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문옥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문옥주는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중국, 미얀마, 태국 등지에서 생활했다. 1940년 16세에 일본 헌병에게 연행되어 위안소로 끌려갔으며, 이후 부산을 거쳐 미얀마로 이동하여 위안부 생활을 했다. 종전 후 귀국하여 요리점을 운영했으나, 만년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권유로 위안부였음을 공개했다. 1991년 일본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으며, 1996년 사망했다. 문옥주의 증언은 강제 연행 여부와 관련하여 시간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며, 이에 대한 학계의 다양한 분석과 논쟁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 하타 이쿠히코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의 역사학자로, 일본 근현대사와 군사 및 전쟁사를 연구하며 난징 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다수의 저서를 저술하여 일본 내외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여러 상을 수상했다.
  • 일본군 위안부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1990년 설립된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로, 피해자 지원, 수요시위, 국제 연대 활동 등을 전개하며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고 전쟁과 여성인권센터 및 박물관 건립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정의기억연대로 통합되었다.
  • 대한민국의 인권 운동가 - 박래군
    박래군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생 박래전의 죽음을 계기로 인권 운동에 참여하여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및 정책실장,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국 국장, 다산인권재단 상임이사,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및 소장, 서울특별시 인권위원회 전문위원 및 부위원장, 2014년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인권 운동가이다.
  • 대한민국의 인권 운동가 - 전태일
    전태일은 1948년 대구 출생으로,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노동 운동을 펼치다 1970년 분신 자살하며 노동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1996년 사망 - 네빌 프랜시스 모트
    네빌 프랜시스 모트는 영국의 물리학자로서 기체에서의 충돌, 고체 물리학 연구를 수행하고 거니-모트 이론을 제시했으며, 197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1996년 사망 - 이병주 (1912년)
    이병주(1912년)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대한민국의 의학박사이자 정치인으로, 대한결핵협회 이사,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을 역임하고 제7·8·9대 국회의원 및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위원, 그리고 민주공화당 주요 직책과 국회 예산결산위원장을 지냈다.
문옥주
기본 정보
문옥주 초상화 없음
문옥주
본관남평 문씨
출생1919년 3월 2일
사망1995년 4월 24일 (76세)
직업목사, 포교자
종교기독교 (개신교)
생애
출생지전라남도 강진군
주요 활동신사도 운동 관련 활동
약력195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목사 안수
1956년: 전도부흥사로 활동 시작
1958년: 서울 성신교회 개척
1960년대: '천국 복음' 전파
1970년대: 해외 선교 활동
1980년대: 신사도 운동에 참여, '피가름' 교리 주장
논란신사도 운동 관련 이단 논란
'피가름' 교리 관련 사회적 물의
가족 관계
배우자박윤호
자녀4남 1녀

2. 생애

문옥주는 192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1940년(만 16세)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었다. 중국 동북부와 미얀마 등지에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으며, 종전 후 귀국하여 요리점을 운영하다 1996년 대구동산병원에서 사망했다.[19] 1991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18]

문옥주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조사[1]와 이영훈이 검증한 수기[5]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2] 그녀의 증언은 여러 출판물에 기록되었는데, 초기 증언과 후기 증언 사이에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1940년 "군복을 입은 일본인"에게 폭력적으로 연행되었다는 이야기는 1992년 이토 다카시의 증언집에는 없지만,[6] 1993년 정대협 조사와 1996년 모리카와 마키코 인터뷰에서는 언급되었다.

위안부 시절 문옥주는 "주에 한두 번 허가를 받아 외출할 수 있었다. 인력거를 타고 쇼핑 가는 것이 즐거웠다", "악어 가죽 핸드백과 하이힐에 녹색 레인코트 차림으로 사이공 거리를 활보했다. 누구라도 나를 위안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5] 루비비취 같은 보석을 구매하며 "천 엔이면 대구에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저금 통장이 자신의 보물이었다고 회상했다.[5] 그러나 이는 일본군이 발행한 군표로, 가치가 매우 불안정했다.[3][4]

2. 1. 어린 시절과 강제 동원

문옥주는 192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1] 1933년(9세) 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사망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서당과 야간학교에서 공부했다.[1] 1937년(13세)에는 일본에 사는 친척 집에 맡겨졌으나 6개월 만에 돌아와 슬리퍼 공장에서 일했다.[1]

1940년(만 16세) 친구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군복을 입은 일본인에게 붙잡혀 헌병대로 보이는 곳으로 끌려갔다.[1] 다음 날 민간인에게 넘겨져 기차로 이틀 동안 이동하여 중국 동북부 도안성의 위안소로 이송되었다.[1] 그곳에서 '문원 나미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1] 이영훈에 따르면, 매춘업소 경영자, 급사, 다른 매춘부 20명이 대구 출신이었으며, 고향 대구에는 예로부터 매춘부 알선 네트워크가 있었다고 한다.[2] 문옥주는 주계 장교의 요리를 해주는 등 그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했다.[1]

