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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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래현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한 대한민국의 여성 화가이다.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60년대부터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며, 동양화 재료를 활용한 서양화 기법, 추상주의, 태피스트리 및 판화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1964년 남편인 화가 김기창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개인전 및 부부전을 열었으며, 1976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작품으로는 〈노점〉 등이 있으며,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와 서구적인 공간 설정을 융합하여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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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 이상주
이상주는 대한민국의 교육학자, 관료, 정치인으로서, 여러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하고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및 비서실장을, 김대중, 참여정부에서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및 부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 서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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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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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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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박래현 |
한글 이름 | 박래현 |
로마자 표기 | Bak Raehyeon |
다른 로마자 표기 | Pak Raehyŏ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Uhyang (아호) |
한글 아호 | 우향 |
아호 의미 | 빗소리 |
출생 | 1920년 4월 13일 |
출생지 | 진남포, 평안남도, 일제강점기 조선 (현재 북한 평안남도 남포) |
사망 | 1976년 1월 2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배우자 | 김기창 |
자녀 | 4명 |
학력 | |
학교 | 경성여자사범학교 졸업 |
대학교 | 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전문학사 |
경력 | |
강사 | 성신여자대학교 |
작품 활동 | |
분야 | 동양화, 한국화, 판화 |
직업 | 동양화가, 한국화가, 판화가, 교수 |
주요 작품 | 〈노점(露店)〉 |
종교 | |
종교 | 개신교 |
가족 관계 | |
친척 | 김기만(시제) |
2. 생애
박래현은 김기창과 결혼하여 함께 전시회와 개인전을 열었다. 동양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서양식 미술 작품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여성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고 열정적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한 선구적인 여성 화가였다.[3] 막내딸은 인터뷰에서 박래현을 헌신적인 화가이자 아내, 그리고 좋은 어머니로 묘사했다.[4] 박래현은 1976년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5]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박래현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진남포 (현재 북한)에서 태어났다. 1937년 경성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44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東京女子美術專門學校) 일본화과(日本畵科)를 졸업하였다. 1940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하여 총독상을 받기도 했다.[9][2]2. 2. 작품 활동 및 수상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데뷔했다. 1944년 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東京女子美術專門學校)의 일본화과(日本畵科)를 졸업하였고, 1940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하여 총독상을 받기도 했다.[9]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과 제5회 국전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출품했고, 서울문리사범대학의 교수가 되었다.1960년대 초까지 국내 미술 전람회에 참여했지만, 이 시기부터 국제 무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해) 이후 한국 최초의 동양화가 단체인 백양회|白陽會한국어 회원으로서, 1960년 2월 중화민국 타이베이, 1960년 2월부터 3월까지 홍콩, 1961년 1월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백양회 그룹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또한 1967년에는 대한민국 공식 대표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했다.[6] 1960년 중화민국의 타이베이와 홍콩 등지의 초대전에 출품하고 이어 일본·베트남의 초대전에도 출품했다.
1961년 이후 국전 심사위원, 서울시문화위원을 역임하고 성신여자사범대학 강사가 되었다. 1964년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남편인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바 있고, 국내·국외에서 여러 차례의 개인전 및 부부전(夫婦展)을 가졌다.[9] 이후 작품 활동을 마치고 멕시코를 포함한 여러 라틴 아메리카 국가를 방문한 뒤, 1969년부터 뉴욕에서 태피스트리 및 판화를 공부했다.[7] 그녀는 프랫 그래픽 아트 센터와 로버트 블랙번 판화 워크숍에서 판화 기법을 배웠다.
그녀의 작품은 간략하게 4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첫 번째 시기 (1940년대)에는 일본화와 인물화에 집중했다.
- 두 번째 시기 (1950년대)에는 서양화 기법으로 동양화 전통 재료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 도전했다. 이 시기 그녀의 작품들은 큐비즘을 해석하고 캔버스를 분석적인 방법으로 분할하여 반 추상적인 회화를 만들어냈다.
