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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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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호통의』는 후한 시대에 반고가 편찬한 유교 경전으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며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 장제의 명에 따라 백호관에서 열린 토론 내용을 바탕으로 엮어졌으며, 예, 정치, 우주론, 철학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다. 금문학과 고문학의 대립 속에서 금문학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고문학의 사상을 포괄하며, 삼강오륜의 개념을 명확히 했다. 원나라 대덕 9년에 간행된 판본을 시작으로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며, 청대에는 노문초의 교감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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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통의
개요
제목 (한자)白虎通
제목 (로마자 표기)Baekho Tong
종류유교 경전 주석서
저자반고
시대후한
완성 시기건초 4년 (기원후 79년)
다른 이름백호통의, 백호통덕론
관련 행사백호관회의
내용
주요 내용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 윤리 및 우주론
구성여러 장으로 구성, 각 장은 특정 주제를 다룸
영향후대 유교 사상에 큰 영향
관련 문서
관련 항목유교, 경전, 주석, 반고, 후한
관련 장소백호관

2. 명칭

白虎通義중국어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후한서 숙종 효장제기에는 『백호의주』, 반표 열전에는 『백호통덕론』, 유림열전에는 『통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명칭들이 모두 같은 서적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3][4][5]

2. 1. 다양한 명칭과 논란

후한서 숙종 효장제기에는 『백호의주』, 반표 열전에는 『백호통덕론』, 유림열전에는 『통의』라고 한다. 이것들이 동일한 서적을 가리키는지는 논란이 있다. 나라의 장술조는 채옹의 『채중랑집』에 수록된 「파군태수 사판」에 의해[3], 『백호주』가 백 편 이상으로 구성되어 『백호통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의주의 이름이 『백호통덕론』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반고가 저술한 서적의 이름이 『백호통의』라고 한다[4]。 주광업은 『백호통덕론』은 본래 『백호통』과 『공덕론』이라는 두 서명을 나란히 한 것으로(「공」이 결자), 송나라 이전에는 서명으로 보이지 않아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다[5]

이상의 문헌적인 문제에 대해, 이케다 슈조는, 근년의 연구자들의 의견을 집약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들었다.

# 『백호의주』는 회의의 논의를 거의 그대로 모은 원자료적인 것인 반면, 『백호통의』는 결론 부분만을 정리한 요강서.

# 『백호통의』가 원서명이고, 『백호통』은 그 약칭(따라서 『백호통덕론』은 오류).

# 저자는 반고이지만, 그는 회의의 결론을 정리하고 요약했을 뿐, 개인적인 저자와는 동렬로 논할 수 없다.

2. 2. 현대의 연구 경향

서명은 『후한서』 숙종 효장제기에는 『백호의주』, 반표 열전에는 『백호통덕론』, 유림열전에는 『통의』라고 한다. 이것들이 동일한 서적을 가리키는지는 논란이 있다. 나라의 장술조는 채옹의 『채중랑집』에 수록된 「파군태수 사판」에 의해[3], 『백호주』가 백 편 이상으로 구성되어 『백호통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의주의 이름이 『백호통덕론』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반고가 저술한 서적의 이름이 『백호통의』라고 한다[4]。 주광업은 『백호통덕론』은 본래 『백호통』과 『공덕론』이라는 두 서명을 나란히 한 것으로(「공」이 결자), 송나라 이전에는 서명으로 보이지 않아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다[5]

이상의 문헌적인 문제에 대해, 이케다 슈조는 근년의 연구자들의 의견을 집약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들었다.

