영지로 이동했다. 관도 전투 동안, 원소의 군대는 흙을 쌓아 작은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플랫폼을 건설하여 궁병들이 조조의 야영지에 화살을 비처럼 쏟아지게 했다. 조조의 군대는 많은 사상자를 냈고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우금은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용감하게 싸우며 훌륭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27]
2. 4. 반란 진압과 좌장군 승진
201년 조조에게 귀부했었던 동해군의 창희가 206년[61] 다시 반기를 들었다. 장패,[62] 하후연과 함께[63] 창희를 평정하였다. 창희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우금에게 투항하였다. 창희를 조조에게 호송해야 한다는 장수들의 의견을 내치고 눈물을 흘리며 바로 참수하였다. 순우(淳于)에 있던 조조는 우금을 더욱 중히 여기고 표를 올려 칭찬하였다. 이에 우금은 호위장군(虎威―)이 되었다.209년[64] 진란과 매성(梅成)이 육안(六安)에서 반란을 일으켰다.[65] 우금과 장패는 매성을, 장료와 장합은 진란을 맡았다. 매성은 우금에게 거짓 항복하여 3,000명의 전력을 보전했다가 진란에게 합류하였다. 우금은 장료에게 군량을 계속 대주어 장료가 마음 놓고 작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마침내 장료가 진란과 매성을 베어 진압하였다. 우금은 식읍 200호를 더해 모두 1,200호가 되었다.
이후 우금은 좌장군()으로 승진하고 황제의 권한을 받았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은 후작 작위를 받고 식읍 500호를 받았다.[34]
2. 5. 번성 전투와 항복
219년(건안 24년), 조조가 장안에 있을 때 번성(樊城)의 조인에게 관우를 공격하게 하고, 우금은 이를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해 8월(음력)에 큰 비가 내려 한수가 범람하면서 우금 등 일곱 군이 물에 잠겼다. 우금 등은 높은 곳에 올라 피할 곳을 찾았으나, 관우가 큰 배를 타고 공격해와 결국 항복하였다. 반면 방덕은 굽히지 않고 처형되었다.[66]이 소식에 조조는 "30년간 알고 지냈던 우금이 위난에 처하자 방덕만도 못하단 말인가."라며 탄식했다.[38] 우금과 3만 명의 포로는 강릉(江陵)으로 보내졌고, 강릉의 식량 부족으로 손권 소유 상관(湘關)의 쌀을 강탈했다. 이를 핑계로 여몽이 진공하여 형주를 점령하였고,[67] 우금은 풀려나 오나라로 인계되었다.
손권과 말을 타고 외출했을 때 우번이 우금을 꾸짖고 채찍을 휘두르려 하자 손권이 제지했다. 또, 손권이 술을 마실 때 우금이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자 우번이 빈정댔고, 손권은 불편해했다.[68] 221년(황초 2년), 손권이 위에 칭번하며[69] 우금을 송환하려 했으나, 우번은 반대했다. 그러나 우금은 돌아가 우번을 칭찬했다.[70]
2. 6. 오나라에서의 억류와 귀환
우금은 219년 말까지 형주의 관우 기지에서 포로로 잡혀 있었다. 여몽의 기습 침공으로 손권의 장군 여몽이 그 지역의 유비 영토를 점령하고 관우는 손권 군대에 의해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우금은 풀려나 동오(손권의 영토)로 보내져[39] 손님의 대우를 받았으나, 손권 휘하의 관리인 우번에게 조롱과 굴욕을 당했다.조조는 220년 3월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조비가 그 뒤를 이었다. 그 해 말, 조비는 후한을 종식시키고 조위를 건국했다. 221년, 손권은 조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가을에 우금을 위나라로 돌려보냈다.[40]
당시 우금은 창백한 모습의 노인이었고 머리카락은 백발이었다. 그는 조비를 만나 무릎을 꿇고 조배하며 울었다.[41] 조비는 그를 위로하고 순림보와 맹명시를 언급하며 안원장군()으로 임명했다.[42]
조비는 우금을 자신의 개인 대표로 손권과 만나게 하려고 했다. 우금이 떠나기 전에 조비는 조조의 묘가 있는 업(현 한단, 허베이성)의 고릉(高陵중국어)을 방문하라고 명령했다. 그곳에서 우금은 번성 전투의 삽화를 보았는데, 그는 관우에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방덕은 용감하고 용맹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는 너무 후회하여 병이 들었고, 결국 사망했다. 조비는 그에게 "려후"라는 시호를 하사했는데,[43] 이는 문자적으로 "가혹한 후작"을 의미한다.
