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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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재홍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으로, 경기도 평택 출신이다.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었고, 조선일보 주필,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나, 좌파 세력과의 갈등으로 탈퇴 후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미군정청 민정장관 등을 지냈다. 6.25 전쟁 중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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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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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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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재홍 |
한자 표기 | 安在鴻 |
다른 이름 | 민세(民世), 우헌(又軒), 자 경륙(景陸), 재홍(在鴻) |
출생일 | 1891년 12월 31일 |
사망일 | 1965년 3월 1일 |
직업 | 한국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역사학자, 언어학자, 수필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대종교 |
배우자 | 이정순(사별), 김부례(재혼) |
자녀 | 장남 안정용, 차남 안민용(아명 안민학), 딸 안서용 |
부모 | 안윤섭(부), 남양 홍씨 부인(모) |
형제 | 형 안재봉, 남동생 안재학, 안재직, 누이동생 안재숙, 안재영, 그외 누이동생 2명 |
친인척 | 안상규(친조부) |
본관 | 순흥 |
정치 활동 | |
직책 | 미군정청 예하 민정 장관, 남한 과도정부 수반 |
임기 | 1947년 2월 5일 ~ 1948년 9월 15일 |
소속 정당 | 무소속 |
사령관 | 존 리드 하지 |
대통령 | 이승만 |
총리 | 이범석 |
부통령 | 이시영 |
출생 및 사망 장소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수원군 종덕면 계루지리 (現 대한민국 경기도 평택시 고덕동)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웹사이트 |
2. 생애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1911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유학 중, 1912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과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였고, 1913년 중국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에 가입하며 민족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2]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교사로 잠시 활동했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청년외교단’을 조직하다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2] 출옥 후에는 조선일보 주필 등으로 활동하며 언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고, 1927년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하며 전국적인 조직 확대와 만주 동포 보호 운동에 힘썼다.[2]
이후 조선일보 필화사건(1928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관련 활동(1929년), 남경군관학교 학생 모집 사건(1937년), 흥업구락부 사건(1939년), 조선어학회 사건(1942년) 등에 연루되어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마지막 투옥 중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했다.[2]
해방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으나 곧 사임하고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미군정 하에서 민정장관을 지냈고, 민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대한올림픽후원회 회장도 역임했다.[2]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으며,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교롭게도 3.1절이 그의 기일이 되었다.[2]
2. 1. 초기
일본 유학 시절부터 민족 운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1913년 상하이의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에 가입하였다.와세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잠시 교사로 일했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경성(현 서울)에서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9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언론 및 사회 운동에 투신하여, 1927년 1월 조선일보 주필 재직 중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선출되었다. 신간회 강령 작성, 창립총회 개최, 지방 순회 강연 등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으며, 만주 동포 보호를 위한 '동맹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1928년 7월, 조선일보 관련 필화 사건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1929년 12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일보 부사장직을 사퇴하고 신간회와 협력하여 일제 규탄 민중대회를 준비하다 다시 체포되었으나, 1930년 1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37년 5월에는 남경군관학교 학생 모집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5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었고, 1942년 12월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감옥에서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으나 곧 사임하고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미군정 하에서 민정장관을 지냈고, 민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대한올림픽후원회 회장도 역임했다.[2]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으며,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2] 공교롭게도 3·1절이 그의 기일이 되었다.
