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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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욱은 후한 말,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조조를 섬기며 그의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명문가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조조가 '나의 장량'이라고 칭찬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순욱은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등 군사적, 행정적으로 많은 공을 세웠지만, 조조가 위공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다가 결국 갈등 끝에 자결했다. 그는 인재 등용에 힘썼으며, 뛰어난 인물들을 조조에게 추천하여 조조군의 참모진을 강화했다. 순욱은 '삼국지'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서 조조의 책사로 묘사되며, 그의 죽음은 조조와의 정치적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년, 효렴으로 추천되어 수궁령(守宮令)[19]이 되었으나, 반동탁 연합이 결성되던 시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기주목(冀州牧) 한복의 초빙을 받아 기주로 피난했다.[20] 그러나 기주가 원소에게 빼앗기자, 원소를 대업을 이룰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순욱을 맞이하며 [나의 자방(子房)[21]이 왔구나!]라고 크게 기뻐하며, 곽가, 사마랑 등 인재 발굴에 힘을 발휘했다.
2. 생애
194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할 때, 순욱은 정욱과 더불어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兗州)의 수비를 담당했다.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켰으나, 순욱은 하후돈과 협력하여 조조 진영에 남은 3개의 성을 조조의 귀환 때까지 사수했다.
196년, 헌제가 장안(長安)을 탈출해 낙양으로 도망치자, 순욱은 조조에게 헌제를 허창(許昌)으로 맞이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조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공으로 조조는 대장군이 되었고, 순욱은 시중[22](侍中), 상서령[23](尚書令)이 되었다.
200년, 관도 전투에서 공융이 원소군의 강력함을 이야기하자, 순욱은 원소군에 있었던 경험으로 약점을 설명했다. 순욱은 본거지 수비를 맡았는데, 조조가 약세라고 느껴 철수를 문의하자, 순욱은 반대하고 조조를 격려했다. 또 조조가 원소에게 승리한 후 유표와 싸우려 하자, "원소가 남은 무리를 수습하고 빈틈을 이용한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203년, 공적으로 만세정후(萬歳亭侯)에 봉해졌다. 조조는 찬탈 의사를 비추며 위공(魏公) 지위를 욕심내어 구석(九錫)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한나라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졌던 순욱은 이에 반대하였고, 조조와 사이가 틀어졌다.
212년, 조조의 손권 정벌에 함께 출정하여 시중(侍中)·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고, 조조와의 불화 속에 서거했다. 향년 50세였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수춘에 병으로 머무르다 근심 속에 죽었다]고 기록했으나, 후한서와 배송지의 주석에서는 조조와의 불화로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조가 순욱에게 빈 찬합을 보내자, 순욱이 조조의 뜻을 간파하고 독주를 마시고 자살했다고 한다. 순욱이 죽은 다음 해 조조는 위공이 되었다.
2. 1. 명문 순씨 가문
순욱의 가계는 명문가로, 조부 순숙(荀淑)은 순자(荀子)의 11세손이다.[4] 후한서에 따르면, 순숙은 당시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양기(梁冀) 일족을 비판하여 명성이 높아져 '신군'(神君)이라 불렸으며, 사후에는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순숙은 유학에 정통하여 낭릉 현령이 되었고, 이고나 이응은 순숙을 스승으로 삼아 교류했다. 후한의 순제에서 환제에 걸쳐 그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순숙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순검(荀儉), 순곤(荀緄), 순정(荀靖), 순도(荀燾), 순신(荀詵), 순상(荀爽), 순숙(荀肅), 순부(荀旉)이다. 그들은 모두 평판이 좋아 '팔룡'이라고 불렸다. 순욱의 아버지 순곤은 상서에서 제남국의 상이 되었다.[18]
순욱과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로는 숙부인 순상이 있었는데, 동탁(董卓)에게 발탁되어 사공까지 올랐지만, 동탁의 폭정에 반감을 품은 가운데 사망했다. 순정은 순상과 함께 명성을 떨쳐 허소에게 인정받았다(황보밀의 『일사전』).
순욱의 종형제(사촌 형제)로는 조조를 섬긴 순유가 있다. 순욱의 형제로는 순연(荀衍)[5], 순심(荀諶)[6]이 있다. 순욱의 또 다른 종형인 순열(荀悅, 순검의 아들)은 순욱 형제나 순유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순씨가전』).