1941년 9월(1년 후), 문옥주는 주계 장교가 밖에서 살림을 차리자는 제안을 이용하여 증명서를 받아 조선으로 돌아갔다.[1] 그녀의 수기에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친하게 지내던 헌병에게 편의를 봐달라고 부탁했다고 적혀 있다.[2]

2. 2. 위안부 생활과 귀환

문옥주는 1940년(만 16세)에 친구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군복을 입은 일본인에게 붙잡혀 헌병대로 끌려갔다. 다음 날 민간인 남자에게 넘겨져 기차를 타고 중국 동북부의 도안성에 도착해 트럭으로 위안소로 이송되었다. 문원 나미코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주계 장교에게 요리를 해주는 등 그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했다.[1] 이영훈은 매춘업소 경영자, 급사, 다른 매춘부 20명이 대구 출신이며, 고향 대구에는 예로부터 매춘부 알선 네트워크가 있었다고 설명한다.[2]

1941년 9월(1년 후), 문옥주는 주계 장교가 밖에서 살림을 차리자는 제안을 이용해 증명서를 받아 조선으로 돌아갔다.[1] 그녀의 수기에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친하게 지내던 헌병에게 편의를 봐달라고 했다고 적혀 있다.[2]

1942년 7월(18세), 문옥주는 친구의 권유로 돈을 벌 수 있는 식당이 있다는 말에 "망가진 몸이라" 생각하고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조선인 경영자에게 이끌려 배를 타고 버마로 갔다. 트럭으로 만달레이의 위안소로 향했으며, 돈을 벌기 위해 왔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정말 많은 군인들이 왔다. 문원 요시코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 그녀의 수기에는 이전부터 남방행을 원했고 부모에게 말하지 않고 만주에서 매춘부 동료 8명과 배를 탔다고 적혀 있다.[2]

이후 문옥주는 아캬브를 거쳐 프롬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경영자가 없어지고 군인이 직접 위안소를 관리했다.[1] 4, 5개월 후에는 랑군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는 난폭한 군인이 많아 죽을 뻔했다고 한다. 한번은 술에 취한 군인이 칼을 들고 죽이려 했으나, 문옥주가 그에게 달려들어 칼을 빼앗아 가슴을 찔렀다. 그 군인은 군사 재판을 받았지만 일주일 후 석방되었고, 문옥주는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1] 그녀의 수기에는 그 군인을 살해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영훈은 당시 군기상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약간의 상해 사건으로 봐준 것이라고 해석했다.[2]

전황이 악화되자 문옥주는 태국 방콕으로 이동했다가 1개월 후 아유타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3, 4개월 동안 부상병 간호를 하고 종전을 맞이했다.[1] 이 기간 동안 문옥주는 20,560엔을 군사 우편 저금했다. 종전 후, 태국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친해진 남자가 일본으로 함께 갈 것을 제안했지만, 문옥주는 조선으로 귀국했다.[1]

2. 3. 귀국 후의 삶과 사망

1945년 광복 이후 문옥주는 태국 수용소에서 조선으로 귀국했다.[1] 귀국 후 요리점을 운영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만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정신대협의 권유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2]

1991년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저축한 돈의 반환을 요구하였다.[18] 1996년 10월 26일 새벽, 대구동산병원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9]

3. 증언과 논란

문옥주의 증언은 여러 차례 출판되었는데, 내용에 일관성이 없어 논란이 되고 있다.

모리카와 마키코와의 공저에 따르면, 문옥주는 1924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생활고로 12살에 일본 규슈로 일하러 갔다가 도망쳐 돌아왔고, 기생이 되려 했으나 오빠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40년 16세에 일본인과 조선인 헌병에게 붙잡혀 강제로 위안소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7월에 출판된 이토 다카시의 증언집에서는 이러한 강제 연행에 대한 언급이 없다.[6] 1992년 3월부터 시작된 정대협의 조사(한국어판은 1993년 1월 출판)에서는 강제 연행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하며, 1996년 출판된 모리카와 마키코의 인터뷰에서도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토 다카시의 증언집에 따르면, 1942년 7월, 문옥주는 "식당에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조선인의 말에 속아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미얀마양곤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신이 위안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6] 양곤에서 위안부가 될 것을 조선인 일본군 병사에게 듣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동시에 묘하게 납득했다고 한다.

