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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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덕공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형주 자사 유표의 초빙을 거절하고 은거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표가 천하를 보전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묻자, 방덕공은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하며 거절했다. 그는 밭을 갈고 약초를 캐며 살다가 녹문산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사고전서》에서 방덕공의 자를 상장이라고 언급했지만, 이는 후한의 다른 은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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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덕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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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방덕공 |
![]() | |
자 | 자어 (子魚), 상장 (尚長) |
출생 | 163년? |
출신지 | 남군 양양현 |
직업 | 명사, 인물 감정가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방통, 제갈량, 사마휘 |
비고 | 은둔 생활을 하며 이름을 숨기고 살았다고 전해짐. |
2. 사적
현산 남쪽에 살았으며, 부부 간에 서로 손님을 대하듯 존중하며 지냈다. 훗날 처자를 이끌고 약초를 캐러 녹문산에 올라갔으나, 그 후 돌아오지 않았다.[1]
2. 1. 유표와의 관계
형주자사 유표가 여러 차례 방덕공을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유표가 직접 방덕공을 찾아가 물었다.[3]保全一身、孰若保全天下乎|보전일신、숙약보전천하호|자기 몸을 보전하는 것보다 천하를 보전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중국어
방덕공은 "각기 그 둥지와 굴을 얻으면 될 것이지, 천하를 보전할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자신의 은둔 생활이 곧 삶의 터전임을 밝혔다.[3]
유표가 다시 "후세의 자손에게 무엇을 남기시렵니까?"라고 묻자, 방덕공은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여 위험을 남기는데, 이렇게 홀로 있으니 편안함을 얻게 됩니다."라고 답하여, 부와 권력보다 개인의 안위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드러냈다.[3] 유표는 탄식하며 물러갔다.[3]
2. 2. 은거 생활
현산(峴山) 남쪽에 살았으며, 부부가 서로 손님을 대하듯이 존중하며 지냈다.[1]형주자사 유표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듣지 않았다. 결국 유표가 직접 찾아가 방덕공에게 물었다. "무릇 자기 몸을 보전하는 것보다는 천하를 보전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1] 방덕공은 웃으면서 대답했다.[1]
"홍곡(鴻鵠)의 둥지는 빽빽한 수풀 위에 있는데, 날이 저물어야 겨우 도착합니다. 원타(黿鼉)의 굴은 깊은 못 아래에 있는데, 저녁이 되어서야 잠이 듭니다. 나아갔다가 사리고 가다가 멈추는 것 또한 사람의 둥지라 하겠습니다. 각기 그 둥지와 굴을 얻으면 될 것이지, 천하를 보전할 필요는 없습니다."[1]
그러고는 처자와 함께 밭을 갈았는데, 유표가 이를 가리켜 물었다. "선생께서는 힘들게 밭을 일구며 관록 받기를 마다하시는데, 후세의 자손에게 무엇을 남기시렵니까?"[1] 방덕공이 답하였다.[1]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여 위험을 남기는데, 이렇게 홀로 있으니 편안함을 얻게 됩니다. 남기는 것이 다르기는 하나, 남길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1]
유표는 탄식하며 물러갔다.[1]
훗날 방덕공은 처자를 이끌고 약초를 캐러 녹문산에 올라갔는데, 그 후 돌아오지 않았다.[1]
3. 자 논란
《사고전서》 치림(卮林) 편에서는 방덕공의 자를 '''상장'''(尙長)이라고 기록하고, 《송서》를 그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송서》의 해당 부분은 방덕공의 자를 '상장'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원문의 '상장'은 후한의 은사 상장(向長)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
史臣曰:襄陽龐公謂劉表曰:「若使周公與管、蔡處茅屋之下,食藜藿之羹,豈有若斯之難。」夫天倫由子,共氣分形,寵愛之分雖同,富貴之情則異也。追味尙長之言,以爲太息。|사신왈 양양방공위유표왈 약사주공여관 채처모옥지하 식여곽지갱 기유약사지난 부천륜유자 공기분형 총애지분수동 부귀지정즉이야 추미상장지언 이위태식중국어[1]
''사신이 말한다. 양양 사람 방공이 유표에게 말하였다.''
''주공과 관숙·채숙이 초가집에 살며 거친 음식을 먹었더라면, 어찌 이런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대저 천륜을 타고나는 자는 기는 같으나 모습이 다르며, 총애하는 바가 같더라도 부귀함은 서로 다르다. '''상장'''(尙長)의 말을 곱씹어보니, 한숨이 나온다.''[1]
참조
[1]
Wikisource
後漢書/卷83#龐公
[2]
Wikisource
後漢書/卷83#龐公
[3]
Wikisource
三國志/卷37#龐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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