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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진카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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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진카 계획은 1995년 1월 필리핀에서 발각된 대규모 테러 음모로, 여러 단계를 거쳐 실행될 예정이었다. 이 계획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시도, 미국행 항공기 11대 폭탄 테러, CIA 본부 공격 등을 포함했다. 자금은 오사마 빈 라덴, 함발리 등으로부터 지원되었으며, 람지 유세프가 주도했다. 계획은 필리핀 마닐라의 아파트 화재로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은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9.11 테러의 배경이 되었으며, 관련된 인물들은 체포 또는 사망했다.

2. 용어 및 어원

이 계획은 '''보진카 계획''', '''보진카 작전''', '''보진카 프로젝트''', '''보징가''' 등으로 알려져 있다. FBI 관계자들은 보진카 작전을 "48시간의 공포"로 묘사했다.[3]

타임 아시아를 포함한 여러 언론 매체들은[4] "보진카"가 세르보크로아트어로 "큰 폭발" 또는 "폭음"을 의미한다고 잘못 보도했다. 9/11 위원회 보고서 제5장 주석 7에 따르면, 할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보진카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세르보크로아트어로 '빅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듣고 채택한 넌센스 단어"라고 말했다.[5]

3. 자금 조달

보진카 계획의 자금은 오사마 빈 라덴, 함발리, 모하메드 자말 칼리파(빈 라덴의 매형)가 운영하는 전선 단체에서 나왔다.

왈리 칸 아민 샤가 이 계획의 자금 담당자였다. 그는 여자친구와 다른 마닐라 여성들을 통해 돈세탁하여 이 계획에 자금을 지원했는데, 그 중 몇 명은 술집 호스티스였고 한 명은 KFC 레스토랑 직원이었다. 그들은 선물과 휴가 여행으로 매수되어 자금을 보관할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이체 금액은 약 1.2만필리핀 페소~2.4만필리핀 페소(500USD~1000USD)로 소액이었고, 매일 밤 웬디스 또는 가라오케 바에서 전달되었다. 자금은 람지 유세프가 사용한 가명인 "아담 살리"에게 전달되었다. 이 자금은 요르단 출신 오마르 아부 오마르가 소유한 필리핀 은행 계좌를 통해 들어왔는데, 그는 모하메드 자말 칼리파가 운영하는 이슬람 단체인 국제 관계 및 정보 센터에서 근무했다.[6]

콘소자야라는 회사도 자금 세탁을 통해 마닐라 지부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콘소자야는 제마 이슬라미야 그룹의 수장인 인도네시아 출신 리두안 이사무딘(일명 함발리)이 설립한 위장 회사였다. 왈리 칸 아민 샤는 이 회사의 이사였다.

4. 계획

1994년, 람지 유세프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공항 보안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유세프는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과 타이베이 근처 타오위안 국제공항 사이의 항공편을, 모하메드는 마닐라 근처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과 서울 근처 김포국제공항 사이의 항공편을 예약했다. 이들은 니트로글리세린이 들어 있는 콘택트렌즈 세척액을 사용했으며, 유세프는 발 아치에 쇠막대기를 테이프로 붙여 기폭 장치로 사용했다. 또한, 공항 보안을 혼란시키기 위해 금속 장신구와 옷을 착용했고, 여성들을 만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방에 콘돔을 넣어두었다.[7]

유세프는 1994년 가을 초 샤와 함께 싱가포르에서 필리핀 비자를 받았다.[7] 같은 해 12월 8일, 유세프는 가짜 모로코 신분증을 사용하여 "나지 아와이타 하아"라는 가명으로 도냐 호세파 아파트에 이사했다. 모하메드는 "압둘 마지드"라는 사우디 아라비아 또는 카타르 출신 합판 수출업자로 가장했다. 유세프는 실수로 첫 번째 등록 양식에 자신의 실제 이름을 적었다.[6]

해당 아파트는 필리핀 주재 교황청인 사도좌 대사관에서 200m 떨어져 있었고, 퀴리노 애비뉴에 있는 마닐라 경찰서 9번에서 500m 떨어져 있었다. 603호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은밀하게 행동하여 의심을 받았는데, 방 청소를 위해 청소원을 고용하지 않았으며, "손에 화학 화상을 입었고" 상자를 들고 다녔으며,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 상자에는 유세프가 폭탄을 만들기 위해 메트로 마닐라마닐라와 케손 시티의 공급업체로부터 구입한 화학 물질이 들어 있었다.[8]

유세프는 며칠 동안 마닐라를 떠났지만, 메트로 마닐라로 돌아오자마자 이슬람주의 사절들과 만났다. 이들은 1994년 11월 12일 아시아 5개국 순방의 일환으로 필리핀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세프는 클린턴 대통령을 살해할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했지만, 계획이 너무 어렵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대신 그는 당시 재임 중이던 교황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살해하는 계획을 보진카 음모에 통합했다.

