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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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는 프랑스 출신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초대 한국 자치 대목구 주교였다. 그는 1815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시암(태국) 자치 대목구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1828년 시암 자치 대목구의 부주교, 1829년 주교로 서품되었으며,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자치 대목구 주교로 임명되었다.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중 1835년 중국에서 병으로 사망했으며, 1931년 그의 유해는 서울로 이장되었다. 그의 삶과 노력은 한국 천주교회 초기 성장에 기여했으며, 저서 <만주 여행기>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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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 |
---|---|
기본 정보 | |
제목 | 한국의 교황 대리 |
교회 | 가톨릭 교회 |
교구 | 한국 교황 대리 |
전임자 | 없음 |
후임자 | 로렌시오 주세페 마리우스 앵베르 |
서품 및 축성 | |
서품 | 1815년 12월 23일 |
축성 | 1829년 6월 29일 |
축성자 | 에스프리-마리-조제프 플로랑스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792년 2월 12일 |
출생지 | 레삭도드, 프랑스 |
사망일 | 1835년 10월 20일 |
이전 보직 | 시암 교황 대리 보좌 |
2. 생애와 사목 활동
1831년 브뤼기에르는 조선에서의 선교를 자청하였고, 같은 해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신설된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이미 1831년부터 마카오에서 조선으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1832년 주교 임명 소식을 듣고 조선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싱가포르,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마카오, 푸젠성, 산시성을 통과하는 육로를 택했다.[2] 당시 중국의 기독교 박해와 조선의 정치적 상황 변화로 인해 여정은 순탄치 않았고, 그는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충리현의 시완지(西灣子) 마을에 머물며 조선 입국을 준비했다. 이곳에서 그는 훗날 조선에서 함께 활동할 피에르필리베르 모방 신부를 만났다.[2]
1835년 10월 7일, 모방 신부와 함께 조선을 향해 출발했으나,[2] 브뤼기에르는 조선 땅을 밟지 못하고 여독과 뇌일혈로 인해 1835년 10월 20일 열하성 인근에서 선종(善終)하였다.[2] 그의 만주 여정에 대한 기록은 이후 달레의 《조선 교회사》에 <만주 여행기>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사후 약 100년이 지난 1931년,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왜고개 천주교 묘지(현 용산신학교)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2]
2. 1. 프랑스에서의 초기 생애
프랑스 랑그도크 지방의 레사크도드(Raissac d'Aude)에서 태어났다.[2] 카르카손 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2] 1815년 12월 23일에 사제품을 받았다.[1] 사제 서품 후에는 모교인 신학교에서 10년 동안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2]2. 2. 파리 외방전교회와 동남아시아 선교
1825년 파리 외방전교회(MEP)에 입회하였다.[2] 본래 베트남 선교를 희망하였으나,[2] 1827년 아시아에 도착한 후 당시 선교사가 한 명뿐이었던 시암 대목구(현 방콕 대교구)로 배정받아[2]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을 시작했다.브뤼기에르는 태국어를 배웠지만, 시암의 기독교 신자 대부분이 태국인이 아닌 크메르인, 중국인, 베트남인 및 포르투갈인계 혼혈인 것을 알게 되었다. 불교를 믿는 태국인들의 개종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소수 민족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2] 또한 몇 년간 방콕의 아송시온 교회 부속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2]
당시 시암 대목구장 에스프리마리조제프 플로렌스 주교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2] 1828년 2월 5일 교황 레오 12세는 브뤼기에르를 시암 대목구의 부교구장(부대목구장)이자 카프사(Capsus)의 명의주교로 임명하였다.[1] 그는 1829년 6월 29일 방콕에서 플로렌스 주교에게 주교 서품을 받았다.[1][2]
1830년 클로드-앙투안 데샤반(Claude-Antoine Deschavannes)과 장밥티스트 팔레고아 두 명의 새로운 선교사가 방콕에 도착하면서 시암 지역의 선교사 부족 문제가 다소 해소되었다. 이에 브뤼기에르는 1831년 페낭으로 이주하여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제너럴 칼리지(General College)에서 자크오노레 샤스탕, 장밥티스트 부쇼, 장 피에르 바르브(Jean Pierre Barbe), 로랑조제프마리 위베르 등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가르쳤다.[2] 시암 지역으로 자금과 선교 인력이 보충되면서 브뤼기에르가 시암에 계속 머물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이는 이후 그가 새로운 선교지인 조선으로 향하는 배경이 되었다.[2] 플로렌스 주교는 자신의 사후에 부교구장이 공석이 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브뤼기에르의 새로운 도전을 지지하였다.[2]
3. 조선 선교와 최후
1827년 아시아에 도착하여 시암 자치 대목구(현재의 방콕 교구)에서 활동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2] 시암 지역에 새로운 선교사들이 충원되면서[2] 1831년 조선 전교를 자청하였다.[1] 같은 해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1]
