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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다다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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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즈노 다다시게는 1541년 오와리국에서 태어난 센고쿠 시대 무장이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시작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에야스의 대역을 맡아 활약했으며,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1600년 호리오 요시하루와의 말다툼 끝에 살해당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도쿠가와 쇼군의 생모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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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다다시게
기본 정보
미즈노 다다시게 초상 (모사, 원본은 교토 도후쿠지 탑두 료겐인)
이름미즈노 다다시게
본명미즈노 다다카쓰 (水野 忠勝), 미즈노 가쓰나리 (勝成) → 미즈노 다다시게
통칭후쥬로, 소베에 (宗兵衛), 이즈미노카미
도호용심 (勇心)
법휘 (법명)겐추 (賢忠)
시호없음
계명즈이겐인덴젠센슈타이슈유신겐추다이젠조몬 (瑞源院殿前泉州太守勇心賢忠大禅定門)
묘소렌겐지 (아이치현가리야시)
겐추지 (히로시마현후쿠야마시)
관위종5위하・이즈미노카미
씨족미즈노 씨 (도요토미 씨 성씨 하사)
출생덴분 10년 (1541년)
사망게이초 5년 7월 19일 (1600년8월 27일)
사망 장소미카와국 지류
가계
아버지미즈노 다다마사
어머니화양원 (오코치 모토쓰나의 양녀)
의붓아버지미즈노 노부모토
형제자매지카모리, 노부모토, 딸 (마쓰다이라 이에히로 실), 노부치카, 다다모리, 오다이노가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실, 히사마쓰 도시카쓰 실), 딸 (이시카와 기요카네 실), 딸 (미즈노 도요노부 실), 지카노부, 다다카쓰, 도스케, 딸 (나카야마 가쓰토키 실), 딸 (미즈노 다다모리 실), 다다아키라, 미즈노 다다시게
배우자정실: 쓰즈키 기치토요의 딸, 측실: 우카와 씨, 기타
자녀가쓰나리, 다다타네, 야주로, 다다키요, 세이조인 (가토 기요마사 실), 다다나오, 딸 (아베 노부카쓰 실), 딸 (모리모토 우콘 실)
무사로서의 정보
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주군미즈노 노부모토 (오다 노부나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오다 노부나가 → 노부타다 → 노부카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도쿠가와 씨
오다 씨
봉록가리야 성 성주
소속미즈노 씨
참전미카타가하라 전투 (1573년)
다카텐진성 공방전 (1581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1584년)

2. 생애

미즈노 다다시게는 미즈노 다다마사의 아들이자 미즈노 노부모토의 형제였다. 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여 다케다 신겐에 맞서 싸웠다.[1] 1576년 그의 형제 노부모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신하고 살해당한 후, 가리야성을 받았다. 1581년 오다 씨의 지원군을 이끌고 다케다 씨에 맞서 제2차 다카텐진성 공방전에 참전했다. 158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맞서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며칠 전인 8월 27일, 미카와국 지류에서 가가노이 시게모치에게 살해당했다.

2. 1. 초기 생애와 오다 가문 섬김

덴분 10년(1541년), 오와리국 지타군을 다스린 미즈노 타다마사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미즈노 가문의 당주였던 이복형 미즈노 노부모토를 섬겼으며, 노부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속했기에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1] 에이로쿠 원년(1558년) 오와리 오가와·이시세 전투에서 첫 출진하여 공을 세웠고,[1] 에이로쿠 3년(1560년) 카리야 18정 늪 전투에서도 군공을 세웠다.[1]

2. 2. 도쿠가와 가문으로

156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쓰다이라 모토야스)의 휘하로 들어갔다.[1]미즈노 노부모토와의 불화가 원인이었다고 한다.[1] 156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미카와 잇코잇키 진압에 공을 세웠다.[1] 1569년, 도쿠가와 가문의 도토미 가케가와성 공격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1] 1570년, 오다니성 전투 및 아네가와 전투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1]

2. 3. 미카타가하라 전투와 다카텐진성 전투

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케무샤(影武者, 대역)를 맡아 공을 세우고 투구와 갑옷을 하사받았다.[2] 『간세이보』에 따르면, 두상 흑칠 투구·불동(仏胴)·곤사이고시 갑옷을 받았다.

