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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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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사라베는 11세기 기독교 자료에서 처음 언급된 용어로, 이슬람 지배 하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 문화에 동화된 기독교인을 지칭한다. 이들은 이슬람 딤미로 간주되어 지즈야를 납부하고 자치권을 보장받았지만,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기도 했다. 9세기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 왕조의 등장과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모사라베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었고,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북부 기독교 왕국으로 이주하여 기독교 왕국 통합에 기여했다. 모사라베는 모자라브어라는 로망스어를 사용하고, 서고트풍의 전례를 보존하는 등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아랍 문화의 영향을 받아 아랍어를 사용하고, 아랍식 생활 방식을 따르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톨레도 대성당 등에서 모사라베 전례가 행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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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라베

2. 명칭

'모사라베'(mozárabes|모사라베스es, moçárabes|모사라베스pt, mossàrabs|무사랍스ca, 아랍어: مُسْتَعْرَب|musta‘rab|무스타아랍ar)는 11세기 기독교 자료에서 처음 나오는 용어이다.[4] 무슬림은 기독교인을 '모사라베'라고 부르지 않았다.[4] 당시 아랍 자료에서는 기독교인을 ''naṣārā'' (아랍어: نصارىar '나사렛 사람')라고 불렀다. 또는 법적·종교적 지위에 따라 ''딤미''(아랍어: أهل الذمةar '계약 백성') 또는 ''mu‘āhidūn'' (아랍어: معاهدونar '계약 당사자') 등으로 불렀다.[1]

오늘날 알-안달루스에 거주하는 모든 기독교인을 '모사라베'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이슬람 스페인에 거주하는 많은 기독교인은 아랍화에 저항했다.[4]

3. 역사

기독교도들은 무슬림 정권에서 딤미로, 즉 이슬람 세계에서 공인된 이교도로 취급되었다.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는 "경전의 백성"으로서 지즈야를 지불하면 정착이 허용되었다. 모사라베는 독자적인 법무관과 위정자가 있었으며, 초기 모사라베 중에는 무슬림 궁정에서 고위직을 얻은 자도 있었다.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장려되었지만, 우마이야 왕조 역대 칼리프나 후우마이야 왕조 초기의 여러 아미르 · 칼리프의 관용적인 정책 하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무슬림으로 자란 자나 이슬람을 신봉하는 자에게 개종을 강요하면 사형에 해당한다고 여겨졌다.

9세기까지 알 안달루스의 무슬림과 기독교도의 인구 비율은 아마도 아직 컸을 것이다. 최초의 무슬림 침략에 대한 기독교도의 저항은 미약했다. 무르시아에 유일한 항복 문서가 현존하며, 아마 이것은 전통적인 특권의 보호를 받는 대신 조공 의무를 지도록 한, 수많은 합의의 한 예일 것이다. 이에 따르면, 714년의 날짜가 찍힌 "투드미르 조약" 문서[22]에서는, 오리우엘라 백작 테오도미르스(아랍어로는 تدمير|투드미르ar)는 압드 알-아지즈[23]를 최고 군주로 인정하고 매년 현금과 특정 농산물을 납부하기로 동의했다. 그 대가로 테오도미르스는 자신의 자산과 지배권을 존중한다는 압드 알-아지즈의 확약을 받았다. 토지 주민에 대한 교환 조건은 없었으며, 때로는 서고트 왕국의 호족이 그대로 남는 사례도 있었다.

모사라베는 처음에는 불평등했지만, 나름대로 관용적인 처우를 받았다. 그러나 정복 후 수 세대가 지나면서, 무슬림 군주들은 딤미에게 불리한 법령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모사라베의 지위는 하락했으며, 심한 차별과 억압이 시작되었다.

