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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데크피르몬트 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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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데크피르몬트 후국은 12세기 슈발렌베르크 백작 가문에서 시작되어, 171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 의해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1807년 라인 동맹에 가입,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독일 연방에 가맹했으며, 1868년 프로이센에 통치를 위임하여 실질적으로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았다. 1871년 독일 제국 구성국이 되었으나,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발데크-피르몬트 자유주가 되었다. 1929년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소멸, 현재는 헤센주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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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데크피르몬트 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독일 제국 내 발데크 (1871년). 북쪽의 작은 영토는 피르몬트이고 남쪽 땅은 발데크이다.
발데크 (빨간색)는 독일 제국 내에 있다. 북쪽의 작은 영토는 피르몬트이고 남쪽 땅은 발데크이다.
베스트팔렌주와 헤센나사우 사이의 국경을 보여주는 발데크 지도
베스트팔렌주와 헤센나사우 사이의 국경을 보여주는 발데크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독일어: Fürstentum Waldeck und Pyrmont
일반 명칭발데크피르몬트 후국
상태후국
존속 기간1180년 - 1918년
국가신성 로마 제국
수도발데크 (1655년까지)
아롤젠 (1655년부터)
국교개신교: 헤센 선제후국-발데크 복음교회
언어독일어
1830년 이전의 발데크 깃발
깃발 (1830년 이전)
독일 깃발
깃발 (1830년 이후)
발데크피르몬트 후국의 문장
문장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원수후작
주요 사건카운티로 설립
즉각적인 백작이 됨 (1349년)
피르몬트 계승 (1625년)
신성 로마 후국으로 승격 (1712년 1월)
프로이센에 의해 관리됨 (1868년)
독일 혁명 (1918년)
지도자프리드리히 안톤 울리히 (최초, 1712년~1728년)
프리드리히 (마지막, 1893년~1918년)
구성 국가슈발렌베르크 백국
피르몬트피르몬트 백국
후신 국가발데크피르몬트 자유주
역사
주요 사건라인 동맹 가맹국
독일 연방 가맹국
북독일 연방 가맹국
독일 제국 구성국
프로이센 자유주에 합병 (1929년)
인구
1848년56,000명

2. 역사

12세기경 슈발렌베르크 백작인 안헤어 비두킨트가 발데크 가문의 시조이다. 1712년에 백작이 공(prinz)이 되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독립이 확인되었고, 북독일 연방을 거쳐 1870년 독일 제국에 가맹하였다.

1918년 11월 13일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퇴위하여 발데크는 자유주(Freistaat)가 되었다. 1921년 피르몬트 지역이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하노버 주의 일부가 되었고, 1929년에는 발데크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헤센-나사우 주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이래 헤센주의 일부가 되었다.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정부 채권, 1863년 1월 1일 발행


발데크 가문은 지더-슈발렌베르크 성을 기반으로 비데킨트 1세의 후손이다. 발데크 성은 1120년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1180년 폴크빈 2세가 포포 1세와 홀렌데의 딸인 루이트가르트와 결혼하여 성을 얻으면서 가문의 한 분파가 성의 이름을 따랐다.

초기에 발데크는 마인츠 선제후국의 봉토였다가 1379년 제국 레헨 백국이 되었다.[2] 1397년 백작 헨리 6세의 죽음 이후, 가문은 란다우 계열(아돌프 3세가 창시)과 발데크 계열(헨리 7세가 창시)로 갈라졌다. 두 계열은 각각 1431년과 1438년에 헤센 방백령의 주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3]

헨리 8세가 1486년에 죽은 후, 발데크 계열은 발데크-빌둥겐과 발데크-아이젠베르크 계열로 다시 분열되었다. 장자 란다우 계열은 오토 4세가 1495년에 사망하면서 사라졌고, 그 소유는 빌둥겐과 아이젠베르크 계열로 넘어갔다. 1526년과 1529년에 발데크-빌둥겐의 필리프 4세와 발데크-아이젠베르크의 필리프 3세는 각각의 공국을 루터교로 개종했다. 1692년에 새로운 빌둥 계열에 의해 재통합되었다.

