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스와프 5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볼레스와프 5세는 1226년에 태어나 1279년에 사망한 폴란드의 대공으로, "정숙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그는 레셰크 1세의 아들이자 루리크 왕조 출신 그지미스와바의 아들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린 나이에 섭정을 거치며 권력을 유지했다. 1239년 헝가리의 킹가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으며, 몽골의 침략과 콘라트 1세와의 갈등 속에서 크라쿠프를 재건하고 도시 개발을 추진했다. 그는 요트빙기아인의 기독교화와 헝가리와의 협력을 통해 외교 정책을 펼쳤으며, 1265년 레셰크 2세를 양자로 입양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도시 개발, 교회 후원 등 내정에도 힘썼으며, 사후에는 레셰크 2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26년 출생 - 카를루 1세
프랑스 왕족 출신인 카를루 1세는 앙주 백작, 프로방스 백작, 시칠리아, 나폴리, 예루살렘, 알바니아 왕, 아카이아 공작을 겸했으며, 시칠리아 왕국 정복 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왕국을 잃고 나폴리 왕국만을 통치했고 예술과 문화를 후원했다. - 1226년 출생 - 레셰크 2세
레셰크 2세는 "흑색공"으로도 불린 폴란드 공작으로, 시에라츠 공작을 거쳐 크라쿠프와 산도미에르츠의 공작이 되었으나, 외세 침략과 내부 반대에 직면했고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폴란드 시니어레이트 주를 둘러싼 권력 투쟁을 야기했다. - 1279년 사망 - 육수부
육수부는 남송 말기의 충신이자 정치가로, 원나라의 침공에 맞서 남송의 마지막 저항을 이끌었으며, 어린 황제를 옹립하여 국정을 운영하다 야먼 해전에서 패배 후 순절하여 충절의 상징으로 기려진다. - 1279년 사망 - 남송 소제
남송 소제는 남송 도종의 아들로, 1278년 즉위했으나 이듬해 애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함으로써 남송을 멸망시킨 인물이다. - 산도미에시 공작 - 브와디스와프 1세
브와디스와프 1세 워키에테크는 피아스트 왕조 시대에 폴란드 대부분을 재통일한 왕으로, 쿠야비 공국의 영주에서 폴란드 왕으로 즉위하여 폴란드 재통합과 독립 왕국임을 선포하고 독일 기사단과의 전쟁에 힘썼다. - 산도미에시 공작 - 바츨라프 2세
바츨라프 2세는 1278년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폴란드 왕으로 즉위했으며, 헝가리 왕위 계승에도 관여했으나 1305년에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5세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볼레스와프 프스티들리비 |
로마자 표기 | Bolesław Wstydliwy |
통치 | |
폴란드 대공 | predecessor: 콘라트 1세 successor: 레셰크 2세 reign: 1243년 – 1279년 |
산도미에시 공작 | predecessor: 볼레스와프 1세 successor: 레셰크 2세 reign: 1227년 – 1230년, 1232년 – 1279년 |
가족 | |
왕가 | 피아스트 가 |
아버지 | 레셰크 1세 |
어머니 | 그지미스와바 우츠카 |
배우자 | 킨가 |
자녀 | 없음 |
생애 | |
출생일 | 1226년 6월 21일 |
출생지 | 스타리 코르친 |
사망일 | 1279년 12월 7일 |
사망지 | 크라쿠프 |
매장지 | 크라쿠프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교회 |
종교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2. 출생과 별명
볼레스와프 5세는 1226년 6월 21일 스타리 코르친에서 태어났다.[1] 레셰크 1세 백공과 그의 아내 그지미스와바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이자 외아들이었다. 증조부 볼레스와프 3세 즈비그니에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숫자 5는 ''Poczet królów Polskich''에서 부여되었다.[2]
1227년 아버지 레셰크 1세가 공가바 회의에서 살해당하면서 볼레스와프 5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5] 크라쿠프 귀족들은 어머니 그르지미스와바와 지역 보이보드, 주교의 공동 섭정을 원했지만, 이는 1217년 레셰크와 브와디스와프 3세 간의 상호 상속 조약에 어긋나는 것이었다.[5]
"정숙왕"(라틴어: ''Pudicus''[3])이라는 별명은 비교적 일찍 나타났으며 이미 ''크라쿠프 프란체스코회 연대기''에 언급되었다.[4] 이 별명은 볼레스와프 5세와 그의 아내 킹가가 함께 서약한 정결 서약 때문에 신하들이 붙인 것이다.