2. 1. 1. 출생과 가계
경기도 수원군 종덕면 계루지리에서 지주 집안 출신인 순흥 안씨 안윤섭(安允燮)과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서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 말의 성리학자 안향의 24대손이자, 정당문학 및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안원숭(安元崇)의 21대손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지주였으며, 아버지 안윤섭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 혜민원 주사를 지냈으나 스스로 사직하고 평택으로 내려와 지역의 부호이자 지주로 자리 잡았다. 집안의 재산은 형 안재봉과 조카 안우용에게 상속되었다. 어린 시절 안재홍은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할아버지 안상규와 아버지 안윤섭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뚜렷한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5세에는 수원의 부호 이규복(李圭復)의 무남독녀인 경주 이씨 이정순과 혼인하였다.17세에 진위 지역의 사립학교인 진흥의숙에 입학하였고, 이후 수원의 기독교계 학교를 거쳐 서울의 경성기독청년회(YMCA) 중학부에 진학하였다. YMCA 중학부 시절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 민족 지도자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10년 8월,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진위에 머물던 중 경술국치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승만 등의 영향과 월남 이상재의 권유로 유학을 결심한 안재홍은 경성기독청년회(YMCA) 중학부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9년 9월 도쿄청년학원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1910년 9월에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 9월,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그는 학과 공부 외에도 밤을 새워 독서에 몰두하여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으며, 이를 통해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인류학,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일본 유학 시절 후배인 여운홍, 윤치영 등을 다시 만났고, 신익희, 송진우, 조소앙 등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넓혔다. 또한 '한인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여 조만식, 송진우, 장덕수, 이광수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호를 '민세'(民世)라 정했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12년 도쿄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한 여운형을 처음 만나 교류를 시작했다.[4] 안재홍은 여운형의 뛰어난 외모와 설득력 있는 말솜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후 "서로 깊은 인식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4] 1913년에는 상하이에서 신규식이 조직한 비밀결사 동제사에 가입하였으나, 실질적인 활동은 1916년부터 시작하였다. 안재홍은 1914년 6월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다.
2. 1. 2. 유년기
경기도 수원군 종덕면 계루지리에서 지주 출신인 순흥 안씨 안윤섭(安允燮)과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서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 말의 성리학자 안향의 24대손이며, 정당문학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안원숭(安元崇)의 21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지주였고, 아버지 안윤섭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 혜민원 주사를 지냈으나 스스로 사직하고 평택으로 내려와 부호이자 지주로 자리 잡았다. 집안의 재산은 형 안재봉과 조카 안우용에게 상속되었다. 어린 시절 안재홍은 근왕 의식이 강했던 할아버지 안상규와 아버지 안윤섭의 영향을 받아 강한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5세에는 수원의 부호 이규복(李圭復)의 외동딸인 경주 이씨 이정순과 결혼했다.17세에 진위의 사립 학교인 진흥의숙에 입학했으며, 이후 수원의 기독교계 학교를 거쳐 서울의 경성기독청년회(YMCA) 중학부에 진학했다. YMCA 중학부 시절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10년 8월,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진위에 내려와 있던 중 경술국치 소식을 듣게 되었다.
2. 2. 청소년기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2] 1911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2] 1912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으며,[2] 1913년 1월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신규식, 신채호 등과 교류하였다.[2][5] 이 시기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5]2. 2. 1. 교육계몽운동
1911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한 후, 1912년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2] 1913년 1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신규식, 신채호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5][2] 이때부터 신채호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5]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교육계에 투신, 1915년 4월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으로 재직했다.[5] 그러나 1917년 초,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다는 이유로 일제 총독부의 압력을 받아 학감직을 사퇴해야 했다.[5] 이 무렵 대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5] 1916년 12월 26일부터는 윤치호의 추천으로 경성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중앙 YMCA)에서 일하며 1917년 1월 교육부 간사가 되었으나 그해 5월 사직하였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평택에서 학생들의 만세 운동을 지도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비밀리에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다가 일제에 검거되었다.[2] 11월 대구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아 고문관마저 놀랐다고 전해진다. 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5] 1920년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5][2]