상황이 일변하는 것은 11세기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무와히드 왕조와 무라비트 왕조가 성립하고 나서부터이다. 특히 십자군의 내습 이후에는 무슬림 측에서 관대함이 사라졌고, 모사라베나 유대인이 칼이나 코란이나 (죽음 또는 이슬람으로의 개종)라는 선택을 강요받는 등 노골적으로 탄압받는 사례도 나타났으며, 그것이 한층 더 북부의 기독교의 반 이슬람 감정을 부추겨, 레콩키스타 (재정복 운동)와 기독교 지배권에서의 무슬림·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다.

모사라베는 박해 시대에 북부로 이주했다.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면서, 모사라베는 기독교 제국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제왕들은 최전선에 정착한 모사라베에게 특전을 부여했다.

3. 1. 초기 모사라베

기독교도들은 무슬림 정권에서 딤미로, 즉 이슬람 세계에서 공인된 이교도로 취급되었다.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는 "경전의 백성"으로서 지즈야를 지불하면 정착이 허용되었다. 모사라베는 독자적인 법무관과 위정자가 있었으며, 초기 모사라베 중에는 무슬림 궁정에서 고위직을 얻은 자도 있었다.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장려되었지만, 우마이야 왕조 역대 칼리프나 후우마이야 왕조 초기의 여러 아미르 · 칼리프의 관용적인 정책 하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무슬림으로 자란 자나 이슬람을 신봉하는 자에게 개종을 강요하면 사형에 해당한다고 여겨졌다.

9세기까지 알 안달루스의 무슬림과 기독교도의 인구 비율은 아마도 아직 컸을 것이다. 최초의 무슬림 침략에 대한 기독교도의 저항은 미약했다. 무르시아에 유일한 항복 문서가 현존하며, 아마 이것은 전통적인 특권의 보호를 받는 대신 조공 의무를 지도록 한, 수많은 합의의 한 예일 것이다. 이에 따르면, 714년의 날짜가 찍힌 "투드미르 조약" 문서[22]에서는, 오리우엘라 백작 테오도미르스(아랍어로는 "تدميرar; 투드미르")는 압드 알-아지즈[23]를 최고 군주로 인정하고 매년 현금과 특정 농산물을 납부하기로 동의했다. 그 대가로 테오도미르스는 자신의 자산과 지배권을 존중한다는 압드 알-아지즈의 확약을 받았다. 토지 주민에 대한 교환 조건은 없었으며, 때로는 서고트 왕국의 호족이 그대로 남는 사례도 있었다.

모사라베는 처음에는 불평등했지만, 나름대로 관용적인 처우를 받았다. 그러나 정복 후 수 세대가 지나면서, 무슬림 군주들은 딤미에게 불리한 법령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모사라베의 지위는 하락했으며, 심한 차별과 억압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교회의 설립이나 종을 치는 것은 최종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에우로기우스가 850년 이후 코르도바의 순교자에 대해 열전을 저술했을 당시에는, 적어도 4개의 성당이 코르도바에 남아 있었고(그 중 하나인 성 아시스클루스 교회는 711년에 저항자를 숨겼다), 코르도바 시내와 그 주변에는 9개의 수도원이 존재했지만, 이것들은 곧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기독교도들은 무슬림을 통솔하는 어떤 지위에도 오를 수 없다는 차별을 받았으며, 기독교도 노예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통해 자유를 되찾도록 장려되었다. 이는 기독교도의 지위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효과가 있었고, 때로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로마계 귀족조차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반 이슬람주의자이자 이교도 정복자에 대한 적대심과 멸시를 숨기지 않았던 에우로기우스는, 기독교도가 받은 박해와 차별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에우로기우스의 저서 『순교자 옹호의 서』는 851년부터 859년코르도바의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에우로기우스의 격려를 받아 이슬람을 모독함으로써 무슬림 정권을 부정하고 순교를 신봉했다. 그러나 그 태도는, 인내와 상호 관용으로 이교도 지배자에게 임해야 한다고 했던, 과거 코르도바 주교 레카레드(Reccared)의 공식적인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었다. 순교자들의 대부분은 젊은 남녀였다.