순욱은 용모가 수려하고 위장부(偉丈夫)였으며, 하옹(何顒)으로부터 "왕을 보좌할 재주를 가졌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는 관중처럼 주군을 위대하게 만드는 재능을 의미한다. 하옹은 조조의 재능을 간파하고, 훗날 조카 순유와 함께 동탁 암살 계획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순욱이 4살 때 환관 당형(唐衡)의 딸과 혼인이 결정되었다. 청류파 명문가였던 순씨 가문이 환관 가문과 혼인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으나, 4살의 순욱이 혼인을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형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7]
2. 2. 젊은 시절
순욱은 영천군(오늘날의 허창, 허난성 일대) 출신으로,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키가 크고 잘생긴 인물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순숙은 지방 관리로 재직했으며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순씨 팔룡"으로 불렸다. 순욱의 삼촌인 순상은 삼공 중 한 명으로 재직했고, 순욱의 아버지 순곤은 제북국의 재상이었다.[17]
순욱은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으며, 학자 하옹으로부터 "왕을 보좌할 만한 인재"(王佐之才중국어)라는 평가를 받았다. 189년, 그는 효렴 (문관 후보)으로 추천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군벌 동탁이 수도 낙양을 장악하자 순욱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관직을 사임하고 기주 (오늘날의 허베이성)로 돌아갔다.[20]
이후 여러 해 동안 각지에서 군벌들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순욱은 처음에는 기주를 기반으로 한 원소를 섬겼으나, 191년에 그를 떠나 조조를 섬기게 되었다. 조조는 순욱의 재능을 알아보고 "내 자방이 왔구나![3]"라고 외쳤다. 순욱이 도착하자 조조는 그를 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순욱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구분 | 이름 | 설명 |
---|---|---|
조부 | 순숙 | 순자의 11대 손으로 여겨지며[4], 유학에 정통하여 낭릉 현령이 되었으나, 양기 일족을 비판하고 청렴하여 신군이라 불렸다. |
부친 | 순곤 | 상서에서 제남국의 상이 되었다. |
숙부 | 순상 | 동탁에게 발탁되어 사공까지 올랐으나, 동탁에게 반감을 품고 사망했다. |
형제 | 순연(순연)[5], 순심(순심)[6] | 순욱의 형제들 |
종형 | 순열 | 순욱 형제나 순유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순씨가전』). |
기타 친척 | 순유 | 순욱의 종자(순욱보다 연상)이며, 조조를 섬겼다. |
순욱이 4세 때, 권세를 떨치던 환관 당형의 딸과의 혼인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순곤이 환관의 권세에 아부하려 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순욱도 비난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배송지 등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환관 측의 압력이 있었을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전략』)[7].
순욱은 젊은 시절 하옹으로부터 "왕좌의 재능을 가졌다"고 칭찬받았다. 왕좌란 덕치를 숭상하는 왕도를 행하는 군주를 보좌하는 것이다. 남양의 음수가 영천태수였을 때 발탁된 유능한 인물로서, 순유, 종요, 곽도 등과 함께 이름이 거론되었다(「종요전」이 인용하는 사승의 『후한서』).
영한 원년(189년), 동탁이 유변(소제)을 폐하고 유협(헌제)을 제위에 올린 후, 효렴으로 추천되어 수궁령(궁중의 종이, 먹, 붓 등의 관리직)이 되었지만, 동탁의 난이 일어나자 항보의 령으로 전직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고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영천으로 귀향했다. 환제 이후, 수궁령은 환관이 임명하는 관례였지만, 취임에는 순욱의 인척 관계가 관련되어 있었고, 그는 환관 당형의 양녀를 아내로 삼았다.
순욱은 전란의 도래를 예감하고, 고향을 떠날 것을 노인들에게 설득했지만, 그들은 고향을 떠나는 것을 꺼렸다. 마침 동향의 기주목(주의 장관)인 한복이 기병을 파견하여 순욱을 맞이했으므로, 그 초청을 받아 자신 일족만을 데리고 기주로 피난했다. 곧 고향은 동탁의 부장인 이각 등의 군세가 습격하여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순욱 일행이 기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한복은 원소에 의해 기주를 빼앗긴 상태였다. 형제 순침, 그리고 동향의 신평과 곽도는 원소에게 벼슬했고, 순욱도 상빈의 예로 맞이되었지만 순욱은 원소는 큰 업적을 이룰 수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이 무렵, 분무장군이었던 조조가 동군에 있었기 때문에, 순욱은 원소의 곁을 떠나 조조에게로 갔다. 순욱을 맞이한 조조는 "나의 자방(子房)이다"라고 크게 기뻐했다. 자방은 전한의 장량의 자이며, 유방이 지혜로운 장량을 막하에 두어 패업을 이룬 것에 비유한 것이다. 초평 2년(191년), 순욱이 29세 때이다.