1922년 출옥 후, 1923년 최남선 등과 함께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하며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5] 1924년 3월 시대일보 논설기자가 되었고, 같은 해 9월 조선일보로 옮겨 주필 겸 이사, 1926년 9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을 맡았다.[5] 1930년 1월부터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비롯한 저작들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국내에 소개하는 등 민족사 연구 보급에도 힘썼다.[5] 또한 조만식,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고 물산장려회 이사로서 국산품 장려 운동을 이끌었다.[5]
1927년 1월, 조선일보 주필 재직 중 좌우합작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여 총무간사로 선출되었다. 신간회 강령 작성과 창립총회 개최를 주도했으며, 전국 각지의 지회 창립을 지원하기 위해 강연 활동을 펼치고 언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2] 또한 만주 동포 보호를 위한 ‘동맹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2]
1928년 7월, 조선일보 필화 사건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2] 1929년 12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일보 부사장직을 사퇴하고 신간회와 협력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조선민중대회를 계획하다가 다시 체포되었으나,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2]
1937년 5월, 중국 남경 중앙군관학교 학생 모집 운동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2] 1939년 3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2]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했다.[2]
아홉 번의 투옥으로 재산을 대부분 잃고 가난하게 생활했지만, 어문 연구나 고적지 답사, 문헌 속 지명 찾기 등 학문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5]
2. 2. 2. 3·1 운동과 투옥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경성(현 서울)에서 청년들을 모아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그러나 3·1 운동 참여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듬해인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2]이후에도 안재홍은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1928년 7월에는 조선일보의 필화사건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고, 항소했으나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29년 12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일보 부사장직을 사퇴하고 신간회와 협력하여 조선민중대회를 개최하며 일제를 규탄하다 다시 체포되었으나,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2]
1937년 5월에는 남경군관학교 학생 모집 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42년 12월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옥중 광복을 맞이했다.[2]
2. 3. 일제 강점기 활동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 유학 중 조선인 유학생들과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고,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에 가입하며 민족 운동에 참여했다.귀국 후 3.1 운동 참여 및 '청년외교단' 조직으로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에는 조선일보 주필 등으로 활동하며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27년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했으며, 만주 동포 보호 운동에도 관여했다.
이후 조선일보 필화사건,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관련 활동, 남경군관학교 학생 모집,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등에 연루되어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마지막 투옥 중 감옥에서 광복을 맞이했다.[2]
2. 3. 1. 독립운동
1911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유학 중이던 1912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힘썼다. 이듬해인 1913년 1월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인 同済社|동제사중국어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잠시 교사로 일했으나,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아 경성(현 서울)에서 청년들을 모아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그러나 3.1 운동 참여 혐의로 일제에 붙잡혀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 1월, 조선일보 주필로 재직하며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新幹會)' 창립에 참여하여 총무간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신간회의 강령을 직접 작성하고 발표했으며, 창립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전국 각지의 신간회 창립을 지원하기 위해 순회 강연을 하고, 언론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다. 만주 동포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동맹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며 민족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1928년 7월, 조선일보의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고, 항소했으나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29년 12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이었던 그는 직책을 내려놓고 신간회와 협력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조선민중대회를 계획했다. 이로 인해 다시 체포되었으나,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의 독립운동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37년 5월에는 중국 남경의 군관학교 학생 모집 운동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9년 3월에는 비밀결사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일제 말기인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감옥에서 광복을 맞이했다.[2]
2. 3. 2. 태평양 전쟁 이후