브뤼기에르는 1832년 주교 임명 소식을 받고 조선 입국을 위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1835년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마카오, 푸젠성, 산시성을 통과하는 힘겨운 육로 이동을 감행했다. 당시 청나라의 기독교 박해와 조선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여정은 순탄치 않았고, 그는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시완쯔(西灣子)의 천주교 신자 마을에서 잠시 피신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브뤼기에르는 조선 선교를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MEP)에서 파견된 동료 선교사 피에르필리베르 모방 신부를 만났다.[2]
1835년 10월 7일, 브뤼기에르는 모방 신부와 함께 드디어 조선 국경을 향해 출발했으나,[2]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병을 얻었다. 그는 1835년 10월 19일[1](또는 20일[2]) 만주 열하성 변경의 작은 마을 마가자(馬架子)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함으로써 끝내 조선 땅을 밟지 못했다.[2] 그의 조선 입국 시도와 여정을 기록한 <만주 여행기>는 훗날 달레 신부가 저술한 <조선 교회사>에 수록되었다. 사후 약 100년이 지난 1931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서울 용산신학교 내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2]
3. 1. 조선 초대 대목구장 임명
1825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브뤼기에르는 본래 베트남 선교를 희망했으나,[2] 1827년 아시아 도착 후 선교사가 부족했던 시암 자치 대목구(현재의 방콕 교구)에 배속되었다.[2] 그는 그곳에서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태국어를 익혔고, 주로 크메르인, 중국인, 베트남인 등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2]1828년 2월 5일, 브뤼기에르는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시암 자치 대목구의 부대목구장 및 Capsus|카프사la의 명의주교로 임명되었고,[1] 1829년 6월 29일 주교 서품을 받았다.[1][2] 이후 시암 지역에 새로운 선교사들이 충원되고 재정 지원이 늘어나면서 브뤼기에르가 시암에 계속 머물 필요성이 줄어들자, 그가 조선으로 가서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2] 당시 시암 대목구장 플로렌스 주교는 후임 부주교가 없는 상황에서도 브뤼기에르의 조선 선교를 지지했다.[2]
이에 브뤼기에르는 1831년 조선 전교를 자청하였고, 같은 해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 전교지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고 조선 대목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브뤼기에르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1]
3. 2. 조선 입국 시도와 좌절
1831년 조선 전교를 자청한 브뤼기에르는 같은 해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이미 1831년 마카오에서 조선으로 떠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1832년 주교 임명 소식을 받고 조선 입국을 위해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여정을 시작했다.1835년 그는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중국의 마카오에 도착했고, 이후 푸젠성과 산시성을 통과하는 긴 여정을 이어갔다. 당시 청나라의 기독교 박해와 조선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때문에 브뤼기에르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우선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시완쯔(西灣子)의 천주교 신자 마을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MEP)에서 파견된 피에르필리베르 모방 신부를 만났다.[2]
1835년 10월 7일, 브뤼기에르는 모방 신부와 함께 조선 국경을 향해 출발했으나,[2] 목적지에 닿기 전 병을 얻었다. 결국 그는 1835년 10월 19일[1](또는 20일[2]) 만주 열하성 변경의 작은 마을 마가자(馬架子)에서 뇌일혈로 사망하여 조선 입국은 좌절되었다.[2] 그의 여정을 기록한 <만주 여행기>는 달레 신부가 저술한 <조선 교회사>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모방 신부는 이후 자크오노레 샤스탕 신부, 로랑조제프마리 위베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다.[2] 1931년 브뤼기에르의 유해는 서울 용산신학교 내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2]
4. 유해 이장
(내용 없음)
4. 1. 열하성에서의 안장과 이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망한 후, 그의 유해는 함께 조선으로 파견되었던 후임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우선 그가 사망한 열하성 뻬리쿠에 안장되었다. 이후 1931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져 다시 안장되었다.[2]5. 평가 및 영향
브뤼기에르 주교는 비록 조선 땅을 직접 밟지는 못했지만,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서 한국 천주교회 설립 과정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2] 그의 임명은 조선에 독립된 교구가 설정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조선 입국을 향한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여정 중의 죽음은[2] 초기 조선 선교의 어려움과 그의 강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존재와 희생은 후임 선교사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조선 선교의 의지를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2] 그의 노력은 조선 교구 설정의 기틀을 마련하고 초기 신자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
