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바르샤바 왕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르샤바 왕궁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로, 1339년 기록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1596년 지그문트 3세가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천도하면서 왕궁으로 개축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재건축과 증축을 거쳤다. 폴란드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바르샤바 공국, 폴란드 입헌 왕국 등 다양한 시대를 거치며 정치,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984년 재건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바르샤바 역사 지구의 일부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렘브란트의 작품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19년 완공된 건축물 - 세 대성당
    세 대성당은 1510년 포르투갈의 고아 점령 승리를 기념하여 건축되었고, 마누엘 양식을 기반으로 토스카나 및 코린트 양식이 혼합되었으며, 황금 종과 황금 장미, 기적의 십자가 경당 등 역사적, 종교적 유물을 소장한 웅장한 건축물이다.
  • 바르샤바의 궁전 - 빌라누프궁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를 위해 17세기 말에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빌라누프 궁전은 바르샤바에 위치하며, 유럽 예술과 폴란드 건축 전통이 융합된 독창적인 디자인과 '정원 안뜰' 형태가 특징이고, 여러 가문을 거치며 확장, 폴란드 최초의 공공 박물관 중 하나로 개방, 2차 세계 대전 후 복원되어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 바르샤바의 궁전 - 문화과학궁전
    문화과학궁전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건축물로, 레프 루드네프가 설계했으며 폴란드 건축 양식을 반영했고, 현재는 복합 시설로 사용되지만 소련의 영향력을 상징하는 건물로 여겨지며 논란이 있다.
  • 폴란드의 미술관 -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1801년 이자벨라 차르토리스카 공작 부인이 폴란드 유산 보존을 위해 설립한 차르토리스키 미술관은 크라쿠프로 이전하여 《흰 족제비를 안고 있는 여인》 등의 주요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전쟁 중 약탈 후 복구를 거쳐 폴란드 국립박물관의 일부로 운영되다가 2016년 기증 및 복원 후 2019년 재개관하였다.
  • 폴란드의 미술관 - 말보르크성
    폴란드 말보르크에 위치한 말보르크성은 튜튼 기사단이 프로이센 정복 후 요새화 목적으로 건설한 유럽 최대의 벽돌 건물 단지로, 중세 후기 동유럽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바르샤바 왕궁
지도
기본 정보
서쪽 정면
성 광장에서 바라본 서쪽 정면
동쪽 정면
비스와 강에서 바라본 동쪽 정면
다른 이름왕궁
종류성 거주지
건축 양식매너리즘-바로크
의뢰인지그문트 3세 바사
위치바르샤바
착공1598년, 1971년
완공1619년, 1984년
파괴1944년 9월 10일 – 13일 (독일군)
높이60 미터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디자인 및 건설
건축가마테오 카스텔리, 조반니 바티스타 트레바노, 가에타노 키아베리
지정
지정 구분세계 문화 유산
공식 명칭역사 지구
지정 번호30
지정 기준ii, vi
유형문화
유네스코 지역유럽
지정 구분폴란드 역사 기념물
지정 날짜1994년 9월 8일
지정 위치바르샤바 - 왕의 길과 빌라누프가 있는 역사적인 도심
지정 번호M.P. 1994 nr 50 poz. 423

2. 역사

바르샤바 왕궁은 14세기 최초의 궁전탑이 건설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마조프셰 공작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17세기 초 크라쿠프의 바벨 성을 대체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세임(하원과 상원) 등의 의석으로 지정되었다. 중세 고딕 양식 건물은 마테오 카스텔리와 조반니 바티스타 트레바노에 의해 이탈리아 매너리즘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동쪽 날개는 가에타노 키아베리가 설계하여 1747년에 완공되었다.

왕궁은 대홍수 시기(1655~1657) 스웨덴군과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에 의해 크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국민들의 노력으로 1984년 재건되어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문화·국가유산부 소속이다. 왕궁에서는 여러 공식 방문과 국가 회담도 열린다.

2. 1. 중세

중세 시대 바르샤바 왕궁의 성벽


1339년, 바르샤바에 주재한 교황 특사폴란드 왕국의 카지미에시 3세 대왕(카지미에시 3세 대왕)이 독일의 튜턴 기사단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심리했다. 카지미에시 3세는 튜턴 기사단이 폴란드 영토인 포메라니아와 쿠야비아 지역을 불법적으로 점령했다고 주장했다. 이 소송 관련 문서는 바르샤바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당시 바르샤바는 흙과 나무로 만들어진 방어벽으로 둘러싸인 요새화된 도시였으며, 현재의 왕궁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조프셰 공작 트로이덴의 거주지였다. 13세기 말 콘라트 공작 통치 시대에는 "작은 저택"(Curia Minor|쿠리아 미노르la)이라 불리는 나무와 흙으로 된 고르드가 세워졌다. 다음 공작인 카지미에시 1세(카지미에시 1세)는 바르샤바 최초의 벽돌 건물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는 대탑(Turris Magna|투리스 마그나la) 건설을 결정했다.

14세기 중반에는 왕궁 탑이 건설되었으며, 1층까지의 잔해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마조프셰를 다스린 야누시 1세 공작(야누시 1세) 재위 시절인 1407년에서 1410년 사이에 "큰 저택"(Curia Maior|쿠리아 마이오르la)이 세워졌다. 1944년까지 남아 있던 외벽은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이후 재건되었다. 새로운 저택의 성격과 규모(47.5m/14.5m)는 건물의 지위 변화를 결정했으며, 1414년부터 공작 저택으로 기능했다.

