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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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범일은 신라 시대의 승려로,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831년 당나라로 유학하여 여러 고승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 선(禪) 사상을 깨달았다. 847년 신라로 돌아와 굴산사에서 40여 년간 후학을 양성했으며,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으로부터 국사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했다. 그는 진귀조사설을 주장하며 한국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 굴산사지 승탑이 그의 승탑으로 추정되며, 수도자의 본분에 대한 사상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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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 | |
---|---|
기본 정보 | |
이름 | 범일 |
한자 표기 | 梵日 |
생몰년 | 810년 ~ 889년 |
법랍 | 60세 |
속성 | 김(金)씨 |
출가 | 15세 |
입적 | 희강왕 4년(839년) |
시호 | 진성대사(眞聖大師) |
생애 및 활동 | |
주요 활동 | 봉암사 개창 선종 구산선문 중 봉암사파 개조 |
주요 저서 | 선문구경(禪門九鏡) |
2. 생애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831년(흥덕왕 6년)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1] 당나라에서 제안(齊安)과 유엄(惟儼) 등 고승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847년 신라로 돌아왔다.[1]
귀국 후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물며 수행하다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崛山寺)로 옮겨 40여 년간 후학을 지도하였다.[1] 이 기간 동안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차례로 그를 국사(國師)로 삼아 경주로 초빙하려 했으나, 범일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산중에 머물렀다.[1] 889년에 입적하였다.[1]
2. 1. 출가와 구족계
15세에 출가하였고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831년(흥덕왕 6년)에는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1]당나라에서 여러 고승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던 중, 제안(齊安) 선사를 만나 성불(成佛)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제안은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이다."라고 답했다. 범일은 이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제안의 문하에서 6년 동안 머물렀으며, 유엄(惟儼) 선사를 찾아가 선문답(禪問答)을 나누고 수행을 인정받았다. 847년 신라로 돌아왔다.[1]
2. 2. 당나라 유학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831년(흥덕왕 6년)에는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당나라에서 여러 고승들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던 중, 제안(齊安) 선사를 만나 성불(成佛)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제안 선사는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이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범일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제안 선사의 문하에서 6년 동안 머물며 수행하였고, 그 뒤 유엄(惟儼) 선사를 찾아가 선문답(禪問答)을 나누고 인가를 받았다. 847년(문성왕 9년)에 신라로 돌아왔다.[1]
2. 3. 귀국과 선종 전파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831년(흥덕왕 6)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禪宗)을 공부하였다.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 제안은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평상의 마음이 곧 도”라고 가르쳤고, 범일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제안의 문하에서 6년 동안 머무른 뒤 유엄(惟儼)에게서 인가를 받았으며, 847년 신라로 돌아왔다.[1]귀국 후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물며 수행에 힘썼다. 이후 명주도독의 요청으로 강릉의 굴산사(崛山寺)로 자리를 옮겨,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머물며 선종을 전파하고 후학들을 길러냈다. 이 시기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차례로 그를 국사(國師)로 삼아 경주로 초빙하려 했으나, 범일은 이를 모두 거절하고 산중에 머물렀다.[1]
889년에 열반하였다.[1]
2. 4. 왕실의 존경
847년 신라로 돌아온 범일은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물며 수행에 정진했다. 이후 명주도독의 요청으로 굴산사로 옮겨 40여 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쳤다.[1] 이 시기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차례로 그를 국사로 받들어 수도인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범일은 이를 모두 사양하며 산문을 떠나지 않았다.[1] 이는 당시 왕실이 범일을 깊이 존경했음을 보여준다.2. 5. 입적