보진카 계획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4. 1. 1단계: 교황 암살

1995년 1월 15일, 필리핀을 방문하는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을 신부로 변장한 테러리스트가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하는 계획이었다.[6][8] 이 계획은 다음 하이재킹 계획을 위해 서방 수사 당국의 눈을 돌리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이를 위해 20명의 테러리스트가 훈련받았다.[6][8]

구체적인 실행 계획으로는 1995년 세계 청소년의 날 행사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자살 폭탄 테러범이 사제 복장을 하고 마카티의 산 카를로스 신학교로 향하는 교황의 차량 행렬에 접근하여 교황에게 접근한 뒤 폭탄을 터뜨릴 예정이었다.

4. 2. 2단계: 항공기 폭탄 테러

보진카 계획의 2단계는 1995년 1월 21일부터 22일까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경유하는 미국행 항공기 11대에 폭탄을 설치하여, 남중국해태평양 상공에서 거의 동시에 폭발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테러 계획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은 각 항공편의 첫 번째 구간에서 좌석 아래 구명조끼 안에 폭탄을 설치하고 중간 기착지에서 내린 후, 다른 항공편에서 이 과정을 반복할 계획이었다. 모든 폭탄이 설치되면 테러리스트들은 파키스탄 라호르로 도주할 예정이었다.

테러 대상은 유나이티드 항공, 노스웨스트 항공, 델타 항공 등 미국의 항공사들이었으며, 미국에 큰 충격을 주기 위해 선택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약 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9]

이 계획의 예행 연습으로 1994년 12월 11일 필리핀 항공 434편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람지 유세프는 마닐라에서 세부를 거쳐 나리타로 가는 필리핀 항공 434편에 시한폭탄을 설치했고, 폭탄은 미나미다이토섬 해상에서 폭발하여 1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다.

테러 목표로 지정된 공항은 나리타 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 타오위안 국제공항, 카이탁 공항, 돈므앙 국제공항, 창이 국제공항,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등이었다.

4. 2. 1. 폭탄

유세프는 마닐라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아랍 아프간인"들과 함께 폭탄 제조 작업을 시작했다. 1994년 가을 초, 유세프는 샤와 함께 싱가포르에서 필리핀 비자를 받았다.[7]

1994년, 유세프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공항 보안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유세프는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과 타이베이 근처 타오위안 국제공항 사이의 항공편을, 모하메드는 마닐라 근처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과 서울 근처 김포국제공항 사이의 항공편을 예약했다. 그들은 니트로글리세린이 들어 있는 14병의 콘택트렌즈 세척액을 사용했다. 유세프는 발 아치에 쇠막대기를 테이프로 붙여 기폭 장치로 사용했고, 공항 보안을 혼란시키기 위해 금속 장신구와 옷을 착용했다. 여성들을 만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방에 콘돔을 넣어두었다.[7]

12월 8일, 유세프는 가짜 모로코 신분증을 사용하여 "나지 아와이타 하아"라는 가명으로 도냐 호세파 아파트에 이사했다. 모하메드는 "압둘 마지드"라는 사우디 아라비아 또는 카타르 출신 합판 수출업자로 가장했다. 유세프는 실수로 첫 번째 등록 양식에 자신의 실제 이름을 적었다.[6]

이 아파트는 필리핀 주재 교황청인 사도좌 대사관에서 200m 떨어져 있었고, 퀴리노 애비뉴에 있는 마닐라 경찰서 9번에서 500m 떨어져 있었다. 603호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은밀하다는 묘사 때문에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방 청소를 위해 청소원을 고용하지 않았으며, "손에 화학 화상을 입었고" 상자를 들고 다녔으며,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 상자에는 유세프가 폭탄을 만들기 위해 메트로 마닐라마닐라와 케손 시티의 공급업체로부터 구입한 화학 물질이 들어 있었다.[8]