1626년에 피르몬트 백국을 상속받았고, 그 후 "발데크와 피르몬트 백작"이라고 칭했다. 1639년, 발데크의 필리프 디트리히 백작은 겔더란트의 Herrschaft Cuylenburg|퀼렘부르크 백국de과 뮌스터란트의 Werth|베르트de, Pallandt|팔란트de, 비템을 상속받았다. 튀링겐의 토나 영지는 1640년에 상속받았지만, 1677년에 작센고타알텐부르크에 매각되었다. 1655년까지 백국의 주요 거주지는 발데크였으며, 그 후 아롤젠으로 옮겨졌다. 1682년, 황제 레오폴트 1세에 의해 제국 직할의 "발데크 공" 지위로 승격되었다. 1685년 6월 12일, 크리스티안 루이와 계약을 맺어 모든 발데크 세습 재산을 그에게 양도하고, 장자 상속에 의해 상속되도록 했다.

171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프리드리히 안톤 울리히를 발데크와 피르몬트의 후작으로 서임했다.[4] 2대 후작 카를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네덜란드 군을 이끈 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7년 전쟁 중인 1760년에는 영내 콜바흐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가 벌어졌다(콜바흐 전투).

3대 후작 프리드리히 카를 아우구스트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 측에 병사를 파견했다.[4] 1807년, 라인 동맹에 가입했다. 1805년에 동생 게오르크 1세에게 피르몬트를 분여했지만, 1812년에 아들이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 게오르크 1세가 발데크 후작을 계승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독립 후국으로서의 지위가 확인되어 독일 연방에 가맹했다. 1845년 게오르크 2세 사후, 어린 게오르크 빅토르의 섭정이 된 것은 엠마였다.

1868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10년마다의 계약에 의해 프로이센 왕국에 통치를 위임하게 되었고, 이후 실질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5] 1871년에는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

1905년의 발데크

2. 1. 발데크 백작령 (1107년~1712년)

12세기경 슈발렌베르크 백작인 안헤어 비두킨트가 시조이다. Haus Waldeck|발데크 가문de은 지더-슈발렌베르크 성을 기반으로 한 남성 후손으로, 궁극적으로 비데킨트 1세 (1127–1136/7년 재위)의 후손이다. 발데크 성은 발데크의 에더 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1120년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1180년, 폴크빈 2세가 발데크의 상속녀였던 포포 1세와 홀렌데의 딸인 루이트가르트와 결혼하여 성을 얻으면서 가문의 한 분파가 성의 이름을 따랐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문은 오늘날 헤센 북부에 작은 영지를 건설했다.

초기에 발데크는 마인츠 선제후국의 봉토였다. 1379년, 이는 제국 레헨 백국이 되었다.[2] 1397년 백작 헨리 6세의 죽음 이후, 가문은 두 계열로 갈라졌다. 장자 란다우 계열은 아돌프 3세가, 차자 발데크 계열은 헨리 7세가 창시했으며, 이들은 때때로 서로 갈등을 겪었다. 두 계열은 각각 1431년과 1438년에 헤센 방백령의 주권 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는 재정적 어려움과 1427년 마인츠에 대한 헤센 방백령의 최종 승리로 인해 지겐하인 백국이 헤센으로 이전된 데 기인한다. 방백들은 발데크 백작들에게 부채를 탕감해주는 대가로 조공을 부과하고, 다른 이들에게 진 모든 부채를 인수했다.[3]

헨리 8세가 1486년에 죽은 후, 발데크 계열은 발데크-빌둥겐과 발데크-아이젠베르크 계열로 다시 한번 분열되었다. 장자 란다우 계열은 오토 4세가 1495년에 사망하면서 종말을 맞이했고, 그 소유는 빌둥겐과 아이젠베르크 계열로 넘어갔다. 1526년과 1529년에 발데크-빌둥겐의 필리프 4세와 발데크-아이젠베르크의 필리프 3세는 각각의 공국을 루터교로 개종했다. 여러 분할로 인해 더 많은 계열이 창설되었지만, 이들은 1692년에 새로운 빌둥 계열에 의해 재통합되었다.

1626년에 가문은 또한 피르몬트 백국을 상속받았고, 그 후 스스로를 "발데크와 피르몬트 백작"이라고 칭했다. 발데크와 피르몬트 두 백국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19세기까지 단일 법인으로 통합되지 않았다.