3. 유년 시절
1227년 12월 6일, 쿠야비의 카지미에시 1세는 아버지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를 대리하여 볼레스와프 5세에 대한 후견 권리를 주장했으나,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를 선호했다.[5] 1228년 3월, 콘라트 1세는 직접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6]
1228년 5월 5일, 치에니아 회담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는 볼레스와프 5세를 입양하고 크라쿠프와 대폴란드의 후계자로 삼기로 합의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3세는 크라쿠프 통치권을 넘겨받았고, 그르지미스와바와 볼레스와프 5세는 산도미에르츠 공국에서 섭정을 행사했다.[9]
1233년,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는 그르지미스와바와 볼레스와프 5세를 납치하여 체르스크와 시에치후프에 감금했다.[12] 헨리크 1세의 도움으로 탈출한 후, 그르지미스와바는 아들을 대신하여 크라쿠프에 대한 권리를 헨리크 1세에게 양도했다.[12]
1241년, 폴란드에 대한 몽골의 첫 번째 침략 당시 볼레스와프 5세는 헝가리로 피신했다가 모라비아를 거쳐 폴란드로 돌아왔다.[2] 헨리 2세 사후,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가 크라쿠프를 점령했으나, 1243년 수호돌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볼레스와프 5세가 통치권을 되찾았다.[2]
3. 1. 아버지의 죽음
1227년 11월 24일, 공가바 회의에서 볼레스와프 5세의 아버지 레셰크 1세가 살해당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볼레스와프 5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레셰크 공작의 사망 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외아들을 후견하려 했다. 크라쿠프의 귀족들은 과부 공작부인 그르지미스와바와 지역 보이보드, 주교가 공동으로 섭정을 수행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는 1217년 레셰크와 브와디스와프 3세가 서명한 상호 상속 조약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 따르면 한 사람이 사망할 경우, 다른 사람은 그의 영지를 통치하고 미성년 자녀를 후견하기로 되어 있었다.[5]
1227년 12월 6일, 쿠야비의 카지미에시 1세는 레셰크 1세의 장례식에서 그의 아버지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를 대표하여, 볼레스와프 5세와 그의 상속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었다.[5] 이에 대한 응답이 없자, 콘라트 1세는 1228년 3월 전반기에 스카리셰프에 와서 그르지미스와바 및 지역 귀족들과 협상하여 미성년자인 조카를 후견하려고 했다.[6] 귀족들, 특히 그리피치 가문은 브와디스와프 3세의 통치를 선호했지만, 그는 당시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와 싸우느라 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콘라트 1세는 그 후 크라쿠프 북부에 나타났지만, 그의 곁에는 토포르 가문과 슈타르자 가문만이 있었다.[7] 따라서 시니오레이트(Seniorate)를 차지하려는 이 시도는 실패했다. 카지미에시 크로토프스키에 따르면, 소폴란드 부재는 프로이센의 마조비아 침공의 원인이 되었다.[8]
3. 2. 브와디스와프 스핀들생크의 입양
1228년 5월 5일, 치에니아에서 이보 오드로봉시 주교, 보이보드 마레크 그리피타, 산도미에르츠 보이보드 파코스와프 아브다니에츠 더 올드, 비실리카 성주 므시치보이를 포함한 크라쿠프 귀족 대표단과 브와디스와프 스핀들생크 간의 회담이 열렸다. 회담 조건에 따라 브와디스와프는 볼레스와프 5세를 입양하여 크라쿠프와 대폴란드의 후계자로 삼기로 합의했다. 회담 후 브와디스와프는 크라쿠프로 도착했고, 그지미스와바는 공식적으로 그에게 도시의 통치를 넘겨주었다. 과부 공작 부인과 아들은 산도미에르츠 공국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섭정을 행사했다.[9]
3. 3.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의 투옥