유세프는 세부 시티의 한 쇼핑몰과 마닐라의 그린벨트 극장의 좌석 아래에 폭탄을 설치하여 첫 번째 작전 테스트를 실시했다. 1994년 12월 1일, 극장 폭탄이 폭발하여 여러 명의 관람객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유세프는 위조된 이탈리아 여권을 사용하여 아르말도 포를라니라는 가명으로 필리핀 항공 434편의 마닐라-세부 구간을 예약했다. 그는 항공기 화장실에서 최종 폭탄 위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폭탄을 제작하여 4시간으로 타이머를 설정했다. 유세프는 이륙 후 옮겨 앉은 좌석 26K의 구명조끼 주머니 안에 폭탄을 설치하고 세부에서 내렸다.

폭탄은 항공기가 일본 오키나와현의 미나미다이토 섬 상공을 비행하는 동안 폭발하여, 이케가미 하루키가 사망했고, 10명의 승객이 추가로 부상을 입었다. 폭발로 인해 바닥에 구멍이 생기고 객실의 제어 케이블이 절단되어 항공기 우측 보조익과 기장 및 부기장의 조종 장치가 모두 차단되었다. 원래 26K 좌석은 중앙 연료 탱크 바로 위에 위치하게 되어 폭탄이 폭발하면 치명적인 폭발을 일으켰을 것이지만, 해당 기종에서는 좌석이 평소보다 두 줄 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비행 승무원은 보잉 747-200의 제어력을 유지하여 오키나와의 나하 공항에 비상 착륙했다.

다음 계획에는 최소 5명의 테러리스트와 2명의 미확인 요원이 연루될 예정이었다. 1995년 1월 21일부터 1월 22일까지, 그들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기착지가 있는 미국행 항공기 11대에 폭탄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모든 항공편은 2구간으로 나뉘어, 폭탄은 첫 번째 구간에서 좌석 아래 구명조끼 안에 설치되고, 각 폭탄범은 비행기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이후 그는 한두 편의 항공편에 더 탑승하여 반복할 예정이었다. 모든 폭탄범이 모든 항공편에 폭탄을 설치한 후, 각자는 라호르 (파키스탄)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시아 항공사 대신 미국 항공사가 선택되었다. 표적이 된 항공편은 "자이드", "마이보스", "마르코아", "미르카스", "오바이드"라는 암호명으로 요원에게 할당되었다. 폭발은 요원들이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작동하도록 설정될 예정이었다. 항공기는 남중국해태평양 상공에서 거의 동시에 폭발했을 것이다. 이 계획이 성공했다면 수천 명의 승객이 사망했을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항공 여행이 중단되었을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 음모가 실행되었다면 잠정적인 사망자 수가 약 4,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9]

"마크 2 마이크로 폭탄"은 카시오(Casio) 디지털 시계를 타이머로 사용하고, 솜 뭉치처럼 보이는 안정제와 감지할 수 없는 양의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을 폭발물로 사용했다. 다른 재료로는 글리세린(glycerin), 질산염(nitrate), 황산(sulfuric acid), 미량의 니트로벤젠(nitrobenzene), 은 아자이드(silver azide), 액체 아세톤(acetone)이 포함되었다. 각 폭탄에는 두 개의 9볼트 9V 배터리가 전원으로 사용되었다. 배터리는 폭탄을 폭발시키는 전구 필라멘트에 연결되었다. 실리콘 제어 정류기(SCR)가 스위치로 배선되어 필라멘트가 폭탄을 폭발시키도록 했다. 폭탄을 장착한 사람이 시계를 착용했을 때 전선이 시계 받침대 아래로 밀려 들어가면 외부 소켓이 숨겨져 있었다. 개조는 매우 작아서 시계는 여전히 정상적인 방식으로 착용할 수 있었다.[6][10][11]

유세프는 1994년 12월 11일 필리핀 항공 434편의 시험 폭탄 테러 당시 신발 속을 파내어 배터리를 숨겨 공항 보안 검색을 통과했다. 유세프는 콘택트 렌즈(contact lens) 세척액이 들어 있는 작은 용기 안에 넣어 니트로글리세린을 밀반입했다.[12]

유세프의 프로젝트는 음모가 실행되기 2주 전에 그의 아파트 안에서 발견되었다. 하드 드라이브의 여러 암호화된 파일에는 항공편 일정, 폭발 시간 계산, 기타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15]

파일 중 하나에 있는 텍스트의 첫 번째 문자열은 "미국 정부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미래 계획에서 우리의 목표이며, 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정부의 행동에 책임이 있고, 미국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며, 그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미국의 핵 목표를 타격할 것이다. 미국 정부가 이스라엘을 계속 지원한다면 우리는 미국 안팎에서 작전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라는 내용으로 끝맺었다.

