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미라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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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미라일 전투는 1814년 2월 11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게르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뷔르허 원수의 프로이센군 및 자켄이 이끄는 러시아군과 벌인 전투이다. 나폴레옹은 샹포베르 전투에서 승리한 후, 몽미라일 인근에서 자켄과 요르크의 연합군을 격파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 결과 프랑스군은 승리했고, 연합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은 중앙 돌파와 기병 돌격 전술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의 중요한 국면 중 하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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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미라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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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중 6일 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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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814년 2월 11일 |
장소 | 프랑스 마른주 몽미라일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
교전국 2 | 러시아 프로이센 |
지휘관 및 지도자 | |
프랑스 | 나폴레옹 |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 | 파비안 오스텐-사켄 루트비히 폰 요르크 |
병력 규모 | |
프랑스 | 20,000–25,000명 |
러시아 | 18,000명, 대포 90문 |
프로이센 | 9,000명, 대포 16문 |
총 병력 | 27,000–39,000명, 대포 106문 |
사상자 및 피해 | |
프랑스 | 2,000–2,100명 |
러시아 | 2,800명, 대포 9–26문 |
프로이센 | 900명 |
총 사상자 | 3,700–4,000명, 대포 9–26문 |
2. 배경
1814년 2월 1일, 라 로티에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맞서 게르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뷔르허 원수의 프로이센군과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 원수의 오스트리아군이 승리했다.[1] 이 승리로 고무된 연합군 지휘관들은 슈바르첸베르크가 트루아에서 파리로 진격하는 동안 뷔르허는 샬롱 쉬르 마른에서 메오를 거쳐 더 북쪽으로 진격하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1] 두 군대는 페터 비트겐슈타인의 군단과 알렉산드르 니키티치 세슬라빈이 이끄는 정찰 부대에 의해 연결될 예정이었다.[1] 그러나 며칠 안에 신중한 슈바르첸베르크는 비트겐슈타인의 군대를 남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전쟁이 거의 끝났다고 믿은 뷔르허는 원수 자크 마크도날 휘하의 소규모 프랑스군을 쫓아 빠르게 서쪽으로 진격했다.
슈바르첸베르크는 세슬라빈의 부대를 우익에서 극좌익으로 전환했지만 뷔르허에게 알리지 않았다. 세슬라빈과의 연락 장교가 없었기 때문에 프로이센군은 그의 좌익에 위험한 틈이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2월 6일, 나폴레옹은 보헤미아 군에게 타격을 가할 계획이었으나, 뷔르허가 메오를 경유하여 파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마크도날은 실레지아 군을 막기에는 너무 약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먼저 뷔르허를 상대하기로 했다. 나폴레옹은 오귀스트 드 마르몽 원수를 8,000명의 병력과 함께 세잔으로 보냈고, 8일에는 황실 근위대 일부와 기병대가 합류했다. 같은 날 마크도날의 순찰대는 루드비히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가 18,000명의 병력과 함께 에페르네 근처에 있다고 보고했다. 2월 9일 아침, 나폴레옹은 마르몽으로부터 파비안 빌헬름 폰 오스텐-자켄이 약 15,000명의 병력과 함께 몽미라유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받자 프랑스군은 행동에 나섰다.
클로드 페랭 빅토르 원수는 14,000명의 병력으로 노장 쉬르 센을, 니콜라 우디노 원수는 20,000명의 병력으로 브레 쉬르 센, 몽테로-포-욘, 퐁 쉬르 욘 및 상스의 다리를 지키게 했다. 나폴레옹은 약 20만 명의 연합군과 대치하기 위해 7만 명의 병력만 가지고 있었고, 뷔르허에게 4만 5천 명의 병력이 있다고 판단하여 직접 뷔르허를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실제 뷔르허의 실레지아 군은 57,000명의 병력이었으나, 약 70.81km 전선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고 나폴레옹은 마크도날 휘하의 10,000명의 병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공격 부대는 30,000명의 병력과 120문의 대포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마르몽의 군단,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두 개의 젊은 근위대 사단, I 기병 군단, 에두아르 모르티에, 트레비즈 공작 원수 휘하의 두 개의 구 근위대 사단, 근위 기병대 일부 및 장-마리 드프랑스의 독립 기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모르티에는 후방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슈바르첸베르크는 뷔르허에게 클라이스트의 군단을 남쪽으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뷔르허는 이에 응하여 클라이스트, 캅체비치, 올수피에프에게 2월 10일 세잔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린 후 도로가 침수되었지만, 프랑스 시골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대포를 진흙 속으로 끌어내는 데 군대를 도왔다. 프랑스군은 2월 10일 샹포베르 전투에서 올수피에프의 소규모 군단을 격파하고 올수피에프를 포로로 잡았다.