1639년, 새로운 아이젠베르크 계열 출신인 발데크의 필리프 디트리히 백작은 겔더란트의 퀼렘부르크 백국과 함께 뮌스터란트의 베르트, 팔란트, 그리고 비템을 상속받았다. 작센알텐부르크 공작의 봉토였던 튀링겐의 토나 영지는 1640년에 발데크-피르몬트가 상속받았지만, 1677년에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프리드리히 1세 공작에게 매각되었다. 발데크는 1655년까지 백국의 주요 거주지였으며, 그 후 거주지가 발데크에서 아롤젠으로 옮겨졌다. 필리프 디트리히는 1664년 그의 형제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공 백작이 계승했는데, 그의 정식 작위는 "발데크, 피르몬트, 퀼렘부르크의 백작이자 영주, 토나, 팔란트, 비템, 베르트의 영주"였다. 1682년, 그는 황제 레오폴트 1세에 의해 제국 직할의 "발데크 공" 지위로 승격되었다. 그의 네 아들 모두 그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1685년 6월 12일, 그는 그의 사촌인 새로운 빌둥 계열의 크리스티안 루이와 계약을 맺어 모든 발데크 세습 재산을 그에게 양도하고, 그 후 장자 상속에 의해 상속되도록 했다. 이 협약은 1697년 레오폴트 황제에 의해 확인되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1692년에 사망한 후, 크리스티안 루이는 전체 공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퀼렘부르크 백국과 베르트 영지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의 둘째 딸인 소피아 헨리에테(1662-1702)가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에르네스트와 결혼하면서 1714년에 상실되었다.

발데크 백작의 문장 (1349–1712)


에더 강 연안의 작은 마을(현재는 헤센 주발데크-프랑켄베르크 군)에 있는 발데크 성을 거점으로 한 일족이 발데크 가문이다. 발데크 가문의 영토는 1200년경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백작령으로 존재했다. 발데크 가문은 분할 상속으로 인해 몇 개의 소국으로 나뉘지만, 1692년에 발데크-빌둥겐 가문의 크리스티안 루드비히가 발데크-아이젠베르크 가문을 계승하여 재통합되었다.

한편, 비지(飛地)가 되는 피르몬트 백작령은 1625년에 발데크-아이젠베르크 가문이 상속한 토지이다. 1655년, 발데크-아이젠베르크 가문은 궁정을 아롤젠으로 옮겼으며, 이후 이 영방(領邦)의 수도가 되었다.

2. 2.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1712년~1918년)

171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프리드리히 안톤 울리히를 발데크와 피르몬트의 후작(Fürst)으로 서임했다.[4] 2대 후작 카를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 1748년)에서 네덜란드 군을 이끈 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7년 전쟁 중인 1760년에는 영내 콜바흐에서 영국군(및 그 동맹국 군)과 프랑스군의 전투가 벌어졌다(콜바흐 전투).

3대 후작 프리드리히 카를 아우구스트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 측에 후국의 병사를 파견했다.[4] 1807년, 발데크 후국은 라인 동맹에 가입했다. 1805년에 프리드리히 카를 아우구스트는 동생 게오르크 1세에게 피르몬트를 분여했지만, 1812년에 아들이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 게오르크 1세가 발데크 후작을 계승했다. 게오르크 1세의 아들인 게오르크 2세는 1814년에 헌법을 제정했지만, 이 안에서 규정된 발데크 영지와 피르몬트 영지의 지위에 관해서는 분쟁을 일으켰다.

1815년 빈 회의에서 발데크 후국의 독립 후국으로서의 지위가 확인되어 독일 연방에 가맹했다. 1845년 게오르크 2세 사후, 어린 게오르크 빅토르의 섭정이 된 것은 게오르크 빅토르의 어머니 엠마였다. 엠마는 프로이센과 접근하는 동시에 1848년 혁명 후의 영방 의회로부터의 섭정 퇴임 요구를 거부하는 등 최고 권력자로서 후국을 움직였다.

1868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후국은 10년마다의 계약에 의해 프로이센 왕국에 통치를 위임하게 되었고, 이후 실질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5] 법적으로는 독립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소규모 후국에게는 행정을 위한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되었다. 1871년에는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

1918년 독일 혁명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되자, 발데크 후작 프리드리히도 퇴위하여 후국도 소멸하고 발데크-피르몬트 자유주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과의 계약은 10년마다 갱신되었으며, 1929년에 프로이센 자유주의 일부가 되었다.

후국의 흑, 적, 금색의 국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및 독일 연방 공화국의 국기 (독일의 국기 참조)와 동일한 디자인이다.

