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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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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고전서는 1772년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된 중국 최대의 고전 문헌 총서이다. 전국 각지의 서적을 수집하여 편찬되었으며, 경, 사, 자, 집의 4부 분류 체계를 따른다. 7부가 제작되어 자금성의 문연각, 원명원의 문원각 등지에 보관되었으나, 문원각본은 소실되었고, 문종각본과 문회각본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파괴되었다. 현재 문연각본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문진각본은 베이징 중국 국가도서관에, 문소각본은 란저우 감숙성 도서관에, 문란각본은 항저우 저장성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고전서는 청나라의 통치에 불리한 내용은 검열 및 삭제되었으며, 이후 속수사고전서가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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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
개요
이름사고전서
원어四庫全書
로마자 표기Sìkù Quánshū
만주어 표기Duiin namun i yooni bithe
의미네 개의 창고에 보관된 완전한 책
종류백과사전
언어한문
시대청나라
편찬 기간1773년 ~ 1790년
주관기윤
내용
분류경, 사, 자, 집 4부
수록 도서3,461종
총 권수36,381권
총 글자 수약 8억 자
특징
의의중국 고대 문헌의 집대성
한계건륭제의 의도에 따른 검열과 삭제
보관
칠각북사각 (내정)
문원각 (북경)
문진각 (열하 피서산장)
문소각 (심양)
문종각 (원명원)
문혜각 (양주)
문란각 (항주)
소실문종각
문혜각
문란각

2. 편찬 배경 및 과정

청나라 건륭 38년(1773년) 2월, 청 조정은 《사고전서》 편찬을 위한 전담 기구인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을 공식적으로 설치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을 시작했다.[9] 이는 1772년 희귀 서적 수집 명령에 이은 조치였다.[7][8] 편찬 작업은 건륭제의 아들 영용(永瑢)과 대학사 우민중(于敏中), 당대 저명한 학자 기윤(紀昀) 등이 주도했으며, 360명 이상의 학자와 3,600여 명의 필사 인원이 동원되는 대규모 국가 사업이었다.

편찬을 위해 중국 전역에서 서적을 수집하고 황실 소장 도서 및 《영락대전》 등을 활용했으며, 성리학 관련 서적을 우선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나라 통치에 비판적이거나 불리하다고 판단된 서적 약 3,000종은 금서로 지정되거나 내용이 임의로 수정, 삭제되는 등 편찬 목적에는 문화적 업적 과시 외에 사상 통제의 의도도 명백히 포함되어 있었다.

1782년에 첫 번째 정본(正本)이 완성되었고,[10] 이후 총 7부의 정본이 제작되어 베이징, 선양, 청더 등 북쪽의 4곳(북사각, 北四閣)과 전장, 양주, 항주 등 남쪽의 3곳(남삼각, 南三閣)에 설치된 전용 서고에 나뉘어 보관되었다.[11] 부본(副本) 1부는 한림원에 보관되었다.

《사고전서》는 이래의 전통적인 사부분류(경·사·자·집) 체계를 따라 분류되었으며,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하여 후대에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책의 해제 목록으로는 『사고전서총목제요』 200권이 별도로 편찬되었다. 수록된 문헌에는 중국 서적 외에도 조선, 일본, 베트남의 문헌과 서양 과학 서적 등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5][6]

2. 1. 건륭제의 지시와 초기 작업

청나라건륭제1772년(건륭 37년)에 『사고전서』 편찬을 공식적으로 명령했다. 이는 같은 해 1월, 유서(類書) 교감을 위해 희귀 서적을 수집하라는 지방관들에 대한 초기 지시에 이은 것이었다.[7][8] 건륭제는 지방 관리들에게 중요한 서적을 수집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희귀하거나 귀중한 책을 소장한 개인들에게는 이를 수도인 베이징으로 보내도록 장려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문자옥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우려로 인해 서적 제출이 저조했다. 이에 건륭제는 1772년 말, 편찬이 완료되면 책을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설령 책에 반청 사상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담은 조칙을 내렸다. 이 조치 이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4,000~5,000권에 달하는 서적이 제출되는 등 참여가 크게 늘었다.