1941년 분성김씨 김부례와 재혼하였다. 김부례의 친정에서는 결혼에 대한 반대가 심하였으나, 김부례는 안재홍과의 결혼을 고집하였다.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10] 이는 그의 9번째 옥고였다.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1943년 3월 불기소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때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은 그의 정신과 육체를 오랫동안 괴롭혔다.[11]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2]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좌파 세력이 우세해짐에 따라 사임하고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미군정청의 민정장관, 민의원 의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또한 대한올림픽후원회 회장도 역임했다.[2]
그러나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고,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일은 공교롭게도 3·1 운동 기념일이었다.[2]
부인 김부례는 안재홍이 납북된 뒤 2000년 11월 25일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5]
2. 3. 3. 광복 직전
조선총독부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안재홍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총독부가 그를 포섭하려 한 주요 이유는 치안을 유지하여 폭동을 막고, 여운형을 통해 연안정부와 연락하며, 소련을 통해 미국, 영국 등 연합국과 평화 공작을 추진하려는 의도였다.[15]안재홍은 치안 유지에 대해서는 일부 동의했으나, 총독부의 이러한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여러 차례에 걸친 협력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 그는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 타다오(西光忠雄)에게 임진왜란, 을미사변,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이 한국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사례들을 직접 언급하며, 일본이 조선에서 물러날 때 한일 양 민족 간의 큰 충돌과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미리 군민 각계에 철저한 대비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15]
나아가 그는 그 대책으로 민족자주, 호양협력, 마찰방지의 3원칙을 제시하고,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허용해 줄 것을 요구했다.[15][16] 총독부 측은 이러한 요구에 대해 일단 긍정적으로 수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17]
그러나 1945년 1월에 이르러 조선총독부는 입장을 바꿔 "유혈 방지는 뜻이 좋으나, 민족자주를 외치는 것은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여운형과 안재홍 두 사람을 구금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동시에 총독부는 '히로시마조'(廣島組)라는 폭력단을 조직하여 만일의 경우 여운형과 안재홍을 암살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다.[17] 실제로 지방법원 검사 모리우라(森浦)는 공개적으로 암살을 부추기는 연설을 하며 제1, 제2 자객을 지정해 안재홍을 제거하자고 협박하기도 했다.[18]
이러한 상황에서 안재홍의 측근들은 총독부와의 '호양협력'이 훗날 친일 협력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안재홍은 "지금 민족자주를 내세우며 일본과 절충하려는 상황인데, 그까짓 호양협력쯤은 겁낼 것 없다"고 말하며, 일본의 패전에 대비한 협상을 계속하겠다는 이른바 '호양협력'의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했다.[17]
1945년 8월 14일, 니시히로 타다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초대로 총독부를 방문했을 때,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패전 직후 조선의 치안 유지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3. 해방 후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으나 좌익 세력의 강화로 사임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고, 미군정청의 민정장관과 민의원 의원을 지내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대한올림픽후원회 회장도 역임하였다.[2]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에 납북되었으며,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공교롭게도 3·1 운동 기념일이 그의 기일이다.
3. 0. 1.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1944년 여운형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경기도 양주군 봉안 이상촌으로 내려가 비밀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결성했는데, 이는 건국준비위원회의 모체가 되었다. 여운형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항복하자, 8월 15일 저녁에 안재홍 등과 함께 건국동맹 위원들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19]안재홍은 1945년 8월 15일 밤 발족된 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았고,[20] 1945년 8월 16일 경성중앙방송국에 나가 방송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에서 안재홍은 건준의 결정을 알리면서 질서 유지를 위한 경비대와 정규병의 편성, 식량 확보와 배급, 통화와 물가 안정, 미결 정치범 석방 등의 당면 과제를 언급하였다.[21]

한편 안재홍은 원서동의 송진우 자택을 찾아가 건준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내세우며 이를 거절했다. 김준연 역시 거절했으며, 김병로와 원세훈은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와세다 대학 후배이자 동생 안재학의 친구인 윤치영과도 접촉했으나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그럼에도 안재홍은 한민당 계열 인사들과의 접촉을 계속 시도하며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안재홍은 개인적으로 박헌영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건준 내에서 박헌영파의 영향력이 커지자 안재홍은 불편함을 느꼈고, 결국 1945년 9월 초 건준과 결별하게 되었다. 박헌영에 대한 반감이 주된 이유였지만, 충칭 임시정부에 대한 시각 차이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안재홍 역시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송진우처럼 '임정 봉대론'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22] 안재홍은 '임정 절대 지지'를 표명한 뒤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9월 4일 건준을 탈퇴하였다.
건준 탈퇴 이후에도 안재홍과 한민당은 민족통일전선과 좌우합작운동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22] 9월 중순, 권태석(權泰錫)이 서울에서 안재홍, 이갑성, 정인보, 이규갑 등이 모인 자리를 방문하여 정당 통일 운동을 제안했으나, 이갑성은 즉석에서 거절했고 안재홍 등도 확답을 피했다.