2. 1. 연합군의 전략
1814년 2월 1일, 라 로티에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한 연합군은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이 이끄는 보헤미아 군과 게르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뷔르허가 이끄는 실레지아 군으로 나뉘어 파리를 향해 진격했다.[1] 이들은 병력 면에서는 프랑스군보다 우세했지만, 서로 간의 협력이 원활하지 않았다.슈바르첸베르크는 트루아를 거쳐 파리로 진격하고, 뷔르허는 샬롱 쉬르 마른에서 메오를 거쳐 더 북쪽으로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1] 두 군대는 페터 비트겐슈타인의 군단과 알렉산드르 니키티치 세슬라빈이 이끄는 정찰 부대에 의해 연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중한 슈바르첸베르크는 며칠 안에 비트겐슈타인의 군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켰고, 뷔르허에게 알리지 않고 세슬라빈의 부대를 우익에서 극좌익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뷔르허의 군대는 좌익에 위험한 틈이 생겼다.
나폴레옹은 뷔르허가 메오를 경유하여 파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뷔르허를 먼저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뷔르허의 실레지아 군은 57,000명에 달했지만, 넓은 전선에 분산되어 있었다. 반면 나폴레옹의 공격 부대는 30,000명의 병력과 120문의 대포로 구성되어 있었다.
슈바르첸베르크는 나폴레옹이 노장 근처에서 전투를 벌일까 봐 뷔르허에게 클라이스트의 군단을 보내 지원하도록 요청했다. 뷔르허는 이에 따라 클라이스트, 캅체비치, 올수피에프에게 2월 10일 세잔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2. 2. 나폴레옹의 대응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분열된 틈을 타 각개격파를 시도했다. 1814년 2월 초, 나폴레옹은 라 로티에르 전투에서 게르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뷔르허 원수의 프로이센군과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 원수의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한 연합군이 방심한 틈을 노렸다.[1] 연합군은 페터 비트겐슈타인 군단과 알렉산드르 니키티치 세슬라빈 부대의 연결 하에 슈바르첸베르크는 트루아를 거쳐 파리로, 뷔르허는 샬롱 쉬르 마른에서 메오로 진격하는 분리 진격을 계획했다.[1]나폴레옹은 뷔르허의 실레지아군을 먼저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2월 6일, 나폴레옹은 뷔르허가 메오를 통해 파리로 진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뷔르허를 막기에는 자크 마크도날 원수의 병력이 부족했기에, 나폴레옹은 직접 뷔르허를 상대하기로 했다. 2월 9일, 오귀스트 드 마르몽 원수로부터 파비안 빌헬름 폰 오스텐-자켄이 이끄는 러시아군이 몽미라일 근처에 있다는 보고를 받자, 나폴레옹은 즉시 병력을 이끌고 몽미라일로 향했다.
나폴레옹은 클로드 페랭 빅토르 원수와 에티엔 모리스 제라르 휘하 병력, 기병대로 노장 쉬르 센을, 니콜라 우디노 원수에게는 VII 군단과 국가 근위대 등을 포함한 병력으로 브레 쉬르 센 등의 다리를 지키게 했다. 나폴레옹은 약 7만 명의 병력으로 20만 명의 연합군과 대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뷔르허에게 4만 5천 명의 병력이 있다고 판단, 직접 뷔르허를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실제 뷔르허의 실레지아군은 57,000명으로, 샤토-티에리의 루드비히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 휘하 18,000명, 라 페르테-수-주아르 근처의 자켄 휘하 20,000명, 샹포베르 등의 자하르 드미트리예비치 올수피에프,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캅체비치, 프리드리히 폰 클라이스트 휘하 19,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뷔르허의 군대는 약 70.81km의 전선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고, 나폴레옹은 마크도날의 10,000명의 병력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공격 부대는 30,000명의 병력과 120문의 대포로, 마르몽의 군단,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젊은 근위대, I 기병 군단, 에두아르 모르티에, 트레비즈 공작 원수 휘하의 구 근위대, 근위 기병대, 장-마리 드프랑스의 독립 기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나폴레옹의 공격에 앞서, 슈바르첸베르크는 뷔르허에게 클라이스트 군단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뷔르허는 이에 따라 클라이스트, 캅체비치, 올수피에프에게 2월 10일 세잔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2월 10일 샹포베르 전투에서 올수피에프의 소규모 군단을 격파하고 올수피에프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3. 전투
1814년 2월 1일, 라 로티에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연합군은 프로이센의 게르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뷔르허와 오스트리아의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으로 나뉘어 파리로 진격했다. 뷔르허는 자크 마크도날 원수의 소규모 프랑스군을 추격하며 빠르게 진격했지만, 자신의 좌익에 위험한 틈이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뷔르허를 먼저 상대하기로 결정하고, 오귀스트 드 마르몽 원수를 세잔으로 보내 정찰하게 했다. 2월 9일, 마르몽으로부터 파비안 빌헬름 폰 오스텐-자켄이 몽미라유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행동에 나섰다. 클로드 페랭 빅토르 원수와 니콜라 우디노 원수에게 슈바르첸베르크를 감시하게 하고, 자신은 뷔르허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었다.