강릉 굴산사(崛山寺)에서 40여 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경문왕·헌강왕·정강왕이 차례로 국사(國師)로 받들어 모시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1] 889년에 입적하였다.[1]3. 사상
수도자의 본분에 대해서는 “부처의 뒤를 따르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깨달음도 따르지 말라. 앞뒤 사람을 바라보고 돌아볼 것도 더 이상 닦고 얻을 바도 없는 본래 부처로서의 철두철미한 자기 본분의 자각을 수행의 목표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1]
3. 1. 진귀조사설
범일국사가 주장한 설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히말라야 설산에서 진귀조사를 만나 교(敎) 밖에 따로 전하는 선(禪)의 이치를 전수받았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1] 이 설은 불교의 '조사스님'이라는 개념 형성과 관련이 깊다.3. 1. 1. 내용
범일국사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주장했다. 이 설은 본래 천축 28대 조사스님인 보리달마의 저서로 알려진 '달마밀록'에 수록되었다고 전해지나, 달마밀록 자체가 현재 전해지지 않아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진귀조사설은 진성여왕이 불교의 선(禪)과 교(敎)의 의미에 대해 물었을 때 범일국사가 답한 내용이다. 설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기원전 589년 12월 8일(음력) 새벽, 마가다국 가야성의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 중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으나, 그것이 궁극적인 경지는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후 기원전 579년(임오년, 45세) 히말라야 설산(雪山)에 들어가 수행하던 중 진귀조사를 만나 교 밖에 따로 전하는 선의 이치(禪旨)를 얻어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범일은 신라의 승려 무염이 《능가경》을 배우다 조사의 길이 아니라며 당나라로 가 선법(禪法)을 익힌 것과, 도윤이 《화엄경》을 읽다가 마음으로 전하는 법(心印)과 같지 않다며 당나라로 가 선을 공부한 사례 등을 이 설의 근거로 제시했다.[1]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는 육조혜능의 《육조단경》이 널리 읽히고 있다. '육조'는 중국 불교의 6대 조사스님을 의미하는데, '조사스님'이라는 용어 자체가 진귀조사설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진귀조사설을 따를 때, 특정 계보를 이은 깨달은 스님을 '조사스님'이라 칭하고, 그 외의 깨달은 이는 부처님이나 선지식 등으로 부른다.
천축 제63대이자 한국 제7대 조사스님으로 여겨지는 서산대사는 말년에 사명대사에게 《선교결》을 저술해주었다. 서산대사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는 이 책에서 그는 "이 선(禪)의 법은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도 진귀조사에게서 따로 전해받은 것"이라고 언급하며 진귀조사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3. 1. 2. 의의와 영향
범일국사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주장했다. 이 설은 본래 천축 28대 조사스님인 보리달마의 '달마밀록'에 수록되었다고 전해지나, 달마밀록 자체가 현재 전해지지 않아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진귀조사설은 진성여왕이 불교의 선(禪)과 교(敎)의 의미를 물었을 때 범일이 대답한 내용이다. 그 내용은 석가모니가 35세(기원전 589년 음력 12월 8일) 새벽, 마가다국 가야성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 중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으나, 그것이 궁극의 경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임오년(기원전 579년, 45세)에 히말라야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수행하다가 '진귀조사'를 만나 교(敎) 밖에 따로 전하는 선의 깊은 뜻(禪旨)을 얻고 크게 깨달았다는 주장이다. 범일은 신라의 무염 스님이 《능가경》을 배우다가 조사의 길이 아니라며 당나라로 가서 선법(禪法)을 익힌 것이나, 도윤 스님이 《화엄경》을 읽다가 마음으로 전하는 법(心印)과 다르다며 당나라로 건너가 선(禪)을 공부한 사례 등을 진귀조사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했다.[1]
진귀조사설은 불교에서 '조사스님'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배경으로 여겨진다. 현재 한국 불교에서는 중국 불교의 6대 조사인 육조혜능의 《육조단경》이 널리 읽히는데, '육조'라는 명칭 자체가 진귀조사설에서 비롯된 '조사' 개념을 따르는 것이다. 진귀조사설에서 유래한 조사스님 외의 깨달은 스님은 보통 부처님이나 선지식으로 불린다.
천축 제63대이자 한국 제7대 조사스님으로 여겨지는 서산대사는 말년에 사명대사에게 그의 대표 저서로 유명한 《선교결》을 써 주었다. 이 책에서 서산대사는 "이 선(禪)의 법은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도 진귀조사에게서 따로 전해받은 것"이라고 언급하며 진귀조사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4. 유물
범일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강릉 굴산사지 승탑(보물 제85호)이 굴산사 터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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