12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칙서에 따르면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는 그시미스와바와 그녀의 아들을 강탈하고 구타한 후 체포했다. 볼레스와프 5세와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체르스크에, 그 다음에는 시에치후프에 갇혔다. 콘라트 1세는 과부 공작 부인의 뺨을 때리는 등 굴욕을 주었다.[12]
헨리크 1세는 감금된 왕자와 그의 어머니를 구출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 볼레스와프와 그시미스와바는 크라쿠프 보이보드 루슈차의 클레멘트와 죄수를 담당했던 미코와이 갈의 도움을 받아 시에치후프의 수도원에서 탈출했다. 클레멘트와 미코와이는 술에 취해 죄수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경비병에게 뇌물을 주었고, 죄수들은 변장한 채 수도원을 떠났다. 얀 둥고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12]
::''어느 날 밤 경비병들이 술과 연회 후에 그들의 임무를 잊고, 그들의 자리를 비운 채 밤중에 볼레스와프 공작과 그의 어머니는 몰래 수도원을 떠났다.''[12]
헨리크 1세는 안전을 위해 볼레스와프와 그의 어머니를 스카와 요새, 프롱드니크 강 계곡 근처에 숨겼다. 그 후 그시미스와바는 아들을 대신하여 크라쿠프에 대한 권리를 헨리크에게 포기했다.[12]
3. 4. 크라쿠프 함락
1241년, 폴란드에 대한 몽골의 첫 번째 침략이 일어났다. 1월에 몽골군은 루블린과 자비호스트를 점령했다. 볼레스와프는 어머니, 아내와 함께 그의 누나인 헝가리 왕자 칼로만의 아내 살로메아와 함께 자신의 영지를 지도자 없이 남겨둔 채 헝가리 왕국으로 도망쳤다. 2월 13일, 몽골군은 산도미에르츠를 정복하고 불태웠으며, 3월 11일에는 흐멜니크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4월 9일, 레그니차 전투에서 헨리 2세가 지휘하는 군대가 패배하고 헨리 2세도 사망했다.[2] 4월 11일, 사요 강 전투에서 헝가리 군대가 패배하고 칼로만 왕자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후 볼레스와프 5세와 그의 가족(과부인 살로메아 포함)은 모라비아로 도망갔고, 결국 폴란드로 돌아왔다.[2]
헨리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장남인 볼레스와프 2세가 대공 칭호를 얻었지만, 크라쿠프에는 클레멘트 오브 루슈차가 그의 대리인으로 통치했다.[2]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는 1241년 7월 10일 크라쿠프에 입성했다.[2] 몇 달 후, 클레멘트 루슈차가 점령하고 있던 스카와 요새가 항복했다.[2] 콘라트는 튜튼 기사단 용병의 희생자인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귀족들은 1243년에 정숙공 볼레스와프를 새로운 통치자로 임명했다.[2] 1243년 5월 25일, 수호돌리 전투에서 클레멘스 루슈차 휘하의 소폴란드군과 헝가리군(사르마티아)이 콘라트의 마조비아 군대를 격파하여 볼레스와프는 크라쿠프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았다.[2] 17세가 된 그는 폴란드의 대공이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2] 그 해 말, 콘라트는 다시 크라쿠프를 공격했지만 패배했다.[2]
4. 성년
레그니차 전투에서 헨리크 2세가 전사한 후, 볼레스와프 5세는 혼란 속에서 폴란드 최고 권위자인 크라쿠프 공작이 되었다.
1239년, 볼레스와프 5세는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딸 킹가와 결혼했다. 중세 연대기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않았다. 독실한 킹가는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했고, 볼레스와프 5세는 킹가의 마음을 바꾸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킹가의 뜻대로 순결을 유지한 채 결혼 생활을 받아들였다. 볼레스와프 5세 또한 독실했기에 애첩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볼레스와프 5세는 '순결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241년 몽골 침공으로 파괴된 크라쿠프를 통치하게 된 볼레스와프 5세는 도시 재건을 위해 많은 독일인 이민을 받아들였다. 크라쿠프는 1257년 구획 할당에 따라 바둑판 모양으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1259년 2차 몽골 침공 때, 노가이의 공격으로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가 황폐해졌다.