# 『백호의주』는 회의의 논의를 거의 그대로 모은 원자료적인 것인 반면, 『백호통의』는 결론 부분만을 정리한 요강서.

# 『백호통의』가 원서명이고, 『백호통』은 그 약칭(따라서 『백호통덕론』은 오류).

# 저자는 반고이지만, 그는 회의의 결론을 정리하고 요약했을 뿐, 개인적인 저자와는 동렬로 논할 수 없다.

3. 역사적 배경

대화하는 사람들, 후한 시대의 무덤에서 출토, 서기 25~220년


白虎觀|백호관중국어에서 열린 토론은 반고 (32–92 CE)가 한 장제 (57-88 CE)의 명으로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토론은 고전의 진정한 의미를 주제로, , 정치, 우주론, 철학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1]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이 서기 3세기 후반에 제작된 자료로 구성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

전한에서 후한에 걸쳐 유교가 정치적으로 중요해지면서, 경서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의 장에서 벌어졌다. 후한 시대에는 경학이 성행하면서 다양한 해석이 나타났고, 광무제가 세운 십사 박사 중심의 금문학과 민간의 고문학이 대립했다. 특히 『춘추』의 "공양전"과 "좌씨전" 해석 차이가 컸다. 이러한 학설들을 비교, 종합하여 정치 지배 이론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6][7]

3. 1. 전한 시대의 유교 정치와 석거각 논의

전한에서 후한에 걸쳐 유교가 점차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면서, 유교 경전인 경서의 해석을 둘러싸고 종종 정치의 장에서 논쟁이 벌어졌다[6]. 기원전 51년 선제의 감로 3년에 미앙궁의 석거각에서 오경의 이견을 논의하고, 경서의 정통 해석을 정한 "석거각의 논의"가 그 예시이다. 이로 인해, 『춘추곡량전』이 박사관으로 세워지게 되었다[6].

3. 2. 후한 시대 경학의 발전과 금문·고문 논쟁



전한에서 후한에 걸쳐 유교가 점차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면서, 유교 경전인 경서 해석을 둘러싸고 종종 정치의 장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일례로 선제의 감로 3년 (기원전 51년) 미앙궁의 석거각에서 오경의 이견을 논의하고 경서의 정통 해석을 정했던 "석거각의 논의"가 있었다. 이로 인해 『춘추곡량전』이 박사관으로 세워졌다.[1]

후한 시대에 들어 경학이 성행하면서 경서 해석에 다양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광무제에 의해 세워진 십사 박사를 중심으로 발전한 금문학에 대하여, 민간에서는 고문학이 흥기하였다. 양자의 대립은 특히 『춘추』에서의 "공양전"과 "좌씨전"의 해석 차이로 나타났다. 이러한 금문학설·고문학설의 비교 연구, 종합 절충을 통해 정치 지배의 이론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2]

이에, 장제건초 4년 (79년) 11월부터 수개월 동안, 예전 석거각의 논의를 본떠 백호관에서 학자들을 모아 경서의 해석에 대해 논의하게 했다. 논의는 오관중랑장 위응이 질문을 하고, 시중 순우공이 논의를 정리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장제가 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6] 그 논의 결과를 반고에게 편찬하게 했다.[7]

3. 3. 백호관 회의의 개최 배경



전한에서 후한으로 넘어가면서 유교가 정치적으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교 경전인 경서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의 장에서 자주 벌어졌다.[1] 예를 들어 전한 선제 감로 3년 (기원전 51년)에는 미앙궁의 석거각에서 오경의 다른 해석들을 논의하고, 경서의 정통 해석을 정하는 "석거각의 논의"가 있었다. 이로 인해 『춘추곡량전』이 박사관으로 세워졌다.[1]

후한 시대에 경학이 유행하면서 경서 해석에 다양한 차이가 생겨났다. 광무제가 세운 십사 박사를 중심으로 발전한 금문학에 대해, 민간에서는 고문학이 일어나 두 학파의 대립이 심해졌다. 특히 『춘추』의 "공양전"과 "좌씨전"의 해석 차이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금문학설과 고문학설을 비교 연구하고 종합 절충하여 정치 지배의 이론을 강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1]

이에 후한 장제건초 4년 (79년) 11월부터 수개월 동안, 예전 석거각의 논의를 본떠 백호관에 학자들을 모아 경서 해석에 대해 논의하게 했다. 오관중랑장 위응이 질문을 하고, 시중 순우공이 논의를 정리하면 장제가 최종 판단을 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6] 장제는 이 논의 결과를 반고에게 편찬하게 했다.[7]