1773년(건륭 38년) 2월 28일, 학자 주균(朱筠)의 상소를 계기로 수집된 서적에 해제(解題)를 붙여 편찬하고 완성 후 『사고전서』라 명명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7] 같은 해 2월, 편찬 작업을 전담할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이 설치되었다.[9] 총책임자로는 건륭제의 여섯째 아들인 영용(永瑢)이 임명되었고, 내각대학사 우민중(于敏中)이 총재(總裁)를, 여러 대학사와 6부의 상서, 시랑 등이 부총재를 맡았다.

실질적인 편찬 작업은 당대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던 기윤(紀昀)이 총찬관(總纂官)을 맡아 주도했으며, 육석웅(陸錫熊), 손사의(孫士毅), 대진(戴震), 주영년(周永年), 소진함(邵晋涵) 등 저명한 학자들이 편찬에 참여했다. 정식 편찬자로 이름을 올린 학자만 360명 이상이었으며, 필사(抄寫)를 담당한 인원도 3,6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필사자들은 현금 대신 일정 분량의 작업을 마치면 관직을 받는 방식으로 보상을 받았다.[3]

2. 2. 편찬 인력 및 규모

항저우 문란각에 소장된 사고전서(복제품).


사고전서가 소장되었던 항저우 문란각의 복원 모형.


1773년 2월, 청나라 건륭 연간에 《사고전서》 편찬을 위한 전담 기구인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이 설치되었다.[9] 총책임자는 건륭제의 여섯째 아들인 영용(永瑢)이 맡았고, 내각대학사 우민중(于敏中)이 총재를, 다른 대학사들과 6부의 상서 및 시랑들이 부총재를 담당했다. 당대 저명한 학자였던 기윤(紀昀)이 총찬관(總纂官)을 맡아 방대한 편찬 작업을 이끌었으며, 육석웅(陸錫熊), 손사의(孫士毅), 대진(戴震), 주영년(周永年), 소진함(邵晋涵) 등 저명한 학자들이 편찬에 참여했다. 편찬자 명단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학자만 360명이 넘었으며, 책을 필사하는 작업(초사, 抄寫)에는 3,600여 명이 동원되었다.

편찬을 위해 전국에서 수집된 서적은 총 13,501종에 달했다. 특히 많은 책을 헌납한 포사공(鲍士恭), 범번주(范懋柱), 왕호숙(汪启叔), 마유(馬裕) 네 사람에게는 황실에서 인쇄한 《고금도서집성》을 1부씩 하사하는 포상이 내려졌다.

1782년에 전서가 완성되었고,[10] 이후 총 7부의 정본(正本)과 1부의 부본(副本)이 제작되었다. 7부의 정본은 아래의 전용 서고에 나누어 보관되었다.[11]

사고전서 보관 서고
구분서고 명칭위치
내정사각 (북사각)문연각(文淵閣)베이징 자금성
문원각(文源閣)베이징 원명원
문소각(文溯閣)선양 선양고궁 (성경행궁)
문진각(文津閣)청더 피서산장
강절삼각 (남삼각)문종각(文宗閣)전장 금산사
문회각(文匯閣)양주 대관당(大觀堂)
문란각(文瀾閣)항주 서호행궁 고산성인사(孤山聖因寺)



부본(副本)은 수도 베이징의 한림원에 보관되었다. 각 서고 건물은 닝보의 유명한 서고인 천일각(天一閣)을 본떠 지어졌으며, 화재 예방을 위해 서고 앞에 연못을 파고 뒤에는 가산(假山)을 조성하는 등 세심하게 설계되었다. 문연각본(文淵閣本)이 가장 먼저 완성되었으며, 교정이 정밀하고 글자체가 깔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3. 수집 도서 및 기준

《사고전서》에는 당시 중국 전역에서 유통되던 서적, 청나라 황실 도서관 소장 서적, 그리고 《영락대전》(永樂大典) 가운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책들이 수록되었다. 건륭제는 1772년 사고전서 편찬을 명하면서 지방 관리들에게 중요한 책을 수집하도록 했고, 희귀하거나 귀중한 책을 소장한 개인들에게도 수도로 보내도록 장려했다.