"보진카"라는 이름의 파일에는 아시아와 미국 간의 11개 항공편이 나열되어 있으며, 5개의 암호명으로 묶여 있었다. "SETTING: 9:30 pm to 10:30 pm TIMER: 23HR. BOJINKA: 20:30-21:30 NRT Date 5" (유나이티드 항공 80편) 및 "SETTING: 8:30-9:00. TIMER: 10HR. BOJINKA: 19:30-20:00 NRT Date 4" (노스웨스트 항공 30편) 과 같은 문자열이 발견되었다.[6]

"칼리드 셰이크 + 보진카"라는 서명이 있는 통신문이 유세프의 컴퓨터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미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있는 유대 국가에 제공한 재정적, 정치적 및 군사적 지원에 대한 대응"으로 목표물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서한은 또한 폭탄 테러범들이 "생명 유지 기관과 인구 및 식수원에 사용할 수 있는 화학 물질과 독가스를 만들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6]

이 서한은 또한 미국이 이 집단의 요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피델 V. 라모스를 암살하고 항공기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서한은 책임을 주장하는 단체가 "해방군 제5사단"이라고 밝혔다.[6]

도냐 호세파에서 발견된 증거는 경찰 밴 3대를 가득 채웠다.[8]

1995년 1월 15일필리핀을 방문하는 로마 교황(요한 바오로 2세)을 신부로 변장한 테러리스트에 의한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하는 계획이었다. 20명의 테러리스트가 이를 위해 훈련받았다. 이 계획은 다음 하이재킹 계획을 위해 서방 수사 당국의 눈을 돌리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음으로 계획된 것은 원래 목표인 미국행 항공기의 동시 다발적인 폭파였다. 동아시아 또는 동남아시아에서 경유지 (도중 기항)하는 11대의 항공기 (그 대부분이 나리타 국제공항 경유)와 승객 4000명이 노려졌다. 계획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은 좌석 아래 구명 조끼에 폭탄을 숨겨, 중간 기항지에서 항공기를 내리고, 폭탄은 태평양 상에서 동시에 기폭시킨다. 테러리스트들은 그 후, 파키스탄라호르에서 만나기로 계획했다.

폭탄은 ''Mark II''라고 불렸으며, 카시오 계산기제 디지털 시계를 시한 폭탄의 타이머로 사용하고, 털 뭉치와 같은 형상으로 안정성을 부여하며, 건전지는 신발 굽에 숨겼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콘택트 렌즈 세척액으로 위장할 계획이었다.

이 예행 연습으로 멤버 중 한 명인 람지 유세프가 1994년 12월 11일, 마닐라 발 세부 경유 나리타 행 필리핀 항공 434편에 시한 폭탄을 설치, 폭탄은 미나미다이토섬 해상 상공에서 폭발하여 1명의 사망자와 10명의 부상자를 낸 필리핀 항공 434편 폭탄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노려진 공항은 다음과 같다.

공항
도쿄나리타 국제공항 (현재 나리타 공항)
서울의 김포국제공항
타이베이의 타오위안 국제공항 (현재 타이완 타오위안 공항)
홍콩카이탁 공항
방콕돈므앙 국제공항
싱가포르의 창이 국제공항
마닐라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노려진 항공 회사는 (정치적 영향을 계산하여) 모두 미국의 항공 회사였다.



폭파할 항공기의 최종 목적지인 미국의 공항은 다음과 같다.


4. 2. 2. 목표 항공편 및 공항

보진카 계획에서 테러의 목표로 지정된 항공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1995년 1월 21일부터 22일까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경유하는 미국행 항공기 11대에 폭탄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미국 항공사를 선택하여 미국에 큰 충격을 주고자 했다.

