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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왕세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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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를린 왕세자궁은 1663년에 건설되어 여러 차례 개조를 거치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역사적인 건물이다. 초기에는 개인 주택과 베를린 주지사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1732년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어 왕세자의 거처가 되었다.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건축되었고, 1856~57년에 요한 하인리히 슈트라크에 의해 현재의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국립 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되어 표현주의 작품을 전시했으나, 나치 시대에 퇴폐 미술로 규정되어 많은 작품이 폐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되었으나, 1968~69년에 재건되어 동독 시대에는 게스트 하우스로, 통일 이후에는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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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왕세자궁 - [지명]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위치베를린, 독일
일반 정보
이름왕세자궁
원어 이름Kronprinzenpalais
이전 이름왕궁
건물 유형궁전
건축 양식신고전주의 건축
건축 및 재건축 정보
최초 건설1663년
개조1857년
재건축1970년
건축가요한 아놀드 네링 (1660년대)
필리프 게를라흐 (1730년대)
하인리히 슈트라크 (1850년대)
리하르트 파울리크 (1960년대)
세부 정보
기타 정보
웹사이트베를린 도시 개발 기념물 데이터베이스

2. 초기 역사 (1663-1732)

요한 아르놀트 네링은 1663년부터 1669년까지 이 건물을 요한 마르티츠 내각 서기관의 개인 거주지로 건설했으며, 기존의 중산층 주택을 개조했다.[2][3] 1706년부터 1732년까지는 베를린 주지사의 공식 거주지였다.[4]

3. 왕궁 시대 (1732-1918)

1732년 필리프 게를라흐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된 후, 당시 왕세자였던 프리드리히 2세가 거주하면서 왕궁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2][4]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조되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가 거주했으며, 이 시기에는 Königliches Palais|쾨니글리헤스 팔레de(왕궁)로 불렸다.[4][5][6] 훗날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는 빌헬름 1세가 1797년 이곳에서 태어났다.[7]

1856년부터 1857년까지 요한 하인리히 슈트라크에 의해 대대적으로 재건축되어 오늘날과 유사한 외관을 갖추게 되었고,[4] 프리드리히 3세와 그의 아내 빅토리아 왕세자비가 왕세자 시절부터 거주하면서 다시 '왕세자궁'(Kronprinzenpalais)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들의 아들이자 마지막 독일 황제가 되는 빌헬름 2세 역시 1859년 이 궁전에서 태어났다.[11] 20세기 초에는 독일 왕세자 빌헬름 부부가 겨울 거처로 사용했으며, 1918년 11월 혁명 당시에는 혁명 지도자들이 궁전 입구 램프에서 연설하는 등 독일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함께했다.[13][14] 이처럼 왕세자궁은 프로이센 왕가와 독일 제국의 주요 인물들이 거주하고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역사적인 장소였다.

3. 1. 바로크 양식으로의 개조 (1732)

1732년, 필리프 게를라흐는 당시 왕세자였던 미래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의 거처로 사용하기 위해 이 건물을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개조했다.[2][4] 이 개조를 통해 중앙에 돌출된 부분과 정문으로 이어지는 마차 진입로가 추가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아내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틴과 함께 이곳에 간헐적으로 머물렀으며, 왕이 된 후에는 베를린 시립 궁전의 일부에서 거주했다. 이후 그는 왕세자궁을 동생인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공에게 넘겨주었다.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공이 1758년에 사망한 후에는 그의 미망인이 1780년까지 계속해서 이 궁전을 사용했다.

3. 2. 신고전주의 양식으로의 개조와 확장 (18세기 후반-19세기 초)

이후 건물은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개조되어, 미래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왕세자와 그의 아내 루이제의 거처가 되었다.[4][5] 그들은 자녀들과 소피 마리 폰 포스와 함께 이곳에 살았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계속 머물렀다. 이때 궁전은 Königliches Palais|쾨니글리헤스 팔레de(왕궁)로 불렸다.[6]

조각가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는 1795년부터 1797년까지 왕세자비 루이제와 그녀의 여동생 프레데리카의 모습을 담은 이중 조각상 Prinzessinnengruppe|프린체시넨그루페de를 이곳에서 제작했다. 훗날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는 빌헬름 1세가 1797년 3월 22일 이 궁전에서 태어났다.[7]