초기에는 문자옥(文字獄)에 대한 우려로 책을 보내는 이가 적었으나, 1772년 말 건륭제는 편찬 완료 후 책을 소유주에게 돌려주고, 책에 반청(反清) 사상이 담겨 있더라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칙을 내렸다. 이 조칙 이후 석 달도 안 되어 4,000~5,000권의 책이 제출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최종적으로 징수된 서적은 13,501종에 달했다.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성리학(性學)의 치법(治法)과 전장(典章)을 중시하고, 구류백가(九流百家)의 학설을 명확히 기록한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반면, 개인적인 기록이나 실용성이 낮다고 판단된 족보(族譜), 편지 모음(尺牘), 병풍의 글씨(屏障), 장수를 기원하는 글(壽言), 주고받은 시문(唱酬詩文) 등은 수록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가장 많은 책을 바친 이들에게는 포상으로 내부(內府)에서 인쇄한 《고금도서집성》(古今图书集成) 1부씩이 하사되었다.

기증자포상 내용
포사공 (鲍士恭)내부(內府) 인쇄 《고금도서집성》(古今图书集成) 1부
범번주 (范懋柱)내부(內府) 인쇄 《고금도서집성》(古今图书集成) 1부
왕호숙 (汪启叔)내부(內府) 인쇄 《고금도서집성》(古今图书集成) 1부
마유 (馬裕)내부(內府) 인쇄 《고금도서집성》(古今图书集成) 1부



《사고전서》에는 중국 문헌뿐만 아니라 조선, 일본(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 『고문고경공씨전』(古文考経孔氏伝), 야마이 와카나(山井鼎)『칠경맹자고문보유』(七經孟子考文補遺)[5]), 베트남의 문헌도 일부 포함되었다. 또한, 유클리드(Euclid)의 『기하원본』(幾何原本)[6]이나 사바티노 데 우르시스(Sabatino de Ursis)의 저작처럼 서양인이 저술한 서적도 수록되었다.

그러나 편찬 과정에서 청나라의 통치에 비판적이거나 불리하다고 판단된 서적 약 3,000종은 금서로 지정되어 수록되지 못했다. 수록된 서적 중에서도 원문의 내용이 건륭제의 의도나 당시 정치적 상황에 맞춰 수정되거나 삭제된 경우가 있어 이용 시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반청 성향을 드러낸 저술에 대해서는 건륭제가 직접 검토하며 편찬 기준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사고전서》에 수록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후대에 더 정확하거나 원문에 가까운 판본이 발견된 경우에는 해당 판본을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구성 및 내용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된 중국 최대의 총서로, 전통적인 사부분류(四部分類) (경·사·자·집)에 따라 방대한 문헌을 정리하였다. 이 편찬 사업은 광범위한 자료를 망라하여 자료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편찬 과정에서 청나라의 통치에 비판적이거나 방해가 된다고 판단된 서적 약 3,000종은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수록되지 못했다. 또한, 수록된 문헌 중에서도 원문의 내용이 통치자의 입맛에 맞게 의도적으로 수정되거나 삭제된 경우가 있어 자료 이용 시에는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편찬 이후 더 우수한 판본이 발견되거나 교감된 서적도 존재하므로, 연구 시에는 《사고전서》 판본 외 다른 판본과의 비교가 권장된다.

《사고전서》의 편찬은 1773년에 시작되어, 각 문헌에 대한 해제(解題)를 모은 목록인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200권이 먼저 작성되었다. 건륭제는 편찬 과정 전반에 걸쳐 많은 저술을 직접 검토하고 의견을 제시했으며, 이는 특히 반청 성향을 보이는 저술을 배제하는 등 수록 도서 선정 기준에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 여러 부가 제작되었으나, 이후 아편전쟁, 애로호 사건, 태평천국의 난과 같은 혼란기를 거치면서 상당수가 소실되었다.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중국국가도서관(문진각), 중화민국 국립고궁박물원(문연각), 간쑤성 도서관(문소각), 저장성 도서관(문란각)에 보관된 4부가 전해지고 있다.

3. 1. 4부 분류 체계

(隋), (唐) 시대 이래 황실 도서관이었던 집현서원(集賢書院)에서 황실 장서를 4부(四部), 즉 경(經)·사(史)·자(子)·집(集)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정리한 전통을 따랐기 때문에 '''사고전서'''(四庫全書)라고 부른다. 각 부의 책 표지는 서로 다른 색깔로 구분하였다.

