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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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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토 결전"은 1944년 말, 일본 제국이 필리핀 전투 패배 이후 연합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하여 준비한 방어 전략을 의미한다. 일본은 국체 호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연합군의 상륙을 지연시키기 위해 1945년 1월 '제국 육해군 작전 계획 대강'을 수립, 쿠릴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남서 제도를 전연 지대로 설정하고 점감 요격 전략을 채택했다. 1945년 4월에는 '결호 작전'으로 명명하고, 1억 옥쇄 사상을 강조하며 지구전을 인정하지 않는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소련의 참전과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본토 결전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본토 결전 준비 과정에서 대량의 병력 동원과 지휘 체계 개편이 이루어졌으며, 국민 의용대 조직을 통해 전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려 했다. 오키나와 전투의 영향, 히로뽕 문제, 한국의 독립과 분단 등 현대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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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결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일본 본토 결전의 개략도
일본 본토 결전의 개략도
시기1945년 11월 (예정)
장소일본 본토 및 주변 섬, 해역
결과일본의 항복으로 작전 중지
교전 세력
연합국
지휘관
추축국쇼와 천황
스즈키 간타로
하타 슌로쿠
요코야마 이사무
시치다 이치로
니시하라 간지
나가사와 미츠오
가와베 마사카즈
스기야마 겐
히구치 기이치로
오자와 지사부로
고이소 구니아키
연합국해리 S. 트루먼
월터 크루거
윌리엄 홀시 주니어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토머스 C. 킨카이드
칼 스파츠
커티스 르메이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
클레멘트 애틀리
아서 해리스
해리 코비
프레더릭 셔거
이오시프 스탈린
장제스
병력 규모
추축국30,000,000명 이상
연합국1,500,000명 이상
참가 부대 (추축국)
참가 부대 (연합국)
해군 전력 (연합군)전함: 24척 이상
항공모함: 60척 이상
구축함: 450척 이상
보조 함정: 3,500척 이상
공군 전력 (연합군)항공기: 6,000기 이상
피해 규모
추축국중단으로 인해 없음
연합국중단으로 인해 없음

2. 배경

1944년 말, 일본은 필리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연합군의 잠수함과 항공 공격으로 일본의 해상 수송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제해권과 제공권마저 상실하면서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였다.

2. 1. 일본 제국의 위기

일본 제국 정부대본영은 "일미의 천왕산"이라며 필리핀 전투를 사수하고자 전력을 다했으나, 1945년 1월 9일 연합군이 루손섬 링가옌 만에 상륙하면서 일본군의 패배가 거의 결정되었다. 필리핀 상실과 본토 진공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일본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빼앗겼다. 연합군의 잠수함과 항공기 공격으로 통상 파괴가 이루어졌고, 기뢰에 의한 일본 연안 해상 봉쇄로 내지와 외지 간 연락망은 완전히 차단되어 철수와 증원도 불가능했다.

거국 일치 체제하에 연합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한 방위 준비가 이루어졌지만, 제해권 및 제공권 상실로 석유, 금속 등 군수 물자가 부족하여 더디게 진행되었다. 송근유를 대체 연료로 생산하고 강재 절약을 위해 콘크리트 선(무치마루) 건조도 이루어졌지만,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인한 폭격까지 겹쳐 유효한 방위 체제 구축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2. 2. 연합군의 압박

1945년 1월 9일, 연합군이 루손섬 링가옌 만에 상륙하면서 필리핀 전투에서 일본군의 패배가 거의 확실해졌고, 필리핀 상실과 본토 침공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1]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연합군은 잠수함과 항공기를 이용한 통상 파괴에 더해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했다.[2] 기뢰를 이용한 일본 연안 해상 봉쇄로 내지와 외지의 연락망은 완전히 끊겼고, 철수와 증원 모두 불가능한 상황이었다.[2]