기독교도들은 점차 고립되어, 주로 행정·군사·사회적 지위에서 배제되었으며, 그 외에도 이슬람법 하에서 차별·억압을 받았다. 9세기까지 코르도바의 순교자 일화가 밝혀지면서, 법적·경제적으로 체계화된 이슬람의 억압, 개종과 아랍 문화에의 흡수에 대한 반발이 분명해졌다. 최초의 무슬림 당국의 대처는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를 포위하고 투옥하는 것이었다. 순교자 운동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에우로기우스의 순교자 열전은 수도원의 폐쇄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것들은 무슬림의 눈에, 기독교도의 천천히 조직적인 배제에 대한 눈에 거슬리는 저항 운동의 온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기독교 신앙 자체는 허용되었다.

상황이 일변하는 것은 11세기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무와히드 왕조와 무라비트 왕조가 성립하고 나서부터이다. 특히 십자군의 내습 이후에는 무슬림 측에서 관대함이 사라졌고, 모사라베나 유대인이 칼이나 코란이나 (죽음 또는 이슬람으로의 개종)라는 선택을 강요받는 등 노골적으로 탄압받는 사례도 나타났으며, 그것이 한층 더 북부의 기독교의 반 이슬람 감정을 부추겨, 레콩키스타 (재정복 운동)와 기독교 지배권에서의 무슬림·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다.

3. 2. 모사라베의 지위 하락과 차별

무슬림 정권에서 기독교인들은 딤미로 취급되었는데, 이는 이슬람 세계에서 공인된 이교도를 의미한다. 기독교와 유대교 신자는 "책의 사람들"로 여겨져 지즈야를 납부하면 정착이 허용되었다. 모사라베는 독자적인 법무관과 위정자가 있었고, 초기에는 무슬림 궁정에서 고위직을 얻은 사람도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와 후우마이야 왕조 초기에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장려되었지만, 강제성은 없었다. 그러나 무슬림이 이슬람에서 배교하거나 기독교로 개종을 권유하면 사형에 처해졌다.[22]

9세기 알 안달루스에서는 무슬림과 기독교 인구 비율이 상당했다. 모사라베는 무슬림에 비해 불평등했지만, 초기에는 비교적 관대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정복 후 몇 세대가 지나면서 무슬림 군주들은 딤미에게 불리한 법령을 공포하기 시작했고, 모사라베의 지위는 하락하여 엄격한 차별과 억압이 시작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점차 고립되어 행정, 군사, 사회적 지위에서 쫓겨났고, 이슬람 법 아래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았다.[23]

11세기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 성격의 무와히드 왕조와 무라비트 왕조가 성립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북부 십자군의 침략 이후 무슬림 측의 관용이 사라지면서, 모사라베와 유대인에게 "죽음이냐? 코란이냐?"라는 선택을 강요하는 등 노골적인 탄압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많은 모사라베가 북부 기독교 왕국으로 이주했고, 이는 북부 기독교 왕국들의 반 이슬람 감정을 부추겨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기독교인에 의한 무슬림, 유대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면서 모사라베는 기독교 왕국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고, 기독교 왕들은 새롭게 정착한 모사라베에게 상당한 혜택을 주었다.

3. 3. 코르도바 순교자 운동

코르도바의 율로기우스는 850년 이후 10년 동안 코르도바 순교자의 순교록을 기록했는데, 성 아시슬루스 교회를 포함하여 적어도 4개의 기독교 바실리카가 도시에 남아 있었고, 711년에 유일한 저항 세력을 보호했던 교회, 그리고 도시와 그 주변에 9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이 있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는 곧 위태로워졌다.