2. 2. 르네상스 시대

1526년 마조프셰 공국이 폴란드 왕국(1385–1569)에 편입되면서, 그때까지 마조프셰 공작의 성이었던 건물은 왕실 거주지 중 하나가 되었다. 1548년부터 보나 스포르차 왕비는 딸들인 이자벨라(헝가리 왕비가 됨), 카타리나(스웨덴 왕비가 됨), 안나 야기에우워(폴란드 왕비가 됨)와 함께 이곳에 거주했다. 1556년~1557년과 1564년에는 지그문트 2세 폴란드 국왕이 바르샤바에서 왕실 의회를 소집했는데, 이 의회는 성에서 열렸다. 루블린 연합(1569) 이후, 바르샤바 왕궁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Sejm, 국회)이 정기적으로 회합하는 장소가 되었다. 1569년~1572년 지그문트 2세 국왕은 조반니 바티스타 디 콰드로와 지아코포 파리오(Giacopo Pario)를 건축가로 하여 성 개조 공사를 시작했다.

쿠리아 마이오르(Curia Maior)는 의회 회의 장소를 제공하도록 개조되었으며, 1층에는 하원(Sejm, 귀족 대표) 회의장(구 하원 회의장), 2층에는 상원 회의장(상원의원들이 국왕 앞에서 논의하는 곳)이 마련되었다. 이는 유럽에서 의회 전용 건물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 중 하나였다. 쿠리아 마이오르의 의회적 성격은 건물 외관의 그림 – 폴란드, 리투아니아, 그리고 대표들이 선출된 다양한 지역의 문장 – 에서 강조된다. "왕궁"으로 알려진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 쿠리아 마이오르 옆에 세워졌다. 국왕은 의회가 소집될 때 이곳에 거주했다.

17세기 초의 설계도. 1600년경 확장 공사 이후의 바르샤바 왕궁

2. 3. 바사 왕조 시대와 대홍수

지기스문트 3세 바사는 1596년에 폴란드의 수도를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옮기면서 왕궁을 개조했다.[33] 1598년부터 1619년까지 왕궁은 확장되었고, 조반니 트레바노가 재건축을 담당했다. 그의 계획은 베네치아 건축가 빈첸초 스카모치에 의해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601년부터 1603년까지 자코모 로돈도가 새로운 북쪽 날개를 완성했고, 1602년부터 파올로 델 코르테가 석공 작업을 했다. 1614년 이후 마테오 카스텔리가 주도권을 잡은 후, 서쪽 날개(오늘날 플라츠 자므코비 쪽)가 문헌관과 원수 사무실로 건설되었다. 남쪽 날개는 마지막으로 건설되었으며, 이로써 매너리즘-초기 바로크 양식의 5개의 날개가 완성되었다. 1619년에는 시기스문트 탑이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왕궁 탑(Nova Turris Regia|노바 투리스 레기아la)이 완공되었다. 높이 60m에 달하는 이 탑은 새로 지어진 90m 길이의 서쪽 성 중앙에 위치했고, 탑 꼭대기에는 금박을 입힌 바늘과 구리 시계판이 있는 시계가 설치되었다. 새로운 탑의 첨탑은 높이 13m였고, 금으로 도금된 손잡이와 꼭대기에 구리 깃발이 달려 있었다.

블라디스와프 탑


1611년 10월 29일 상원 의원실에서 폴란드의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졸키에프스키에게 사로잡힌 러시아 차르 바실리 4세가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3세 바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사 왕조의 지기스문트 3세와 그의 후계자들 — 블라디스와프 4세 바사와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 은 동양 직물, 태피스트리, 티치아노, 베로네세, 야코포와 레안드로 바사노, 틴토레토, 팔마 일 조바네, 안토니오 바실라키, 토마소 도라벨라, 게르치노, 귀도 레니, 요제프 하인츠 엘더,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 로엘란트 사베리, 렘브란트, 피터르 사우트만, 피터 댕커츠 더 라이, 페터 파울 루벤스, 얀 브뤼겔 엘더, 다니엘 세거스, 게오르크 다니엘 슐츠 등 유명 화가들의 수많은 그림과 지암볼로냐, 조반니 프란체스코 수시니, 아드리아엔 더 브리스 등의 조각품 등 많은 귀중한 예술 작품들을 왕궁에 소장했다.

블라디스와프의 오페라 홀


1655년부터 1657년까지 스웨덴과 러시아의 폴란드 침략으로 인한 대홍수 기간 동안 이러한 훌륭한 예술 작품들은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 스웨덴군은 귀중한 그림, 가구, 태피스트리, 왕실 도서관, 왕실 기록 보관소, 수많은 조각품, 전체 층과 왕실 깃발을 모두 가져갔다. 성 안에는 군대 야전병원인 라자레트가 설치되어 건물 파괴에 더욱 기여했다. 몇 달 후 군대는 나머지를 파괴하고 대부분의 구리 부품을 약탈하고 성의 나머지 바닥을 뜯어냈다.

1656년 왕궁


바사 시대의 보존된 왕궁 가구 대부분은 마지막 바사 국왕인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그의 프랑스 태생 아내 마리 루이즈 곤자가의 기증으로 바르샤바의 방문 수녀회 수도원 소장품이 되었다.