19세기 초에는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이 궁전 내부의 여러 방을 개조했다.[8] 또한 싱켈은 왕의 세 딸이 거주하던 Kronprinzessinnenpalais|크론프린체시넨팔레de(왕세자비 궁전)와 왕세자궁을 연결하기 위해 Oberwallstraße|오버발슈트라세de 위에 놓이는 확장 건물을 설계했다. 이 연결 건물은 1811년 하인리히 겐츠가 왕세자비 궁전의 외부 개조 공사와 함께 건설했다.[8] 루이제 왕비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궁전 안에 그녀를 기리는 개인적인 공간을 유지했다.[9]

이 건물은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사망할 때까지 Königliches Palais|쾨니글리헤스 팔레de(왕궁)로 알려졌다. 그 이후에는 이전 왕궁으로 불렸으며 한동안 왕족이 사용하지 않았다.

3. 3. 슈트라크의 재건축 (1856-57)

요한 하인리히 슈트라크(Johann Heinrich Strack)의 개조 이후의 왕세자궁, 1890년경


1856년부터 1857년까지 요한 하인리히 슈트라크(Johann Heinrich Strack)는 빌헬름 1세(William I)의 아들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Frederick William)(훗날의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Kaiser Frederick III))을 위해 궁전을 대대적으로 재건축하여 오늘날과 같은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4] 슈트라크는 기존의 만사르드 지붕(mansard roof)을 코린트식(Corinthian order) 기둥으로 장식된 3층 구조로 바꾸었다. 또한 파사드에는 신고전주의 건축(Neoclassical style) 양식의 세부 장식을 더했으며, 기둥 양식도 기존의 토스카나식(Tuscan order)에서 코린트식으로 변경하였다.[4] 입구 위에는 네 개의 조각상을 그대로 두었지만,[5] 발코니가 딸린 높은 기둥의 포르티코(portico)를 새로 추가했다. 더불어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과 Niederlagstraße|니더라크슈트라세de 쪽 건물 동편에는 열주(colonnade)를 갖춘 증축 부분을 건설하였다.[4]

186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버지 빌헬름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왕세자가 되었고, 이에 따라 건물은 다시 왕세자궁(Kronprinzenpalais)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의 딸인 아내 영국의 빅토리아 공주(Princess Victoria)와 함께 이곳에 거주했다.

3. 4.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황후 시대



1856년부터 1857년까지 요한 하인리히 슈트라크(Johann Heinrich Strack)는 당시 빌헬름 1세(William I)의 아들이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Frederick William, 훗날의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을 위해 궁전을 대대적으로 재건축했다. 이 공사로 궁전은 오늘날과 비슷한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슈트라크는 기존의 만사르드 지붕을 코린트 양식 기둥이 있는 3층 구조로 바꾸고, 파사드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세부 장식을 추가했으며, 기둥 양식도 토스카나 양식에서 코린트 양식으로 변경했다.[4] 입구 위 4개의 조각상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5] 발코니가 있는 높은 기둥의 포르티코(현관 지붕)가 새로 추가되었다. 또한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와 니더라크슈트라세(Niederlagstraße) 쪽으로 열주랑(colonnade)이 있는 후퇴된 형태의 증축 건물이 동쪽에 세워졌다.[4]

1859년 1월 27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과 그의 아내 영국의 빅토리아 공주(Princess Victoria,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딸) 사이에서 훗날 마지막 독일 황제가 되는 독일 제국 빌헬름 2세(Wilhelm II, German Emperor)가 이 궁전에서 태어났다.[11]

186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가 왕세자가 되자, 이 건물은 다시 '왕세자궁'(Kronprinzenpalais)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와 빅토리아 왕세자비는 이곳에서 거주하며, 특히 빅토리아 왕세자비는 하인리히 폰 앙겔리(Heinrich von Angeli), 안톤 폰 베르너(Anton von Werner), 아돌프 폰 멘젤(Adolph von Menzel) 등 당대의 예술가와 학자들을 궁전으로 초대하여 교류하는 등 문화적인 활동의 장으로 활용했다.[12]

