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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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상왕은 292년 서천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이 되었다. 그는 즉위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숙부와 동생을 살해하고, 흉년에도 궁궐 증축을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293년에는 모용외의 침입을 받았으나 고노자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후 국상 창조리의 간언을 무시하고 폭정을 이어가다 창조리를 비롯한 신하들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300년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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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휘 | 상부(相夫) · 삽시루(歃矢婁) |
별칭 | 치갈왕(雉葛王) |
시호 | 봉상(烽上) |
능묘 | 봉산원(烽山原) |
왕족 정보 | |
부친 | 서천왕 |
모친 | 왕후 우씨(于氏)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왕자 2명 |
생애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300년 9월 (음력) |
즉위 정보 | |
전임자 | 서천왕 |
왕위 계승 순위 (전임) | 태자 약로 |
즉위 | 292년 |
폐위 | 300년 9월 (음력) |
왕위 계승 순위 (후임) | 태자 사유 |
후임자 | 미천왕 |
기타 정보 | |
재위 기간 | 292년 ~ 300년 9월 (음력) |
2. 생애
봉상왕은 292년 서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293년 음력 8월, 선비의 모용외가 침입하자, 봉상왕은 신성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모용외의 군대가 추격해 왔다. 이때 신성의 재(宰)이자 북부 소형(小兄)인 고노자가 기병 500명을 이끌고 왕을 맞이하러 가던 중 모용외의 군대를 만나 격파하였다. 봉상왕은 고노자의 공을 치하하며 그에게 대형(大兄)의 관직을 내리고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주었다.[7]
294년에는 국상 상루가 죽자 남부의 대사자(大使者) 창조리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296년 음력 8월, 모용외가 다시 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돌아갔다. 이후 봉상왕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아 모용외를 방비하게 하였다.[7]
2. 1. 왕권 강화와 폭정
292년 서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상왕은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숙부인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를 음모로 살해하였다.[7] 293년에는 동생 고돌고에게 역모죄를 씌워 자살하게 하였으며, 도망친 고돌고의 아들 고을불을 추격하게 하였다.[7]298년 음력 9월에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니 백성들이 흩어졌다.[7]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7]
이러한 폭정으로 인해 300년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압록강에서 소금장수였다던 고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7] 봉상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이라 하였다.[7]
2. 2. 모용외의 침입과 격퇴
293년 음력 8월, 선비의 모용외가 침입하였다. 봉상왕은 신성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모용외의 군대가 추격해 왔다. 이때 신성의 재(宰)이자 북부 소형(小兄)인 고노자가 기병 500명을 이끌고 왕을 맞이하러 가던 중 모용외의 군대를 만나 격파하였다. 봉상왕은 고노자의 공을 치하하며 그에게 대형(大兄)의 관직을 내리고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주었다.[7]296년 음력 8월, 모용외가 다시 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돌아갔다. 묘를 파헤친 자들 중에서 갑자기 죽는 자가 나오자 괴이함을 두려워하여 모용외의 군대는 퇴각했다. 잦은 선비의 침입을 막기 위해 봉상왕은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등용했고, 고노자는 선정을 펼쳐 위세를 떨치자 선비는 더 이상 침공하지 않았다.[7]
2. 3. 거듭된 실정과 폐위
봉상왕은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숙부인 안국군 달가를 음모로 살해하였다.[7] 293년에는 동생 고돌고에게 역모죄를 씌워 자살하게 하였으며, 고돌고의 아들 고을불을 추격하게 하였다.[7]298년 음력 9월에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 증축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7]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7] 300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니 백성들이 흩어졌다.[7]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7]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300년 봉상왕을 폐위하고 압록강에서 소금장수였다던 고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7]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7] 봉상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이라 하였다.
3. 가계
참조
[1]
서적
Samguk sagi
http://db.history.go[...]
1145
[2]
웹사이트
King Bongsang
https://web.archive.[...]
Korean Broadcasting System
2016-01-31
[3]
서적
Samguk sagi
http://db.history.go[...]
2016-01-31
[4]
서적
A History of Land Systems and Policies in Kore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isconsin
2016-01-31
[5]
서적
Koguryŏsa yŏn'guŭi chemunje
https://books.google[...]
Paeksan charyowŏn
2016-01-31
[6]
서적
Samguk sagi
https://web.archive.[...]
2016-01-31
[7]
문서
『三国史記』高句麗本紀・美川王即位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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