한편, 연합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한 방위 준비는 거국 일치 체제라는 구호 아래 진행되었지만, 본토와 점령지 사이의 제해권 및 제공권 상실로 석유, 금속 등 군수 물자가 심각하게 부족하여 더디게 진행되었다.[3] 항공기용 대체 연료로 송근유를 생산하고 강재를 절약하기 위해 콘크리트 선 (무치마루) 건조까지 시도되었다.[3]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인한 폭격까지 더해져, 효과적인 방위 체제 구축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3]

3. 본토 방위전 준비

1945년 1월 20일, 대본영은 '제국 육해군 작전 계획 대강'을 통해 연합군의 본토 상륙을 지연시키고 그사이 본토의 작전 준비 태세를 확립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는 해군의 점감 요격 전략이 채택되었다.[2]

1945년 4월 8일, 대본영은 '결호 작전 준비 요강'을 지시하고, 일련의 방위 계획을 '결호 작전'으로 명명했다. 일본군은 연합군의 본토 침공 시기를 1945년 가을로 예측했으며, 이는 실제로 연합군의 일본 본토 침공 계획과 거의 일치했다.

3. 1. 기본 구상

초기에 일본 대본영은 본토에서의 지상전을 예상하지 않았지만, 절대 국방권이 무너지면서 본토 방위전을 처음부터 고려해야 했다.

국체 호지가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1944년 1월경부터 마쓰시로 대본영 건설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1944년 7월 20일, 참모총장은 '본토 연안 축성 실시 요강'을 제시하고, 연합군 상륙에 대비하여 구주쿠리 해안, 가시마나다, 하치노헤에 진지 구축을 명령했다. 또한, 관동 방위를 위해 대본영 직속 부대로 제36군이 편성되었다.

1944년 7월 24일, 대본영은 '육해군 이후의 작전 대강'을 정하고, 필리핀, 쿠릴 열도, 본토, 대만의 4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침공을 예상한 요격 작전 준비를 명령했다(쇼호 작전).

필리핀에 미군이 침공하자, 대본영은 쇼이치호 작전을 발동했지만, 레이테 만 해전에서 연합 함대가 괴멸하는 대패를 겪어, 일본은 해상 작전 능력을 사실상 잃었다.

그 결과, 대본영은 본격적으로 본토 방위 계획에 집중했다. 연합군의 본토 상륙 침공을 늦추고, 그 사이에 본토의 작전 준비 태세를 갖추기 위한 '제국 육해군 작전 계획 대강'을 1945년 1월 20일에 정하고, 육상 방위전에 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이 작전 계획은 '전연 지대', 즉 쿠릴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남서 제도의 오키나와 본도 이남, 대만 등을 '외곽'으로 하고, 연합군이 침공해 오면 최대한 항전하여 적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장거리 침공해 오는 적을 일본 본토 깊숙이 유인한 후 격퇴한다는 해군의 점감 요격 전략이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8일, 대본영은 연합군 상륙 시에는 각 방면군이 독립적으로 끝까지 전투에 임할 것과 '결호 작전 준비 요강'을 지시하고, 일련의 방위 계획을 정식 작전명 '결호 작전'으로 했다. 이후 대본영의 구상은 부대의 후퇴, 지구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취지를 각 부대에 알리고[2], 1억 옥쇄 사상에 휩싸이게 된다.

일본군은 연합군이 본토에 침공해 오는 시기를 1945년 가을로 예측하고 있었다.

