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가게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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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카미 가게치카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무라카미 수군의 일족이다. 1558년 무라카미 타케요시의 차남으로 태어나, 1578년 우에츠키 성 전투에 참전하며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휘하에서 큐슈 평정 이후 치쿠젠과 치쿠고의 다이묘가 되자 가신으로 활약했으며,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모리 가문으로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했으며, 161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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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가게치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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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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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명 | 노시마 무라카미 씨 |
이름 | 무라카미 가게치카 |
가명 (통칭) | 겐하치로 -> 사부로뵤에노조 |
법명 | 뇨신 |
묘소 | 쇼간지 무라카미 가 묘소 (야마구치현오시마군스와오시마정 와다) |
시대 | 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
출생 | 에이로쿠 원년 (1558년) |
사망 | 게이초 15년 2월 9일 (1610년 3월 4일) |
아버지 | 무라카미 다케요시 |
어머니 | 무라카미 미치야스의 둘째 딸 |
형제 | 무라카미 모토요시, 가게치카 |
배우자 | 정실: 히라오카 후사자네의 딸, 측실: 양반의 딸 |
자녀 | 무라카미 하치스케, 딸 (무라카미 모토타케의 부인), 딸 (시시도 가게요시의 부인), 딸 (나이토 모토타다의 부인), 딸 (히노 모토시게의 정실), 딸 (히노 모토시게의 계실), 무라카미 모토노부, 딸 (히라오카 나리오키의 부인) |
관직 | |
주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모리 데루모토 |
2. 생애
덴쇼 6년(1578년) 우에쓰키성 전투에 출진했고, 이후 형인 모토요시와 함께 행동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휘하에 속했으며, 규슈 평정 후 덴쇼 15년에 다카카게가 지쿠젠과 지쿠고의 다이묘가 되자 6,000석[1]을 받고 가신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씨가 보초 2개국으로 감봉된 후 야시로지마 안에서 1,500석을 받아 아버지 타케요시와 함께 이주하여 모리 가문 어선수조(御船手組)의 조두(組頭)가 되었다.[1] 데루모토가 삭발하고 "소우즈이 환안(宗瑞幻庵)"이라 칭하자, 가게치카도 삭발하고 "뇨신(如真)"이라 칭했다.[1]
게이초 15년(1610년) 2월 9일 사망했다. 향년 53세.[1] 적남 하치스케가 가독을 상속했으나, 게이초 18년(1613년) 3월 21일 11세로 요절하여 차남 모토노부가 뒤를 이었다.[1]
2. 1. 출생과 가문 배경
에이로쿠 원년(1558년), 노시마 무라카미 씨 당주 무라카미 타케요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 2. 초기 활동과 고바야카와 가문 섬김
에이로쿠 원년(1558년), 노시마 무라카미 씨 당주인 무라카미 다케요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덴쇼 6년(1578년) 우에쓰키성 전투에 출진했고, 그 후 형인 모토요시와 함께 행동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휘하에 속했으며, 규슈 평정 후 덴쇼 15년에 다카카게가 지쿠젠과 지쿠고의 다이묘가 되자 6,000석[1]을 받고 동격 오토나 야쿠(家老)가 되어, 부하로 히노 가게유키를 배속받았다.
덴쇼 20년 4월부터 시작된 분로쿠의 역에서는 형 모토요시와 함께 요시카와 히로이에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갔다. 같은 해 6월 5일 모케이 전투에서 손인갑이 이끄는 조선군이 모케이 요새를 공격했지만, 가게치카의 군은 분전하여 조선군을 격퇴하고 수백 명을 죽였다. 이때 가게치카는 부상을 입었고, 모리 데루모토는 다음 6월 6일에 서신을 보내 공을 치하하고 부상을 걱정했다. 6월 7일에도 서신을 보내 은자 5매를 주었다. 호이다 모토키요도 부상당한 가게치카를 걱정하여 6월 7일에 서신을 보내 치료를 위해 요새에 남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을 전했다. 같은 해 12월 13일에도 적군을 격퇴하고 추격전에서 적을 죽였지만, 이때도 부상을 입어 데루모토나 모토키요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이케다 데루마사는 가게치카의 무용을 보고 가신으로 유혹했지만, 모리 모토나리 이래의 모리 씨에 대한 의리를 이유로 거절했다.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호이다 모토키요 등은 가게치카의 충성을 기뻐하며, 앞으로도 그를 등한시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분로쿠 4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은거하자, 양자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가신이 되었다. 게이초 2년 6월 13일 다카카게가 사망하자 고바야카와 가문을 사직하고 야시로지마 (스오오시마)로 이주했는데, 데루모토의 초빙을 받아 모리 가문에 귀참했다. 게이초 4년 4월 17일 아키국 가마가리 양도에서 1,000석의 땅을 받았다.