1575년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카와 요시다성을 습격했을 때 성을 지켰다. 이때 출격하여 교전 중 오른쪽 어깨에 조총알을 맞아 부상당했지만, 탄환이 살 속에 박혀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왼손으로 창을 잡고 지휘를 계속했다. 이 부상으로 나가시노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같은 해, 형 미즈노 노부모토가 다케다 씨(武田氏)와의 내통 혐의로 처형되었지만, 다다시게는 오카자키에 남았다. 1579년부터 약 3년간 이에야스의 다카텐진성 공격에 매번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2. 4. 오다 가문 가신, 그리고 혼노지의 변

1580년, 사쿠마 노부모리가 오다 가문에서 추방되고 미카와국 가리야성이 몰수되자, 다다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가리야 성을 받아 미즈노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2] 1581년, 오다 노부타다의 명령으로 미즈노 모리타카와 함께 요코스카성의 번수(番手)로 파견되었다.[2]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다카텐진 성 공격에 군감(軍監)으로 참전했다.[2]

1582년 2월, 노부타다의 고슈 정벌에 종군했다.[2] 같은 해 6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자 노부타다를 따라 교토에 있었으나, 난을 피해 탈출하여 6월 11일에 미카와국 가리야로 돌아갔다.[2]

2. 5. 도요토미 가문 섬김

1582년 6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자 오다 노부타다를 따라 묘카쿠지, 니조 어신조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난을 피해 교토에 잠복했다가 탈출하여 6월 11일에 미카와국 카리야로 돌아갔다.[1]

『간세이보』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돌아갔다고 되어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기타바타케 노부오를 섬겼다. 『오다 노부오 분겐장』에 따르면, 다다시게는 카리야, 오가와 외에 북 이세에도 소령을 가지고 있어, 모두 1만 3천 칸몬을 영유하고 있었다.[1] 다만, 이에야스의 친숙부라는 입장이기도 하여, 종속 관계는 복잡했다.

덴쇼 임오의 난에 참가했다. 1582년 9월 5일[3], 다다시게가 이끄는 카리야중이 가이국의 도쿠가와 측 요새에 착진했다. 다다시게의 출진은, 이에야스의 요청에 응한 「오다 정권」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이전인 같은 해 8월 12일에 행해진 구로코마 전투에, 적자인 가쓰나리가 참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선행한 가쓰나리의 출진이 「오다 정권」에 의한 것인지, 이에야스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또는, 다다시게의 독단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4]

1584년 3월 10일, 하시바 히데요시는 노부오 측의 미즈노 다다시게, 니와 우지쓰구, 다카기 사다토모 등을 (가신으로서) 불렀지만, 응하지 않았다.[5] 같은 달, 코마키 전투에 노부오 측으로 종군하여, 13일, 아들 가쓰나리는 이세 간베성의 구원을 명령받았으며,[6] 다다시게는 (노부오에게 주살된) 오카다 시게타카의 동생 오카다 젠도가 갇힌 혼지성(本治城)|혼지조일본어를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도코나베성(常滑城)|도코나베조일본어도 공략했다.[1] 더욱 진격하여 아사이 씨의 가리야스카성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개성설도 있음).[7]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4월 8일, 오카베 나가모리, 오스카 야스타카,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혼다 히로타카, 니와 우지쓰구와 함께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선두를 맡았다. 오바타성에서 군의를 할 때, 다다시게는 "적의 대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득책이 아니며, 적의 뒤를 따라, 최후미를 공격하는 것이 좋다"라고 제안하자, 사카키바라 등 여러 장수들은 이에 찬성하여 출진했다고 한다.[8] 다음 날 새벽 미요시 히데쓰구의 본진을 습격하여 궤멸시켰다.[1] 키노시타 토시마사는 다다시게의 일족 미즈노 분나가가 물리쳤다고 한다.[9] 전투 후 오바타성으로 돌아오자, 혼다 다다카쓰가 합류했다. 히데요시의 대군이 류센지 산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다다카쓰는 류센지 산으로의 야습을 주장하며 "내가 선봉이 되겠다. 누군가 후위를 맡아주길 바란다"라고 호소했다. 이른 아침부터 싸움에 지친 도쿠가와의 여러 장수들은 피로하여 아무도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그것을 본 다다시게가 후위를 맡겠다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다다카쓰, 다다시게를 억누르고, 그 날 밤 안에 코마키로 철수하기로 했다.[10] 6월, 카니에성 합전에서도 니와 우지쓰구와 함께 활약했다.[1]