1279년, 볼레스와프 5세는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녀가 없었기에 조카인 셰라츠 공작 레셰크 2세가 폴란드 대공위를 계승했다.
4. 1. 콘라트와의 투쟁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는 크라쿠프 대공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1246년, 콘라트 1세는 자신의 아들 카지미에시와 오폴레 군대의 지원을 받아 소폴란드를 공격했다. 자리슈프 전투에서 볼레스와프 5세의 군대는 패배했고, 레루프를 잃었지만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는 지켜냈다. 전쟁 자금 부족으로 볼레스와프 5세는 아내 킹가의 재산을 일부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257년 3월 2일 노비 코르친 회의에서 킹가는 스타리 송치 지구를 받는 것으로 보상받았다.[1] 1246년 가을, 볼레스와프 5세는 레루프를 되찾았다. 콘라트 1세는 1247년 8월 31일에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카지미에시는 계속해서 크라쿠프 대공 자리를 노렸다.[1]1254년에서 1255년 사이, 볼레스와프 5세는 카지미에시에게 포로로 잡힌 마조비아 공작 시에모비트 1세와 그의 아내 페레야슬라바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긴 협상 끝에 1255년 봄, 두 사람은 풀려났다.[1] 1258년, 볼레스와프 1세는 쿠야비아 공작 카지미에시와 그의 동맹인 시비에토페우크(스반토폴크) 2세에 대항하여 론트 영지를 차지하기 위한 길고 파괴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대폴란드 연합에 합류하여 쿠야비아 공작에 맞섰다.[1]
1259년 9월 29일부터 10월 6일까지, 볼레스와프 5세는 볼레스와프 1세와 함께 쿠야비를 약탈했다. 1259년 11월 29일, 마침내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260년, 카지미에시 1세는 레루프 요새를 점령했다. 12월 12일 프셰드부르츠 회의에서 볼레스와프 5세는 카지미에시와 시에모비트 사이의 분쟁을 중재했고, 상호 조약으로 분쟁은 종결되었다.[1]
4. 2. 헝가리와의 협력
볼레스와프 5세는 헝가리 왕국의 동맹이었다. 1245년, 헝가리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할리치 왕위 계승을 지원했으나, 8월 17일 야로스와프 전투에서 패배 후 웽치차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
1253년 6월과 7월, 볼레스와프 5세의 군대를 포함한 폴란드-러시아 군대는 모라비아를 거쳐 빈델리시아(오스트리아)로 진군하여 헝가리를 지원했다. 이 지역은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여러 마을을 약탈했지만 전쟁은 해결되지 않았다. 분쟁은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오토카르 2세는 크라쿠프 대주교 파베우의 도움을 받아 볼레스와프 5세를 자신의 편으로 설득하려 했다.[1]
1260년, 헝가리 왕자 스테판이 케른텐 공국으로 약탈 원정을 감행하면서 헝가리와 보헤미아 사이에 또 다른 분쟁이 발생했다. 6월부터 7월까지 볼레스와프 5세는 검은 레셰크와 함께 보헤미아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헝가리 군대를 지원했다. 7월 12일 크레센브룬 전투가 벌어졌으나, 헝가리 군대는 패배했다.[1]
1262년 1월 29일 이와노비체에서 열린 회의에서 볼레스와프 5세는 백색 헨리크와의 분쟁에서 경건공 볼레스와프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6월 7일 댕쿠프에서 두 번째 회의가 열려 헨리와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기회에 오폴레의 브와디스와프는 보헤미아 왕, 볼레스와프 5세, 경건공 볼레스와프와 4자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1]
벨라 4세는 아들 스테판과 갈등을 겪었고, 이는 헝가리 내전으로 이어졌다. 1266년 3월, 볼레스와프 5세와 그의 아내 킹가는 부다에서 회의를 주선했고, 스테판은 아버지, 오토카르 2세, 볼레스와프 5세, 검은 레셰크, 경건공 볼레스와프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로 약속했다.[1]