1628년, 최초의 폴란드 오페라인 ''갈라테아''가 왕궁에서 상영되었다. 왕궁에 있던 대규모 오페라 홀(2층, 50m 이상)은 스웨덴군과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1660년대에 얀 2세 카지미에시 국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2. 4. 후기 바로크 시대

17세기 중반 이지도르 아파이트의 지휘 아래 왕궁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미하우 1세는 전면적인 재건 대신 파괴된 건물 복원에 집중했다.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1669년 우야즈두프 성(Ujazdów Castle)으로 거처를 옮겼다. 얀 3세 소비에스키(John III Sobieski) 통치 기간(1696년 사망) 동안에도 대규모 공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건물 검사에 국한되었다. 왕궁에서는 의회 회의,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공작의 충성 맹세, 외국 대사 접견 등 국가 행사가 계속 열렸다.

1697년 아우구스트 2세(Augustus II) 즉위 후 왕궁은 다시 쇠퇴했다. 스웨덴의 칼 12세(Charles XII of Sweden)와의 갈등으로 왕실 예산이 제한되었지만, 1698년 아우구스트 2세는 요한 프리드리히 카르허에게 재건축 설계를 의뢰했다.[5] 1702년 스웨덴군이 왕궁을 점령하여 병원으로 사용하고, 하원 의원 회의실과 장관실은 마구간으로 만들었다.[5] 1704년 폴란드군이 탈환했으나 곧 다시 스웨덴군에 점령되었다.[5] 1707년 평화 조약으로 러시아 동맹군이 바르샤바에 들어왔고, 러시아의 표트르 1세(Peter I of Russia)가 왕궁에 머물렀다.[5] 러시아군은 철수하면서 토마소 돌라벨라(Tommaso Dolabella)의 그림 등 예술품을 가져갔는데, 그중 "스몰렌스크 방어"와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3세 앞에 무릎을 꿇게 된 러시아 차르 바실리 4세"는 러시아에 중요했다.[5] 블라디스와프 4세의 오페라 홀은 파괴되어 복원되지 않았다.

1713년부터 1715년까지 카르허의 계획에 따른 재건축이 시작되었다.[5] 1717년 의회 회의실이 재건되어 작센 통치자들의 대관식장으로 사용되었다. 1722년부터 1723년 사이에 요아힘 다니엘 폰 야우흐(Joachim Daniel von Jauch)의 지휘 아래 새로운 상원 의원 회의실이 건설되었고, 60개의 폴란드 지방 문장, 패널, 몰딩 등이 이전되었다.[5] 1732년 화재로 서쪽 외벽과 지기스문트 탑 일부, 외부 조각상이 파괴되었다.

아우구스트 3세(Augustus III) 즉위 후(1733년) 새로운 왕궁 재건축 계획이 1734년에 만들어져 1737년 가에타노 키아베리(Gaetano Chiaveri)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계획에는 비스와(Vistula) 쪽 파사드를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하고, 북동쪽 부분을 개조하여 2층짜리 리스알토(risalto) 3개를 건설하는 것이 포함되었다.[5] 1740년부터 1752년까지 재건축 작업이 진행되었다. 1740년에서 1747년 사이에 비스와 강변 파사드가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건축가: 가에타노 키아베리, 칼 프리드리히 뻬펠만, 얀 크시슈토프 크뇌펠).[5] 얀 예르지 플레르슈(Jan Jerzy Plersch)는 왕실 장식 틀, 몰딩, 조각상을 만들었다. 1763년 아우구스트 3세 사후, 플레르슈는 의회 회의실을 위한 조각상과 지방 문장이 있는 틀을 만들었다.[5]

왕궁 재건축 설계도


키아베리(G. Chiaveri)의 동쪽 날개 설계도


1720년 왕궁 상원 의원 회의실


17세기 말 왕궁의 "새로운 하원 의원 회의실"

2. 5. 계몽주의 시대

왕궁 상원 의회장 복원 디자인, V. 루이


무도회장의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국왕의 신격화, 앙드레 르 브룅, 1780년경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통치(1764~1795) 시절은 바르샤바 왕궁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기였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정교한 예술 작품들을 수집했으며, 그중 상당수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는 왕궁 공사를 위해 야쿠프 폰타나, 도메니코 메를리니, 얀 크리스티안 캄제트세르, 야쿠프 쿠비츠키 등 일류 건축가들을 고용했다. 또한 마르첼로 바치아렐리, 베르나르도 벨로토, 프란치셰크 스무글레비치, 카지미에시 보이냐코프스키, 장-바티스트 필레망 등 훌륭한 화가들과 앙드레-장 르브룅, 야쿠프 모날디와 같은 저명한 조각가들, 그리고 빅토르 루이와 같은 유명한 프랑스 예술가들을 영입했다. 국왕이 계획한 왕궁의 전면적인 재건은 완료되지 못했지만, 내부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바뀌었다. 폴란드에서는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양식'으로 알려진 이 양식은 유럽 다른 지역의 신고전주의와는 상당히 달랐다.

야쿠프 폰타나(J. Fontana)가 설계한 바르샤바 왕궁 복원 디자인


1791년, 1788~1792년의 '대 세임'(또는 '4년 세임')과 상원이 왕궁에서 5월 3일 헌법을 채택하다.