그러나 1888년,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한 지 불과 99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이 된 빅토리아 황후는 주로 새로운 거처인 슐로스 프리드리히스호프(Schloß Friedrichshof)에서 지냈고 왕세자궁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3. 5. 20세기 초

1905년부터 빌헬름 2세의 상속자인 독일 왕세자 빌헬름과 그의 아내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공작 부인이 겨울 거처로 사용했다. 1918년 베를린의 11월 혁명 동안 혁명 지도자들은 궁전의 입구 램프에서 군중에게 연설했다.[13][14]

4. 국립미술관 분관 시대 (1919-1937)

군주제가 폐지된 후, 왕세자궁은 프로이센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1919년 국립 미술관에 넘겨져 현대 미술을 전시하는 분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15][16] 당시 관장 루드비히 유스티는 이곳에 생존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Galerie der Lebenden|갤러리 데어 레벤덴de(살아있는 자들의 갤러리)를 개관하여 표현주의를 포함한 동시대 미술을 선보였다.[6][16][17][18][19][20] 이는 현대 미술관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받았으나, 보수적인 비평가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23][26]

그러나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나치 정권은 현대 미술을 "퇴폐 미술"(Entartete Kunst|엔타르테테 쿤스트de)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크론프린첸팔레는 그 주요 대상이 되었다.[27] 1936년에는 표현주의 갤러리가 강제로 폐쇄되었고,[31][32][33] 1937년에는 대대적인 작품 압수 작전이 벌어져 수많은 귀중한 현대 미술품들이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34][35][36][37] 같은 해,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가 이 건물로 이전하면서 국립미술관 분관으로서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45]

4. 1. 갤러리 데어 레벤덴 (Galerie der Lebenden)

군주제가 폐지된 후, 왕세자궁은 프로이센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1919년 국립 미술관에 넘겨져 드로잉 컬렉션을 소장하게 되었다.[15][16] 당시 관장이었던 루드비히 유스티는 기존 건물(알테 국립 미술관)의 부속 건물이었던 이곳을 활용하여 생존 예술가들을 위한 새로운 부서인 Galerie der Lebenden|갤러리 데어 레벤덴de(살아있는 자들의 갤러리)를 만들었다. 이는 유스티가 전년도에 제안했고 현대 예술가들 스스로도 요구했던 바였다.[6][16][17][18][19] 이 부서는 1919년 8월 4일에 개관했으며,[20] 약 150점의 회화와 조각품을 전시했다. 전시 작품에는 자연주의 및 프랑스 인상주의 작품,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품(옛 궁전 장식을 유지한 방에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과 함께 전시됨), 베를린 예술가 협회와 베를린 분리파를 대표하는 작품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꼭대기 층에서는 임시 전시로 다리파와 다른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였다.[16][19][21] 이는 독일에서 표현주의 작품을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전시한 사례였으나,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22] 이 갤러리는 현대 미술관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당시 국립 미술관 부관장은 소장품이 동시대 현대 미술을 수집하던 다른 모든 독일 갤러리보다 우수하다고 판단했다.[23] 갤러리 데어 레벤덴은 후대의 여러 기관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1927년 알프레드 H. 바 Jr.가 이곳을 방문한 지 2년 후에 개관한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의 모델이 되었다.[16][24][25] 반면, 인상주의를 선호하고 표현주의를 비판했던 미술 평론가 카를 셰플러는 유스티의 현대 미술 갤러리 개관을 비판하며 1921년에 Berliner Museumskrieg|베를리너 무제움스크리크de(베를린 박물관 전쟁)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26]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후, 초기에는 현대 미술에 대한 일시적인 관용이 있었으나, 히틀러는 곧 갤러리들에게 현대 미술을 "청소"하라고 명령했으며, 특히 크론프린첸팔레를 지목했다.[27] 1936년 5월, 게슈타포는 베를린 경매장에서 압수한 이스마르 리트만 컬렉션의 표현주의 미술품들을 소각했다.[28][29] 당시 국립 미술관 관장이었던 에버하르트 한프스탱글은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몇 점만 보존하라는 명령 아래 5점의 그림과 10점의 드로잉만을 구할 수 있었다.[29][30] 표현주의 갤러리는 1936년 하계 올림픽이 끝난 1936년 10월, "Kulturbolschewismus|쿨투어볼셰비스무스de(문화 볼셰비즘)"의 온상으로 간주되어 폐쇄되었다.[31][32][33]