3. 0. 2. 군정기 정치활동
광복 직후 그는 좌우의 계급 투쟁이나 이념 투쟁 대신 통일된 민족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순점과 공산당 일당 독재를 모두 비판하며, 모든 사람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945년 8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으나, 건준이 박헌영의 개입으로 점차 좌경화되자 이에 반발하여 탈퇴했다. 박헌영은 건준 내에 민족주의자들이 많다며 우경화를 우려했고, 조직 개편을 요구했다. 여운형은 안재홍과 상의했고, 안재홍은 여운형에게 박헌영을 멀리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23] 그러나 건준 내에서 박헌영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자 안재홍은 불편함을 느꼈고, 결국 9월 초 건준과의 결별을 선언했다.[23]
건준 탈퇴 후, 1945년 9월 1일 독자적으로 조선국민당을 창당했다. 이후 9월 24일에는 사회민주당, 자유당, 민중공화당, 근우동맹, 협찬동지회 등 여러 군소 정당과 통합하여 국민당을 결성했다. 이 국민당은 1946년 4월 18일 한국독립당에 흡수 통합되었고, 안재홍도 한독당에 입당했다. 한편, 김성수의 권유로 한민당 입당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한민당 내 일부 세력이 안재홍을 좌파 또는 조선식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영입은 무산되었다.
1945년 10월 23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는 데 참여했다. 11월 23일 조선일보가 복간되자[24],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으로 숨이 끊어졌던 조선일보가 민족 해방과 함께 보도, 비판, 선양의 기관으로서 다시 출발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며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24]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한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25] 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25] 이후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에 강력히 반발하며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고[26] 곧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6] 1946년에는 우익 성향의 언론사인 한성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미군정 하에서 민정장관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 기여했다.[2]
3. 0. 3. 신탁통치 반대에서 선회
처음에는 안재홍도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을 자세히 살피고 당시의 국제정세를 고려한 다음, 1946년 4월 8일에 한민족은 당시 유일한 한반도 통일방안으로써 관련 강대국 간의 합의에 의해 마련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27]안재홍은 신탁통치 문제를 민족 내부의 공론과 협동, 즉 좌우합작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선 좌우합작을 성사시킨 후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에 제시할 제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민족의 단결된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그러나 그의 이러한 현실적인 접근은 당시 '탁치는 매국'이라는 강경한 반탁 여론이나, 신탁통치를 미국 또는 소련의 식민지화로 간주하는 시각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안재홍은 김구, 이승만 등 반공주의 우익 인사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졌다. 그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을 수용하는 것이 곧 신탁통치를 무조건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27] 즉, 결정의 틀 안에서 민족의 주체적인 노력을 통해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946년 1월 12일 제2차 반탁 시위를 전후하여 반탁의 물결이 다시 전국으로 확산되자, 안재홍은 국민경제의 파탄을 우려했다. 그는 이미 1월 8일 서울 중앙방송을 통해 "탁치를 반대하는 것이지 연합국에 적대하는 것이 아니며, 전민족의 의사표시가 대중생활에 지장이 없어야 하므로 파업을 풀고 직장에 복귀하라"는 내용의 파업 철회 촉구 연설을 하였다.[28] 이어 1월 15일 방송 연설에서는 "국제적 국내적 상황 변화에 직면하여 우리는 극좌, 극우사상을 배격하고 한국독립을 위해 일하고 있다[28]"고 말하며,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좌우의 극한 대립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27]
나아가 1월 29일에는 "탁치안이 아직 실시가 아니된 대신 철폐도 아니되었으니, 장래를 위하여 무용한 반탁시위는 필요할 때까지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발언하였다.[27] 이는 반탁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극한 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일부 강경파 인사들과는 명확히 선을 긋는 입장이었다.[27]
3. 0. 4. 우익정당 단결 노력
안재홍은 한민당과 함께 이승만의 비상국민회의와 김구가 중심이 된 비상정치회의를 통합하여 건국 과정을 앞당기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29] 그는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각 정파의 입장을 고려하여 인물을 선정한 뒤 비상국민회의를 열고, 여기서 이승만, 김구 등 지도자들에게 최고정무위원 지명권을 일임하여 최고정무회의를 구성함으로써 통일 정부를 실현하자고 제안했다.[29]이러한 안재홍의 구상은 수용되어, 그는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고 주비회장을 맡아 활동했다.[29] 이는 해방 직후 분열된 우익 정치 세력을 하나로 모아 국가 건설의 동력을 만들고자 했던 노력으로 평가된다.