1270년, 새로운 왕 헝가리의 스테판 5세는 크라쿠프에서 볼레스와프 5세를 방문하여 영원한 평화를 서명했다. 같은 해 스테판 5세는 바벤베르크 상속을 위해 보헤미아에 대항한 전쟁을 재개했지만, 헝가리의 패배로 끝났다. 1271년, 볼레스와프 5세는 류리크 왕조 왕자들의 도움을 받아 브로츠와프 공국으로 원정을 감행했는데, 이는 백색 헨리크가 보헤미아의 동맹이었기 때문이다.[1]
1272년 8월 6일, 스테판 5세가 사망하면서 볼레스와프 5세와 헝가리 왕국 사이의 동맹은 완전히 깨졌다. 1277년, 볼레스와프 5세는 오파바에서 보헤미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헝가리의 새로운 왕인 미성년자 헝가리의 라슬로 4세와 함께 볼레스와프 5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동맹이 되었지만, 오토카르 2세와 독일의 루돌프 1세 사이의 분쟁 동안에는 헝가리 편을 선택했다. 1278년 8월 26일, 마르히펠트 전투에 참전했고, 이 전투에서 오토카르 2세는 패배하고 사망했다.[1]
4. 3. 요트빙기아인의 기독교화
볼레스와프 5세의 외교 정책 목표 중 하나는 요트빙기아인의 기독교화였다. 1248년부터 1249년 사이에 그는 시에모비트 1세의 지원을 받아 그들을 상대로 원정을 조직했지만,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4]1256년에서 1264년 사이에 요트빙기아인들은 소폴란드를 침략하여 약탈했다.[4] 1264년 봄, 볼레스와프는 이에 대한 보복 원정을 조직했고, 이 원정은 크라쿠프-산도미에르츠 군대의 승리와 요트빙기아 공작 코마타의 죽음으로 끝났다.[4] 볼레스와프는 이 부족의 기독교화를 위해 소폴란드의 북동쪽 경계에 있는 우쿠프에 주교구를 설립했다.[4] 그는 이 일에 그의 여동생 살로메아와 1254년에 특별 문서를 발행한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지원을 기대했다.[4] 결국 이 선교는 실패했다.[4]
4. 4. 몽골의 2차 침입
1259년 11월, 몽골군과 루테니아군은 산도미에시, 루블린, 크라쿠프를 파괴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헝가리 또는 레셰크 검은공이 통치하는 시에라츠로 도망쳤다.[13] 1260년 2월 몽골군이 소폴란드를 떠나자, 볼레스와프 5세는 자신의 영토로 돌아왔다.[13] 1241년의 몽골 침공으로 파괴된 크라쿠프의 통치자가 된 볼레스와프 5세는 도시 재건을 위해 많은 독일인 이민을 받아들였다. 크라쿠프는 1257년의 구획 할당에 따라 바둑판 모양으로 정비된 도시로 변모했다. 그러나 1259년의 2차 몽골 침공 당시, 적장 노가이의 공격으로 볼레스와프 5세의 영지인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가 황폐해졌다.4. 5. 레셰크 2세 흑공의 입양
볼레스와프 5세와 그의 아내 킹가는 정결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에는 자녀가 없었다. 1265년 볼레스와프 5세는 레셰크 흑공을 자신의 상속자로 입양했다. 1273년 오폴레의 브와디스와프는 이 입양을 받아들이지 않아 크라쿠프에 대한 군사 원정을 조직했다. 6월 4일 보구친 마위 전투가 벌어졌고, 오폴레-라치부시 군대가 패배했다.[1] 10월 말 볼레스와프 5세는 오폴레-라치부시에 대한 보복 원정을 벌였지만, 군대는 공국의 특정 지역을 파괴하는 데에만 국한되었다.[1] 1274년 브와디스와프와 볼레스와프 5세는 평화를 맺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오폴레-라치부시 공작은 크라쿠프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1]4. 6. 내정 정책
볼레스와프 5세는 도시 개발에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253년 2월 27일 보흐니아시에 특권을 부여했다. 1257년 6월 5일 핀추프 인근의 코페르니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크라쿠프 지역에 마그데부르크 권을 부여했고, 1년 뒤에는 노비코르친시에 부여했다. 1264년에는 스카리셰프시도 이 권리를 받았으며, 1271년 크라쿠프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옝제유프시도 권리를 얻었다.[1] 독일법의 시행은 몽골의 침입으로 인구가 최대 75%까지 손실을 입었던 공국에서 빠른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1]또한 보흐니아와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의 행정 개혁도 주목할 만하다. 1251년 보흐니아에서 암염 매장지가 발견되었고, 이전에는 염수만 발견되었었다.