보진카 계획 목표 항공편 및 공항
암호명항공사 및 노선경유지최종 목적지 (미국)비고
자예드서울, 타이페이, 방콕로스앤젤레스,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방콕에서 하선 후 파키스탄 카라치로 도주 예정
마즈보스도쿄, 홍콩로스앤젤레스, 뉴욕홍콩에서 하선 후 파키스탄 카라치로 도주 예정
마로카도쿄, 홍콩시카고, 뉴욕홍콩에서 하선 후 파키스탄 카라치로 도주 예정
미르카스서울, 타이페이샌프란시스코, 방콕타이페이에서 하선 후 파키스탄 카라치로 도주 예정
오바이다홍콩, 싱가포르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싱가포르 도착 후 파키스탄으로 도주 예정



이 계획이 성공했다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 세계 항공 여행이 중단될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로 인한 잠정적인 사망자 수를 약 4,000명으로 추정했다.[9]

테러의 목표가 된 공항은 다음과 같다.



폭파 대상 항공기는 유나이티드 항공, 노스웨스트 항공, 델타 항공 등 모두 미국의 항공사였다.[13]

4. 3. 3단계: CIA 본부 공격

압둘 하킴 무라드는 유세프에게 비행기를 CIA 조지 부시 정보 센터 본부에 충돌시키는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유세프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8] 무라드의 자백은 체포된 후 마닐라 경찰의 심문을 통해 3단계 계획을 상세히 밝혔다.

3단계는 무라드가 소형 비행기(가급적 세스나)를 임대, 구매 또는 항공기 납치하여 폭발물을 가득 채운 후,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랭리에 있는 CIA 본부에 충돌시키는 계획이었다. 무라드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았으며, 자살 테러리스트 조종사로 투입될 예정이었다.[8]

마닐라 조직은 폭발물 시험이 위험하고 테러 음모를 쉽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소형 항공기 대신 12번째 상업용 항공기를 납치하는 대체 계획도 있었다.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가 대체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8]

1995년 1월 20일 필리핀에서 미국으로 보낸 보고서에는 "피의자는 일반 승객인 척하면서 미국의 상업용 항공기에 탑승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해당 항공기를 납치하여 조종석을 장악하고 CIA 본부로 돌진할 것입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8]

또 다른 계획은 더 많은 비행기를 납치하는 것이었다. 세계 무역 센터(뉴욕주 뉴욕), 펜타곤(버지니아주 알링턴), 미국 국회의사당(워싱턴 D.C.), 백악관(워싱턴 D.C.), 시어스 타워(일리노이주 시카고), U.S. 뱅크 타워(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트랜스아메리카 피라미드(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가 유력한 목표였다. 보진카 작전 실패 전 필리핀 조사관들에게 자백한 압둘 하킴 무라드는 마닐라 조직이 다른 납치를 실행할 충분한 사람들을 모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고 말했다. 이 계획은 결국 상업용 항공기를 납치하는 9.11 테러(9·11 테러)의 기본 계획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 무역 센터(파괴됨)와 펜타곤(부분적으로 피해를 입음)만 공격을 받았다. 9.11 테러의 원래 계획은 10대의 비행기를 납치하는 것이었고, 그 중 하나는 로스앤젤레스의 U.S. 뱅크 타워에 충돌할 계획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미국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은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의 잠재적 목표였지만, 납치범에 저항한 승객들로 인해 납치된 비행기가 펜실베이니아주 섐크스빌(Shanksville, Pennsylvania) 근처 들판에 추락하면서 공격받지 못했다.[8]

5. 발각 및 저지

음모는 1995년 1월 6일 금요일 저녁, 필리핀 마닐라의 6층짜리 도냐 호세파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 화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월 12일 필리핀을 방문하기 전에 발생했다.[7]

필리핀 당국의 초기 보고에 따르면, 압둘 하킴 무라드는 도냐 호세파 아파트 603호의 주방 싱크대에 어떤 물질에 물을 부어 화학적 화재를 일으켰다. 이상한 냄새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있은 후, 화재는 오후 11시경에 발견되었다. 아파트 소유주인 에디스 게레라는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지만, 화재는 별다른 도움 없이 진압되었다. 유세프와 무라드는 소방관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말했다. 경찰 메이저 프란시스코 F. 바우티스타와 감시 지휘관 아이다 D. 파리스칼을 포함한 그의 직원들은 상황을 조사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의 포장 상자에서 4개의 핫 플레이트, 베이지색 용액에 적셔진 솜 뭉치처럼 보이는 것, 녹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전기 배선을 발견했다. 전화가 울리자 경찰은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아래층으로 달려갔다.[7] 파리스칼은 최근 메트로 마닐라와 필리핀 항공 434편을 강타한 유세프의 폭탄 테러로 인해 603호실의 남자들을 의심했다. 수색 영장을 찾기 위해 그들은 떠났고 영장을 발부할 판사를 찾기 전에 11명의 판사에게 요청했다.

