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독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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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주독립당은 1947년 10월 신한국민당 등 5개 정당의 통합으로 결성된 정당이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론을 지지했으나, 좌우 분열과 대량 탈당 사태를 겪었다. 1949년 10월 등록이 취소되었으며, 일부 당원들이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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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명희 -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되어 민주주의, 민족주의, 문화주의를 사시로 내걸고 민족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일제강점기 폐간 후 복간되어 방송 사업을 시작했고, 여러 논란을 겪으며 현재 주 6일제로 신문을 발행한다. - 홍명희 - 신간회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로, 민족 대단결을 목표로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지원하며 일제에 저항하다가 1931년 해산되었다. - 대한민국의 정당 - 국가혁명당
허경영을 중심으로 창당된 국가혁명당은 경제, 복지, 사회, 정치 개혁을 주요 이념으로 하며 국회의원 축소, 수능 폐지, 국민배당금 지급, 유엔 본부 판문점 이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국회의원 및 대통령 선거에서 의석 확보에는 실패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 대한민국의 정당 - 바른미래당
바른미래당은 2018년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으로 창당된 대한민국 정당으로, 중도와 개혁적 보수를 표방했으나 이념 갈등, 선거 참패, 분당을 겪고 민생당으로 합당되며 소멸되었다.
민주독립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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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창립 | 1947년 10월 19일 |
해산 | 남한: 1949년 10월 8일 |
설립자 | 안재홍 홍명희 김호 박용희 이극로 김원용 |
의장 | 홍명희 |
국가 | 북한 |
국가 2 | 남한 |
이념 | |
주요 이념 | 한국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진보주의 |
정치적 위치 | 중도주의 |
조직 | |
본부 | 알 수 없음 |
학생 조직 | 알 수 없음 |
청년 조직 | 알 수 없음 |
여성 조직 | 알 수 없음 |
관련 정보 | |
색상 | 알 수 없음 |
슬로건 | 알 수 없음 |
상징 | 알 수 없음 |
웹사이트 | 알 수 없음 |
2. 역사
1947년 10월 20일 신한국민당, 민중동맹, 신진당, 건민회, 민주통일당 등 5개 정당이 통합하여 민주독립당이 창당되었다. 임원선거에서 의장에 박용희, 김평, 이극로, 홍명희, 김원용 5인이 선출되었고, 서기에는 姜俊杓 외 2인, 사찰위원에는 金斗鎬 외 9인이 선출되었다.[9] 1947년 10월 31일 중앙위원 부서가 발표되었는데, 당대표는 홍명희가 선출되었고, 홍명희, 박용희, 이극로, 오하영(본명 오화영), 김평, 김원용, 이순탁 7인이 상무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12]
1948년 1월 13일 민주독립당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안에 반대하며, 이는 독립을 포기하고 민족을 멸망으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3] 2월 3일 단선단정론에 반대하며 김구의 남북협상론을 지지하는 담화를 발표했고,[15] 3월 9일 남한총선거 불참을 결의했다.[16] 3월 30일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남북협상 추진을 천명했다.[18]
1948년 4월 20일 위원장 홍명희 등 30여 명이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북행했다.[20] 5월 4일 민주독립당은 남북협상 결과에 대해 전조선정당단체대표자회의 결정과 미소 양국에 제출한 요청서가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완전 자주독립을 달성하자는 본당의 기본노선과 합치한다고 발표했다.[21] 5월 14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강제투표였으므로 무효를 주장하며,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할 것을 강조했다.[22]
1948년 남북협상 이후 당내 노선 갈등이 심화되었다. 1948년 6월 23일, 구 민중동맹 출신 200여 명이 당내 행동이 통합 정신에 투철하지 못하고 정치 행동이 배치된다는 이유로 탈당했다.[23] 8월 12일, 정치부장 유석현이 모든 정치단체를 이탈한다고 발표했다.[24] 8월 20일, 민주독립당 내 좌파와 우파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보도가 나왔다.[25] 8월 24일, 북한정권 지지파와 양김씨(김구, 김규식) 지지파의 대치로 당이 분열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27] 결국 9월 23일, 당 노선 견지파 측 간부 374명이 탈당 성명을 발표하였다.[28]
1949년 10월 18일, 민주독립당은 남조선로동당, 근로인민당 등 133개 단체와 함께 등록 취소 처분을 받았다.[10] 1950년 5월 27일, 치안국은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 민주독립당원 10여 명이 연루되었다고 발표하였다.[1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최고인민회의에 참여하였다.