4. 백호관 회의의 진행과 반고의 역할



《백호통의》는 반고 (32~92년)가 한 장제 (57~88년)의 명으로 편찬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이 책의 이름은 서기 79년 낙양 (수도)의 북궁(北宮)에 있는 백호관(白虎觀)에서 열린 회의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회의는 고전의 진정한 의미를 주제로 다루었다.[1] 회의에서는 , 정치, 우주론, 철학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반고는 이 회의 기록을 편집하여 오늘날의 《백호통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이 반고가 79년 회의를 기록한 결과물이 아니라, 실제로는 서기 3세기 후반에 제작된 자료로 구성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

5. 내용

『백호통의』에는 논의 과정에 대한 언급은 없고 결론만 기록되어 있다.

5. 1. 삼강오륜의 명확화

삼강(군신·부자·부부)의 개념은 『백호통의』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언급되었다(「삼강오기」라는 말은 『춘추번로』에도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1]

후한의 공식 학문은 금문이며, 금문의 설만을 채택하고 있지만, 히와라 토시쿠니에 의하면, 왕망이 고문학파의 설을 채택했기 때문에, 왕망을 부정하는 백호관 회의에서는 겉으로는 금문파를 이기게 해야 했지만, 『춘추좌씨전』이 군부(君父)를 중시하는 등 고문의 설 중에도 이용 가치가 높은 사상이 많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금문·고문을 포괄하는 내용이 되었다고 한다.[3]

와타나베 요시히로에 의하면, 왕망은 유교에 기반한 정책을 펼쳤지만, 당시 유교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고, 백호관 회의에서 유교의 국교화가 완성되었다고 한다.[4]

후한의 경학의 특징으로서 위서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5]

5. 2. 금문과 고문의 종합

『백호통의』에는 논의 과정에 대한 언급은 없고 결론만 기록되어 있다.

삼강의 개념은 『백호통의』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언급되었다. (춘추번로에도 '삼강오기'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히와라 토시쿠니에 의하면, 왕망이 고문학파의 설을 채택했기 때문에, 왕망을 부정하는 백호관 회의에서는 겉으로는 금문파를 이기게 해야 했지만, 『춘추좌씨전』이 군부(君父)를 중시하는 등 고문의 설 중에도 이용 가치가 높은 사상이 많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금문·고문을 포괄하는 내용이 되었다고 한다.

와타나베 요시히로에 의하면, 왕망은 유교에 기반한 정책을 펼쳤지만, 당시 유교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고, 백호관 회의에서 유교의 국교화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후한의 경학의 특징으로서 위서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5. 3. 유교의 국교화 완성

『백호통의』에는 논의 과정에 대한 언급은 없고 결론만 기록되어 있다.

삼강(군신·부자·부부)의 개념은 『백호통의』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언급되었다(「삼강오기」라는 말은 『춘추번로』에도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히와라 토시쿠니에 의하면, 후한의 공식 학문은 금문이며, 금문의 설만을 채택하고 있지만, 왕망이 고문학파의 설을 채택했기 때문에, 왕망을 부정하는 백호관 회의에서는 겉으로는 금문파를 이기게 해야 했다. 그러나 『춘추좌씨전』이 군부(君父)를 중시하는 등 고문의 설 중에도 이용 가치가 높은 사상이 많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금문·고문을 포괄하는 내용이 되었다고 한다.

와타나베 요시히로에 의하면, 왕망은 유교에 기반한 정책을 펼쳤지만, 당시 유교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고, 백호관 회의에서 유교의 국교화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후한의 경학의 특징으로서 위서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5. 4. 위서(緯書)의 인용

삼강(군신·부자·부부)의 개념은 『백호통의』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언급되었다. 「삼강오기」라는 말은 『춘추번로』에도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1]

후한 경학의 특징으로 위서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특기할 만하다.[1]