[1] 볼레스와프 5세는 이 지역에 소금 채굴을 장려했고, 이는 정기적인 수입원이 되었다.[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볼레스와프는 교회, 특히 크라쿠프 주교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245년 볼레스와프의 누이 살로메아의 노력 덕분에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 수도원이 자비호스트에 설립되었다.[1] 1252년 8월 28일 오글렌두프에서 열린 회의에서 공작과 그의 어머니 그르지미스와바는 주교구에 면제 특권을 부여하여 지역 성직자들에게 경제 및 사법 문제에 대한 더 큰 자율성을 보장했다.[1] 1253년 9월 17일 볼레스와프와 크라쿠프 주교의 공동 노력으로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스타니스와프 (스타니스라우스) 시체파노프를 성인으로 추대했다.[1] 1254년 5월 8일에는 크라쿠프에서 성 스타니스와우스를 기리는 축하 행사가 열렸으며, 피아스트 군주들의 회의도 포함되었다.[1] 6월 18일에는 크로베르츠에서 또 다른 회의가 열렸으며, 볼레스와프는 오글렌두프에서 크라쿠프 주교구에 부여된 특권을 확인했다.[1] 1257년에는 웽치차에서 시노드가 열렸으며, 주교를 납치한 모든 통치자는 자동적으로 파문되며 그의 영토는 교황령 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1] 1258년 6월 11일부터 12일까지 산도미에시에서 회의가 열렸으며, 볼레스와프는 소폴란드 교회를 위한 추가 특권을 승인했다.[1] 볼레스와프 5세와 그의 아내 킹가의 초청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1258년경 크라쿠프로 왔다.[1]
5. 죽음
볼레스와프 5세는 1279년 12월 7일에 사망했다.[10] 얀 둥고시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백성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들로부터도 깊은 슬픔을 받았다. 그가 보여준 겸손함과 위엄 때문이었다."[10]
볼레스와프 5세의 장례는 사흘 뒤인 12월 10일에 치러졌다.[11] 그는 크라쿠프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치되었다.[11]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Anno Domini MCCLXX obiit ilustrissimus princeps et dnus, Vladislaus dictus pius dux Cracov."
카지미에시 스트론친스키[12]는 이 묘비가 가짜라고 주장했지만, 동시대 기록에서 볼레스와프의 시신이 성당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 주장에 대한 반박은 제기되지 않았다.[13]
남편의 사망 이후, 킹가는 스타리 송치의 가난한 클라라 수도원에 들어갔다.[10] 이전 합의에 따라 레셰크 2세 흑공이 크라쿠프와 산도미에르츠를 상속받았다.[10]
6. 교회 재단
참조
[1]
서적
Rodowód Piastów małopolskich i kujawskich
Poznań – Wrocław
2001
[2]
서적
Pomniki dziejowe Polski
Lwów
1878
[3]
웹사이트
Skromne jak dzieciątko
http://wyborcza.pl/1[...]
2015-02-11
[4]
서적
Rodowód Piastów małopolskich i kujawskich
Poznań – Wrocław
2001
[5]
간행물
Udział synów Konrada I Mazowieckiego w realizacji jego planów politycznych
1980
[6]
서적
Henryk Brodaty i jego czasy
Warsaw
2006
[7]
서적
Ród Awdańców w wiekach średnich
[8]
서적
Walka o tron krakowski w roku 1228
W. L. Anczyc i Sp.
1895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간행물
Mniemany grobowiec Bolesława Wstydliwego w Krakowie
1849
[13]
문서
[14]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