선거 | 의석 | 증감 |
---|---|---|
1948년 | 20석 | 20 |
1957년 | 1석 | 19 |
1962년 | 1석 |
2. 1. 창당 (1947)
1947년 10월 20일 신한국민당, 민중동맹, 신진당, 건민회, 민주통일당 등 5개 정당이 통합하여 민주독립당이 창당되었다. 임원선거에서 의장에 박용희, 김평, 이극로, 홍명희, 김원용 5인, 서기 姜俊杓 외 2인, 사찰위원에 金斗鎬 외 9인을 각각 선출하였다.[9]1947년 10월 31일 민주독립당은 중앙위원 부서를 발표하였다. 당대표는 홍명희가 선출되었고, 홍명희, 박용희, 이극로, 오하영(본명 오화영), 김평, 김원용, 이순탁 7인이 상무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아래와 같이 중앙위원 부서를 배정하였다.[12]
부서 | 정 | 부 |
---|---|---|
서무 | 劉錫鉉 | 康俊杓 |
재무 | 尹元上 | 崔東權 |
조직 | 權廷植 | 林榮 |
선전 | 嚴雨龍 | 朴一來 |
비서 | 金逢和 | 金琦煥 |
훈련 | 李景錫 | 柳種烈 |
정치 | 趙憲植 | 金昌燁 |
문화 | 李甲燮 | 尹容基 |
조사 | 洪祥憙 | 朴莞哲 |
후생 | 申鎭雨 | 李相鵔 |
노동 | 朴儀陽 | 河萬鎬 |
농민 | 金商圭 | 崔廟洙 |
2. 2. 단선단정 반대 및 남북협상 참가 (1948)
1948년 1월 13일 민주독립당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안을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일부에서 소련의 비협력으로 남북통일 완전독립이 불가능할 때에는 남부만의 단선에 의한 정부 수립을 적극 주장하는 편도 있으나, 이 결과는 우리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고 우리 민족을 멸망의 구렁이로 몰아넣는 것 이외에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지적한다."[13]1948년 2월 3일 민주독립당은 단선단정론에 반대하며 김구의 남북협상론을 지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15]
1948년 3월 9일 민주독립당은 남한총선거 불참을 결의했다.[16]
1948년 3월 13일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민주독립당이 남북협상을 위한 행동 통일을 모색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17]
1948년 3월 30일 민주독립당은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남북협상 추진을 천명했다.[18]
1948년 4월 20일 민주독립당 위원장 홍명희 등 30여 명이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북행했다.[20]
1948년 5월 4일 민주독립당은 남북협상 결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1) 전조선정당단체대표자회의에서 결정된 결정서와 미소 양국에 제출한 요청서는 민족자결원칙에 의하여 완전 자주독립을 달성하자는 본당의 기본노선과 합치함을 확인한다. 2) 본당이 금번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은 어느 나라의 제안을 지지하거나 어느 나라를 반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민족의 진정한 이해를 위하여 행동하는 것뿐이다."[21]
1948년 5월 14일 민주독립당 선전부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1) 금반 실시한 선거(제헌 국회의원 선거)는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강요당한 강제투표였으므로 당연히 무효를 주장한다. 2) 금반 선거를 토대로 조직되는 단정은 우리 민족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므로, 본당은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할 것을 재강조한다."[22]
2. 3. 좌우 분열 및 대량 탈당 사태 (1948)
1948년 남북협상 이후 민주독립당 내 노선 갈등은 심화되었다. 1948년 6월 23일, 구 민중동맹 출신 200여 명은 당내 행동이 통합 정신에 투철하지 못하고 정치 행동이 배치된다는 이유로 탈당 성명서를 발표하였다.[23]1948년 8월 12일, 제1차 남북협상 이후 당수 홍명희는 북조선에 체류하였다. 김구, 김규식의 제2차 남북협상 부인 성명을 계기로 당은 이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못하는 심각한 내적 모순을 안게 되었다. 이에 당 정치부장 유석현은 모든 정치단체를 이탈한다고 발표하였다.[24]
1948년 8월 20일, 민주독립당 내 좌파와 우파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보도가 나왔다.[25] 7명의 당무위원 중 당대표 홍명희와 이극로는 북에 체류 중이었고, 박용희(朴容羲)·오화영은 당무에 방관적인 태도를 보여 당의 결의기관 운영이 두절되었다.[26] 8월 24일에는 북한정권 지지파와 양김씨(김구, 김규식) 지지파의 대치로 당이 분열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27]
결국 1948년 9월 23일, 북한정권 지지파와 당 노선 견지파의 균열 끝에 당 노선 견지파 측 간부 374명은 탈당 성명을 발표하였다.[28] 탈당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주요 탈당 인사 |
---|
박용희(상무) |
오화영(상무) |
신의경(상무) |
조헌식(상무) |
이동산(감찰위원장) |
권정식(조직부장) |
권영우(선전부장) |
이의식(후생부장) |
이경석(훈련부장) |
장자일(외교위원장) |
김창엽(정치부차장) |
현경(청년부장) |
박일래(문화부차장) |
임영(조직부차장) |
안재홍 |
양우조 |
이승복 |
유매진 |
김수철 |
이두열 |
허간룡 |
외 중앙집행위원 및 감찰위원, 각 지부 책임위원 374명 |
2. 4. 등록 취소 (1949) 및 이후
1949년 10월 18일, 이철원 공보처장은 '법령 제55호 제2조 (가)항'에 해당되는 정당·사회단체로서 남조선로동당, 근로인민당, 민주독립당 등 133개 단체를 등록 취소 처분하였다.[10]1950년 5월 27일, 치안국 사찰과는 1949년에 발생한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 민주독립당의 홍명흥, 홍기문, 하만호, 신봉하, 홍철희, 김무삼, 마진화 외 10여 명이 연루되었다고 발표하였다.[1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최고인민회의에 참여하였다.
선거 | 의석 | 증감 |
---|---|---|