6. 구성

『백호통의』는 43편(삼강육기를 삼강과 육기로 나누어 44편으로 하는 경우도 있음)으로 구성되며, 10권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성
권1작, 호, 시
권2오사, 사직, 예악
권3봉, 공후, 경사, 오행
권4삼군, 주벌, 간쟁, 향사, 치사, 벽옹, 재변, 경상
권5봉선, 순수, 고출
권6왕자불신, 시귀, 성인, 팔풍, 상고
권7서예, 삼정, 삼교, 삼강육기
권8정성, 수명, 종족, 성명, 천지, 일월, 사시, 의상, 오형, 오경
권9가취
권10불면, 상복, 붕훙


7. 판본 및 연구

대덕 9년(1305년)에 무석주학에서 『풍속통의』와 함께 간행된 간본이 있으며, 사부총간에 수록된 10권본 『백호통덕론』이 있다.

각종 총서에는 대부분 원대덕본을 바탕으로 한 2권 또는 4권본(편수는 동일)이 수록되어 있다.

대 노문초는 소자송본, 원대덕본 등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교감한 『포경당총서』본을 만들었는데, 이 책은 4권으로 구성되어 각 권을 상하로 나누고 잃어버린 문장을 추가했다.

청대 연구서로는 장술조의 『백호통의고』, 진립의 『백호통소증』이 있다. 상주학파 (공양학파)는 『백호통』이 금문의 설을 많이 인용하여 중시하였으며, 장술조와 진립도 상주학파였다. 중화민국에서는 유사배의 연구가 있다.

7. 1. 원대덕본 및 사부총간본

대덕 9년(1305년)에 무석주학에서 『풍속통의』와 함께 간행된 간본이 있다. 이후, 사부총간에 수록되었다. 『백호통덕론』이라는 제목으로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1]

각종 총서에 수록된 것은 대부분 원대덕본에 기인하지만, 2권 또는 4권으로 된 것이 많다(편수는 동일).

7. 2. 청대 노문초 교감본

청대에는 노문초가 소자송본, 원대덕본 등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교감을 진행하여 『포경당총서』에 수록했다. 이 책은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을 다시 상하로 나누었다. 또한, 잃어버린 문장을 추가했다.[1]

7. 3. 청대 및 중화민국 시대의 연구

원나라 대덕 9년(1305년)에 무석주학에서 『풍속통의』와 함께 간행된 간본이 있었다. 이후, 사부총간에 수록되었다. 『백호통덕론』이라는 제목으로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1]

각종 총서에 수록된 것은 대부분 원대덕본에 기인하지만, 2권 또는 4권으로 된 것이 많다(편수는 동일).

청나라 시대 노문초는 소자송본, 원대덕본 등을 이용하여 독자적으로 교감하여 『포경당총서』에 수록했다. 이 책은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을 다시 상하로 나누었다. 또한, 잃어버린 문장을 추가했다.

청대 연구서로는 장술조의 『백호통의고』, 진립의 『백호통소증』이 있다. 『백호통』은 금문의 설을 많이 인용하기 때문에 상주학파 (공양학파)에서 중시되었으며, 장술조와 진립도 상주학파였다. 중화민국에서는 유사배의 연구가 있다.

8. 영향

참조

[1] 서적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1, the Ch'in and Han empires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Early Chinese Texts: A Bibliographical Guide Society for the Study of Early China 1993
[3] 문서 『蔡中郎集』巻9・巴郡太守謝版 "[[s:zh:蔡中郎集/卷九#巴郡太守[...]
[4] 문서 『四庫全書総目提要』巻118・子部28・雑家類2・白虎通義4巻 "[[s:zh:四庫全書總目提要/卷11[...]
[5] 서적 白虎通 http://ctext.org/lib[...] 『抱経堂叢書』本
[6] 서적 『後漢書』粛宗孝章帝紀
[7] 서적 『後漢書』班彪列伝下「天子会諸儒講論五経、作『白虎通徳論』、令固撰集其事。」
[8] 서적 《[[후한서]]·장제기(章帝纪)》:“(건초4년 11월 임술)於是下太常,將、大夫、博士、議郎、郎官及諸生、諸儒會白虎觀,讲議‘五經’同異……帝親稱制臨決,如孝宣甘露、石渠故事,作《白虎議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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