2. 3. 발데크-피르몬트 자유주 (1918년~1929년)

1918년 11월 13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가 퇴위하고 발데크는 자유주(Freistaat)가 되었다.[6] 카셀의 혁명적인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 대표가 발데크에 와서 군주제 폐지를 선언했고, 공국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 발데크피르몬트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헌법은 제정되지 않았고, 1849/1852년의 군주제 헌법이 1929년까지 사실상 유효했다.[6] 프로이센과의 조약 조건 또한 유효했다.

1921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피르몬트 지역이 발데크에서 분리되어 프로이센에 합병되었고, 하노버 주의 새로운 하멜른-피르몬트 지역의 일부가 되었다.[7] 이후 남은 영토는 단순히 발데크 자유국이 되었다.

1926년까지 프로이센과의 1867년 조약에 따라 통치가 계속되다가, 1927년 4월 9일 연방 재정 평준화 법이 개정되었다. 이로 인해 발데크는 연방 세수 배분이 거의 600000제국 마르크 감소했다. 지역 세금을 대폭 인상하지 않고는 자유국이 더 이상 재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따라서 1929년 4월 1일, 발데크 자유주는 폐지되어 프로이센의 헤센-나사우 주의 일부가 되었다. 이것은 발데크가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2. 4. 1929년 이후

1921년 피르몬트 지역이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하노버의 일부가 되었고, 1929년에는 발데크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헤센-나사우의 일부가 되었다. 1946년 이래 헤센주의 일부가 되었다.

1929년 발데크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었을 때, 1849~1850년에 발데크가 에데르, 아이젠베르크, 트비스테 세 구역으로 분할된 상태가 초기에 유지되었다. 1866년부터 발데크에 둘러싸여 있던 프로이센의 월경지인 회링하우젠과 아이멜로드는 아이젠베르크 구역에 통합되었다. 1932년, 연방 정부는 에데르 구역과 아이젠베르크 구역을 통합했다. 트비스테 구역은 1934년 4월 1일에 인접한 볼프하겐 구역과 통합될 예정이었으나, 1933년 나치 정권의 장악 이후 연기되었다. 1934년 2월 28일 법률은 에데르와 아이젠베르크의 통합을 되돌리고 트비스테와 볼프하겐의 통합 계획을 최종적으로 취소했다.

1942년 2월 1일, 발데크의 세 구역은 코르바흐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Landkreis Waldeckde 구역으로 통합되었다. 이 새로운 구역은 이전 자유주의 국가와 거의 동일한 경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구역은 1945년에 대헤센의 일부가 되었고, 1946년에 현대 독일 연방 공화국의 헤센주가 되었다. 1972년 8월 1일, 폴크마르젠시는 볼프하겐 구역에서 분리되어 발데크에 재할당되었다. 1974년 헤센 구역 개혁 동안, 발데크는 인접한 프랑켄베르크 구역과 통합되어 새로운 발데크-프랑켄베르크 구역을 형성했으며, 쥐셴시는 프리츠라의 슈발름-에더-크라이스 교외가 되었다.

3. 지리

발데크 후국은 독일 중부에 있던 영방 중 하나이다. 수도는 처음에는 발데크,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아롤젠(둘 다 현재 헤센주발데크-프랑켄베르크군에 속한다)에 두었다.

"발데크-피르몬트 후국"이라는 이름처럼, 발데크나 아롤젠을 포함한 본토 외에 북쪽 하멜른 부근에 피르몬트(현재 니더작센주하멜른-피르몬트군에 속한다)라는 월경지를 가지고 있었다. 피르몬트는 원래 다른 백작령이었으며, 17세기에 당시 발데크 백작령에 편입된 토지이다.

독일 제국 시대, 발데크 후국의 영토는 프로이센 왕국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발데크는 프로이센령 헤센-나사우주와 베스트팔렌주의 주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피르몬트는 베스트팔렌주 내에 월경지 형태로 존재했다.

발데크령 내에는 헤센 대공국령의 두 개의 월경지가 있었다.