뷔르허의 군대는 넓게 분산되어 있었고, 나폴레옹은 마크도날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공격 부대는 30,000명의 병력과 120문의 대포로 구성되었으며, 마르몽의 군단,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근위대, I 기병 군단 등이 포함되었다.
2월 10일, 샹포베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자하르 드미트리예비치 올수피에프의 소규모 군단을 격파하고, 뷔르허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나폴레옹은 몽미라유 근처의 마르셰(Marchais-en-Brie) 마을을 중심으로 공격을 전개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병력 수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5,000명의 구 근위대 보병, 4,500명의 기병, 리카르 사단, 36문의 대포만으로 방어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초반에 고전했으나, 황실 근위대의 투입과 기병대의 돌격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요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증원되었으나, 프랑스군의 강력한 공격에 밀려 후퇴했다. 자켄의 러시아군도 프랑스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시작될 때, 나폴레옹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고 병사들이 피로했기 때문에, 프랑스 증원군과 요르크의 프로이센군 중 누가 먼저 전장에 도착할지 불분명했다. 나폴레옹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
프티모랭 강(Petit Morin)은 전장의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서쪽으로 흘렀고, 전장은 대부분 여러 숲으로 덮인 구릉 지형이었다. 프랑스군의 좌익은 프티모랭 강 바로 북쪽에 있는 숲으로 고정되었다. 숲의 북쪽 가장자리에는 마르셰(Marchais-en-Brie) 마을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남북 방향의 시내가 있었다. 더 북쪽에는 동서 방향의 고속도로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중앙 위치를 활용하여 자켄과 요르크를 블뤼허에게서 고립시키고 각개격파하려 했다.[1]
3. 1. 양측 병력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30,000명의 병력과 120문의 대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부대는 마르몽의 군단,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두 개의 젊은 근위대 사단, I 기병 군단, 에두아르 모르티에 원수 휘하의 두 개의 구 근위대 사단, 근위 기병대 일부 및 장-마리 드프랑스의 독립 기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모르티에는 후방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데이비드 G. 챈들러에 따르면 자켄의 병력은 18,000명과 90문의 대포였고, 조지 내프지거는 14,000명의 병사와 80문의 대포, 프랜시스 로레인 페트리는 18,000명의 병력이라고 기록했다. 프로이센 참모 장교 카를 프라이헤어 폰 뮈플링은 러시아군을 20,000명으로 추정했고, 다른 독일 장교는 16,300명의 병력과 90문의 대포로 집계했다.
자켄은 2개 보병 군단과 1개 기병 군단을 이끌었다. 보병은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탈리신의 제6군단(제7 및 제18 보병 사단)과 이반 안드레예비치 리벤의 제11군단(제10 및 제27 보병 사단, 제16 사단의 1개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기병 군단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란스코이의 제2 훌란 사단과 세묜 다비도비치 판슈리셰프의 제3 용기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포병 사령관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니키틴은 12파운드 포 3개 포대와 6파운드 포 4개 포대를 지휘했다. 탈리신은 병든 알렉세이 그리고리에비치 셰르바토프를 대신하여 군단 지휘관 역할을 했다. 기병 군단은 일라리온 바실리에비치 바실시코프가 지휘했다.
챈들러와 페트리에 따르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최대 병력은 20,000명이었다. 내프지거는 27,153명의 병력으로 더 많은 병력을 집계했다.
프랑스군 기병대는 피에르 다비드 드 콜베르-샤바네 휘하의 제1 근위 기병 사단의 2,582명, 루이 마리 르베스크 드 라페리에르 휘하의 제3 근위 기병 사단의 2,164명, 드프랑스 사단의 896명으로 구성되었다. 보병은 클로드 마리 뫼니에의 제1 근위 신병 사단의 4,133명, 필리베르 장-밥티스트 퀴리알의 제2 근위 신병 사단의 2,840명, 루이 프리앙의 제1 근위 구병 사단의 4,796명, 클로드-에티엔 미셸의 제2 근위 구병 사단의 3,878명, 에티엔 피에르 실베스트르 리카르의 제8 보병 사단의 2,917명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샤를르 르페브르-데누에트는 제2 근위 기병 사단의 3,535명 또는 제3 근위 신병 사단의 4,947명의 보병을 이끌었다.