2. 3. 조조의 책사
하옹(何顒)에게서 '''왕좌의 재주를 가졌다'''라는 칭찬을 받은 순욱은 젊은 시절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21] 189년, 효렴에 추천되어 수궁령(守宮令)이 되었으나, 반동탁 연합이 결성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기주목(冀州牧) 한복의 초빙을 받아 기주로 피난했다.[20]그러나 순욱이 기주에 도착했을 때쯤 기주는 원소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원소는 순욱을 예우했지만, 순욱은 원소가 큰일을 이룰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를 떠나 조조에게 의탁했다. 조조는 순욱을 맞이하며 [나의 자방(子房)이 왔구나!]라고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곁에서 정치와 전략 양면에서 활약할 기회를 주었다.[21]
순욱은 조조의 책사로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194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할 때, 순욱은 정욱과 함께 조조의 본거지였던 연주의 수비를 담당했다.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켰을 때, 연주 대부분이 여포에게 넘어갔지만, 순욱은 하후돈과 협력하여 조조 진영에 남은 3개의 성을 지켜냈다.
196년, 헌제가 장안(長安)을 탈출해 낙양으로 도망쳐 오자, 순욱은 조조에게 헌제를 맞이하여 허창으로 모셔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일로 조조는 대장군이 되었고, 순욱은 시중[22](侍中), 상서령[23](尚書令)이 되었다. 헌제를 맞이한 것은 조조에게 큰 명분을 주었고, 이후 정치와 전략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년, 관도 전투에서 순욱은 본거지의 수비를 맡았다. 조조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철수를 고려하며 순욱에게 의견을 묻자, 순욱은 조조를 격려하며 철수에 반대했다. 또한 조조가 원소에게 승리한 후 유표를 공격하려 하자, 순욱은 "원소가 남은 무리를 수습하고 빈틈을 이용한다면 공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순욱의 진언에 따라 조조는 황하를 사이에 두고 원소와의 대치를 계속했고, 원소가 죽은 뒤 내분에 빠진 원소 세력을 공격하여 하북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203년, 순욱은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만세정후(萬歳亭侯)에 봉해졌다.
2. 3. 1. 인재 등용
하옹에게서 '왕좌의 재주를 가졌다'는 평을 들은 순욱은 189년 효렴에 추천되어 수궁령이 되었으나, 반동탁 연합이 결성되자 관직을 버리고 기주로 피난했다.[20] 기주목 한복의 초빙을 받았으나, 기주가 원소에게 넘어가자 그를 떠나 조조에게 갔다. 조조는 순욱을 "나의 자방(子房)[21]이 왔구나!"라며 크게 기뻐했다.순욱은 곽가, 사마랑 등 많은 인재를 조조에게 추천했다. 특히 청류파 명사로서의 인맥과 안목으로 순유, 진군, 종요, 사마의 등 뛰어난 인물들을 발굴하여 조조 진영의 참모진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순욱이 추천한 인재 중 대신으로 승진한 자는 십수 명에 달했다.
194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할 때 정욱과 함께 본거지 연주를 지켰다.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키자, 순욱은 하후돈을 불러 연주를 지켜냈다.
196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도망쳐 오자, 순욱은 조조에게 헌제를 맞이할 것을 건의했다. 조조는 헌제를 허창으로 맞이하여 대장군이 되었고, 순욱은 시중[22], 상서령[23]이 되었다.