'''사고전서 4부 분류'''
분류내용표지 색깔
(經)유교 경전 및 관련 서적. 공자에 의해 확립되고 한나라(기원전 202년~서기 220년) 이후로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경전을 다룬다.녹색
(史)역사서.적색
(子)제자백가를 비롯한 철학, 예술, 과학 등에 관한 저술.청색
(集)시, 서간 등 문학 작품과 일반 대중을 위한 글.회색



이 4부 분류 아래에는 다시 총 44개의 하위 분류(類)가 있다. 사고전서에는 주역(易經),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주례(周禮), 예기(禮記), 시경(詩經), 춘추(春秋), 설문해자(說文解字), 사기(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손자병법(孫子兵法), 국어(國語), 사략(史略), 본초강목(本草綱目) 등 전국시대(周朝)부터 청나라 시대까지의 주요 중국 고전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사고전서 편찬 과정에서 학자들은 각 책에 대해 저자의 이름, 출생지, 연도 등을 상세히 기록한 서술적 주석, 즉 해제(解題)를 작성했다. 이 해제에는 저자 주장의 요점 분석과 편찬자들의 의견이 담겼으며, 책의 앞부분에 배치되어 총목(總目, 총 목록)을 구성했다. 이 목록은 사고전서를 네 개의 부분(庫, 고)으로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분류 방식에 있어서, 예를 들어 의학 지식은 사마천의 《사기》처럼 사례 연구 중심으로 기록되었고, 철학 저술은 황종희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편찬자들이 분류 기준을 재정의하기도 했다. 건륭제는 편찬 중인 저술들을 검토하고 의견을 제시했으며, 이는 특히 반청 성향을 보이는 저술을 제외하는 등 수록 도서 선정 기준에 영향을 미쳤다.

3. 2. 주요 수록 문헌

《사고전서》는 시대 이래 황실 도서관의 분류법인 사부분류를 따라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四部)로 나누어 문헌을 분류하고 정리하였다. 각 부의 책 표지는 녹색(경부), 적색(사부), 청색(자부), 회색(집부)으로 구분되었다.

수록된 문헌은 매우 광범위하여 시대의 고전부터 청나라 시대의 작품까지 아우른다. 44개의 하위 분류(類) 아래 총 36,381책, 79,0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약 230만 페이지, 약 8억 자에 이른다.

주요 수록 문헌은 다음과 같다.

  • 중국 고전: 경학 부문에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주역, 주례, 예기, 시경, 춘추 등이 포함됐다. 사학 부문에는 사기, 자치통감, 국어, 사략 등이 있으며, 자학 부문에는 손자병법, 설문해자, 본초강목 등이 대표적이다. 집부에는 시, 서간 등 다양한 문학 작품이 수록됐다.
  • 주변국 문헌: 조선, 일본, 베트남 등 중국 주변국의 한문 서적도 일부 포함됐다. 일본 문헌으로는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의 《고문고경공씨전》(古文考経孔氏伝)과 야마이 와카나(山井鼎)의 《칠경맹자고문보유》(七經孟子考文補遺) 등이 수록됐다.[5]
  • 서양 문헌: 예수회 선교사 등을 통해 전래된 서양 학문 서적도 일부 포함됐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가 저술한 《기하원본》(幾何原本)[6]과 이탈리아 선교사 사바티노 데 우르시스(Sabatino de Ursis)의 저작 등이 있다.


다만 《사고전서》 편찬 과정에서 청나라 왕조의 통치에 비판적이거나 불리하다고 판단된 서적 약 3,000종은 금서로 지정되어 수록되지 못했다. 또한, 수록된 문헌 중에서도 원문의 내용이 의도적으로 수정되거나 삭제된 경우가 있어 이용 시 주의가 필요하다. 편찬 이후 더 우수한 판본이 발견된 경우도 있으므로, 연구 시에는 《사고전서》 판본 외 다른 판본과의 비교 검토가 권장된다.