모사라베는 딤미로 용인되었고 가치 있는 납세자로 여겨졌으며, 기독교 지도자 율로기우스(859년에 참수)와 코르도바의 알바로가 이끄는 당이 결성되기 전까지는 어떤 모사라베도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다. 그들의 강렬한 믿음은 무함마드를 모욕하고 이슬람을 비판함으로써 순교를 추구하게 했다. 기독교인의 아랍화는 율로기우스 자신에 의해 반대되었으며, 그는 무어의 영향을 제거한 보다 순수한 기독교 문화를 요구했다. 이를 위해 그는 코르도바에서 모사라베의 반란을 이끌었고,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무슬림 통치에 항의하기 위해 스스로 순교했다.

케네스 백스터 울프[7]는 율로기우스가 이러한 박해의 주동자가 아니라 단순히 전기 작가였다고 결론 내린다. 이것은 860년에 처형된 두 명의 기독교인과 그 직후 세 번째 기독교인에 대한 다른 역사 기록과 일치한다. 그 후의 처형은 888–912년과 913–920년에 있었다. 923년(유제니아), 925년 소년 펠라기우스(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칼리프의 성적 요구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한 죄로), 931년 아르젠테아에서 코르도바에서 더 많은 처형이 기록되었다. 울프에 따르면, 그들이 그때에도 멈췄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펠라기우스는 1660년 ''순교자 거울''에 묘사되어 있다.


851–59년 코르도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율로기우스의 저술은 그들이 신성 모독으로 무슬림 당국에 반항하고 순교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했으며, 관용과 상호 인내를 권고했던 이전 코르도바의 레카레드 비숍의 서고트 시대의 공식 기독교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그 이후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교회를 짓거나 교회 종을 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로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권위의 대부분의 지위에서 배제되었고 이슬람 율법 하에서 불평등한 존재로서 많은 다른 굴욕을 겪었기 때문에 점점 더 소외되었다. 9세기 중반, 코르도바 순교자들의 에피소드가 드러내듯이, 이슬람의 다양한 법적, 재정적 수단에 의한 체계적인 압력에 대한 명확한 기독교적 반대가 있었고, 이들의 개종과 이슬람 문화로의 흡수를 저항했다.

코르도바 순교자에 대한 초기 공식 반응은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투옥하는 것이었다. 순교자들의 10년이 끝날 무렵, 율로기우스의 순교록은 기독교 수도원과 수녀원의 폐쇄를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무슬림의 눈에는 기독교의 느리지만 체계적인 제거에 대한 합법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파괴적인 광신주의의 온상으로 판명되었다.

3. 4. 이슬람 원리주의 왕조와 박해

9세기까지 알 안달루스의 무슬림과 기독교도의 인구 비율은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무슬림 침략에 대한 기독교도의 저항은 미약했다. 무르시아에 유일한 항복 문서가 현존하며, 이는 전통적인 특권 보호를 조건으로 조공 의무를 지도록 한 여러 합의 중 하나일 것이다. 714년의 "투드미르 조약" 문서[22]에 따르면, 오리우엘라 백작 테오도미르스(아랍어로는 "تدمير|투드미르ar")는 압드 알-아지즈[23]를 최고 군주로 인정하고 매년 현금과 특정 농산물을 납부하기로 동의했다. 그 대가로 테오도미르스는 자신의 자산과 지배권을 존중한다는 압드 알-아지즈의 확약을 받았다. 토지 주민에 대한 교환 조건은 없었으며, 때로는 서고트 왕국의 호족이 그대로 남는 경우도 있었다.