1948년 | 20석 | 20 |
1957년 | 1석 | 19 |
1962년 | 1석 |
민주독립당은 중도 노선을 표방하며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13] 1948년 1월 13일, 민주독립당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안에 반대하며, "이는 우리 독립을 포기하고 우리 민족을 멸망의 구렁이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비판했다.[13]
1948년 6월 23일 구 민중동맹 출신 200여 명은 당내 행동이 통합 정신에 투철하지 못하고 정치 행동이 배치된다는 이유로 민주독립당에서 탈당했다.[23]
3. 이념 및 노선
1948년 2월 3일, 민주독립당은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론에 반대하며 김구의 남북협상론을 지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15] 이후 3월 9일에는 남한 총선거 불참을 결의했다.[16]
민주독립당은 남북협상을 위한 행동 통일을 모색했으며, 1948년 3월 30일에는 민족 자결 원칙에 따른 남북협상 추진을 천명했다.[18] 4월 20일에는 위원장 홍명희 등 30여 명이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북으로 갔다.[20]
1948년 5월 4일, 민주독립당은 남북협상 결과에 대해 "전조선정당단체대표자회의에서 결정된 결정서와 미소 양국에 제출한 요청서는 민족자결원칙에 의하여 완전 자주독립을 달성하자는 본당의 기본노선과 합치함을 확인한다"라고 발표했다.[21] 또한, "어느 나라의 제안을 지지하거나 어느 나라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민족의 진정한 이해를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21]
그러나 1948년 5월 14일, 민주독립당 선전부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강요당한 강제투표"였다며 무효를 주장하고, "자주적 통일정부수립에 매진할 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22]
4. 주요 인물
1948년 9월 23일 민주독립당 내 북한정권 지지파와 당 노선 견지파 간의 균열 끝에 당 노선 견지파 측 간부 374명이 탈당 성명을 발표했다. 주요 탈당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28]직책 이름 상무 박용희, 오화영, 신의경, 조헌식 감찰위원장 이동산 각 부장 권정식(조직), 권영우(선전), 이의식(후생), 이경석(훈련), 장자일(외교) 각 부 차장 김창엽(정치), 현경(청년), 박일래(문화), 임영(조직) 기타 안재홍, 양우조, 이승복, 유매진, 김수철, 이두열, 허간룡 외 중앙집행위원 및 감찰위원, 각 지부 책임위원
4. 1. 홍명희
1948년 8월 12일 제1차 남북협상 이후 민주독립당 당수 홍명희는 북조선에 체류하고 있었다. 민주독립당은 김구, 김규식의 제2차 남북협상 부인성명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하지 못하는 심각한 내적 모순을 겪게 되었다. 이에 당 정치부장 유석현(劉錫鉉)은 모든 정치단체를 이탈한다고 발표하였다.[24]
1948년 8월 20일에는 민주독립당 내 좌파와 우파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보도가 나왔다.[25] 7명의 당무위원 중 당대표 홍명희와 이극로는 북에 체류 중이었고, 박용희·오화영은 당무에 방관적인 태도를 보여 당의 결의기관 운영이 중단되었다.[26]
1948년 8월 24일에는 민주독립당 내 북한정권 지지파와 김구, 김규식 지지파의 대립으로 분열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27]
4. 2. 이극로
1948년 8월 20일 민주독립당 관련 보도에 따르면, 당무위원 7명 중 당대표 홍명희와 이극로가 북한에 체류 중이었고, 오화영은 당무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의 결의기관 운영이 중단되었다.[26] 이는 민주독립당 내 좌파와 우파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25]
4. 3. 오화영
1948년 8월 20일 민주독립당 내 좌파와 우파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보도가 나왔다.[25] 당무위원 7명 중 당대표 홍명희와 이극로는 북한에 체류 중이었고, 박용희·오화영은 당무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해 당의 결의기관 운영이 두절되었다.[26] 8월 24일 민주독립당 내 북한정권 지지파와 김구, 김규식 지지파의 대치로 분열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27]
1948년 9월 23일 민주독립당 내 북한정권 지지파와 당 노선 견지파 간의 균열 끝에 당 노선 견지파 측 간부 374명이 탈당 성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상무였던 오화영도 포함되어 있었다.[28]
참조
[1]
논문
분단국가의 형성과 중도파의 민족주의운동
[2]
서적
안 재홍 의 신 국가 건설 운동, 1944-1948
선인
[3]
백과사전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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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5
[4]
백과사전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http://encykorea.aks[...]
2019-03-15
[5]
서적
韓國史學論叢: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論叢刊行委員會
[6]
학술지
On the Origins of an Independent South Korean State: Separatism Versus a Policy of Unity
[7]
백과사전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http://encykorea.aks[...]
2019-03-15
[8]
서적
Hsinhua News Agency Re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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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inhua
1956-05-24
[9]
웹인용
민주통일당 결성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및 감찰위원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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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哲源 공보처장, 정당·단체 정리와 관련된 담화 발표와 등록취소 처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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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국 사찰과, 중간정당에 침투한 남조선노동당 특수부 조직사건 관련자를 검거했다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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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 중앙위원 부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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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 남한단선안을 반대하는 당의 견해 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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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 상무위원 엄우룡과 이순탁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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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과 민의, 김구의 對조선의견서에 대해 담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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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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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 남한총선거 불참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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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당·민족자주연맹·민주독립당, 행동통일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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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남북협상 추진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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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 각 부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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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위원장 홍명희 등 30여명 북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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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 남북협상에 관한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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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 선전부, 당면문제에 대해 담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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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의 구 민중동맹계 집단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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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독립당 정치부장 유석현, 탈당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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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獨立黨, 좌우분열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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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파 정당들의 재편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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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獨立黨, 북한정권 지지파와 양김씨 지지파 대치로 분열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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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主獨立黨 간부 370여 명, 탈당 성명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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