- 세 번째 시기 (1960년대)에는 추상주의를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 네 번째 시기 (1970년대)에는 태피스트리와 판화 기법을 창의적인 드로잉에 활용했다.[8]
2. 3. 국제 무대 진출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과 제5회 국전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출품했다. 서울문리사범대학의 교수가 되었다.[9] 1960년 중화민국의 타이베이와 홍콩 등지의 초대전에 출품하고 이어 일본·베트남의 초대전에도 출품했다. 1961년 이후 국전 심사위원, 서울시문화위원을 역임하고 성신여자사범대학 강사가 되었다. 1964년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남편인 동양화가 김기창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고, 국내·국외에서 여러 차례의 개인전 및 부부전을 가졌다.[9]1960년대 초까지 국내 미술 전람회에 참여했지만, 이 시기부터 국제 무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해) 이후 한국 최초의 동양화가 단체인 백양회|白陽會한국어 회원으로서, 1960년 2월 타이베이, 1960년 2월부터 3월까지 홍콩, 1961년 1월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백양회 그룹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1967년에는 대한민국 공식 대표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했다.[6] 이후 작품 활동을 마치고 멕시코를 포함한 여러 라틴 아메리카 국가를 방문한 뒤, 1969년부터 뉴욕에서 태피스트리 및 판화를 공부했다.[7]
2. 4. 후기 활동 및 사망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과 제5회 국전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출품했으며, 서울문리사범대학 교수가 되었다.[9] 1960년 중화민국 타이베이와 홍콩 등지의 초대전에 출품하고 이어 일본·베트남 초대전에도 출품했다. 1961년 이후 국전 심사위원, 서울시문화위원을 역임하고 성신여자사범대학 강사가 되었다. 1964년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남편인 동양화가 김기창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국내·국외에서 여러 차례의 개인전 및 부부전을 가졌다.[9]박래현은 저명한 예술가 김기창과 결혼하여 함께 전시회와 개인전을 열었고, 이미 그녀 스스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녀의 작품은 동양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서양식 미술 작품을 표현하고자 했다. 선구적인 여성 화가였던 그녀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고 열정적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했다.[3]
그녀의 막내딸은 대한민국에서 수녀인데, 인터뷰에서 헌신적인 화가이자 아내로서, 그리고 좋은 어머니로서 삶을 보냈다고 말했다.[4]
1976년 박래현은 성북구 서울 자택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5]
3. 작품 및 평가
박래현은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서구적인 공간 설정을 도입하여, 새로운 한국화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9]
그녀의 작품 활동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940년대에는 일본화와 인물화에 집중했고, 1950년대에는 서양화 기법을 동양화에 접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1960년대에는 추상주의를 실험했으며, 1970년대에는 태피스트리와 판화 기법을 활용했다.[8]
3. 1. 제1기 (1940년대)
작품으로 〈노점〉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 동양화의 재료로서 서구적인 공간 설정을 종합함으로써 새로운 한국화의 방향을 시험하고 있다고 평가된다.[9]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데뷔했다.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이 시기에는 일본화와 인물화에 집중했다.[8]3. 2. 제2기 (1950년대)
박래현의 작품은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서구적인 공간 설정을 도입하여, 새로운 한국화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9] 이 시기에 박래현은 큐비즘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캔버스를 분석적으로 분할하여 반추상적인 회화를 창조했다.[8] 대표작으로는 〈노점(露店)〉 등이 있다.3. 3. 제3기 (1960년대)
박래현의 작품은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서구적인 공간 설정을 통합하여 새로운 한국화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9] 대표작으로 〈노점(露店)〉 등이 있다.1960년대 초까지 국내 미술 전람회에 참여하다가 이 시기부터 국제 무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해) 이후 한국 최초의 동양화가 단체인 백양회 회원으로서, 1960년 2월 타이베이, 1960년 2월부터 3월까지 홍콩, 1961년 1월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백양회 그룹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또한 1967년에는 대한민국 공식 대표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했다.[6] 이 시기에 박래현은 추상주의를 실험하기 시작했다.[8]
3. 4. 제4기 (1970년대)
박래현은 작품 활동을 4개의 시기로 구분했는데, 네 번째 시기(1970년대)에는 태피스트리와 판화 기법을 창의적인 드로잉에 활용했다.[8] 1969년부터 뉴욕에서 태피스트리 및 판화를 공부했다.[7] 프랫 그래픽 아트 센터와 로버트 블랙번 판화 워크숍에서 판화 기법을 배웠다.4. 가족
배우자 | 김기창 (1913년 2월 18일 ~ 2001년 1월 23일) |
---|---|
자녀 |
박래현은 김기창과 결혼하여 함께 전시회와 개인전을 열었다.[3] 막내딸은 대한민국에서 수녀인데, 인터뷰에서 헌신적인 화가이자 아내로서, 그리고 좋은 어머니로서 삶을 보냈다고 말했다.[4]
참조
[1]
웹사이트
MMCA sheds light on underappreciated modern art pioneer
http://www01.koreahe[...]
2020-10-18
[2]
웹사이트
Park Naehyun
http://gate.dbmedia.[...]
DB media
2016-02-03
[3]
서적
한국의 명화
1993
[4]
뉴스
운보의 수녀딸 김영
http://www.donga.com[...]
2008-02-10
[5]
뉴스
Park Re-hyun's life as 'Triple Interpreter' - artist, wife and interpreter
https://www.koreatim[...]
The Korea Times
2020-10-19
[6]
뉴스
그림의 추억- 부부화가
http://chi.koreatime[...]
USHankook Ilbo
2014-02-19
[7]
웹사이트
Explanation on her work - "Abstract"
http://211.57.113.10[...]
[8]
서적
한국의 명화
1993
[9]
간행물
박래현
https://ko.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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