1766년부터 1785년까지 야쿠프 폰타나의 설계를 바탕으로, 1767년 12월 15일에 화재로 소실된 왕궁 남쪽 날개가 재건되었다. 재건된 부분은 2개의 파괴된 층, 남쪽에 3개의 아방코르 또는 리스알티가 있는 새로운 외벽, 레젠과 이오니아식 주두가 있는 필라스터로 정면을 구분하는 특징을 가졌다. 1774년부터 1777년 사이에는 국왕의 개인 아파트가 꾸며졌다. 여기에는 전망실(카날레토의 풍경화가 있는), 예배당, 접견실, 침실이 있었다. 1779년부터 1786년 사이에는 무도회장, 기사의 방, 옥좌실, 대리석 방, 회의실로 구성된 상원 아파트가 완성되었다. 이 방들에는 폴란드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묘사한 그림과 조각상, 그리고 폴란드 국왕, 장군, 정치가, 학자들(코페르니쿠스와 아담 나루셰비치 포함)의 초상화가 있었다. 1777년에는 클레멘스 14세가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국왕에게 증정한 금박을 입힌 청동 제단이 새로 지어진 왕궁 예배당(오늘날의 콘서트홀)에 설치되었다.

왕궁에는 3200점의 그림, 고전 조각상, 약 10만 점의 판화 외에도 메달, 동전, 그리고 별도의 건물이 1780년~1784년에 세워진 훌륭한 도서관을 포함한 풍부한 왕실 소장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6] 새로운 도서관 건물에는 국왕 소유의 많은 책, 보석, 그림, 동전, 지도, 설계도가 보관되었다. 왕실 도서관의 장서량은 다음과 같았다.

종류수량
다양한 작품1만 6천 권
그림2만 5,525점
제본된 판화(726권)4만 4,842점
총 판화7만 점



사교계 무도회도 이 홀에서 열렸다.[6]

1786년까지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왕궁의 외부 장식을 바꾸고 건축학적인 왕궁 광장을 건설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 왕궁은 폴란드 계몽주의 사상이 처음으로 꽃피운 장소였다. 국왕은 왕궁에서 과학자, 학자, 작가, 예술가들을 위한 "목요일 점심 식사"를 열었다. 여기서 유럽 최초의 세속적인 교육부 중 하나인 국립 교육 위원회의 아이디어가 제기되었다. 왕궁은 기사 학교와 국립 극장에 대한 최초의 제안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왕궁 상원 의회장에서 소위 "대 세임"(대의회)이 1791년 유명한 폴란드 5월 3일 헌법을 통과시켰다. 의식 중에 국왕은 근처의 성 요한 교회로 이동했다. 이를 기념하여 이그나치 크라시츠키의 글이 새겨진 대리석 명판이 왕궁 벽에 설치되었다.

2. 6. 분할 통치 시대와 제2차 폴란드 공화국

나폴레옹 1세는 1806년 12월 19일부터 20일, 1807년 1월 1일부터 30일까지 이 성에 머물렀다. 1807년 그는 이곳에서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통치할 바르샤바 공국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왕궁을 그의 거주지로 삼았다. 바르샤바 공국군 총사령관이자 프랑스 원수였던 요제프 포냐토프스키 공은 왕궁과 연결된 구리지붕궁전에 거주했다. 폴란드 입헌 왕국(1815년)이 수립된 후, 그 의회인 세임이 이 왕궁에서 회의를 열었다. 폴란드 국왕이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니콜라이 1세도 바르샤바에 머무는 동안 이 왕궁에 거주했다. 11월 봉기 기간 중인 1831년 1월 25일, 왕궁에서 회의 중이던 세임은 니콜라이 1세 황제를 폴란드 국왕 자리에서 폐위했다.[7]

회화가 차르 군대에 의해 도난당한 왕궁의 회의실


1836년, 폴란드 입헌 왕국의 보이보디십은 폐지되고 구베르니야로 대체되었다. 그 당시 왕궁은 차르의 총독 이반 파스키예비치의 거주지가 되었다. 파스키예비치는 러시아 대령이자 건축가인 루드비크 코리오에게 새로운 입면과 외관(서쪽, 남쪽, 동쪽 부분)을 설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새로운 디자인에 만족하지 않았고, 코리오는 쿠비츠키의 해결책(그리고 그의 동료인 렐레벨과 토마스)을 참고한 또 다른 디자인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결국 코리오는 모든 입면과 외관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건했지만, 작센 측면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1856년 파스키예비치가 사망한 후, 모든 후임 총독들은 왕궁의 궁정 관리실에 거주했다. 러시아 관리들은 왕궁 서쪽과 북쪽 날개의 2층 모두에 있는 방들을 점유했다. 총독들은 러시아 군대에 의해 삼엄하게 경비를 받았다. 불행히도 이 병사들에게 배정된 주거 공간은 의회 회관, 도서관, 그리고 왕궁 지하의 병영이었고, 그 결과 이곳들은 황폐해졌다.