4. 사고전서의 한계와 검열

《사고전서》는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하여 서적의 복원과 발굴에 크게 기여했지만, 편찬 과정에서 청조의 통치 이념에 맞춰 내용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청나라 통치에 불리하거나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서적들은 의도적으로 수록에서 배제되거나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그 수는 약 3,000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수록되는 서적이라 할지라도 원문의 내용이 청나라의 입맛에 맞게 고쳐지거나 삭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책 자체를 불태워 없애는 분서까지 자행되어 수많은 귀중한 문헌들이 소실되거나 훼손되었다.[18] 건륭제는 편찬이 완료된 이후인 1787년(건륭 52년)에도 직접 《사고전서》를 검토하여 청 왕조를 비판하는 구절을 문제 삼아 재교정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일부 서적이 목록에서 삭제되기도 했다.

이처럼 《사고전서》는 편찬 과정에서 가해진 검열과 내용 훼손이라는 심각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고전서》에 수록된 자료를 이용할 때에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내용이 개찬되었을 가능성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편찬 이후 더 우수한 판본이 발견되거나 교감된 경우에는 해당 판본을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1. 금서 및 분서

《사고전서》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서적의 복원과 발굴에 크게 기여했지만, 편찬 과정에서 청조의 통치에 불리하다고 판단된 서적들을 제외하거나 내용을 수정하는 등 사상 통제의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18]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서적이 금서로 지정되거나 분서(焚書, 책을 불태움)되는 등 파괴되었다.

청나라 건륭제1772년 《사고전서》 편찬을 명하면서 전국의 희귀하거나 중요한 서적들을 수집하도록 했다. 초기에는 문자옥(文字獄)에 대한 두려움으로 책을 제출하는 이가 적었으나, 건륭제는 편찬 후 책을 돌려주고 반청(反清) 사상이 담겨 있더라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제출을 독려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편찬 과정에서 청나라 통치에 비판적이거나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는 내용 등은 문제시되었다.

병부(兵部)의 보고에 따르면 건륭 39년(1774년)부터 건륭 47년(1782년) 사이에만 24차례의 분서가 행해져 538종, 1만 3862권의 책이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전체 편찬 과정에서는 2,400여 종의 책과 목판이 불태워졌고, 400종 이상의 책이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내용이 수정되었다.[18] 또한, 《사고전서》에 수록되지 못한 책들은 금서 목록인 《사고금서》(四庫禁書)에 포함될 위험이 있었는데, 이 목록에는 2,855종 이상의 책이 포함되었다. 금서로 지정된 책 중 상당수는 명나라 말기에 쓰여 청나라 반대 의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건륭제가 명나라 충신의 흔적을 지우고 청나라 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4] 일설에 따르면 건륭제는 수집한 책을 소유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도 한다.[3]

심지어 편찬이 완료된 이후인 건륭 52년(1787년), 건륭제 자신이 《사고전서》를 열람하다 청 왕조를 비판하는 내용을 발견하고 재교정을 명령하여 최종적으로 《제사동이록》(諸史同異錄) 등 11종의 책이 《사고전서》에서 삭제되었다. 다만 이 삭제된 책들은 파기되지 않고 궁중에 보관되어 9종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사고전서》 편찬은 문화적 업적 이면에 사상 통제와 서적 파괴라는 어두운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수록된 책이라 할지라도 내용이 개찬되거나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이용 시 주의가 필요하다. 한편, 청나라의 검열로 금지된 책 대부분은 오히려 보존되었고, 실제 소실된 책 중 상당수는 금서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다.[4]

4. 2. 내용 개찬 및 삭제

《사고전서》 편찬 과정에서 청조의 통치에 불리한 내용이 담긴 서적은 의도적으로 제외되거나 금서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금서는 약 3,000여 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편찬 기간 중 서적 파괴 행위도 자행되었다. 병부(兵部)의 보고에 따르면 건륭 39년(1774년)부터 47년(1782년) 사이에만 24차례의 분서(焚書)를 통해 538종, 1만 3862권의 책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전체 편찬 과정에서는 2,400여 종의 책과 목판이 불태워졌으며, 400종 이상의 책이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내용이 수정되었다.[18]