1937년 나치의 '퇴폐 미술(Entartete Kunst|엔타르테테 쿤스트de)' 작전으로 국립 미술관은 총 435점의 작품을 잃었다.[34][35][36] 크론프린첸팔레는 7월 19일 뮌헨에서 개막한 동명의 전시회에 다른 어떤 기관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기증해야 했다.[37] 대부분의 표현주의 작품은 같은 달 공식적으로 'Verfallskunst|페어팔스쿤스트de'(퇴폐 미술)로 분류되었다. 국립 미술관 관장이었던 유스티는 1933년 이념적으로 의심스러운 인물로 분류되어 강제로 물러났고, 그의 후임 알로이스 샤르트 역시 박물관을 담당했던 나치 소속 프로이센 교육부 장관 베른하르트 루스트가 현대 미술 갤러리를 방문한 후 사임을 강요당했다.[38] 샤르트의 뒤를 이은 한프스탱글마저도 "퇴폐" 미술품 식별 및 제거 임무를 맡은 아돌프 치글러 위원회와의 만남을 거부한 후 사임해야 했다.[39][40] 치글러 위원회는 크론프린첸팔레를 두 차례 방문하여 "청소" 작업을 벌였다. 첫 방문은 전시회 개막 전인 7월 7일이었고,[40][41] 8월에 다시 방문했다.[37] 위원회 일부 구성원들은 처음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아우구스트 마케프란츠 마르크의 작품 제거를 주저했으나, 결국 이들의 작품도 제거되었다. 다만, '푸른 말의 탑'을 포함한 마르크의 작품 일부는 뮌헨 전시 이후 베를린으로 옮겨지기 전에 전시 목록에서 제외되었다.[42] 국립 미술관은 괴링에게 반 고흐의 '도비니의 정원'을 넘기고 을, 폴 시냐크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4점에 대해 을 보상받았다. 괴링은 총 13점의 현대 미술 그림을 가져가 아는 미술상에게 개인적으로 판매하도록 했으며,[43] 이는 스위스에서 열린 "퇴폐 미술" 공식 경매 후 발생한 총 이상의 손실 중 약 6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44]

1937년 후반, 알베르트 슈페어의 사무실이 파리 광장에 있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건물을 징발하면서 크론프린첸팔레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45] 젠다르멘마르크트에 있는 샤우슈필하우스 극장의 감독 구스타프 그륀트겐스도 임시로 이 건물에 사무실을 두었다.[46]

1945년 3월, 크론프린첸팔레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1958년까지 발레 학교가 남은 뒷부분을 사용했지만, 1961년에는 부지가 완전히 정리되었다.[47]

4. 2. 나치 시대와 퇴폐 미술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후, 현대 미술에 대한 일시적인 관용 기간이 있었으나, 곧 히틀러는 크론프린첸팔레를 포함한 갤러리들에게 현대 미술을 "청소"하라고 명령했다.[27] 1936년 5월에는 게슈타포가 베를린 경매장에서 압수한 표현주의 미술품인 이스마르 리트만 컬렉션이 소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28][29] 당시 국립 미술관 관장이었던 에버하르트 한프스탱글은 몇 점의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만 보존하라는 명령 아래 5점의 그림과 10점의 드로잉만을 구할 수 있었다.[29][30] 결국 표현주의 갤러리는 1936년 하계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936년 10월, "문화 볼셰비즘"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폐쇄되었다.[31][32][33]