경찰은 증거를 발견한 후, 스스로 "아흐메드 사이드"라고 부르는 남자를 체포했다. 나중에 무라드로 밝혀진 "사이드"는 자신이 상업 조종사이며 자신이 폭죽이라고 주장한 것이 터졌다고 설명하기 위해 경찰서로 가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무라드는 처음에는 도망치려 했지만 나무 뿌리에 걸려 체포되었다. 체포 경찰관은 수갑을 잃어버리고 경찰관의 레인코트에서 가져온 고무줄로 무라드의 손을 묶는 방법으로 임시방편을 마련했다. 무라드는 다른 두 사람의 도움으로 택시 밴에 실려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는 경찰관들에게 그를 풀어주면 2000USD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경찰관들은 거절했다.[7] 경찰서에서 무라드는 자신이 결백하고 화학 수입/수출 사업을 하는 친구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라고 진술서에 서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파괴해야 할 두 명의 사탄: 교황과 미국"에 대해 중얼거렸다.[18]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9.11 테러와 유사한 점이 많아, 이 사건의 발각으로 미국의 FBI는 항공기 납치를 이용한 다음 테러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람지 유세프는 1995년에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게스트하우스에 은신해 있다가 미국파키스탄의 정보 기관(ISI)에 의해 체포되었다. 할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2003년에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미국과 파키스탄의 정보 기관에 의해 체포되어 관타나모 만 미 해군 기지로 이송되었다.

6. 수색 및 체포

1995년 1월 6일 금요일 저녁, 필리핀 마닐라의 6층짜리 도냐 호세파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보진카 계획은 중단되었다.[7] 필리핀 당국의 초기 보고에 따르면, 압둘 하킴 무라드는 아파트 6층 603호 주방 싱크대에 어떤 물질을 붓고 물을 뿌려 화학 화재를 일으켰다. 경찰은 증거를 발견한 후, "아흐메드 사이드"라는 가명을 사용하던 무라드를 체포했다. 무라드는 처음에는 도망치려 했지만 나무 뿌리에 걸려 체포되었고, 경찰관에게 석방 조건으로 2000USD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7] 무라드는 경찰서에서 자신이 결백하며 화학 수입/수출 사업을 하는 친구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라고 진술했지만, "파괴해야 할 두 명의 사탄: 교황과 미국"이라고 중얼거렸다.[18]

1월 7일 오전 2시 30분, 경찰은 603호실에서 교황의 교황 차량 행렬 경로가 표시된 마닐라 시가지 지도, 묵주, 교황 사진, 성경, 십자가, 교황의 고해, 사제 복장 등을 발견했다. 같은 날 오전 4시에 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6] 경찰은 갤런 단위의 황산, 피크르산 등 화학 물질과 온도계, 눈금 실린더 등의 장비, 완성된 원격 제어 황동 파이프 폭탄과 포장 직전의 폭탄을 추가로 발견했다. 아파트에서는 화학 교과서사전, 국제 테러 관련 ''타임''지 기사[6][8], 약국 영수증, 콘택트 렌즈 용액 병도 발견되었다. 싱크대 아래 찬장에서는 완성된 시한폭탄과 카시오 시계가 발견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액체 폭탄 제조법이 담긴 아랍어 매뉴얼이었다.

무라드는 경찰 체포 후 람지 유세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화재 이후 컴퓨터를 회수하기 위해 아파트로 보내졌으며, 필리핀 국가 경찰 본부인 캠프 크라메로 이송되어 67일 동안 "전술 심문"을 받았다. 무라드는 심문에서 "이것이 내 최고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즐긴다"고 말하며, "미국이 우리 무슬림과 우리 민족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세계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람지 유세프가 여객기에 설치하려던 시한폭탄에 대해 "아무도 그것이 폭발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니트로글리세린은 "X선으로도 감지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왈리 칸 아민 샤는 유세프가 호출한 호출기가 샤의 여자친구 이름으로 등록된 것을 확인한 후 1월 11일 아파트에서 체포되었으나, 약 77시간 후 탈출했다. 유세프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필리핀에서 파키스탄으로 도피했다.[6] 1995년 4월, 필리핀은 보진카 계획의 세부 사항을 미국에 전달했다.

유세프는 23일간의 수색 끝에 1995년 2월 7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수-카사 게스트하우스에서 체포되었다.