2. 3. 임진왜란 참전
1592년 4월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분로쿠의 역)에서 형 모토요시와 함께 요시카와 히로이에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갔다. 같은 해 6월 5일 모케이 전투에서 손인갑이 이끄는 조선군이 가게치카가 지키는 모케이 요새를 공격했지만, 가게치카의 군은 분전하여 조선군을 격퇴하고 추격하여 수백 명을 쳐 죽였다. 가게치카는 이때 부상을 입었는데, 테루모토는 6월 6일에 서신을 보내 그의 공을 칭찬하고 부상을 걱정했다. 6월 7일에도 테루모토는 서신을 보내 은상으로 은자 5매를 주었고, 호이다 모토키요 역시 가게치카에게 서신을 보내 상처 치료를 위해 요새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전했다. 12월 13일에도 쳐들어온 적군을 격퇴하고 추격전에서 적을 쳐 죽였지만, 이때도 가게치카는 부상을 입어 테루모토와 모토키요로부터 서신을 받았다.호소카와 타다오키와 이케다 테루마사는 분로쿠의 역에서 보여준 가게치카의 무용을 눈여겨보고 가신으로 유혹했지만, 가게치카는 모리 모토나리 이래 모리 가문에 대한 의리를 이유로 거절했다.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호이다 모토키요 등은 가게치카의 충성심을 칭찬하며 앞으로도 그를 소홀히 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2. 4. 고바야카와 가문 사직과 모리 가문 귀환
덴쇼 20년(1592년) 임진왜란에서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이케다 데루마사는 가게치카의 무용을 눈여겨보고 가신으로 삼으려 했으나, 가게치카는 모리 모토나리 이래로 모리 가문에 받은 은혜를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호이다 모토키요 등은 가게치카의 충성심을 칭찬하며 앞으로도 소홀히 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분로쿠 4년(1595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은거하자 그의 양자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섬겼다. 게이초 2년(1597년) 6월 13일에 다카카게가 사망하자 고바야카와 가문을 떠나 야시로지마(스오오시마)로 이주했으나, 모리 데루모토의 초빙을 받아 모리 가문에 복귀했다. 게이초 4년(1599년) 4월 17일 아키국 가마가리 양도에서 1,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2. 5. 세키가하라 전투와 말년
게이초 5년(1600년), 형 모토요시와 함께 수군을 이끌고 하치스카 씨의 영지였던 아와국 이노야마 성을 항복시켰다. 이후 테루모토의 명을 받아 모토요시와 헤어져 모리 씨 군의 일원으로서 아노쓰 성 전투와 오쓰 성 전투에 참가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결과 모리 씨가 보초 2개국으로 감봉된 후 야시로지마 안에서 1,500석을 받아 아버지 타케요시와 함께 이주하여 모리 가문 어선수조(御船手組)의 조두(組頭)가 되었다.[1] 테루모토가 삭발하고 "소우즈이 환안(宗瑞幻庵)"이라 칭하자, 가게치카도 삭발하고 "뇨신(如真)"이라 칭했다.[1]게이초 15년(1610년) 2월 9일 사망했다. 향년 53세.[1] 적남 하치스케가 가독을 상속했으나, 게이초 18년(1613년) 3월 21일 11세로 요절하여 차남 모토노부가 뒤를 이었다.[1]
3. 일화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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