1937년, 나치는 소위 '퇴폐 미술' Entartete Kunst|엔타르테테 쿤스트de 작전을 본격화하여 국립 미술관 소장품 총 435점을 압수했다.[34][35][36] 특히 크론프린첸팔레의 소장품은 같은 해 7월 19일 뮌헨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회에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을 강제로 출품하게 되는 수모를 겪었다.[37] 대부분의 표현주의 작품들은 같은 달 공식적으로 '퇴폐 미술' Verfallskunst|페어팔스쿤스트de로 분류되었다. 현대 미술 갤러리를 열었던 유스티 관장은 이미 1933년에 나치 정권에 의해 강제로 물러났으며, 그의 후임자 알로이스 샤르트 역시 나치 소속 교육부 장관 베른하르트 루스트가 갤러리를 방문한 후 사임을 강요당했다.[38] 샤르트의 뒤를 이은 한프스탱글마저도 "퇴폐" 미술품을 식별하고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아돌프 치글러 위원회와의 만남을 거부한 후 사임해야 했다.[39][40] 치글러 위원회는 크론프린첸팔레를 두 차례나 방문하여 작품을 "청소"했는데, 첫 방문은 뮌헨 전시회 개막 직전인 7월 7일이었고,[40][41] 두 번째 방문은 8월이었다.[37] 위원회 일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아우구스트 마케프란츠 마르크의 작품 제거를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이들의 작품도 제거되었다. 다만, '푸른 말의 탑'을 포함한 마르크의 일부 작품은 뮌헨 전시 이후 베를린으로 옮겨지기 전에 전시 목록에서 제외되기도 했다.[42] 나치 고위층의 미술품 약탈도 자행되었다. 괴링반 고흐의 '도비니의 정원'을 포함한 13점의 현대 미술 작품을 개인적으로 빼돌려 아는 미술상을 통해 판매했으며,[43] 국립 미술관은 이에 대해 150,000 RM, 폴 시냐크뭉크의 그림 4점에 대해서는 15,000 RM을 보상받는 데 그쳤다. 이는 스위스에서 열린 "퇴폐 미술" 공식 경매 이후 발생한 총 100만 RM 이상의 손실 중 일부에 불과했다.[44]

5. 재건과 전후 활용 (1968-현재)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크론프린첸팔레는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재건되었다. 동독 시절에는 '운터 덴 린덴 궁전'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영빈관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1990년 8월 31일에는 역사적인 통일 조약이 이곳에서 서명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47] 통일 이후 건물은 베를린 시 소유가 되었고, 독일 역사 박물관의 임시 전시 공간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시회와 문화 행사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크론프린첸팔레는 베를린의 중요한 역사적 랜드마크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4]

5. 1. 동독 시대

1980년 재건된 운터 덴 린덴 궁전


1968년부터 1969년까지 크론프린첸팔레는 건축가 리하르트 폴릭과 베르너 프렌델에 의해 외관이 복원되었다. 폴릭은 발터 그로피우스의 전 동료였으며 이미 크론프린체시넨팔레와 베를린 국립 오페라를 재건축한 경험이 있었다. 복원된 외관은 스트라크의 작품 이후 모습과 거의 동일하게 만들어졌으며, 이는 운터 덴 린덴 남쪽 복원을 완료하고 새로 지어진 동독 외무부 건물(이후 철거됨) 및 동쪽의 정부 지구와 시각적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었다.[48], [4], [47] 원래 폴릭은 1733년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여 현대적인 박물관, 음악 학교 또는 공연 공간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1960년대에 이 지역의 역할에 대한 계획이 변경되면서 무산되었다.[47] 건물의 비율을 개선하기 위해 최상층은 동쪽 날개까지 확장되었고,[4]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내부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개조되었다.[47] 이후 '운터 덴 린덴 궁전'이라는 이름으로 동베를린 행정부(마기스트라트)의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4], [47]

1990년 8월 31일, 역사적인 통일 조약이 이곳에서 서명되었으며,[47] 통일 이후 건물은 베를린 시 상원 소유가 되었다.