모사라베는 처음에는 불평등했지만, 나름대로 관용적인 처우를 받았다. 그러나 정복 후 수 세대가 지나면서, 무슬림 군주들은 딤미에게 불리한 법령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모사라베의 지위는 하락했으며, 심한 차별과 억압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교회의 설립이나 종을 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에우로기우스가 850년 이후 코르도바의 순교자에 대해 열전을 저술했을 당시, 코르도바에는 적어도 4개의 성당(그 중 하나인 성 아시스클루스 교회는 711년에 저항자를 숨김)이 남아 있었고, 코르도바 시내와 그 주변에는 9개의 수도원이 존재했지만, 곧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기독교도들은 무슬림을 통솔하는 어떤 지위에도 오를 수 없었으며, 기독교도 노예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자유를 얻도록 장려되었다. 이는 기독교도의 지위를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때로는 고대 로마계 귀족조차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반 이슬람주의자이자 이교도 정복자에 대한 적대심과 멸시를 숨기지 않았던 에우로기우스는, 기독교도가 받은 박해와 차별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에우로기우스의 저서 『순교자 옹호의 서』는 851년부터 859년까지 코르도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에우로기우스의 격려를 받아 이슬람을 모독함으로써 무슬림 정권을 부정하고 순교를 신봉했다. 그러나 그 태도는, 인내와 상호 관용으로 이교도 지배자에게 임해야 한다고 했던 과거 코르도바 주교 레카레드(Reccared)의 공식적인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었다. 순교자들의 대부분은 젊은 남녀였다.

기독교도들은 점차 고립되어, 주로 행정·군사·사회적 지위에서 배제되었으며, 이슬람법 하에서 차별·억압을 받았다. 9세기까지 코르도바 순교자 일화가 밝혀지면서, 법적·경제적으로 체계화된 이슬람의 억압, 개종과 아랍 문화에의 흡수에 대한 반발이 분명해졌다. 최초의 무슬림 당국의 대처는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투옥하는 것이었다. 순교자 운동 시대가 끝날 때까지, 에우로기우스의 순교자 열전은 수도원의 폐쇄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것들은 무슬림의 눈에, 기독교도의 조직적인 배제에 대한 저항 운동의 온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기독교 신앙 자체는 허용되었다.

상황이 일변하는 것은 11세기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무와히드 왕조와 무라비트 왕조가 성립하고 나서부터이다. 특히 십자군의 내습 이후에는 무슬림 측에서 관대함이 사라졌고, 모사라베나 유대인이 칼이나 코란이나 (죽음 또는 이슬람으로의 개종)라는 선택을 강요받는 등 노골적으로 탄압받는 사례도 나타났으며, 이는 북부 기독교의 반 이슬람 감정을 부추겨, 레콩키스타 (재정복 운동)와 기독교 지배권에서의 무슬림·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다.

모사라베는 박해 시대에 북부로 이주했다.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면서, 모사라베는 기독교 제국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제왕들은 최전선에 정착한 모사라베에게 특전을 부여했다.

3. 5. 레콩키스타와 모사라베

무슬림 정권 하에서 기독교인들은 딤미로 취급되었으며, 지즈야를 납부하면 정착이 허용되었다. 초기에는 우마이야 왕조와 후우마이야 왕조의 관용적인 정책 덕분에 이슬람으로 개종할 필요성이 크지 않았고, 모사라베들은 독자적인 법무관과 위정자를 가질 수 있었으며, 일부는 무슬림 궁정에서 고위직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무슬림에게 이슬람교에서의 배교 및 기독교로의 개종을 위한 선교 행위를 한다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9세기까지 알 안달루스의 무슬림과 기독교 인구 비율은 상당했다. 초기에는 기독교도들의 저항이 미약했고, 714년 "투드미르 조약"과 같이 항복 문서가 존재했다.[22] 이 조약에 따르면 오리우엘라 백작 테오도미르스(تدمير|투드미르ar)는 압드 알-아지즈[23]를 최고 군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는 대신 자신의 자산과 지배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슬림 군주들은 딤미에게 불리한 법령을 공표했고, 모사라베의 지위는 하락하여 차별과 억압이 심해졌다. 새로운 교회 설립과 종을 치는 것이 금지되었고, 기독교도들은 무슬림을 통솔하는 지위에 오를 수 없었으며,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에우로기우스는 저서 『순교자 옹호의 서』에서 851년부터 859년까지 코르도바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이들은 이슬람을 모독하여 무슬림 정권에 저항했다.