1863년 1월 봉기 이후, 러시아군은 비스와 강변의 왕실 정원을 완전히 파괴하고(이는 군사 퍼레이드 광장으로 변모했다) 마구간과 코사크 병영을 위한 몇몇 벽돌 건물을 건설했다. 1862년부터 1863년까지 예르지 오를로비치, 루드비크 고스와프스키, 포톨로프의 감독 하에 왕궁에서 일부 유지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1890년, 건축업자 야누아리 키시랸스키의 감독 하에 작센 측면이 재건되었는데, 아우구스트 3세 시대부터 내려온 두 개의 전망대의 아케이드가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통치 기간 동안 마지막 수리 작업은 1902년 러시아 군대가 점유했던 방들에서 이루어졌으며, 비용은 28000RUB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독일 군사 총독의 거주지였다. 1918년 폴란드가 독립을 되찾은 후, 이 성은 폴란드 대통령의 거주지가 되었다. 카지미에시 스쿠레비치(1920년~1928년)와 아돌프 시시코-보ഹു슈(1939년까지)의 지휘 아래 복원되었다. 1920년 리가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체결한 평화 조약 조건에 따라, 러시아로 가져간 모든 성 가구를 포함한 예술 작품 및 기타 귀중품들이 폴란드로 반환되었다. 그 결과,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치세 당시의 모습으로 역사적인 방들을 복원할 수 있었다.

2. 7.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7일, 바르샤바 왕궁은 독일군의 포격을 받아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지붕과 탑이 파괴되었고, 마르첼로 바치아렐리의 천장 프레스코화 ''세계의 창조''가 소실되었으며, 다른 방들도 일부 손상되었다.[8] 독일군 점령 이후에는 왕궁 철거가 시작되었고, 중앙 난방 및 환기 설비를 포함한 귀중품들은 독일로 반출되었다.

1939년 10월 4일, 아돌프 히틀러는 왕궁 폭파 명령을 내렸다. 이후 독일 부대는 마루, 대리석, 조각상 등 왕궁의 석재 요소들을 분해하여 독일이나 크라쿠프로 옮겼고, 이 중 상당수는 나치 고위 인사들에게 압류되었다. 폴란드 박물관 직원들과 미술 복원 전문가들은 총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왕궁의 예술 작품과 장식 조각들을 구출해냈으며, 이는 스타니스와프 로렌츠 교수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945년의 왕궁 잔해.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실패 후, 독일군은 왕궁의 남은 벽을 폭파했다.[8] 이는 왕궁 자리에 대규모 회관이나 의회당을 건설하고 지기스문트 석주를 게르마니아 기념비로 대체하려는 파브스트 계획의 일환이었다. 왕궁은 두 개의 벽 조각만 남은 채 잔해 더미로 변했고, 그중 하나에는 백색 독수리 훈장의 왕실 모토인 "PRO FIDE, LEGE ET REGE"(신앙, 법률, 그리고 국왕을 위하여)가 새겨진 카르투슈가 남아 있었다.

2. 8. 재건

1945년 전쟁이 끝난 직후, 왕궁의 남아있는 벽, 기초, 지하실 조각들과, 화재로 그을린 구리 지붕 궁전과 왕립 도서관 건물을 추가적인 파괴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1949년, 폴란드 국회(세임)는 폴란드 역사와 문화의 기념비로서 왕궁을 재건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편, 얀 덤브로프스키, 피오트르 비에간스키, 얀 자흐바토비치가 이끄는 특별 건축 설계 사무소는 건물의 골격을 복원하고 역사적인 방들을 꾸미기 위한 청사진을 작성했다. 공사 시작 결정은 여러 차례 연기되었지만, 마침내 1971년 1월 20일에 결정되었다.[8] 시민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전 국민의 박수 속에,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왕궁을 재건하기로 결정되었다. 폴란드 국내외에서 모금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75년 5월까지 기금은 이미 5억 즐로티에 달했다. 같은 날짜에 폴란드 국내외에 거주하는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1,000점이 넘는 귀중한 예술품을 성에 기증했다.[8] 다른 국가들의 공식 대표들 또한 예술적, 역사적 가치가 큰 예술 작품들을 성에 기증했다.

지그문트 3세가 1596년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천도하면서 왕궁으로 개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984년에 재건되었다.[33]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바르샤바 역사지구"의 일부로 지정되어 있다.

재건된 왕궁 상부 정원

3. 내부

바르샤바 왕궁 내부는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후 원래 전시품을 최대한 사용하여 복원되었다.


  • 야기에우워 집안 방: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중앙 유럽 국가들을 통치했던 야기에우워 왕조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2011년에 현대 회화, 조각 및 장식 예술 갤러리로 재배치되었다.[11]

  • 란츠코론스키 소장품: 1994년 카롤리나 란츠코론스카 백작 부인이 왕궁에 기증한 37점의 그림이 있다. 이 중에는 렘브란트의 그림 두 점, ''유대인 신부의 아버지''(일명 ''강단의 학자'')와 ''유대인 신부''(일명 ''그림 속 소녀'')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두 작품은 원래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의 소장품이었다.[13] [14]


2018년 12월에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1685년에 제작한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폴란드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폴로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이올린 연주자 예르지 바브로프스키만이 이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15] 같은 해, 마르첼로 바치아렐리의 그림 ''딸 엘리자베스와 키오펙과 함께 한 미하우 예르지 므니셰크의 초상화''(1795)가 왕궁 소장품으로 반환되었다.[16][17]

3. 1. 의회 의사당

1569년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루블린 연합으로 통합된 후, 바르샤바 왕궁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Sejm, 국회)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소가 되었다. 기존의 쿠리아 마이오르(Curia Maior) 건물은 의회 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1층에는 하원(귀족 대표) 회의장이, 2층에는 국왕이 참석하는 상원 회의장이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의회 전용 건물로는 최초의 시도 중 하나였다. 쿠리아 마이오르 외관에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그리고 대표들이 선출된 지역들의 문장이 그려져 있어 의회 건물로서의 성격을 강조했다. "왕궁"이라 불리는 새로운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 쿠리아 마이오르 옆에 세워졌고, 국왕은 의회가 열릴 때 이곳에 머물렀다.