수록된 서적이라 할지라도 원문이 개찬되거나 삭제된 경우가 존재한다. 1787년(건륭 52년), 건륭제 자신이 직접 《사고전서》를 열람하다가 청 왕조를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내용을 발견하고 대대적인 재검토 및 교정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제사동이록》(諸史同異錄) 등 11종의 서적이 최종적으로 《사고전서》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다만, 이 삭제된 11종 중 9종은 파기되지 않고 궁중에 보관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건륭제는 명나라 초기 통치자들의 잔혹함을 부각하고 이를 청나라의 정책과 대비시킴으로써 명 왕조를 폄하하고 청나라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편찬 과정에 개입하였다. 특히 반청(反清) 사상을 담고 있다고 판단된 저술들은 주요 검열 대상이 되었다. 《사고전서》에 수록되지 못한 책들은 금서 목록인 《사고금서》(四庫禁書)에 포함될 위험이 있었는데, 이 목록에는 2,855종 이상의 책이 등재되었다. 추가로 400~500종의 책들이 편집되거나 검열을 거쳤다. 금서로 지정된 책들의 상당수는 명나라 말기에 저술된 것으로, 청나라에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서적 탄압은 건륭제가 명나라에 충성하는 잔존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목적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4]

한편, 청나라의 검열로 금지된 저술 대부분은 실제로는 파기되지 않고 보존된 반면, 편찬 과정에서 완전히 소실된 저술 중 상당수는 금서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존재한다.[4] 따라서 《사고전서》를 이용할 때에는 이러한 내용의 누락, 개찬, 삭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편찬 이후 더 우수한 판본이 발견되거나 교감된 경우에는 해당 판본을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사고전서의 보관 및 현황

현재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문연각본, 문진각본, 문소각본 3부이며, 문란각본은 소실 후 복구된 것이다. 이 중 문소각본은 1966년 중소 분쟁이 격화될 가능성에 대비하여 간쑤성 란저우로 옮겨졌다. 1987년 이후 랴오닝성은 여러 차례 문소각본을 선양으로 반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간쑤성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14]

5. 1. 7부의 제작 및 보관



건륭 49년(1784년)까지 《사고전서》 정본 7부와 부본 1부가 완성되었다.[10][11] 건륭제는 완성된 7부를 중국 각지의 도서관에 나누어 보관하도록 명령했다.

처음 4부는 황제를 위해 제작되어 내정사각(內廷四閣) 또는 북사각(北四閣)이라 불리는 북경과 그 주변의 황실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나머지 3부는 강절삼각(江浙三閣) 또는 남삼각(南三閣)이라 불리는 강남 지역의 주요 도시에 보내져 일반 학자들도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문종각(文宗閣): 전장 금산사(金山寺)
  • 문회각(文匯閣): 양주 대관당(大觀堂)
  • 문란각(文瀾閣): 항저우 서호행궁(西湖行宮) 고산성인사(孤山聖因寺)


부본(副本) 1부는 수도 베이징의 한림원에 보관되었다.[11] 7개의 정본 중에서는 문연각본이 가장 먼저 완성되었고 교정이 정밀하며 글자체도 가장 깔끔했다고 전해진다. 각 서고는 화재 예방을 위해 닝보의 유명한 서고인 천일각(天一閣)을 본떠 앞에는 연못을 파고 뒤에는 가산(假山)을 만드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쟁과 혼란 속에서 많은 부본이 소실되거나 훼손되었다. 원명원의 문원각본은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 당시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전장의 문종각본과 양주의 문회각본은 태평천국 운동 중에 완전히 소실되었다. 항저우의 문란각본 역시 태평천국 운동 때 약 70~80%가 파괴되었으나, 이후 정씨 형제 등의 노력으로 상당 부분 복구되었다. 나머지 네 본도 중일전쟁 시기에 일부 손상을 입었다.

각 부본의 상세한 현황은 다음과 같다.

버전궁서각궁서각 위치궁서각 현황도서 현 소장처출판 상황・비고
문연각본문연각베이징 자금성현존타이완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1986년 문연각본 「사고전서」영인본 출판. 2010년 재판
문원각본문원각베이징 원명원현존하지 않음프랑스
퐁텐블로궁
일본
동양문고 [12] (일부)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 당시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공격으로 소실
문진각본문진각청더 피서산장현존베이징
중국 국가도서관
2005년 문진각본 「사고전서」영인본 출판
문소각본문소각선양 선양고궁현존감숙성 란저우
감숙성 도서관
1966년 중소 분쟁 격화 우려로 란저우로 이전. 랴오닝성의 반환 요구가 있으나 감숙성이 거부 중[14]
문회각본문회각양주 대관당현존하지 않음현존하지 않음1853년 태평천국의 난 당시 양주 함락 시 소실
문종각본문종각전장 금산사2011년 재건현존하지 않음1842년 제1차 아편 전쟁으로 일부 파괴된 후, 1853년 태평천국의 난 당시 전장 공격으로 완전 소실
문연각본 「사고전서」영인본 소장 [13]
문란각본문란각항저우 성인사행궁1880년 재건저장성 항저우
저장성 도서관
1861년 태평천국의 난 당시 항저우 함락 시 장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이후 정씨 형제의 노력으로 복구
2006년 문란각본 「사고전서」영인본 출판
부본청나라 한림원베이징현존하지 않음현존하지 않음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소실