3. 2. 육군

1945년 1월, 일본 육군은 방위총사령부를 제1총군과 제2총군으로 분할하고, 항공 전력의 일원 운용을 위해 항공총군을 신설하여 지휘 체계를 효율화하려 했다.[1]

3. 2. 1. 지휘 체계 개편

1945년 1월 22일, 일본군오키나와 전투 전에 해체된 북방군, 대만군과 더불어, 1944년부터 본토 방위의 총지휘를 맡고 있던 방위총사령부 예하의 동부군, 중부군, 서부군, 조선군을 폐지하고, 새롭게 방면군과 군관구를 신설했다.[1] 이를 통해 작전과 군정의 분리를 실시하여 본토 결전에서의 지휘 계통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1]

4월 8일, 지휘의 원활화를 위해 방위총사령부는 제1총군과 제2총군으로 분할되었다.[1] 양 총군의 지휘 범위는 스즈카 산맥을 경계로 했다.[1] 또한, 항공 전력의 일원 운용을 위해 항공총군이 신설되었다.[1]



이러한 일련의 신 지휘 계통 확립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1]

총군방면군군관구 및 관할 지역
제1총군제11방면군도호쿠군관구 (도호쿠 지방)
제12방면군동부군관구 (간토, 고신에쓰 지방)
제13방면군도카이군관구 (도카이, 호쿠리쿠 지방)
제2총군제15방면군중부군관구 (간사이, 주고쿠, 시코쿠 지방)
제16방면군서부군관구 (규슈 지방)
제5방면군북부군관구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 열도 등 북해 지방)
제17방면군조선군관구 (한반도)
제10방면군대만군관구 (대만)


3. 2. 2. 병력 배치

일본은 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근절 동원'을 통해 대규모 병력을 소집하고, 부대를 신설했다. 1945년 2월 28일에 임시 동원이 하달된 제1차 병비를 시작으로, 4월 2일과 6일에 걸쳐 제2차 병비, 5월 23일에 제3차 병비가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일반 사단 40개, 독립 혼성 여단 22개 등 약 150만 명 가까이가 동원되었다.[1]

그러나 기간과 물자의 제한으로 인해 병력이나 장비가 부족하더라도 편성이 완료된 것으로 간주하는 방침이 취해졌다. 따라서, 이들 사단은 어중간한 인원과 장비 상태로 배치되었다.[1]

연안 경비 등을 목적으로 특설 경비대가 편성되었고, 국민 전투 조직과 연계하는 부대로서 지구 특설 경비대도 편성되었다. 연대구 사령부는 징병 관련 사무 처리 기관이었으나, 지구 특설 경비대 등을 지휘하여 전투 임무를 맡게 되었고, 직원 겸임의 지구 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이러한 부대들은 병기, 훈련 모두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1]

본토 소재 군 부대의 증가에 따른 군의 질서 유지 및 군민 관계 조정을 위해 국내 배치된 헌병의 증강도 이루어졌다. 정규 헌병은 14,203명, 보조 헌병은 9,222명이었다. 이로 인해 국내 헌병은 단번에 3배의 병력이 되었다.[1]

3. 2. 3. 특수 군무 기관 이전

『제국 육해군 작전 계획 대강』에 따라, 본토 방위전에서의 첩보전, 비밀전, 유격전, 세균전에 대비하여 육군 나카노 학교는 군마로, 노보리토 연구소는 나가노로 이전되었다.

3. 3. 해군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조직적인 전투력을 상실한 일본 해군은 해군 총대를 설치하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해군총사령장관을 겸임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3. 3. 1. 지휘 체계 개편

레이테 만 해전에서 패배하여 많은 함정을 잃고, 이미 조직적인 전투력을 상실한 일본 해군은 남동 방면 함대 및 남서 방면 함대를 제외한 전 부대를 통일 지휘하기 위해 육군의 지휘 체계 개편과 같은 시기인 1945년 4월 25일에 게이오기주쿠 대학 히요시 캠퍼스에 해군 총대 사령부를 설치했다. 초대 해군 총사령 장관에는 연합 함대 사령 장관을 겸임한 도요다 소에무 대장이 임명되었고, 이어서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임명되었다.

3. 4. 행정 및 민병 정비

군사 특별 조치법이 시행되어 선박, 항만 등의 일원적인 운영과 지방 행정 조직의 전시 체제 전환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선박 운영회에 위임되었던 선박 관리는 군 징용선과 함께 신설된 대본영 해운 총감부에서 실시하게 되었다.