3. 2. 왕실 아파트

지기스문트 3세 바사는 왕궁을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옮긴 후, 왕궁을 개조했다. 1598년부터 1619년까지 왕궁은 확장되었고, 조반니 트레바노가 재건축을 담당했다. 그의 계획은 베네치아 건축가 빈첸초 스카모치에 의해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601년부터 1603년까지 자코모 로돈도가 새로운 북쪽 날개를 완성했고, 1602년부터 파올로 델 코르테가 석공 작업을 했다. 1614년 이후 마테오 카스텔리가 주도권을 잡은 후, 서쪽 날개(오늘날 플라츠 자므코비 쪽)가 문헌관과 원수 사무실로 건설되었다. 남쪽 날개는 마지막으로 건설되었으며, 이로써 매너리즘-초기 바로크 양식의 5개의 날개가 완성되었다. 1619년에는 시기스문트 탑이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왕궁 탑(Nova Turris Regia|노바 투리스 레기아la)이 완공되었다. 높이 60m에 달하는 이 탑은 새로 지어진 90m 길이의 서쪽 성 중앙에 위치했고, 탑 꼭대기에는 금박을 입힌 바늘과 구리 시계판이 있는 시계가 설치되었다. 새로운 탑의 첨탑은 높이 13m였고, 금으로 도금된 손잡이와 꼭대기에 구리 깃발이 달려 있었다.

1611년 10월 29일 상원 의원실에서 폴란드의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졸키에프스키에게 사로잡힌 러시아 차르 바실리 4세가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3세 바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사 왕조의 지기스문트 3세와 그의 후계자들 — 블라디스와프 4세 바사와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 은 동양 직물, 태피스트리, 티치아노, 베로네세, 야코포와 레안드로 바사노, 틴토레토, 팔마 일 조바네, 안토니오 바실라키, 토마소 도라벨라, 게르치노, 귀도 레니, 요제프 하인츠 엘더,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 로엘란트 사베리, 렘브란트, 피터르 사우트만, 피터 댕커츠 더 라이, 페터 파울 루벤스, 얀 브뤼겔 엘더, 다니엘 세거스, 게오르크 다니엘 슐츠 등 유명 화가들의 수많은 그림과 지암볼로냐, 조반니 프란체스코 수시니, 아드리아엔 더 브리스 등의 조각품 등 많은 귀중한 예술 작품들을 왕궁에 소장했다. 이러한 훌륭한 예술 작품들은 1655년부터 1657년까지 스웨덴과 러시아의 폴란드 침략으로 인한 대홍수 기간 동안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 스웨덴군은 귀중한 그림, 가구, 태피스트리, 왕실 도서관, 왕실 기록 보관소, 수많은 조각품, 전체 층과 왕실 깃발을 모두 가져갔다. 성 안에는 군대 야전병원인 라자레트가 설치되어 건물 파괴에 더욱 기여했다. 몇 달 후 군대는 나머지를 파괴하고 대부분의 구리 부품을 약탈하고 성의 나머지 바닥을 뜯어냈다.

바사 시대의 보존된 왕궁 가구 대부분은 마지막 바사 국왕인 얀 2세 카지미에시와 그의 프랑스 태생 아내 마리 루이즈 곤자가의 기증으로 바르샤바의 방문 수녀회 수도원 소장품이 되었다.

1628년, 최초의 폴란드 오페라인 ''갈라테아''가 왕궁에서 상영되었다. 왕궁에 있던 대규모 오페라 홀(2층, 50m 이상)은 스웨덴군과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1660년대에 얀 2세 카지미에시 국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왕궁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1764~1795) 통치 시절이었다. 이 국왕은 정교한 예술 작품들을 수집했으며, 그중 상당수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는 왕궁 공사를 위해 야쿠프 폰타나, 도메니코 메를리니, 얀 크리스티안 캄제트세르, 야쿠프 쿠비츠키와 같은 일류 건축가들을 고용했으며, 마르첼로 바치아렐리, 베르나르도 벨로토, 프란치셰크 스무글레비치, 카지미에시 보이냐코프스키, 장-바티스트 필레망과 같은 훌륭한 화가들과 앙드레-장 르브룅, 야쿠프 모날디와 같은 저명한 조각가들, 그리고 빅토르 루이 건축가와 같은 유명한 프랑스 예술가들을 영입했다. 국왕이 계획한 왕궁의 전면적인 재건은 완료되지 못했지만, 내부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바뀌었는데, 폴란드에서는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양식'으로 알려진 이 양식은 유럽 다른 지역의 신고전주의와는 상당히 달랐다.