현재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문연각본, 문진각본, 문소각본 3부이며, 문란각본은 소실 후 복구된 것이다.

5. 2. 소실 및 현존

국립고궁박물원1986년 영인본 출판, 2010년 재판문원각본문원각베이징 원명원소실프랑스
퐁텐블로궁
일본
동양문고 [12] (일부)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 공격으로 소실문진각본문진각허베이성 청더 피서산장현존베이징
중국 국가도서관2005년 영인본 출판문소각본문소각랴오닝성 선양 선양고궁현존간쑤성 란저우
감숙성 도서관1966년 중소 분쟁 우려로 란저우로 이전됨[14]문회각본문회각장쑤성 양저우 대관당소실현존하지 않음1853년 태평천국의 난으로 소실문종각본문종각장쑤성 전장 금산사소실 (건물은 2011년 재건)현존하지 않음1842년 제1차 아편 전쟁으로 파괴 후, 1853년 태평천국의 난으로 소실[13]문란각본문란각저장성 항저우 성인사현존 (건물은 1880년 재건)저장성 항저우
저장성 도서관1861년 태평천국의 난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이후 복구됨. 2006년 영인본 출판부본청나라 한림원베이징 동장안가소실현존하지 않음1900년 의화단의 난으로 소실



현재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문연각본, 문진각본, 문소각본 3종이며, 문란각본은 소실 후 복구된 것이다. 이 중 문소각본은 원래 선양고궁에 보관되었으나, 1966년 중소 분쟁이 격화될 가능성에 대비하여 간쑤성 란저우로 옮겨졌다. 1987년 이후 랴오닝성 정부는 여러 차례 문소각본을 선양으로 반환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간쑤성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14]

6. 사고전서의 영향 및 의의

중국 청나라 건륭제 시기에 편찬된 사고전서는 당대까지의 중국 학술과 문화를 집대성한 대규모 총서로서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 시대부터 이어져 온 황실 도서 분류법인 사부분류(경·사·자·집) 체계를 따라 방대한 문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대에 전함으로써 지식 유산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

사고전서는 중국 문헌 외에도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주요 문헌과 일부 서양 서적까지 포함하여 당시 지식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함께 편찬된 해제 목록인 『사고전서총목제요』는 방대한 수록 문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러나 편찬 과정에서 청나라의 통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된 수많은 서적이 금서로 지정되어 제외되거나 내용이 의도적으로 수정·삭제되었다는 명확한 한계점을 안고 있다. 이는 청 왕조의 사상 통제라는 비판적 평가를 받으며, 사고전서를 학술 자료로 활용할 때 원본과의 비교 검토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된다.

6. 1. 학술적 가치

(隋)와 (唐) 시대부터 황실 도서관에서 장서를 사부분류(경·사·자·집) 방식으로 나누어 관리하던 전통을 이어받아, 당대까지의 중국 학문과 문화를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5] 광범위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대에 전함으로써 자료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

수록 범위는 중국 문헌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국, 일본(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 『고문고경공씨전』(古文考経孔氏伝), 야마이 와카나(山井鼎)『칠경맹자고문보유』(七經孟子考文補遺)[5]), 베트남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주요 문헌까지 포함하고 있어 동아시아 학술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나아가 그리스의 유클리드(エウクレイデス)가 저술한 『기하원본』(幾何原本)[6]이나 예수회 선교사 사바티노 데 우르시스(サバティーノ・デ・ウルシス)의 저작과 같은 서양 서적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

방대한 수록 문헌에 대한 해제(解題) 목록인 『사고전서총목제요』 200권이 함께 편찬되어, 각 문헌의 내용과 학술적 가치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고전서는 편찬 과정에서 청나라 왕조의 통치 이념에 부합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판단된 서적 약 3,000여 종을 금서로 지정하여 제외하거나 내용을 의도적으로 수정, 삭제했다는 한계점도 지닌다. 이러한 이유로 수록된 문헌이라도 원본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용 시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사고전서 편찬 이후 더 우수한 판본이 발견되거나 교감된 경우도 있으므로, 학술 연구 시 사고전서본 외에 다른 판본과의 비교 검토가 권장된다.