11세기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 성격의 무와히드 왕조와 무라비트 왕조가 등장하고 십자군의 침략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무슬림 측의 관용이 사라지고 모사라베와 유대인에게 강제 개종을 요구하는 등 탄압이 심해졌다. 이로 인해 북부 기독교 왕국들의 반 이슬람 감정이 커졌고,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무슬림과 유대인을 탄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면서 모사라베는 기독교 왕국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으며, 기독교 왕들은 새롭게 정착한 모사라베에게 특전을 부여했다.

4. 언어

이베리아로망스어군 초기 단계에서 모사라브어가 발전했다. 모사라브어 단어들은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카탈루냐어, 특히 발렌시아어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26]

모사라베의 교양어는 라틴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슬림 지배에 따라 아랍어를 배우면서 아랍어에 더 능숙해졌다. 기독교 복음서, 예언서, 기도서 등도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850년경 한 기독교 신자는 "우리 중 조상의 말로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1000명 중 한 명도 없다"라고 한탄하며, "아랍의 시에 희희낙락하며 정신을 빼앗기고, 아랍어로 시를 쓰는 자는 아주 많다"라고 했다.[24]

5. 신앙

모사라베는 프랑스 왕국의 수도사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오늘날 모사라베 전례로 알려진 서고트풍 전례 양식을 보존했다. 하지만 북부 왕국은 라틴 전례로 전환했고(1080년 카스티야 왕국), 정복된 교구에는 북부 출신 주교가 임명되었다. 오늘날 모사라베 전례는 교황의 은혜에 따라 톨레도 대성당의 예배에 사용하도록 인가되었다.[11][12] 푸어 클레어 수녀회 교회인 마드리드의 라 이마쿨라다 이 산 파스쿠알에서도 매주 모사라베 미사를 드린다. 모사라베 형제단은 여전히 톨레도에서 활동하고 있다. 톨레도는 그들이 굳건하게 남아 있던 가장 깊이 뿌리내린 중심지였기 때문에 고딕 전례는 확인되었고 ''"톨레도 전례"'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드리드의 은둔자인 농부 성 이시도로 또한 때때로 모사라베 전례에 따른 미사를 거행했다. 모사라베 수도회는 지금도 톨레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모사라베에게 새로운 사회적 지평을 열었다. 코르도바의 알바르스와 에우로기우스는 젊은이들이 아랍 문화와 아랍어에 얼마나 매료되었는지 한탄했다. 그러나 851년에는 몇몇 기독교도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이슬람을 모독함으로써 대결 자세를 취하려고 했다. 순교를 통해 투쟁에 주목을 끌려고 기대했던 것이다. 기독교도의 처형은 859년 3월 11일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무슬림 정권은 오히려 그들을 광인으로 간주하여 긴장을 완화하는 것을 선택했다.

6. 문화

모사라베는 무슬림 정권 하에서 짐미로 취급되었다.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는 "경전의 백성"으로서 지즈야를 지불하면 정착이 허용되었다. 초기에는 모사라베에게 어느 정도 관용이 베풀어졌고, 일부는 무슬림 궁정에서 고위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슬림 군주들은 짐미에게 불리한 법령을 발표했고, 모사라베의 지위는 하락했다.[22]

9세기 중반까지 알 안달루스의 무슬림과 기독교 인구 사이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무르시아에서는 테오도미루스가 압드 알 아지즈를 지배자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자신의 재산과 무르시아 지방의 관할권을 존중받는다는 내용의 계약이 보존되어 있다.