200년 관도 전투에서 순욱은 본거지를 지키며 조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조조가 유표를 공격하려 하자 원소의 빈틈을 노려야 한다고 진언하여 조조가 하북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2. 3. 2. 주요 전투
전투명 | 시기 | 역할 | 주요 내용 | 결과 |
---|---|---|---|---|
반동탁 연합 | 189년 | 수궁령(守宮令) (관직을 버리고 낙향) |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옹립하자, 효렴에 추천되어 수궁령이 되었으나 반동탁 연합 결성 시기에 관직을 버리고 기주로 피난했다. | 기주로 피난 |
서주 침공 방어 | 194년 | 연주 수비 담당 | 조조가 도겸을 공격할 때 정욱과 함께 본거지 연주를 수비했다. 장막,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켰으나, 하후돈과 협력하여 3개의 성을 사수했다. | 연주 방어 성공, 조조군 근거지 유지 |
여포 격파 | 194년 ~ 195년 | 조조에게 조언 | 조조에게 연주를 우선 평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조조가 여포를 격파하고 연주 평정 |
헌제 옹립 | 196년 | 조조에게 조언 | 조조에게 헌제를 허창으로 맞이할 것을 제안했다. | 조조가 헌제를 옹립, 정치적/전략적 우위 확보, 순욱은 시중, 상서령에 임명됨 |
관도 전투 | 200년 | 본거지 수비 및 조언 | 원소군의 약점을 분석하고 조조에게 조언했다. 조조가 철수를 고려할 때 격려하며 반대했다. | 조조의 승리에 기여, 순욱은 만세정후(萬歳亭侯)에 봉해짐 |
유표 공격 반대 | 201년 | 조조에게 조언 | 조조가 유표를 공격하려 하자 원소를 먼저 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 조조가 원소 세력 공격, 하북 대부분 장악 |
2. 4. 최후
조조는 순욱이 동소의 제안에 반대한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17] 이후 순욱은 손권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에 참여한 병사들을 포상하기 위해 초현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순욱은 병이 들어 치료와 요양을 위해 수춘(寿春, 현재의 수현, 안후이성)으로 옮겨졌다.[18] 그는 다음 해인 212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조조의 공작 등극에 대한 반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19]같은 해, 조조는 손권을 정벌하러 갔다. 이때 조조는 초에서 군대를 위로하는 데 순욱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순욱은 지절, 시중, 광록대부에 임명되어 조조의 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20] 이때, 활쏘기가 취미였던 조비와 활에 대해 담소했다고 한다.[21]
조조가 유수까지 군대를 진격시키려 했을 때, 순욱은 병이 들어 수춘에 남았다. 그는 우울함 속에 사망했는데, 향년 50세였다. 시호는 '''경후'''이다.[22] 그의 죽음에는 수수께끼가 많으며, 자살이라고도 한다. 『후한서』, 『위씨춘추』에서는 조조로부터 받은 그릇의 내용물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의도를 "너는 이제 쓸모없다"라고 해석한 순욱이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한다.[23] 또한, 『헌제춘추』에서는, 과거 동승이 살해되었을 때, 복완으로부터 조조에 대한 반란을 암시하는 편지를 오랫동안 묵비하고 있었고, 그것이 발각될까 두려워 자기 변명과 비슷한 고발을 한 탓에 조조로부터 소외된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순욱의 죽음 다음 해에 조조는 염원하던 위공이 되었고, 그 후 위왕으로 올랐지만 수년 만에 병사했다. 그 후 조비는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다. 순욱의 죽음으로부터 8년 후의 일이었다.
3.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순욱을 그의 연장자인 조카 순유, 그리고 모사 가후와 함께 같은 권(삼국지 위서 10권)에 넣었다. 진수는 순욱에 대해 청아한 풍모와 왕좌의 풍격, 선견지명을 갖췄지만 뜻을 달성하는 데는 뛰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1]
배송지는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당시 난세를 평화로 이끌었던 조조에게 협력한 것밖에는 없었다. 이 일로 인해 한나라는 살아나지 못했지만, 백성들은 구할 수 있었다'고 극찬했다. 또한 가후를 싫어하여 순욱을 가후 등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12] 범엽은 순욱을 후한왕조에게 순사한 충신으로 평가하여 후한서에 순욱의 전기를 따로 싣었다.
순욱은 누구나 인정하는 조조의 패업을 이루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다. 조조 휘하에 뛰어난 책사는 많았지만 순욱은 단순히 수하 중 한 사람을 넘어 패업의 공동설계자이자 동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종요는 "(공자의 제자) 안회가 죽은 후, 그에 필적하는 덕을 갖춘 유일한 인물이다"라고 칭찬했다(『순욱별전』).
사마의는 "서적에 쓰여진 일이나, 먼 곳의 일을 보거나 듣거나 했지만, 백 수십 년 동안 순욱을 능가하는 현명한 인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순욱별전』).
예형은 "문약(순욱)은 조문 가는 것이 어울린다"라고 조롱했지만, 배송지는 다른 사람의 험담만 하는 것으로 평판이 나빴던 예형도 순욱의 풍채가 좋다는 것만큼은 인정했다는 실례로 들고 있다(『삼국지』「순욱전」이 인용한 『평원예형전』).