1995년 2월 유세프가 체포된 이슬라마바드 게스트하우스
자금 제공자 왈리 칸 아민 샤는 1995년 12월 말레이시아에서 체포되었다. 세 명의 공모자는 모두 보진카 계획에 참여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오사마 빈 라덴의 누이와 결혼한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출신 사업가 모하메드 자말 칼리파는 1994년 초 필리핀에 있었으며, 보진카 계획에 자금을 지원한 혐의를 받았다. 미국 이민 귀화국은 1995년 5월 칼리파를 요르단으로 추방했고, 그는 요르단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사우디 아라비아로 이주했다. 칼리파는 2007년 1월 마다가스카르의 호텔 객실에서 살해되었다.[16][17]

람지 유세프는 1995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할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2003년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미국과 파키스탄 정보 기관(ISI)에 의해 체포되어 관타나모 만 미 해군 기지로 이송되었다.

7. 여파

미국 수사관들은 몇 년이 지나서야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와 알 카에다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후 계획에서 폭발물을 사용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대신 비행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계획은 나중에 수정되어 9·11 테러 당시 실행되었다.

9·11 테러는 원래의 보진카 계획에서 발전했다.


람지 유세프는 2001년 새로운 재판을 신청했으나, 미국 제2순회 항소 법원은 2002년 5월 3일에 사건을 심리하고 2003년 4월 3일에 유세프와 그의 공범들이 계속 수감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발표했다.[18] 보진카는 ''9·11의 길'' 및 ''9·11의 비밀 역사''를 포함한 여러 9·11 다큐멘터리 및 미니 시리즈에 포함되었다. 9·11 테러와 유사점이 많아, 이 사건의 발각으로 미국의 FBI는 항공기 납치를 이용한 테러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소형 항공기를 구매하여 연료를 가득 채운 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군에 있는 CIA 본부에 충돌시키는 계획도 있었다. 이를 위한 자살 테러 파일럿 양성이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비행 클럽에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최종적으로 민간 여객기 납치로 변경되었고, 목표물 또한 시어스 타워, 미국 국회의사당, 백악관 등으로 검토되었다. 이것이 후에 9·11 테러로 이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람지 유세프는 1995년에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게스트하우스에 은신해 있다가 미국파키스탄의 정보 기관(ISI)에 의해 체포되었다.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2003년에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미국과 파키스탄의 정보 기관에 의해 체포되어 관타나모 만 미 해군 기지로 이송되었다. 그는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9·11 테러 등 일련의 테러에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참조

[1] 뉴스 Portrait of 9/11 'Jackal' Emerges as He Awaits Trial https://www.nytimes.[...] 2009-11-15
[2] 웹사이트 Project Bojinka http://www.globalsec[...] 2010-11-06
[3] 서적 Cover Up: What the Government Is Still Hiding About the War on Terror Regan Books
[4] 뉴스 Asia's Own Osama http://www.time.com/[...] 2024-07-30
[5] 웹사이트 The 9/11 Commission Report https://www.govinfo.[...] United States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2023-05-21
[6] 뉴스 Operation Bojinka's bombshell https://www.thestar.[...] 2017-08-24
[7] 뉴스 Philippines: U.S. missed 9/11 clues years ago http://edition.cnn.c[...] 2024-07-30
[8] 웹사이트 Plane terror suspects convicted on all counts http://edition.cnn.c[...] 2024-07-31
[9] 뉴스 Nine facts about terrorism in the United States since 9/11 https://www.washingt[...] 2015-11-26
[10] 뉴스 Terrorism trial begins in New York http://edition.cnn.c[...] 2024-07-30
[11] 서적 1000 Years for Revenge: International Terrorism and the FBI—the Untold Story William Morrow and Company
[12] 간행물 Bomb on Board 2005-10-12
[13] 서적 Terrorism's War with America: A History Praeger Publishers 2003-11-30
[14] 뉴스 The Plot http://www.latimes.c[...] 2024-07-30
[15] 논문 DOSCapital http://www.findartic[...]
[16] 뉴스 Gems, al-Qaida and murder. Mystery over killing of Osama Bin Laden's friend https://www.theguard[...] 2012-06-19
[17] 뉴스 Mohammed Jamal Khalifa, Osama bin Laden's brother-in-law, killed in Madagascar http://www.longwarjo[...] 2012-06-19
[18] 문서 Decision http://news.find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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