우마이야 칼리파와 코르도바의 에미르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장려했다. 많은 모사라베는 지즈야 세금을 피하기 위해 개종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지위 향상과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배교하는 것은 사형으로 처벌받는 범죄였다.[8]

모사라베 상인들은 안달루시 시장에서 거래했지만, 12세기 중반 이전에는 큰 영향력이 없었다. 이는 무역을 천시하는 모사라베의 인식 때문이었는데, 유대교이슬람 사회에서 상인에게 더 큰 존경을 표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알 안달루스의 모사라베와 북부 기독교 왕국 사이에는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 알 안달루스의 번영으로 인해 북부 기독교인들의 문학적 문화 수준은 남부의 모사라베 형제들보다 열등했다. 모사라베 이민자들은 북부 이베리아 기독교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코르도바 칼리파국


모사라베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무어 문화에 동화되는 능력은 종종 그들을 가톨릭교에 강한 충성을 가진 것으로 묘사하게 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자우메 비센스 비베스는 모사라베가 주로 자기중심적인 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레콩키스타 말기에 알 안달루스의 모사라베 인구는 꾸준히 감소했다. 이는 개종, 북쪽으로의 이주, 민족 종교적 갈등 등에 의해 발생했다.

무슬림 이베리아에서는 기독교 학문 담론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랍어로는 복음서시편, 반이슬람 소논문의 번역본과 교회사 번역본이 남아 있다.

알-안달루스의 무슬림 공동체는 모사라베로부터 제한적인 문화적 차용을 했다. 예를 들어, 무슬림이 기독교의 태양력과 공휴일을 채택한 것은 순전히 안달루스 현상이었다. 알-안달루스에서는 이슬람 음력에 지역 태양력을 보완하여 농업 및 항해에 더 유용하게 사용했다.

모사라베 문화의 이단적 특징은 불가피하게 더욱 두드러졌다. 기독교 여성은 종종 무슬림 남성과 결혼했고 그들의 자녀는 무슬림으로 자랐다. 심지어 모사라베 가족 내에서도 법적 이혼은 결국 이슬람식으로 시행되었다.

일부 기독교 당국(코르도바의 알바로와 코르도바의 율로기우스)은 기독교인의 대우에 경악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강화하고 기독교인들이 부당하다고 여긴 이슬람법에 항의하기 위해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도록 장려하기 시작했다.[9] 율로기우스는 이 시기에 기독교인을 위한 논문과 순교록을 저술했다.[9]

코르도바의 순교자로 알려진 48명의 기독교인(대부분 수도사)은 850년부터 859년 사이에 순교했으며, 기독교 신념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혐의로 참수되었다. 딤미는 죽음을 각오하고 무슬림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시카 A. 쿠프는 48명 모두에게 단일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동화 과정에 대한 항의를 반영한다고 시사한다. 그들은 기독교 정체성을 주장하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10]

모사라베는 북부 기독교 이베리아에서 매우 영향력이 컸던 시토회와 같은 프랑스 가톨릭 수도회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모사라베 전례로 알려진 미사를 보존했다. 오늘날, 모사라베 전례는 톨레도 대성당의 모사라베 예배당에서 교황의 특권에 의해 매일 거행된다.[11][12]

1080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부르고스 공의회를 소집하여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라틴 전례를 통일하기로 합의했다. 1085년, 톨레도가 재정복되었고 그 후 로마의 에큐메니컬 기준을 재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126년, 많은 모사라베가 알모라비드 왕조에 의해 북아프리카로 추방되었다. 다른 모사라베는 북부 이베리아로 도망갔다. 이것은 알-안달루스에서의 모사라베 문화의 종말을 구성했다.

톨레도에서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는 모사라베를 별도의 법적 공동체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꾸준한 쇠퇴를 악화시켜 15세기 말까지 일반 공동체에 의해 모사라베가 완전히 흡수되도록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모사라베 문화는 사실상 사라졌다.

6. 1. 아랍화된 생활 양식

9세기 이후의 기독교도들은 의복, 몸치장, 옷의 재단법과 색상 등에서 아랍의 방식을 모방했다. 유행은 비교적 부유한 모사라베 젊은이들이 부유한 무슬림 유력자의 아들들을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갔다. 당시 기독교도들의 수기에는 "우리들은 그들 식으로 옷을 입고 비단을 좋아한다. 그들처럼 향수를 뿌리고, 보석과 의복의 풍요로움을 자랑한다"라며 흉내 내는 유혹에 저항하기 어렵다는 기록이 있다.[25] 모사라베 양가집 여성들은 외출 시 베일을 쓰는 습관을 익혔다.