당의 두목은 "순욱이 위무(조조)에게 연주를 취할 것을 권했을 때는, 위무를 한고조·광무에 비유했고, 관도에서 허도로 돌아가지 않고 머물게 했을 때에는, 이를 초한(의 싸움에서 한나라가 승리한 것)에 비유했는데, 사업이 완수되자, 이름을 한대에 구하려 했다. 예를 들어, 도둑에게 담벼락에 구멍을 뚫게 하고, 관을 파헤쳐 놓고, 도둑과 손을 끊은 것과 같다. (순욱을) 도둑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자치통감』권66·한기58·효헌황제 신건안17년 10월 조, 사마광에 의한 인용).
사마광은 "위무를 고조·광무제, 초·한에 비유한 것은, 순욱이 실제로 한 말이 아니고, 사가의 창작임이 틀림없으니, 이 일은 순욱의 죄가 아니다."라고 두목에게 반론하고 있다. 또한 "한말의 대란은 환공 시대부터 심했는데 순욱은 조조에게 천하의 8할을 다스리게 했다. 그 공은 관중을 넘어섰다. 관중은 자규에게 순종하지 않았지만, 순욱은 한나라에 순종했다. 그 인은 관중을 넘어섰다"라고도 말했다.
이시이 히토시는 "순욱은 천하 통일을 위해, 천자라도 이용하려 했으니 한조의 순신은 아니다",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순욱이 적벽대전에서의 패배 이후, 형식을 가리지 않는 패권 추구로 향하는 조조에게 반대하면서, 순욱이 잘려나갔다"라고 평가하고 있다.[13]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설명 |
---|---|---|
조부 | 순숙(荀淑) | 낭릉령(Langling) 역임 |
부친 | 순곤(荀緄) | 제남상(Jinan) 역임 |
숙부 | 순검(荀儉) | |
순정(荀靖) | ||
순도(荀燾) | ||
순왕(荀汪) | ||
순상(荀爽) | 평원상, 소부, 사공 역임 | |
순숙(荀肅) | ||
순부(荀旉) | ||
형제 | 순연(荀衍) | 셋째 형 |
순침(荀諶) | 넷째 형, 원소를 섬겼고, 한복을 설득하여 항복시켰으며, 관도 전투 이후 행적 불명 | |
배우자 | 당씨(唐氏) | 당형(唐衡)의 딸 |
아들 | 순운(荀惲) | 호분중랑장 역임, 조조의 딸 안양공주와 결혼, 요절 |
순우(荀俁) | 황문시랑 역임 | |
순선(荀詵) | 대장군참군 역임, 요절 | |
순의(荀顗) | 진(晋)나라 때 사공까지 올랐으며, 사후에 임회강공(臨淮康公)으로 추증 | |
순찬(荀粲) | 학자이자 현학 철학자, 조홍의 딸과 결혼 | |
사위 | 진군 | 위(魏)나라를 섬겼으며, 구품관인법을 창시 |
사촌 | 순열(荀悅) | 후한의 역사가이자 순검의 아들 |
순채(荀采) | 순상의 딸로, 음유(陰瑜)와 결혼 | |
기타 사촌 | 순욱(荀勗) | 순상의 증손자로, 진(晋)나라 초대 황제 사마염(司馬炎)의 영향력 있는 대신. 순욱의 아들들 또한 고위 관료가 되었고, 그의 손자들은 동진에서 벼슬을 지냄 |
재종질 | 순유 | 조조의 책사 중 한 명 |
손자 | 순한(荀甝) | 순운의 장남, 광양향후에 봉해졌으며, 30세에 사망 |
순익(荀霬) | 순운의 차남, 사마의의 딸 남양공주와 결혼, 장군 역임, 사후에 진후로 추증 | |
순우(荀寓) | 순우(荀俁)의 아들, 진나라 때 상서 | |
진태(陳泰) | 진군(陳群)의 아들, 강유의 북벌에 대항하여 참전 | |
증손 | 순준(荀頵) | 순한의 아들, 우림감을 역임, 요절 |
순담(荀憺) | 순익(荀霬)의 장남, 시중 | |
순개(荀愷) | 순익(荀霬)의 차남, 진나라 때 정서장군 역임 | |
순괴(荀悝) | 순익(荀霬)의 셋째 아들, 진나라 때 호군장군 역임, 사후에 차기대장군으로 추증 | |
순우(荀羽) | 순우(荀寓)의 아들, 상서를 역임 | |
후손 | 순숭(荀崧) | 순준의 아들, 중서감 |
순관(荀灌) | 순숭의 딸 | |
순선(荀羨) | 순숭의 아들, 호분북중랑장, 서주, 연주 자사 역임 | |
순백자(荀伯子) | 순선의 손자, 유송 시대에 황문시랑 역임, 순씨가전(荀氏家傳)의 저자 |
5. 대중문화 속 순욱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진 · 삼국무쌍 7 엠파이어스》에서는 팬들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여론 조사를 통해 신규 무장 중 한 명의 이름을 순욱으로 결정했다. 이후 순욱은 코에이의 《진 · 삼국무쌍 8 엠파이어스》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했다.