5. 1. 한국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1년 조선 전교를 자원하였고[2], 같은 해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신설된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1832년 주교 임명 소식을 접하고 조선 입국을 위해 중국 대륙 횡단이라는 어려운 여정을 시작했다. 1835년 만주의 시완지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합류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피에르필리베르 모방 신부를 만났고[2], 10월 7일 함께 조선을 향해 출발했으나, 안타깝게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국경 근처인 열하성에서 1835년 10월 20일 뇌일혈로 선종하여 끝내 조선 땅을 밟지 못했다.[2]비록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의지와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여정 중의 죽음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희생은 피에르필리베르 모방, 자크오노레 샤스탕, 로랑조제프마리 위베르 등 후임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지를 이어받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2]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을 횡단하며 남긴 기록인 <만주 여행기>는 샤를 달레 신부가 저술한 조선 교회사에 중요한 부분으로 인용되어, 당시의 상황과 초기 교회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의 유해는 훗날 1931년 서울 용산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2]
5. 2. 재조명
프랑스 레사크도드 출신인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는 카르카손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815년 12월 23일 사제로 서품받았다.[1][2] 10년간 신학교에서 가르친 후, 선교의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MEP)에 입회하여 처음에는 베트남으로 가고자 했다.[2] 그러나 1827년 아시아에 도착한 그는 선교사가 부족했던 시암(태국) 자치 대목구에 배속되어 에스프리마리조제프 플로렌스 주교를 도왔다.[2] 그는 태국어를 익혔으나, 태국 불교 신자들의 개종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크메르인, 중국인, 베트남인, 포르투갈계 혼혈인 등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에 집중했다.[2]몇 년간 방콕 아송시온 교회 부속 학교에서 교육 활동을 하던 브뤼기에르는 1828년 2월 5일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시암 자치 대목구의 부주교이자 ''캡수스''의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고,[1] 1829년 6월 29일 플로렌스 주교에게 주교 서품을 받았다.[1][2] 이후 새로운 선교사들이 방콕에 도착하면서[2] 브뤼기에르는 1831년 페낭으로 이동하여 제너럴 칼리지에서 자크오노레 샤스탕, 로랑조제프마리 위베르 등 다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2]
시암 지역의 선교 상황이 안정되자, 브뤼기에르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를 초대 한국 자치 대목구의 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1] 이는 조선 땅에 처음으로 독립된 가톨릭 교구가 설정되었음을 의미하는 역사적인 결정이었다. 브뤼기에르는 조선 입국을 위해 1835년 싱가포르를 떠나 마닐라, 마카오, 푸젠성, 산시성을 거치는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 중국 내에서의 기독교 박해와 조선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그는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시완지(서만자)의 신자들 마을에 은신하며 입국 기회를 엿보아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 선교에 자원한 동료 선교사 피에르필리베르 모방 신부를 만났다.[2]
1835년 10월 7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와 함께 조선을 향해 출발했으나, 안타깝게도 국경에 이르기 전 병을 얻어 1835년 10월 20일 선종하였다.[2] 비록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초대 대목구장으로서 조선 교회를 위해 헌신하려 했던 그의 열정과 희생은 한국 천주교회 초기의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그의 뒤를 이어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와 자크오노레 샤스탕 신부, 그리고 이후 합류한 로랑조제프마리 위베르 주교(제2대 조선 대목구장)는 험난한 환경 속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 결국 순교하였다.[2]
브뤼기에르 주교의 숭고한 희생과 선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는 1931년 서울특별시 용산의 성직자 묘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2] 이는 한국 천주교회가 그의 헌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참조
[1]
웹사이트
Bishop Barthélemy Bruguière, M.E.P.
http://www.catholic-[...]
David M. Cheney
2017-01-04
[2]
간행물
Bishop Barthélemy Bruguière (1792–1835) by Kennon Breazeale
http://www.siamese-h[...]
Journal of the Siam Society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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