궁전의 정원은 1969년부터 1970년까지 W. 힝케푸스에 의해 새로 조성되었다. 오버발슈트라세에서 니더라크슈트라세까지 이어지는 이 정원 아래에는 지하 주차장이 있으며, 중앙 잔디밭을 향해 테라스 형태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구조이다. 정원 끝에는 '징켈클라우스'라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이곳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부 파괴되고 1960년경 철거된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건축 아카데미에서 가져온 테라코타 조각과 입구가 통합되어 있다. 정원에는 Senta Baldamusde, 게르하르트 티어세, Gerhard Lichtenfeldsde의 조각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다.[4], [47]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크론프린첸팔레는 길 건너편의 주 건물인 제이그하우스가 개조 공사 중일 때 독일 역사 박물관의 임시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49] 이후에도 전시회 및 기타 문화 행사를 위한 장소로 계속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05년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대한 전시회가 열렸고,[50] 2006년 봄에는 알마 말러에 관한 조슈아 소볼의 폴리드라마 ''알마''가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여러 방에서 동시에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내부의 역사적 외관을 일시적으로 재구성해야 했다. 2006년에는 추방자 연맹이 주최한 20세기 유럽 독일인 추방에 관한 논란이 있는 전시회 '강제된 길—20세기 유럽에서의 도피와 추방'이 열렸으며,[51], [52] 2012년 3월부터 6월까지는 강제 추방 문제를 더 폭넓게 다루는 3부작 전시회의 일부로 '강제된 길' 전시가 다시 포함되어 열렸다.[53] 이 건물은 베를린의 역사적 랜드마크로 지정되어 있다.[4]

'''입구 위의 네 개의 동상'''