코에이의 《결전 2》에서 순욱은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조조에게 짝사랑을 품은 여성으로 묘사된다. 비주얼 노벨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 《연희무쌍》에서 준이쿠(순욱의 일본식 이름)는 소소(조조)의 책사로 활동하며 그녀에게 강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위자드 오브 더 코스트의 매직 더 개더링 카드 게임에서 순욱은 포탈 쓰리 킹덤즈 세트의 "위의 조언가 순욱"이라는 마법 카드로 등장한다. 카드 삽화에서 순욱은 용기를 열고 있으며, 한나라 시대 조언자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카드에 적힌 그의 대사는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훌륭한 재능! 그의 어리석음은 조조의 권력에 봉사하는 데 있었다."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순욱은 조조의 책사로 등장하여 때때로 조조에게 조언과 계략을 제공한다. 조조가 군웅할거하던 시대에는 유비에게 관직을 주어 그 대가로 여포를 치게 하는 "이호경식지계(二虎競食之計)",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와 같은 계책을 만들어냈다. 최후에는 위공 책립을 둘러싸고 조조와 대립하여 자결하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10]
참조
[1]
기록
Xun Yu's biography in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2]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3]
문서
"Zifang" was the [[courtesy name]] of [[Zhang Liang (Western Han)|Zhang Liang]], a prominent advisor to [[Emperor Gaozu of Han|Emperor Gao]]. Zhang Liang contributed greatly to the founding of the [[Ha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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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後漢書/卷62/荀韓鐘陳列傳第五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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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緄の三男。荀彧の長兄と次兄については、名も事蹟も不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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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国志』「荀彧伝」本文によると弟。『荀氏家伝』では兄、『[[三国志演義]]』では従弟とされる。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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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流派の名士であった荀氏の子息が、宦官の一族と繋がったことで批判を受けたようであるが、当時4歳の荀彧が婚儀を取り決めるわけがなく、唐衡の荀家への圧力によるものであろう。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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献帝を迎えたことによって曹操は道義的に大きな後ろ盾を得、後の政戦両略を有利に進めていった。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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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事においても公正さを発揮し、素行の悪い甥が1人いたが、彼を取り立てるようなことはしなかったという(『典略』)
[10]
서적
三国志演義
岩波新書
1994-08-2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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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臣20選には、'''荀彧'''、[[荀攸]]、[[袁渙]]、[[崔琰]]、[[徐邈]]、[[陳羣]]、[[夏侯玄]]、[[王経]]、[[陳泰]](以上[[魏 (三国)|魏]])、[[諸葛亮]]、[[龐統]]、[[蔣琬]]、[[黄権]](以上[[蜀漢|蜀]])、[[周瑜]]、[[張昭]]、[[魯粛]]、[[諸葛瑾]]、[[陸遜]]、[[顧雍]]、[[虞翻]](以上[[呉 (三国)|呉]])を選出している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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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彧のことは「英英文若 靈鑒洞照 應變知微 探賾賞要 日月在躬 隱之彌曜 文明映心 鑽之愈妙 滄海橫流 玉石同碎 達人兼善 廢己存愛 謀解時紛 功濟宇內 始救生人 終明風概」と謳われている
[13]
서적
曹操 魏の武帝
新人物往来社
[14]
서적
宋書』巻60
[15]
서적
資治通鑑』巻89・晋紀11・孝愍皇帝下の繋年より
[16]
서적
晋書』巻96・列女伝より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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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政軍)의 어느 분야를 관할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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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국의 장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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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종이, 먹, 붓등의 관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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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孔荀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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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방은 [[전한]]의 건국공신 [[장량]]의 자(字)로 [[한 고조|유방]]의 군사로써 그의 패업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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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곁에서 질문에 답하는 직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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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발행을 관장하는 정치의 핵심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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