1766년부터 1785년까지 야쿠프 폰타나의 설계를 바탕으로, 1767년 12월 15일에 화재로 소실된 왕궁 남쪽 날개가 재건되었다(2개의 파괴된 층, 남쪽에 3개의 아방코르 또는 리스알티가 있는 새로운 외벽, 레젠과 이오니아식 주두가 있는 필라스터로 정면을 구분). 1774년부터 1777년 사이에 국왕의 개인 아파트가 꾸며졌다. 여기에는 전망실(카날레토의 풍경화가 있는), 예배당, 접견실, 침실이 있었고, 1779년부터 1786년 사이에는 무도회장, 기사의 방, 옥좌실, 대리석 방, 회의실로 구성된 상원 아파트가 완성되었다. 이 방들에는 폴란드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묘사한 그림과 조각상, 그리고 폴란드 국왕, 장군, 정치가, 학자들( 코페르니쿠스와 아담 나루셰비치 포함)의 초상화가 있었다. 1777년에는 클레멘스 14세가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국왕에게 증정한 금박을 입힌 청동 제단이 새로 지어진 왕궁 예배당, 소위 삭슨 예배당(오늘날의 콘서트홀)에 설치되었다. 왕궁에는 3200점의 그림, 고전 조각상, 약 10만 점의 판화 외에도 메달, 동전, 그리고 별도의 건물이 1780년~1784년에 세워진 훌륭한 도서관을 포함한 풍부한 왕실 소장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6] 새로운 도서관 건물에는 국왕 소유의 많은 책, 보석, 그림, 동전, 지도, 설계도가 보관되었다. 왕실 도서관의 장서량은 다양한 작품 1만 6천 권, 그림 2만 5,525점, 726권의 제본된 판화 4만 4,842점, 총 7만 점의 판화에 달했다. 사교계 무도회도 이 홀에서 열렸다.[6]

1786년까지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왕궁의 외부 장식을 바꾸고 건축학적인 왕궁 광장을 건설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 왕궁은 폴란드 계몽주의 사상이 처음으로 꽃피운 장소였다. 국왕은 왕궁에서 과학자, 학자, 작가, 예술가들을 위한 "목요일 점심 식사"를 열었다. 여기서 유럽 최초의 세속적인 교육부 중 하나인 국립 교육 위원회의 아이디어가 제기되었다. 왕궁은 기사 학교와 국립 극장에 대한 최초의 제안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왕궁 상원 의회장에서 소위 "대 세임"(대의회)이 1791년 유명한 폴란드 5월 3일 헌법을 통과시켰다. 의식 중에 국왕은 근처의 성 요한 교회로 이동했다. 이를 기념하여 이그나치 크라시츠키의 글이 새겨진 대리석 명판이 왕궁 벽에 설치되었다.

4. 구리 지붕 궁전

왕궁 옆에 있는 구리지붕궁전


구리지붕궁전은 1989년부터 왕궁 박물관의 분관이 되었다.[19] 이 궁전은 바르샤바 왕궁과 인접해 있으며, 왕궁 광장과 구시가지에서 경사면 아래에 위치한다. 원래는 바브르제니에츠 레푸스(Wawrzyniec Reffus)의 귀족 저택이었으며, 1651년에서 1656년 사이에 지어졌다.[20] 1657년 라코치 2세 게오르크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 후, 1698년에서 1701년 사이에 예르지 도미니크 루보미르스키를 위해 완전히 개조되었다.[20]

루보미르스키는 건물 남쪽에 수직 날개를 증축하고 서쪽 외벽을 확장하여 궁전을 확장했다. 건축 직후 궁전은 루보미르스키의 손자 이름을 따서 '마르탱 궁전(Palais Marti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1] 1720년에는 북쪽 날개를 하나 더 추가하여 궁전을 재건축했고, 내부는 로코코 양식의 그림으로 장식되었다.[21] 1777년 이후 궁전은 폴란드의 마지막 왕인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의 소유가 되었고, 그는 건축가 도메니코 메를리니를 고용하여 궁전 내부 방을 다시 설계하고 왕궁의 도서관 날개와 연결시켰다.[21] 그 후 왕은 재단장한 궁전을 그의 조카인 요제프 포냐토프스키(Józef Poniatowski) 왕자에게 선물했다.[20] 요제프 포냐토프스키는 1794년 코슈추슈코 봉기에서 성공적인 지휘관이었고, 나중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원수가 되었다. 그의 소유하에 궁전은 바르샤바 상류층의 사교 중심지가 되었다. 폴란드 3분할 이후 바르샤바가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가 되자 이 건물들은 프로이센 전쟁부의 본부가 되었다.[21]

구리지붕궁전은 1944년에 불타 버렸고, 베르나르도 벨로토의 그림을 바탕으로 1948년에서 1949년 사이에 재건되었다.

현재 이 궁전은 박물관으로, 특히 테레사 사하키안(Teresa Sahakian) 여사가 기증한 동양 카펫과 기타 동양 장식 예술품의 상설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22] 이 컬렉션은 579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562점은 섬유 제품이다.[23]

5. 흥미로운 사실


  • 1829년 5월 24일, 왕궁 상원 의원 회의장에서 니콜라이 1세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였다.[24][25]
  • 1916년 11월 5일, 대연회장에서 11월 5일 법령이 발표되었다.[26]
  • 1935년 4월 23일, 기사회의실에서 4월 헌법이 서명되었다.[9]
  •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냐토프스키의 왕실 의복은 왕실 예배당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백조 훈장, 성 스타니스와프 훈장의 의식용 검, 아쿠아마린 홀이 있다.
  • 대통령 권력의 상징도 성에 보관되어 있다. 대통령의 도장,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의 봉인,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가 1990년 12월 22일 레흐 바웬사에게 전달한 국가 문서 등이 있다.[27]
  • 왕궁과 관련된 폴란드 전설 중에는 1569년 바르바라 라지빌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트 왕이 마스터 트바르도프스키에게 그녀의 유령을 소환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다.[28][29] 마법 거울을 통해 소환은 성공했고, 그 거울은 현재 벵그루프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28] 다만, 일각에서는 왕비의 유령이 아니라 왕의 정부였던 바르바라 기잔카와 닮은 여인이었으며, 이 사건이 기잔카의 공범인 미콜라이 므니세흐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29]
  • 바르샤바 왕궁은 유럽 왕실 거주지 협회의 공식 회원 중 하나이다.[30]
  • 2014년, 폴란드 중앙은행은 "폴란드를 발견하다" 시리즈의 일환으로 바르샤바 왕궁을 묘사한 5PLN짜리 동전을 발행했다.[31]