6. 2. 문화적 의의

사고전서는 (隋)와 (唐) 시대부터 내려온 황실 도서 분류법인 사부분류(경·사·자·집)를 따라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하여, 중국의 지식 유산을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각 부의 책 표지는 경부 녹색, 사부 적색, 자부 청색, 집부 회색 등으로 구분하여 체계성을 더했다.

이처럼 광범위한 자료를 망라하여 자료 보존에 큰 공헌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의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서적 약 3,000여 종을 금서로 지정하여 제외하는 등 한계를 드러냈다. 또한, 수록된 문헌 중에서도 원문의 내용을 바꾸거나 삭제하는 경우가 있어 이용 시 주의가 필요하다. 사고전서 편찬 이후 더 정확하거나 완전한 판본이 발견된 경우도 있으므로, 연구 시에는 사고전서본 외의 다른 판본을 함께 참고하는 것이 권장된다.

사고전서에는 중국 문헌뿐만 아니라, 조선, 일본(다자이 슌다이의 古文考経孔氏伝|고문고경공씨전일본어, 야마이 와카나의 七經孟子考文補遺|칠경맹자고문보유일본어[5] 등), 베트남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중요 문헌들도 포함되어 있다.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가 저술한 『기하원본』[6]이나 예수회 선교사 사바티노 데 우르시스의 저작과 같이 서양 학문 서적까지 수록하여 당시로서는 폭넓은 지식 세계를 보여준다.

각 수록 도서에 대한 해설을 담은 목록으로 『사고전서총목제요』 200권이 편찬되어, 사고전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7. 속수사고전서

『사고전서』는 건륭제 이전의 서적만을 수록하고 있고 선발 과정에서 누락된 서적도 많았기 때문에, 19세기 말부터 속편 제작에 대한 제안이 있었다.[15] 하지만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동방문화사업에서 『사고전서총목제요』의 속편에 해당하는 『속수사고전서제요』 편찬을 진행하여 3만 2,961권 분량의 제요를 작성하기도 했으나,[16]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인해 사업은 중단되었다.

세월이 흘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1994년에 『속수사고전서』 사업을 다시 시작하였고, 2002년에 상해고적출판사에서 이를 출판하였다. 『속수사고전서』는 총 5,212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사고전서』의 1.5배에 달하는 규모이다.[17]

참조

[1] 웹사이트 Complete Library of the Four Treasuries https://culture.teld[...] 2023-09-08
[2] 서적 zh:中國大(第二版)(第21冊) Editorial Board of the Encyclopedia of China 2024-03-02
[3] 서적 Chinese History: A Manual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5] 웹사이트 四庫全書と四部 http://www2.aasa.ac.[...]
[6] 서적 幾何原本 https://archive.org/[...]
[7] 웹사이트 文淵閣の四庫全書 https://www.aozora.g[...]
[8] 웹사이트 『四庫全書存目叢書』箚記 http://web.lib.kansa[...]
[9] 웹사이트 『文淵閣四庫全書電子版』 http://www.skqs.com/[...]
[10] 문서 1782년
[11] 서적 乾隆帝 その政治の図像学 文藝春秋
[12] 서적 記録された記憶 : 東洋文庫の書物からひもとく世界の歴史 山川出版社
[13] 웹사이트 线装版《四库全书》重回镇江金山文宗阁 http://js.people.com[...] 新华日报 2011-10-25
[14] 웹사이트 国之瑰宝《四库全书》花落谁家? http://news.xinhuane[...] 新華網 2004-03-04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뉴스 [BOOK책갈피] “빨리 구해오라” 정조가 사신을 닦달하던 책 http://www.joongang.[...] 중앙일보 200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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