3. 4. 1. 국민의용대 조직

3월 하순 이후 육군과 해군과는 별도로 전 국민을 전투력으로 만들기 위한 국민 전투 조직 편성이 추진되었다. 3월 23일 통제 강화와 민간 방위를 위한 국민 의용대 설치가 각의 결정되었고, 국민학교 초등과를 마친 사람부터 65세 이하의 남성과 45세 이하의 여성 중 병약자와 병역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지역 단위로 조직했다.[1] 6월 22일 의용병역법이 공포되면서 국민의용대는 육군과 해군의 정규 부대 외의 보조 전투 조직인 국민의용전투대로 편입될 수 있게 되었다.[1] 의용병역법에서는 병역법 대상이 아닌 청년층, 고령자, 여성도 대상으로 포함되었고, 남성은 15세 이상 60세 이하(당시 남성 평균 수명 46.9세), 여성은 17세 이상 45세 이하까지가 「의용 소집」에 의해 국민의용전투대 대원으로 편입되어 「의용병」으로서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1] 다만 소집을 거부할 수 없으며, 도망이나 기피에 대해서는 벌칙이 가해졌다.[1] 대상 연령자가 아닌 사람도 지원하면 전투대에 참가할 수 있었고, 그 외의 사람은 전투가 예상되는 지역에서 대피할 예정이었다.[1] 이에 따라 재향 군인회가 자율적으로 조직했던 방위대는 국민의용대로 통합되었다.[1]

4. 준비 경과

1945년 4월, 연합군이 오키나와 전투를 개시하여 일본 본토를 압박해오자, 일본은 소련을 통한 강화 공작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본토 결전을 준비했다.[4]

쇼와 천황 독백록에 따르면, 1945년 6월 12일, 쇼와 천황은 "해안 지방의 방비가 좋지 않으며, 결전 사단조차 무기가 충분히 지급되지 않았다. 적이 떨어뜨린 폭탄의 철을 이용하여 '삽'을 만든다는 것은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가장 방비가 잘 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가고시마 반도의 부대조차 대전차포가 없는 형편이었고, 병사들은 매일 참호 굴착에 동원되어, 만족스러운 훈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5]

4. 1. 오키나와 전투

1945년 4월 연합군이 오키나와 전투를 시작하여 6월에는 오키나와 점령을 거의 완료했다. 연합군은 일본의 조기 항복을 위해 기뢰잠수함을 이용한 일본 본토 해상 봉쇄, 폭격기를 통한 도시 공습을 실시했지만, 항복을 이끌어내는 데는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연합군은 본토 상륙을 통해 도쿄를 점령하여 전쟁을 끝내려 했다.[4]

4. 2. 강화 공작 실패

일본 정부는 러일 전쟁을 염두에 두고 소련을 중개로 천황제 유지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국체 호지"를 내걸고 강화 공작을 펼쳤지만, 태평양 전쟁의 최종 목표로 국가 체제의 파괴를 내건 연합군에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고[4], 별다른 결과를 낳지 못했다.

4. 3. 포츠담 선언과 일본의 항복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최고 전쟁 지도 회의는 소련의 중개 응답을 기다리기로 했으나, 군부는 국민 사기를 이유로 비난 성명을 요구했다.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기자 회견에서 "중대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며, 묵살할 뿐이다"라고 말했다.[4]

이후, 소련의 대일 참전으로 최고 전쟁 지도 회의의 어전 회의에서 쇼와 천황의 "성단"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이 결정되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연합국에 포츠담 선언을 정식 수락한다고 통고했다. 다음 날인 8월 15일, 이 사실이 발표되었고, 9월 2일에는 정식 조인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본토 결전"은 예상과 계획으로만 끝나게 되었다.