6. 시카고 복제품

1979년, 시카고 제퍼슨 파크 지역의 역사적인 게이트웨이 극장이 코페르니쿠스 재단(Copernicus Foundation)에 의해 매입되었고, 폴란드 문화 및 시민 센터의 중심지로 개조될 예정이었다. 건물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내부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외부는 개조되었으며, 바르샤바 왕궁과 유사하게 하기 위해 바로크 부흥 건축(Baroque Revival architecture) 양식의 신바로크(Neo-Baroque) 시계탑이 추가되었다.[32] 이는 폴란드를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시카고의 폴란드계 주민에게 바치는 시각적 경의이다.

참조

[1] 뉴스 History of Royal Castle – official website http://www.zamek-kro[...] 2010-05-16
[2] 폴란드법 Zarządzenie Prezydenta Rzeczypospolitej Polskiej z dnia 8 września 1994 r. w sprawie uznania za pomnik historii.
[3] 웹사이트 Sale Sejmowe http://www.zamek-kro[...] 2008-07-18
[4] 웹사이트 The 100 most popular art museums in the world—blockbusters, bots and bounce-backs https://www.theartne[...] 2024-03-26
[5] 웹사이트 Zamek Królewski za Sasów http://swiadectwo1.r[...] 2008-07-23
[6] 웹사이트 Biblioteka Stanisława Augusta Poniatowskiego (Library of Stanisław August Poniatowski) https://web.archive.[...] 2008-07-23
[7] 웹사이트 Royal Castle in Warsaw https://web.archive.[...] 2008-07-18
[8] 웹사이트 Warsaw's Royal Castle and its destructio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ttps://web.archive.[...] 2008-07-23
[9] 웹사이트 Warszawa Zamek Królewski http://www.zamkipols[...] 2008-07-22
[10] 웹사이트 Pokoje Dworskie http://www.zamek-kro[...] 2008-07-18
[11] 웹사이트 Galeria Malarstwa, Rzeźby i Sztuki Zdobniczej http://www.zamek-kro[...] 2013-03-02
[12] 웹사이트 Dawna Izba Poselska i sale sąsiednie http://www.zamek-kro[...] 2008-07-18
[13] 웹사이트 Galeria Lanckorońskich http://www.zamek-kro[...] 2008-07-18
[14] 웹사이트 Historia dwóch obrazów http://www.zamek-kro[...] 2008-07-18
[15] 뉴스 Stradivarius "Polonia" on display in the Royal Castle in Warsaw https://rmx.news/pol[...] 2019-02-16
[16] 뉴스 Kept in a vault under armed guard, TFN gets exclusive glimpse at 'hugely important' painting hidden from public view for 200 years https://www.thefirst[...] 2019-09-21
[17] 뉴스 Nowe nabytki Zamku – portret Marcella Bacciarellego i kolekcja biskwitów https://zamek-krolew[...] 2019-02-16
[18] 웹사이트 First Raphael in Polish collection since theft of ‘Portrait of a Young Man’ arrives in Warsaw https://www.thefirst[...] 2024-01-08
[19] 뉴스 Remont i przebudowa pałacu Pod Blachą https://web.archive.[...] 2009-03-23
[20] 뉴스 Pałac pod Blachą http://www.warszawa1[...] 2009-03-23
[21] 웹사이트 "Under the Metal Roof" Palace (Palac Pod Blacha) https://web.archive.[...] 2009-03-24
[22] 뉴스 Wystawa kobierców wschodnich http://www.zamek-kro[...] 2009-03-23
[23] 뉴스 Fundacja Teresy Sahakian http://www.zamek-kro[...] 2009-03-23
[24] 웹사이트 Historia Repliki Polskich Insygniów Koronacyjnych https://web.archive.[...] 2008-07-22
[25] 웹사이트 Insygnia koronacyjne Królów Polski (1025–2003) http://www.polskiedz[...] 2008-07-22
[26] 웹사이트 Akt 5 listopada 1916 roku https://web.archive.[...] 2008-07-22
[27] 웹사이트 Wydarzenie https://web.archive.[...] 2004-11-02
[28] 웹사이트 Legendy o Węgrowie https://web.archive.[...] 2009-03-19
[29] 웹사이트 Duchotwórca http://www.maly.gosc[...] 2007-08-07
[30] 뉴스 Full members https://www.european[...] 2019-05-09
[31] 뉴스 Banknoty i monety https://www.nbp.pl/h[...] 2019-05-09
[32] 뉴스 Northwest Chicago Historical Society Newsletter – January 2005; Number 1 http://www.nwchicago[...]
[33] 뉴스 History of Royal Castle – official website http://www.zamek-kr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