바트 빌둥겐의 프리드리히슈타인 성


콜바흐 부근의 아이젠베르크 성의 폐허

4. 군사

발데크는 1681년에 보병 대대를 창설했다. 18세기 발데크 군대는 외국 군대에 고용되는 '보조군' 역할을 했는데, 흔히 '용병'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수요가 많아 1740년에 단일 대대가 2개(제1 연대)로, 1744년에는 3개 대대, 1767년에는 4개 대대(제2 연대 편성)로 늘어났다. 특히 네덜란드 공화국 (제1, 제2 연대)과 영국(1776년 대영 제국미국 독립 전쟁에 군대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후 제3 발데크 연대, 단일 대대 창설)에 군대를 파견했다. 제3 발데크 연대는 미국에서 복무했는데, 이들은 '헤센인'으로 알려졌다. 4개의 '대대 중대', '척탄병' 중대, 참모, 포병 분견대로 구성된 이 연대는 미국을 지원하는 프랑스 및 스페인 군대에 의해 포획되었으며, 소수만이 독일로 돌아와 일부는 새로 창설된 제5 대대(1784년)의 일부를 구성했다.

나폴레옹이 독일을 정복했을 때, 네덜란드 군에 복무 중이던 발데크 연대는 바타비아 공화국이 홀란드 왕국으로 전환되면서 해산되었다. 대대 규모로 축소된 그들은 홀란드 왕국의 제1 및 제2 보병 연대의 제3 대대를 형성했다. 제5 대대는 해산되었고, 발데크는 프랑스 제1 제국을 위해 II 대대, 제6 독일 연합(라인 연방) 연대에 2개 중대를 제공해야 했다. 이들은 주로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웰링턴 공작과 싸웠다. 1812년에 제6 연합 연대가 재편성되어, 발데크의 3개 중대와 로이스의 1개 중대가 다시 II 대대를 형성했다. 1814년 프랑스 제국의 몰락 시점에 네덜란드에서 복무 중이던 대대는 사라졌지만, 발데크는 새로 창설된 독일 연방에 3개의 보병 중대와 1개의 예거 중대를 제공했다.

발데크 코케이드(Pickelhaube에 착용)


1866년까지 발데크 파견대는 ''Fürstlisches Waldecksches Füselier-Bataillon''으로 불렸으며,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발데크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으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1867년 이후 북독일 연방에 가입한 발데크 퓨질리어 대대는 프로이센 보병 연대 폰 비티히(제3 선제후 헤센) 제83 연대의 III(퓨질리어) 대대가 되었으며, 1918년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연대 '사령관'(명예 칭호) 자리는 발데크-피르몬트 공작이 맡았다.

발데크군은 피켈하우베에 발데크 코케이드를 착용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발데크 대대는 아롤젠, 바트 빌둥겐, 바트 피르몬트 및 바르부르크에 주둔했다.

이 연대는 1870년 보불 전쟁에서 전투에 참여했으며(''Das Eiserne Regiment''라는 별명을 얻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22 사단의 일부로 주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5. 역대 군주

통치자출생재위통치 지역배우자사망비고
게오르크 1세?1812년 - 1813년발데크 후국?1813년
게오르크 2세?1813년 - 1845년발데크 후국?1845년
게오르크 빅토르1831년1845년 - 1893년발데크 후국?1893년
프리드리히1865년1893년 - 1918년발데크 후국?1946년



발데크 후가는 네덜란드 왕실(오라녜-나사우 가)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게오르크 빅토르의 딸(프리드리히의 누나)인 엠마는 네덜란드 국왕이자 룩셈부르크 대공인 빌럼 3세의 왕비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A Pictorial Geography of the World: Comprising a System of Universal Geography, Popular and Scientific C.D. Strong 1848
[2] 서적 Grundlagen der Waldeckischen Regentengeschichte 1824
[3] 논문 Lehnsauftragung. http://d-nb.info/967[...] Juristische Fakultät der Bayerischen Julius-Maximilians-Universität, Würzburg 2002
[4] 웹사이트 Akzessionsvertrag Waldecks zum Rheinbund, 18. April 1807 http://www.documenta[...]
[5] 간행물 Stenographische Berichte über die Verhandlungen des Preußischen Hauses der Abgeordneten: 1877/78 https://books.google[...]
[6] 서적 Geschichte Hessens C. H. Beck, München 2006
[7] 웹사이트 Staatsvertrag zwischen Preußen und Waldeck-Pyrmont über die Vereinigung des Gebietsteils Pyrmont mit Preußen http://waldeck-pyr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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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Schloß Hückeswagen http://www.bgv-hueck[...] Sonderdruck einer Artikelserie des „Bergischer Volksbote" (Burscheider Zeitung) 201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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