2. 7. 죽음과 사후 평가
은 번성 전투에서 관우에게 항복한 후 포로 생활을 하다 조위로 돌아왔으나, 조조의 무덤에서 자신의 항복 장면을 그린 그림을 보고 분하고 부끄러워 병을 얻어 사망했다.[43] 시호는 '''여후'''(厲侯)로, '가혹한 후작'이라는 뜻이다.[43]조조는 우금이 수재로 인해 패전한 것이지 그의 과실이 아니라며 위로하고 안원장군(安遠―)에 임명했다.[71] 그러나 오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기 전, 조조의 능묘인 고릉(高陵)을 참배하게 했는데, 그곳에는 관우가 승리하고 방덕이 항복을 거부하며, 우금이 항복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72]
조비는 우금을 위로하며 순림보와 맹명시의 고사를 언급하며 안원장군으로 임명했다.[42] 하지만 조조의 묘를 방문하게 하여 번성 전투의 장면을 보게 했고, 결국 우금은 병으로 사망했다.[43]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조비가 우금을 능묘에 그려 욕보인 것은 군주가 할 짓이 아니라고 비판했다.[52]
진수는 우금을 장료, 악진, 장합, 서황과 함께 조조 생전에 가장 공적이 있던 장군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가 말년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고 평했다.
3. 성품과 평가
우금은 군대를 엄격하게 다루어 적의 재물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아 중용받았다. 하지만 병사들의 마음까지는 얻지 못했다.[45] 조조가 주령의 병력을 우금에게 붙여주고자 했을 때, 우금이 명령을 받들어 수십 기만을 데리고 달려가 그대로 집행하자 주령과 그 부하들은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복종하였다. 이처럼 우금은 위엄이 있었다.[46]
왕랑은 우금을 조조에게 대장군을 맡을 능력이 있다고 추천하였다. 197년 완(宛)에서 장수에게 죽을 뻔한 조조는 청주병 건을 진술하는 우금에게 “육수(淯水)에서의 난으로 급박한 와중에도 우금은 군사를 정돈해 적들과 싸우고 보루를 단단히 했다.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는 절도가 있으니 역사 속 명장이라 한들 이보다 뛰어나겠는가![73]”라고 극찬하였다. 206년에는 헌제에게 올리는 표에서 우금, 악진, 장료를 ‘무력이 걸출할 뿐더러 계략까지 능하며, 충성심도 한결같아 절의를 지킨다. 싸울 때마다 병사를 지휘하여 어떠한 강한 적이라도 분격하여 물리치고 스스로 북을 쳐 지치지도 않는다.’라고 표현했다.[74]
진수는 조조 휘하의 훌륭한 장수로는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5명이 으뜸이며, 우금은 가장 굳세면서도 엄중하다 하였으나 그 명성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다고 평가하였다.[75] 배송지는 ‘교분이 있던 창희를 중론을 내치면서까지 이송하지 않고 바로 참했으면서 자신은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었으니 나쁜 시호를 받은 것이 당연하다’고 평가하였다.[76] 사마광 역시 ‘수만을 거느리고 패해 죽지도 않고 살아서 항복했으니 조비가 폐하는 것도 옳고, 죽이는 것도 옳다’고 하였다. 다만 고릉에 그림을 그려놓아 능욕한 것은 임금이 할 짓이 아니라는 말도 남겼다.[77]
진수는 그의 저서인 ''삼국지''에서 우금을 장료, 악진, 장합, 서황과 함께 당대의 오대명장 중 한 명으로 칭했다.[2] 배송지는 우금이 옛 친구를 위해 예외를 두는 것을 꺼렸고, 살인에 기울었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는 데 가혹했기 때문에, 결국 포로가 되어 죽은 후에 부정적인 칭호를 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47]
송나라 시인 공평중(孔平仲; 11세기–12세기)은 우금의 삶을 묘사한 시 "우장군"()을 썼다.[48]
북송의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우금은 수만의 장병을 이끌었다. 패하여 죽지 못하고 살아 항복했으며, 또한 돌아왔다. 문제(조비)는 이것(우금)을 파면하거나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능묘에 (항복한 모습을) 그리게 하여 이를 욕보였다. 군주가 할 짓이 아니다."라고 조비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다.