3. 2. 전투 경과
나폴레옹은 몽미라일 근처의 마르셰(Marchais-en-Brie) 마을을 중심으로 공격을 전개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병력 수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5,000명의 구 근위대 보병, 4,500명의 기병, 리카르 사단, 36문의 대포만으로 방어해야 했다.프랑스군은 초반에 고전했으나, 황실 근위대의 투입과 기병대의 돌격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요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증원되었으나, 프랑스군의 강력한 공격에 밀려 후퇴했다. 자켄의 러시아군도 프랑스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시작될 때, 나폴레옹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고 병사들이 피로했기 때문에, 프랑스 증원군과 요르크의 프로이센군 중 누가 먼저 전장에 도착할지 불분명했다. 나폴레옹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
프티 모린(Petit Morin) 강은 전장의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서쪽으로 흘렀고, 전장은 대부분 여러 숲으로 덮인 구릉 지형이었다. 프랑스군의 좌익은 프티 모린 바로 북쪽에 있는 숲으로 고정되었다. 숲의 북쪽 가장자리에는 마르셰(Marchais-en-Brie) 마을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남북 방향의 시내가 있었다. 더 북쪽에는 동서 방향의 고속도로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리카르 사단을 마르셰 동쪽에 열로 배치했다. 리카르의 2개 대대는 분리되어 바일리 숲의 고속도로 북쪽에 배치되었다. 리카르 뒤에는 뫼니에와 퀴리알 휘하의 네의 두 근위 신병 사단이 있었다. 예비대로는 프리앙의 사단이 100보 간격으로 대대 열로 배치되었다. 자켄과 요르크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 황제는 샤토-티에리 도로가 주요 동서 고속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프리앙 사단을 배치하고, 그의 오른쪽에 드프랑스의 기병을 배치했다. 더 북쪽에는 낭수티가 근위 기병 사단을 전체적으로 지휘하며 샤토-티에리 도로를 차단했다.
자켄은 탈리신의 군단을 남쪽에 배치하여 제7 사단을 우익에, 제18 사단을 중앙에 배치했다. 북쪽, 하지만 여전히 고속도로 남쪽에는 리벤의 군단이 있었고, 제10 사단이 중앙에, 제27 사단이 좌익에 있었다. 보병은 각 대대가 열을 이루어 2열로 배치되었다. 3열의 산병이 앞쪽에 배치되었고, 경포는 보병의 측면에 배치되었다. 제18포대의 12파운드 포는 제10 및 제18 사단 사이에 중앙에 배치되었고, 다른 두 개의 중포는 예비로 유지되었다. 러시아군은 계곡 서쪽에 36문의 대포를 집중시켰다. 한 기록에 따르면, 리벤의 군단은 레핀-오-부아(L'Épine-aux-Bois) 마을 서쪽에 예비대로 있었다. 바실시코프의 기병은 고속도로 근처 리벤의 보병 좌익에 배치되었다.
3. 3. 주요 전술
나폴레옹은 중앙 위치를 활용하여 자켄과 요르크를 블뤼허에게서 고립시키고 각개격파하려 했다.[1] 이를 위해 마크도날에게는 샤토-티에리와 그곳의 중요한 다리를 다시 점령하도록 명령했고, 마르몽은 블뤼허를 감시하도록 했다.[1]전투 시작 당시 나폴레옹은 수적으로 열세였으며, 5,000명의 구 근위대 보병, 4,500명의 기병, 리카르 사단, 그리고 36문의 대포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고 병사들의 피로도가 심했기 때문에 프랑스 증원군과 요르크의 프로이센군 중 어느 쪽이 먼저 전장에 도착할지는 불분명했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전투를 진행해야 했다.
4. 결과
몽미라일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군은 2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연합군은 4천 명 이상의 사상자와 다수의 포로를 잃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나폴레옹은 연합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하고, 6일 전역에서 연승을 거두는 발판을 마련했다.
5. 역사적 평가
몽미라일 전투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을 보여주는 전투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전투의 승리가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점도 지적된다.
6. 기타
몽미라일 전투는 나폴레옹의 6일 전역의 일부로, 샹포베르 전투, 샤토티에리 전투, 보샹 전투 등과 함께 연이어 벌어졌다. 이 전투들은 모두 나폴레옹의 전술적 승리로 끝났지만, 전략적으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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