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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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복완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헌제의 장인이며 순욱과 친교를 맺었다. 보국장군과 의동삼사를 역임했으나 조조가 외척을 꺼리자 인수를 반납하고 중산대부, 둔기교위를 지냈다. 조조의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복황후와 함께 조조를 멀리하려 했으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에게 모반 혐의로 처형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으며, 20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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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는 후한 말 유표의 아들로, 채씨 일가의 견제를 피해 강하 태수로 부임했으며, 유비와 합류하여 형주자사가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209년 사망 - 사환
후한 말 무장 사환은 패군 출신으로 협객으로 이름을 떨치다 조조의 거병에 가신들과 합류하여 중군교위 등을 맡아 활약했으며 관도 대전에서 순유의 계책에 따라 원소군의 군수 물자 운송대를 습격하는 공을 세웠다.
복완 | |
---|---|
인물 정보 | |
이름 | 복완 |
로마자 표기 | Bok W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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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청나라 시대의 서적에 묘사된 복완 |
생애 | |
왕조 | 후한 |
봉호 및 관직 | 불기후 시중 |
출생 | 생년 미상 |
출신지 | 서주 낭야군 동무현 |
사망 | 건안 14년 (209년) |
사망지 | 미상 |
자 | 미상 |
시호 | 미상 |
묘호 | 미상 |
다른 이름 | 미상 |
섬긴 군주 | 헌제 |
기타 사항 | 미상 |
2. 사적
전한 초기의 학자 복승의 후손이다. 복씨는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가로, 7세조 복담은 광무제 때 대사도를 지냈고, 증조부 복신(伏晨)은 황실의 여식과 혼인하였다. 복완 자신은 황제의 장인으로서 명성이 드높았으며, 순욱과 친교를 맺었다.[1]
伏完|복완중국어은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복덕(伏德), 차남 복아(伏雅), 딸 복수(伏壽), 삼남 복균(伏均), 사남 복존(伏尊), 오남 복랑(伏朗) 순이다.[2]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헌제가 조조에게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했을 때, 처형당한 동승의 원한을 풀고자 복황후와 공모하여 조조 타도 계획을 세운다. 이때 황후는 아버지에게 서신을 보내 연락을 취하지만, 그 서신이 조조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문에 조조의 손에 의해 복완과 복황후, 그리고 일족은 모반을 꾀했다는 죄로 모두 처형된다. 또한, 복황후 처형 후 조절이 황후로 시집오면서 조조의 전횡이 더욱 심해졌다고 묘사된다.
[1]
서적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
건안 원년(196년), 보국장군(輔國將軍)·의동삼사(儀同三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복완은 자신이 외척임을 조조가 꺼리는 것을 알고 인수를 반납하였다. 이후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임명되었고, 둔기교위(屯騎校尉)를 역임하였다.[1]
건안 5년(200년), 동승 등이 조조를 암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다. 조조는 보복으로 주모자 동승 등은 물론 동승의 딸이자 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동귀인(董貴人)마저 죽였는데, 복황후는 이에 몹시 놀라 복완에게 조조를 멀리하라는 편지를 썼다.[1]
건안 14년(209년)에 죽었다.[1] 제남 출신의 복생·복승의 후손으로, 복승의 8세손인 복리 (태부), 복리의 아들 복담 (대사도·양도후), 복담의 4세손인 복신의 증손이며, 복무기의 손자 (시중·둔기교위)였다. 명문가 출신으로 황제의 사위로서 명성이 높았고, 순욱과 친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2]
196년, 헌제가 낙양에서 궁정을 열자, 복완을 보국장군·의동삼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복완은 조조가 자신이 외척의 지위에 있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인수를 반납했다. 그 후 중산대부로 임명되었고, 둔기교위로 직책을 옮겼다.[2]
200년, 동승 등이 조조 암살 쿠데타 미수 사건을 일으키자, 조조는 헌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동승의 딸인 동귀인까지 처형했다. 이에 복황후는 전율하며 아버지에게 조조는 잔인하니 제거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복완은 조조 배척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209년에 사망하였다.[2]
3. 가계
伏完|복완중국어이 죽은 후 아들 복흥(伏興)이 뒤를 이었는데,[3] 이는 복완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거나 장남 복덕 등을 잘못 기록한 것일 수 있다.[4]
제남 출신의 복생·복승의 후손이다. 복승의 8세손인 복리(태부), 복리의 아들 복담(대사도·양도후), 복담의 4세손인 복신의 증손이며, 복무기의 손자(시중·둔기교위)이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참조
[2]
서적
효헌황제기
[3]
문서
판본에 따라서는 복전(伏典)이라고도 한다.
[4]
서적
황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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