배송지는 우금이 옛 친구인 것을 믿고 항복한 창희를 죄인으로 조조에게 호송했으며, 옛 친구를 위해 만일의 대사(大赦)를 기대했어야 했다며 우금의 행위를 비난하고 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우금은 이각 등이 집권할 무렵 조조가 연주에서 순욱, 전위 등 인재를 모으면서 임관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수많은 전장에 따라다닌다. 육수에서의 청주병 일화도 삽입되었다. 유종이 형주를 들어 조조에게 귀부한 후 청주자사에 임명되어 가는 길에 조조의 명령을 수행하여 유종과 그 모친 채씨(蔡氏)를 죽인다. 적벽 대전에서는 채모와 장윤이 처형되는 바람에 모개와 함께 후임 수군 도독으로 세워진다. 제갈량이 안개 속에서 보낸 배에 조조의 명에 따라 오직 화살만 쏘아대서 많은 화살을 넘겨주고 만다.[19]
동관(潼關)을 함락한 마초와 일기토를 벌이지만 팔구 합 만에 패주한다. 이간계에 넘어간 마초가 한수를 의심하고 한수는 결국 조조와 내통한다. 조조가 마초를 기습하고 마초는 한수의 부장 이감을 추격한다. 우금이 마초 뒤에서 활을 쐈는데 마초가 소리를 듣고 피하면서 그 앞에 있던 이감이 맞아 죽는다. 마초가 말 머리를 돌려 우금에게 덤벼들자 달아난다.[19]
사서처럼 번성을 구원하러 간다. 방덕이 관우와 일기토를 하다가 내빼는 척하면서 화살을 쏘아 관우의 왼팔을 맞춘다. 우금은 방덕이 큰 공을 세울까 시기하여 바로 불러들이고 군대를 증구천(罾口川)에 주둔시킨 채 출격하지 않는다. 마침 비가 연일 내려서 관우는 일시에 둑을 무너트릴 계획을 세우고 각종 배들을 준비한다. 위군 독장(督將) 성하가 강물이 범람할 위험이 있다며 옮기자고 해도 우금은 움직이지 않는다. 기어이 수공에 당해서 궤멸되고 우금은 관우에게 목숨을 애걸한다. 여몽이 형주를 취한 덕에 조조에게로 풀려난다. 조비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 사서와 같은 최후를 맞는다.[19]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청주병을 처단하고 조조군을 통솔한 일화가 소개되는 한편, 조조에게 항복한 유종을 조조의 명령으로 암살하거나(사실에서는 유종은 조조를 섬긴 후 승진을 거듭했다), 방덕의 충성을 의심하여 공적을 방해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간신 조조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그려진다. 비참한 최후를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항복하는 장면에서는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묘사는 처형당한 방덕의 충성심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궁마술에 뛰어난 장군으로 등장하지만, 일기토를 벌이는 기회는 적고, 마초와 싸우다 도망치는 정도의 묘사만 있다. 또한 적벽 대전에서는 처형된 채모와 장윤의 후임으로 모개와 함께 수군 도독이 된다.[19]
5. 가계
우규는 우금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위인 "이수정후"(益壽亭侯)를 물려받았다.[44] 우금은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아들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우규는 후작 작위와 500호의 식읍을 받았다.
참조
[1]
기타
Zizhi Tongjian Vol.69
[2]
서적
Sanguozhi vol. 17
[3]
서적
Sanguozhi vol. 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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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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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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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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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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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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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48]
citation
Song Shi Chao (Siku Quanshu version) (宋詩鈔 (四庫全書本)
https://zh.wikisourc[...]
[49]
문서
会稽太守の王朗とは別人。この人物の出身郡や他の事蹟は不明。
[50]
문서
この反乱は2度目であり、1度目は張遼によって説得され、罪を許されていた。
[51]
문서
「臧覇伝」によると、臧覇も従軍。
[52]
서적
逸周書
[53]
서적
위서
[54]
문서
회계군 태수 왕랑과는 동명이인
[55]
문서
광위(廣威)는 오기이다.
[56]
문서
〈우금전〉에서는 교유 등과의 교전이 완성 전투 앞에 배치되어 있으나 〈무제기〉를 따른다.
[57]
서적
삼국지
[58]
서적
자치통감
[59]
서적
삼국지
[60]
서적
삼국지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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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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