문옥주는 미얀마에서의 위안부 시절에 대해 "천 엔이면 대구에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 어머니를 조금 편하게 해드릴 수 있다."라고 말하며, 어머니에게 거액을 송금했다고 이야기했다.[3][4] 그러나 이는 일본군이 발행한 군표로, 가치가 없었다.[3][4] 또한 "주에 한두 번 허가를 받아 외출할 수 있었다. 인력거를 타고 쇼핑 가는 것이 즐거웠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5]

이영훈은 문옥주의 고향인 대구에 매춘부 알선 네트워크가 있었고, 만주 북부의 매춘 숙소[7](「위안소」라는 용어의 오용을 수정)에는 매춘부 20명 전원과 돌보미 및 경영자가 대구 출신이었으며, 문옥주가 자신의 의사로 남쪽으로 돈을 벌러 갔다고 진술한 점을 지적한다.[2]

안병직은 위안부 중 사실을 왜곡한 사람도 있었지만, 문옥주의 증언은 신뢰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2006년에 안병직은 "강제 동원되었다는 일부 위안부 경험자의 증언은 있지만, 한일 양국 모두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정대협이 일본과의 싸움을 바라고 있었다고 비판했다.[8]

문옥주는 1992년 위안부 시절 저축한 우편 저금 2만 6145엔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한일 청구권 및 경제 협력 협정에 의해 해결되었다며 패소했다.[9] 문옥주는 이 저금이 위안소 경영자가 급여를 지불하지 않아 항의한 결과 받게 된 돈과 일본군 팁 등을 합쳐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5] 그러나 전쟁 말기 일본군 점령지의 인플레이션율은 심각했고,[12] 일본 정부는 엔화 교환을 불가능하게 해 사실상 종잇조각이 되었다는 연구가 많다.[13][14]

요시미 요시아키는 1940년 연행에 대해 "군복을 입은 일본인"이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확정할 수 없지만, 민간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16] 윤명숙은 문옥주의 사례를 1940년은 납치(강제 연행), 1942년은 취업 사기로 분류한다. 하타 이쿠히코는 "진위가 불분명한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평가한다.[17]

3. 1. 증언의 변화

모리카와 마키코와의 공저에서 문옥주는 1940년 16세에 일본인과 조선인 헌병에게 붙잡혀 강제로 위안소로 연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2년 7월에 출판된 이토 다카시의 증언집에서는 이러한 강제 연행에 대한 언급이 없다.[6] 1992년 3월부터 시작된 정대협의 조사(한국어판은 1993년 1월 출판)에서는 강제 연행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하며, 1996년 출판된 모리카와 마키코의 인터뷰에서도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토 다카시의 증언집에 따르면, 문옥주는 1942년 7월, "식당에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조선인의 말에 속아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미얀마양곤으로 갔고, 그곳에서 자신이 위안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6]

문옥주는 미얀마에서의 위안부 시절에 대해 "천 엔이면 대구에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 어머니를 조금 편하게 해드릴 수 있다. 폼이 나서 정말 기뻤다. 저금통장은 나의 보물이 되었다"라고 말하며, 어머니에게 작은 집을 여러 채 살 수 있는 거액을 송금했다고 이야기했다.[3][4] 그러나 이는 일본군이 발행한 군표로, 가치가 없었다.[3][4] 또한 "주에 한두 번 허가를 받아 외출할 수 있었다. 인력거를 타고 쇼핑 가는 것이 즐거웠다." "악어 가죽 핸드백과 하이힐에 녹색 레인코트. 이렇게 세련된 차림으로 사이공 거리를 활보했다. 누구라도 나를 위안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리워서 으스대게 된다." "루비비취가 쌌다. (중략) 나도 하나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과감하게 다이아몬드를 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5]

이토 다카시는 증언집 후기에서 증언 내용이 100%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증언자들의 기억이 불확실해지고 있음을 언급하면서도, 가능한 한 확인을 거쳐 삭제한 부분도 있어 기본적으로는 사실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6]

3. 2. 증언 내용에 대한 논쟁

문옥주의 증언은 여러 차례 출판되었는데, 내용에 일관성이 없는 부분이 있어 논쟁이 되고 있다. 특히 1940년에 "군복을 입은 일본인"에게 폭력으로 연행되었다는 이야기는 1992년 8월 이토 다카시의 증언집에는 없지만,[6] 1992년 3월부터 시작된 정대협의 조사(1993년 1월 출판)와 1996년 모리카와 마키코의 인터뷰에서는 등장한다.