5. 2. 통일 이후



통일 조약은 1990년 8월 31일 이곳에서 서명되었으며,[47] 이후 베를린 시 상원이 건물을 소유하게 되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크론프린첸팔레는 독일 역사 박물관의 임시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박물관의 주 건물인 길 건너편의 제이그하우스가[49] 개조 공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이곳은 전시회 및 기타 문화 행사를 위한 장소로 계속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05년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대한 전시회가 열렸고,[50] 2006년 봄에는 알마 말러에 관한 조슈아 소볼의 폴리드라마 ''알마''가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여러 방에서 동시에 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내부의 역사적 외관을 일시적으로 재구성해야 했다. 2006년에는 추방자 연맹이 조직한 20세기 유럽의 독일인 추방에 관한 논란이 많은 전시회인 ''강제된 길—20세기 유럽에서의 도피와 추방''이 열렸으며,[51], [52] 2012년 3월부터 6월까지는 강제 추방 문제를 더 광범위하게 다루는 3부작 전시회가 열렸고, 그 일부로 ''강제된 길'' 전시가 다시 포함되었다.[53] 이 건물은 베를린의 중요한 역사적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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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Barock in Berlin: Meister und Werke der Berliner Baukunst 1640-1786' https://books.google[...] Rembrandt 1969
[3] 서적 'Das historische Berlin: Bilder erzählen' https://books.google[...] Imhof 2005
[4] 웹사이트 Kronprinzenpalais http://www.stadtentw[...] Senatsverwaltung für Stadtentwicklung und Umwelt 2015-07-05
[5] 서적 'Luise von Preußen: Königin der Herzen; eine Biographie' https://books.google[...] Beck 2010
[6] 서적 'The Companion Guide to Berlin' https://books.google[...] 'Companion Guides/Boydell & Brewer' 2004
[7] 서적 "Wilhelm I. Deutscher Kaiser (1871–1888)" https://books.google[...] Beck 1990
[8] 서적 'Berlin: die alte neue Metropole; Architektur und Kunst, Geschichte und Literatur' https://books.google[...] DuMont 2009
[9] 서적 'Monarchy, Myth, and Material Culture in Germany 1750–195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2011
[10] 서적 https://books.google[...]
[11] 서적 "Wilhelm II. Deutscher Kaiser (1888–1918)" https://books.google[...] Beck 1990
[12] 웹사이트 Kaiserin Friedrich als Künstlerin: Künstlerische Bestrebungen am preußischen Hof in Berlin http://www.kaiserinf[...] Kaiserin Friedrich.de 2013-10-02
[13] 웹사이트 "Nach der Ausrufung der Republik in Berlin" http://www.dhm.de/go[...] [[German Historical Museum]] 1918-11-09
[14] 웹사이트 "Revolution in Berlin 9 November 1918" http://xserve04.mpiw[...] 2013-01-06
[15] 서적 https://books.google[...]
[16] 서적 'The Museums of Contemporary Art: Notion and Development' https://books.google[...] Ashgate 2011
[17] 서적 'Art treasures of the Berlin State Museums' https://books.google[...] Abrams 1965
[18] 서적 'Spirit of an Age: Nineteenth-Century Paintings from the Nationalgalerie, Berlin' https://books.google[...] "[[National Gallery, London]],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London: National Gallery" 2001
[19] 서적 'The End of Expressionism: Art and the November Revolution in Germany, 1918–19'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1990
[20] 서적 'Das Schicksal einer Sammlung: Aufbau und Zerstörung der Neuen Abteilung der Nationalgalerie im ehemaligen Kronprinzen-Palais unter den Linden, 1918–1945' https://books.google[...] "Neue Gesellschaft für Bildende Kunst" 1988
[21] 학위논문 "Berlin—Bühne des Wandels—Ein Reisebericht" http://www.diss.fu-b[...]
[22] 서적 "The Popular Opposition: Politicizing Modern Art in the National Gallery in Berlin, 1918–1933" https://books.google[...]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Associated University Presses" 2008
[23] 서적 'Degenerate Art: The Fate of the Avant-Garde in Nazi Germany' https://books.googl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Art Institute of Chicago]], New York: Abrams" 1991
[24] 서적 https://books.google[...]
[25] 서적 'Solar Dance: Genius, Forgery and the Crisis of Truth in the Modern Age' https://books.google[...] Knopf Canada 2012
[26] 웹사이트 "Scheffler, Karl" http://www.dictionar[...] Dictionary of Art Historians 2012-07-22
[27] 서적 'Art as Politics in the Third Reich'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1996
[28] 서적 https://books.google[...]
[29] 뉴스 'Das Schicksal der jüdischen Kunstsammlung von Ismar Littmann. Ein neuer Fall von Kunstraub wirft grundsätzliche Fragen auf' http://www.bnaibrith[...] '[[Neue Zürcher Zeitung]]' 1998-08-17
[30] 서적 'The Faustian Bargain: The Art World in Nazi German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2000
[31] 서적 'Art as Politics' https://books.google[...]
[32] 뉴스 "Magere Schultern" http://www.spiegel.d[...] '[[Der Spiegel]]' 1968-09-09
[33] 서적 'Kunst in Deutschland, 1933–1945: eine wissenschaftliche Enzyklopädie der Kunst im Dritten Reich' https://books.google[...] '[[Grabert Verlag|Grabert]]' 1988
[34] 서적 https://books.google[...]
[35] 서적 'Nationalgalerie: Verzeichnis der Vereinigten Kunstsammlungen Nationalgalerie (Preussicher Kulturbesitz) Galerie des 20. Jahrhunderts (Land Berlin)' https://books.google[...] Mann 1968
[36] 뉴스 It lost a total of around 500 works, 170 of them paintings Der Spiegel
[37] 서적 Kurt Martin und das Musée des Beaux-Arts de Strasbourg: Museums- und Ausstellungspolitik im 'Dritten Reich' und in der unmittelbaren Nachkriegszeit https://books.google[...] Akademie 2012
[38] 서적 Art as Politics https://books.google[...]
[39] 서적 Faustian Bargain https://books.google[...]
[40] 서적 https://books.google[...]
[41] 서적 Art as Politics https://books.google[...]
[42] 서적 Art as Politics https://books.google[...]
[43] 서적 Art as Politics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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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서적 Art as Politics https://books.google[...]
[46] 뉴스 Tanz auf dem Vulkan http://www.spiegel.d[...] Der Spiegel 1981-09-28
[47] 간행물 Das Kronprinzenpalais Unter den Linden. Ein Denkmal der DDR-Moderne http://schlossdebatt[...] Museumsjournal Berlin 1999
[48] 서적 Neue deutsche Biographie https://books.google[...] Duncker & Humblot 2001
[49] 서적 Berlin Heute / Today / Aujourd'hui Prestel 2002
[50] 웹사이트 The Location: The Kronprinzenpalais http://einsteinexhib[...] Albert Einstein—Chief Engineer of the Universe 2005
[51] 뉴스 Ausstellung 'Erzwungene Wege': Auf schmalem Grat http://www.spiegel.d[...] Der Spiegel 2006-08-10
[52] 웹사이트 Pressestimmen zur Ausstellung 'Erzwungene Wege—Flucht und Vertreibung im Europa des 20. Jahrhunderts' http://www.zeitgesch[...] Zeitgeschichte-online 2006-09-07
[53] 간행물 Kronprinzenpalais: ''Heimatweh—Eine Trilogie'' Museumsjournal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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