3. 0. 5. 좌우합작운동 참여와 과도입법위 활동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부재함)3. 0. 6. 미군정 민정장관 재임
1947년 2월 5일, 미 군정청의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임명 직후 각 부처의 장 및 도지사를 한국인으로 임명하고 미국인을 고문으로 두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조치는 미군정 기구에 중도파 인사인 안재홍이 참여하는 것을 경계했던 한민당의 반발을 샀다. 한민당은 안재홍을 맹렬하게 공격했으며[33], 음해공작까지 벌였다고 전해진다.[34]
안재홍 본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상당한 고충을 겪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 노선을 '순정우익'이라 칭했으나, '나는 최초에는 찬탁매국노요, 다음에는 애국운동 저해자요. 또 다음에는 극악무도한 탐관오리로 허다한 비방을 당하게 되었다'고 개탄하며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34] 그는 한민당과 공산당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김구 역시 그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좌파 진영에서는 그를 "계급의식을 희석화시키려는 소부르주아지", "지주의 아들"이라 비난했고, 우파 진영에서는 미군정의 앞잡이, 찬탁론자라고 비판했다.
한편,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추천한 주체가 한민당이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34] 이 견해에 따르면, 미군정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던 한민당이 정치적 야심이 크지 않은 비(非)한민당계 인물을 물색하던 중 안재홍을 추천했다는 것이다.[34]
한독당의 당수였던 김구는 안재홍의 민정장관 입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한독당 내부에서는 미소공위 참가 문제를 둘러싸고 참여 거부를 주장하는 구 한독당원들과 참여를 주장하는 구 국민당 계열 간의 갈등이 있었고, 결국 1947년 4월에는 국민당 출신 인사들이 한독당에서 제명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안재홍은 찬탁론자로 오해받아 자객이 그의 집 담장을 넘다가 발각되어 도주하는 등 신변의 위협을 겪기도 했다.
3. 1. 정치 활동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1911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유학 중이던 1912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힘썼다. 1913년 1월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잠시 교사로 일했으나,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경성(현 서울)에서 청년들을 모아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이 활동과 3·1 운동 참여 혐의로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7년 1월, 조선일보 주필로 재직하며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여 총무간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신간회의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했으며, 창립총회 개최와 각 지방 조직의 창립을 지원하기 위해 강연 활동을 펼쳤다. 또한 언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한 '동맹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1928년 7월에는 조선일보의 필화사건으로 인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1929년 12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일보 부사장직을 사퇴하고 신간회와 협력하여 조선민중대회를 열어 일본을 규탄하다 다시 체포되었으나, 1930년 1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에도 그의 항일 활동은 계속되었다. 1937년 5월에는 중국 남경의 군관학교 학생 모집 운동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9년 3월에는 비밀결사 흥업구락부 사건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1942년 12월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옥중 생활을 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으나 좌파 세력 강화로 사임하고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이후 미군정청 민정장관, 민의원 의원을 지내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2]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에 납북되었으며,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3. 1. 1. 미소 공위 지지와 김구와의 갈등
그러나 안재홍은 국민당이 한독당에 합당된 후 김구와 정치적 견해 차이를 보이며 대립하고 있었다. 그가 김구와 입장을 달리했던 주요 쟁점은 신탁통치 문제와 미군정 참여 문제 등이었다.[32]1947년 5월에 재개된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둘러싸고, 참가를 주장하는 한독당 내 국내파와 참가를 보류하자는 해외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해외파인 임정 측에서는 미소공위 참가 여부를 결의할 중앙집행위원회 소집안을 제출한 국민당 및 신한민주당 계열 인사들을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6] 이러한 갈등 속에서 안재홍은 1947년 6월 19일 한국독립당에서 제명되었다.[36]