5. 각국 군의 예상

일본 본토 결전 개략도


일본군은 규슈간토 지방을 중심으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특공을 주력으로 한 항공 공격을 계획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다음 날 9일 새벽, 만주·조선 북부와 쿠릴 열도·사할린에 침공했다(소련의 대일 참전). 소련은 홋카이도 북반부 점령을 미국에 요구했으며, 실제로 1945년 8월 후반에는 군에 홋카이도 상륙 준비 명령을 내렸다.

중국군은 일본 본토 결전을 지원하는 양동작전으로 10월 후반에 중국 대륙에서의 전면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5. 1. 일본군의 작전

일본군은 쿠릴 열도에서 규슈까지 일본 전역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징발을 통해 전투 요원을 확보했다. 특히 규슈간토 지방에 진지 구축이 집중되었다. 군인 외에 지역 주민들도 동원되어 참호와 비행장을 건설했다. 항공 공격은 야간 뇌격 폭격을 주력으로 하는 통상 공격도 포함되었지만, 특공이 주축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1]

5. 2. 연합국 군의 작전

연합군은 다운폴 작전을 통해 일본 본토 상륙을 계획하였다.

5. 3. 소련군의 동향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다음 날 9일 새벽, 만주·조선 북부와 쿠릴 열도·사할린에 침공했다(소련의 대일 참전). 소련은 홋카이도 북반부 점령을 미국에 요구했으며, 실제로 1945년 8월 후반에는 군에 홋카이도 상륙 준비 명령을 내렸다.

5. 4. 중국군의 동향

중국군은 일본 본토 결전을 지원하는 양동작전으로 10월 후반에 중국 대륙에서의 전면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6. 주일 외교관에 대한 대응

일본은 독일 등 동맹국과 소련 같은 비교전국,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등 중립국 외교관 대다수가 도쿄나 피난처인 가루이자와 등에서 통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연합군 상륙 시에는 일본 정부와 함께 피난하고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7. 현대에 미친 영향

"본토 결전"은 임시변통 전략으로, 전후 일본의 방위 전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작가 카사이 키요시는 본토 방위전이 벌어졌을 경우 희생자 수를 200만에서 300만 명으로 추산하며, 이러한 참화를 피한 것은 "행운"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 대가로 일본인이 무엇을 잃었는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고도 지적했다.[6]

7. 1. 오키나와 전투의 영향

오키나와 전투는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일본 정부가 자국민과 영토를 전략적 희생시키는 선택을 오키나와에만 강요한 결과, 전후 오키나와는 본토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는 기지 문제 등으로 이어졌다.[6]

7. 2. 한국의 독립과 분단

일본의 항복은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졌지만, 미·소 양군에 의한 분단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이는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7. 3. 히로뽕 문제

본토 결전을 위해 피로 회복용 히로뽕이 대량 생산되었으나,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종전 시 대량으로 비축되었다. GHQ에 압수되었다가, 이후 일본군의 저장 의약품 개방 지시에 따라 다른 의료품과 함께 대량으로 시장에 유출되었다. 이는 부족했던 술이나 담배를 대신하여 널리 퍼져나가, 많은 약물 의존자를 발생시켰다.[7]

참조

[1] 문서 소련군에 의한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에서의 육상전투 가능성
[2] 문서 대본영 "국토결전교령" 1945년 4월 20일 발령 등
[3] 문서 홋카이도, 쿠릴 열도, 사할린, 오가사와라 제도, 난세이 제도의 본토 주변부, 군사학교 등의 약 41만 2천 명, 항공 부대, 선박 부대 등의 인원 약 45만 3천 명을 합쳐도 132만 1천 명으로, 총 병력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4] 서적 8·15と3·11 戦後史の死角 NHK出版新書
[5] 서적 昭和天皇独白録 文藝春秋
[6] 서적 8·15と3·11 戦後史の死角 NHK出版新書
[7] 웹사이트 SCAPIN-389: CUSTODY AND DISTRIBUTION OF JAPANESE MILITARY MEDICINAL NARCOTIC STOCKS 1945/12/04 https://dl.ndl.go.jp[...] 국립국회도서관 20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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