10월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오가 갇힌 구와나성을 포위했지만, 다다시게 등은 굳게 지켜 이를 물리쳤다.[1] 구와나 대진 중, 적남 가쓰나리가 다다시게의 가신 도미나가 한베에게 참언당해 아버지에게 벌을 받았다고 하여 이를 살해했다. 코마키에서 이 변명을 들은 다다시게는 용서하지 않고 추방했기 때문에, 가쓰나리는 여러 나라를 방랑했다.[1]

11월 15일, 노부오가 히데요시와 단독 강화하여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기 때문에, 다다시게는 배신의 신분이 되었다. 1585년 2월, 히데요시가 사이카 정벌의 군을 일으키자, 노부오로부터 같은 해 2월 12일에 출진 명령을 받고 있다.[1]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무렵 다다시게는 히데요시의 직신이 된 것 같다.[1] 9월, 히데요시는 세쓰국 도요시마군 내의 칸다 728석을 가증했지만,[1] 『간세이보』에서는 이것을 가쓰나리에 대한 부조로 삼았다.[1] 히데요시는 구와나 대진에서의 활약과 여러 해 동안의 공적을 평가하여, 이시카와 가즈마사와 같은 무사 봉행으로 삼았다.[1] 다다시게의 경우, 노부오의 명령으로 히데요시 진영에 속했던 것이다.[11]

1587년 규슈 정벌에 참가했다.[1] 같은 해 7월 29일, 종5위하 이즈미노카미에 서임되어, 도요토미 씨의 성을 하사받았다.[12] 1587년 10월 1일, 히데요시는 기타노마쓰바라에서 대다회를 열었는데, 이 다회에 다다시게도 다석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3]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250기의 군을 이끌었다. 같은 해 9월 4일, 이세 간베성 4만 석으로 이봉되었다.[1]

1592년, 임진왜란(분로쿠·게이초의 역)에서는 『마쓰우라 고사기』의 기록에 나고야성 어루스반진중 안에 미즈노 이즈미노카미의 이름이 있으며, 히젠국 나고야성에 재진했다.[1]

1595년, 후시미성 축성을 분담했다.[1] 경위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같은 해에 다시 본령 미카와 가리야성 주가 되었으며,[1] 『당대기』에 따르면 석고는 2만 석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감봉된 것 같다.[1]

2. 6. 죽음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유품으로 좌문자(左文字) 칼을 받았다.[12]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는 아들 가쓰나리가 종군하고, 다다시게는 미카와국에 남았다. 같은 해 7월 19일, 미카와국 이케치리누(현 아이치현 지류시)에서 호리오 요시하루를 환대하는 주연을 열었을 때, 동석한 가가노이 시게모치와 말다툼을 벌여 살해당했다.[12] 향년 60세였다.

미즈노 노부모토와 같은 미카와 료겐지의 미즈노 가문 영묘에 묻혔으며,[12] 아들 가쓰나리가 추선 공양을 위해 건립한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의 겐츄지에도 묘가 있다.

3. 후손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생모 신토쿠인과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생모 코린인은 미즈노 다다시게의 아들 미즈노 다다나오의 자손이다.

가계도


4. 등장 작품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0 2000
[2] 서적 福山開祖・水野勝成
[3] 문서 家忠日記 天正十年九月五日
[4] 간행물 開館記念展 初代刈谷藩主水野勝成展~「鬼日向」のいくさとまちづくり~
[5] 문서 大日本史料
[6] 문서 大日本史料
[7] 문서 武家事紀
[8] 서적 小牧・長久手合戦 秀吉と家康、天下分け目の真相 (角川新書)
[9] 서적 小牧・長久手合戦 秀吉と家康、天下分け目の真相 (角川新書)
[10] 서적 小牧・長久手合戦 秀吉と家康、天下分け目の真相 (角川新書)
[11] 서적 福山開祖・水野勝成
[12]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13] 문서 東福寺塔頭霊源院書状
[14] 문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외조모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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