1947년 7월 3일에는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다가 김규식과 함께 용공분자로 모는 전단이 뿌려지고 벽보가 붙는 일이 발생했다. 이어 괴청년들이 김규식의 집을 둘러싸고 김규식과 안재홍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안재홍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탁과 반과도입법위원 관련 내용을 담은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37] 이에 안재홍이 운영하던 한성일보는 '어째서 경찰은 입법의원 의장과 민정장관을 모독하는 삐라를 붙여도 못 본 척하고, 한민당을 비난하는 삐라를 살포한 애국부녀동맹 소속 두 여성만 체포하는가'라는 항의성 기사를 싣기도 했다.[37]
한편, 1947년 6월 초 안재홍은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구 국민당 출신 인사들과 함께 김구 등의 반탁 노선에 반대하며 미소공위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한독당을 탈당하였다.[38][39]
3. 1. 2. 4.3 사태 진압회의 참석
5월 5일, 미군정청 군정장관 윌리엄 F. 딘,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등이 비행기편으로 제주도에 도착했다.[40][41] 이날 오전 12시부터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4.3 사건 해결을 위한 최고수뇌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딘 장군,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준장, 조병옥 경무부장, 맨스필드 대령, 유해진 제주도지사, 김익렬 제9연대장 중령, 최천(崔天)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딘 장군의 통역관 등 9명이 참석했다.[40][41]회의의 주제는 4.3 사건 진압 방안이었으나, 참석자 간 의견 대립으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김익렬과 조병옥의 난투극으로 번졌다. 최천 경찰감찰청장은 사건을 국제공산주의자의 계획된 폭동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군경 합동작전을 통한 토벌을 주장했다. 반면 김익렬 연대장은 무력 위압과 설득, 선무귀순 공작을 병행하는 작전을 건의했다. 김익렬은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불분명하지만 경찰의 초동 대처 실패와 기강 문란이 사태 악화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작전의 방해 요소로 경찰 문제를 지적하고 전 제주도경찰을 자신의 지휘 하에 둘 것을 요구했다.[40][41]
김익렬이 경찰의 문제를 지적하는 증거로 사진첩을 제시하자, 이를 본 윌리엄 F. 딘 장관은 흥분하여 조병옥에게 사진 자료들을 던지며 질책했다. 이에 격분한 조병옥은 김익렬의 발언과 증거가 모두 허위 조작이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부인했다. 나아가 조병옥은 김익렬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라고 말하고, 김익렬이 국제공산주의자의 상투 수단에 따라 민족주의를 가장하여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익렬의 아버지가 소련에서 교육받은 공산당 간부이며, 김익렬이 부친의 지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몰아붙였다.[40][41]
이 말을 들은 김익렬은 "닥쳐라!"라고 소리치며 격분하여 조병옥에게 달려들어 폭행을 가했다. 유도 3단이었던 김익렬은 조병옥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복부를 가격했으며, 이를 말리려던 최천 경찰청장마저 발길질로 급소를 가격해 쓰러뜨렸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안재홍 민정장관은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라며 싸움을 말리려 했고, 송호성 장군 역시 김익렬을 꾸짖었으나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김익렬은 조병옥에게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며 격렬하게 저항했다.[40][41]
윌리엄 F. 딘 장관이 통역관에게 안재홍 민정장관과 송호성 장군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묻자, 통역관은 그들이 김익렬을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하고 있다고 왜곡하여 통역했다. 이에 더욱 격분한 김익렬은 통역관마저 발길질로 음낭을 걷어찼다. 놀란 딘 장관과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장군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딘 장군은 미군 헌병(MP)을 투입해 김익렬을 제압하도록 명령했다. 헌병들이 김익렬을 강제로 떼어놓고 의자에 결박하면서 소란은 마무리되었으나, 회의는 아무런 결론 없이 파행으로 끝나고 말았다.[40][41]
3. 1. 3. 정부수립 참여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김구,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에도 회의적이었다. 그는 1947년 12월 20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창당에 참여하여 민족자주연맹 최고위원에 피선되었지만, 1948년 4월에 열린 남북협상에 그는 불참하였다. 5월 5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의 주도로,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경비대사령관 준장 송호성 등이 제주도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가졌다.1948년 6월 24일 조선언론인협회에서 서재필, 안재홍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로 입후보, 출마하였으나 2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이후 '''국민당''' 당수와 조선일보 사장 겸 주필을 역임하였다.