식문화 또한 아랍의 영향을 받았다. 신성 로마 제국을 창건하려 했던 오토 1세가 코르도바에 대사로 파견한 로렌의 성직자는, 알안달루스의 기독교도들이 "무슬림을 흉내 내어" 돼지고기를 전혀 먹지 않게 된 것에 놀라워했다.[25] 돼지에 대한 금기는 절대적이어서, 돼지가 곡물용 사일로에 떨어져 죽으면 그 곡물은 더럽혀진 것으로 간주되어 먹는 것, 사는 것, 세금으로 무슬림 당국에 제출하는 것 모두 불가능했다. 때문에 기독교도들이 돼지를 기르지 않게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부유한 모사라베는 집 안을 태피스트리, 쿠션, 소파, 벽걸이로 장식했다. 기독교도들은 아랍의 시가와 음악에도 심취했다.[25]

참조

[1] 서적 The Almoravid and Almohad Empires http://dx.doi.org/10[...] 2016-08-01
[2] 서적 Conversion to Islam in the Medieval Period http://dx.doi.org/10[...] De Gruyter 1979-12-31
[3] 간행물 Envisioning Islam: Syriac Christians and the Early Muslim World 2020-05-22
[4] 서적 Christian Identity amid Islam in Medieval Spain http://dx.doi.org/10[...] BRILL 2013-05-30
[5] 문서 Astronomies and Cultures in Early Medieval Europe Cambridge
[6] 서적 The legacy of Muslim Spain, Volume 2 BRILL
[7] 서적 Christian Martyrs in Muslim Spain https://libro.uca.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8] 웹사이트 Al-Andalus. Mozarabs. https://www.spainthe[...] 2017-12-18
[9] 웹사이트 Orthodoxengland.btinternet.co.uk http://www.orthodoxe[...]
[10] 서적 The Martyrs of Cordoba: Community and Family Conflict in an Age of Mass Conversion https://books.google[...] U of Nebraska Press 1995-01-01
[11] 서적 A Companion to Medieval Toledo: Reconsidering the Canons Brill Publishers
[12] 서적 Art, Liturgy, and Legend in Renaissance Toledo: The Mendoza and the Iglesia Primad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3] 서적 A Companion to Medieval Toledo: Reconsidering the Canons Brill Publishers
[14] 서적 Art, Liturgy, and Legend in Renaissance Toledo: The Mendoza and the Iglesia Primad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5] 웹사이트 The Preservation and Restoration of Paper Records and Books: A RAMP Study with Guidelines http://unesdoc.unesc[...]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2013-07-10
[16] 간행물 Les Mozarabes de Valence et d'Al-Andalus entre l'histoire et le mythe http://www.persee.fr[...]
[17] 서적 Spanish Literatur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8] 서적 The Literature of Al-Andalu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 간행물 Literatura latina mozárabe https://rua.ua.es/ds[...]
[20] 서적 The Literature of al-Andalu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1] 서적 Christian Arabic Apologetics during the Abbasid Period (750–1258) E. J. Brill
[22] 문서 Mozarab Leiden
[23] 문서 アンダルス初代総督。征服を指揮したムーサー・ブン・ヌサイルの息子
[24] 문서 イスラーム治下のヨーロッパ 共存と衝突の歴史 Ch-E・デュフルク 初版 第3刷
[25] 문서 イスラーム治下のヨーロッパ 共存と衝突の歴史 Ch-E・デュフルク 初版 第3刷
[26] 문서 이슬람 치하의 유럽, 공존과 충돌의 역사 - Ch-E·듀훌크 초판 제3쇄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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