이영훈은 문옥주의 고향인 대구에 매춘부 알선 네트워크가 있었고, 만주 북부의 매춘 숙소[7](「위안소」라는 용어의 오용을 수정)에는 매춘부 20명 전원과 돌보미 및 경영자가 대구 출신이었으며, 문옥주가 자신의 의사로 남쪽으로 돈을 벌러 갔다고 진술한 점을 지적한다.[2]

안병직은 위안부 중 사실을 왜곡한 사람도 있었지만, 문옥주의 증언은 신뢰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2006년에 안병직은 "강제 동원되었다는 일부 위안부 경험자의 증언은 있지만, 한일 양국 모두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정대협이 일본과의 싸움을 바라고 있었다고 비판했다.[8]

문옥주는 1992년 위안부 시절 저축한 우편 저금 2만 6145엔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한일 청구권 및 경제 협력 협정에 의해 해결되었다며 패소했다.[9] 문옥주는 이 저금이 위안소 경영자가 급여를 지불하지 않아 항의한 결과 받게 된 돈과 일본군 팁 등을 합쳐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5] 그러나 전쟁 말기 일본군 점령지의 인플레이션율은 심각했고,[12] 일본 정부는 엔화 교환을 불가능하게 해 사실상 종잇조각이 되었다는 연구가 많다.[13][14]

요시미 요시아키는 1940년 연행에 대해 "군복을 입은 일본인"이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확정할 수 없지만, 민간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16] 윤명숙은 문옥주의 사례를 1940년은 납치(강제 연행), 1942년은 취업 사기로 분류한다. 하타 이쿠히코는 "진위가 불분명한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평가한다.[17]

3. 3. 증언에 대한 학계의 분석

모리카와 마키코와의 공저에서 문옥주는 1940년 16세에 일본인과 조선인 헌병에게 붙잡혀 강제로 위안소로 연행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1942년에는 "식당에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스스로 배를 타고 미얀마로 가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3][4]

이토 다카시 편집의 증언집[6]에서는 1942년 7월, 문옥주가 지인의 권유로 돈을 벌기 위해 미얀마 양곤으로 갔고, 그곳에서 위안부가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이토는 증언이 100% 사실은 아닐 수 있지만, 대체로 사실에 가깝다고 덧붙였다.[6]

이영훈은 대구에 매춘부 알선 조직이 있었고, 문옥주가 일했던 만주 북부의 매춘 숙소[7](「위안소」라는 용어는 잘못된 표현)에는 대구 출신 매춘부들과 경영진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문옥주는 자신의 의지로 돈을 벌기 위해 남쪽으로 갔다고 진술했다.[2]

안병직은 위안부 증언 중 사실을 왜곡한 경우도 있었지만, 문옥주의 증언은 믿을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2006년, 안병직은 "강제 동원되었다는 일부 위안부 경험자의 증언은 있지만, 한일 양국 모두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8]

요시미 요시아키는 1940년 문옥주 연행에 대해 "군복을 입은 일본인"이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민간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16]

하타는 저서에서 문옥주 증언에 대해 "진위가 불분명한 부분도 없지 않다"라고 언급했다.[17]

4. 재판 기록

재판 내용과 경위에 대해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사건을 참조하십시오. 문옥주는 최초의 지방 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사망했다.

5.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함께 이전 출력을 제공해주시면 수정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참조

[1] 서적 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 明石書店
[2] 웹사이트 11. 楯師団の慰安婦、文玉珠 https://www.youtube.[...] 2023-01-30
[3] 웹사이트 文玉珠さんの2万円は価値があったのか? {{!}} 泥憲和全集——「行動する思想」の記録 http://doro-project.[...] Doro Project 2023-12-15
[4] 간행물 京大東アジアセンターニュースレター 第558号 https://hdl.handle.n[...] 京都大学経済学研究科東アジア経済研究センター 2024-05-01
[5] 서적 文玉珠ビルマ戦線楯師団の「慰安婦」だった私
[6] 서적 証言従軍慰安婦・女子勤労挺身隊 風媒社
[7] 서적 満洲国新制定鉄道警護総隊法規総攬 : 満文 [康徳9年] 満州帝国
[8] 웹사이트 教科書フォーラムの安秉直、「慰安婦は自発的」妄言で波紋 http://www.dailyseop[...] デイリー・サプライズ 2006-12-06
[9] 서적 ナショナリズムとジェンダー 青土社
[10] 서적 文玉珠ビルマ戦線楯師団の「慰安婦」だった私
[11] 서적 闇に挑む! 徳間文庫
[12] 웹사이트 文玉珠(ムン・オクチュ)さんはビルマで大金持ちになった? http://fightforjusti[...]
[13] 서적 日本軍政下のアジア—「大東亜共栄圏」と軍票 岩波書店
[14] 서적 日本軍「慰安婦」制度とは何か https://ndlsearch.nd[...] 岩波書店
[15] 간행물 元慰安婦・文玉珠の軍事郵便貯金問題再考 https://archives.buk[...] 佛教大学歴史学部 2022-03-00
[16] 서적 従軍慰安婦 岩波書店
[17] 서적 慰安婦と戦場の性 新潮社
[18] 뉴스 위안부 피해자 故문옥주 증언, 기록 일치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8-01-08
[19] 뉴스 日軍위안부 문옥주할머니 숨져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1996-10-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