1949년 대한민국 1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기시정위원회를 조직했다. 안재홍은 국기시정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42] 남북협상이 실패하고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단독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자신의 신념이자 이상론인 민공협동론의 실현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자 그는 미련없이 최선책을 버리고 이승만 정권에의 참여라는 차선책을 선택.[43] 하게 된다.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은 허상이었으며 김규식 역시 미군정의 부탁에 의해 남북협상에 참여했음을 알린 후 그는 이승만을 찾아갔다. 그와 함께 조소앙, 여운홍 등도 역시 남북 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두 번째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북협상, 좌우합작론을 주장하다가 전향하여 이승만을 찾아온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했다. 프란체스카 도너가 안재홍을 멸시하고 무시하던 것은 친구였던 윤치영과 그의 비서 최기일에게도 그대로 목격되었다. 이를 목격한 윤치영의 공보비서인 최기일은 '안재홍 씨가 프란체스카에게 푸대접을 받고 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44]'고 증언한 바 있다. 간단한 영어를 해독할 수 있었던 그는 프란체스카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이화장과 경무대를 출입하였다.
3. 1. 4. 정치 활동과 한국 전쟁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으나, 좌파 세력이 우세해지자 사임하고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미군정청의 민정장관, 민의원 의원으로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으며, 대한올림픽후원회 회장도 역임했다.[2]1948년 8월, 민간위원으로서 사학자 이병도, 이선근, 화가 고희동, 국어학자 최현배 등과 함께 시정위원회에 참여했다.[42] 이 위원회는 국회의원, 법조인, 언론인, 학자 등 총 42명의 시정위원과 12명의 특별심사위원으로 구성되어 새 나라의 국기 채택을 논의했다.[42] 1949년 8월 20일에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45]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기도 평택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운명은 바뀌었다. 정부의 안심하라는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못했던 그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서울 외곽에 숨어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가족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인민군에게 붙잡히는 길을 택했다. 조선인민군은 정보요원을 동원해 안재홍의 행방을 추적했고, 그는 서울특별시 돈암동 자택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1950년 9월 26일, 북한으로 납북되었다.[46]
납북된 후 안재홍은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일은 공교롭게도 3·1 운동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2]
3. 2. 피랍과 최후
6.25 전쟁 발발 후 피랍되었으나,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는 월북 인사로 취급되어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북한 당국은 납북 및 월북 인사들에게 협조를 요구했지만, 안재홍은 이를 거절하고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납북 이후 안재홍의 구체적인 행적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재북평통)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46] 그는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기일은 3·1 운동 기념일과 겹친다. 그의 사망 소식은 당일 일본 방송을 통해 대한민국에 전해졌고, 아들 안정용과 변호사 이인 등의 주도로 3월 9일 서울에서 시신 없는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고향인 경기도 평택의 생가에는 많은 추모객이 모였으나, 유해가 없는 장례식은 쓸쓸하게 치러졌다고 전해진다. 한편 북한에서는 옛 동지였던 홍명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그를 애도했다.[47]
3. 3. 사후
아들 안정용은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평택군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일부 손자들은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이민을 가기도 했으며, 교원 자격증을 가진 며느리 김순경은 교직에 복귀하려 했지만 여러 차례 거절당했다.1957년 11월, 북한 간첩 박정호 등 15명이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검찰은 이들이 안재홍의 밀서를 받아 진보당, 민혁당 등에 침투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한동안 남한 사회에서 안재홍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다.
1965년 3월 안재홍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부인 김부례 등 유족은 북한에 시신 인도를 요구했다. 북한 당국은 같은 해 12월, 세계적십자사국제위원회를 통해 시신을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안재홍에 대한 재평가 논의가 시작되었고 관련 학술대회도 열렸다. 하지만 아들 안정용이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면서, 그가 1989년 해금되기 전까지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안재홍을 언급하는 것이 여전히 어려웠다.
1989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008년 8월에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으로 선정한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32명 중 문화, 종교, 언론 부문 인물로 선정되었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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