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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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추는 서진, 모용부, 동진, 후조 등을 섬기며 활동하다가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그는 유주 참군을 시작으로 모용외를 섬기며 장사에 임명되었고, 동진에서는 고굉과 동이교위를 역임했다. 모용인 반란과 후조의 항복 권유에 연루되어 고구려로 도주했으며, 고구려에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고 국정 정비, 군비 확충, 적극적인 외교 정책 추진에 기여했다. 봉추의 부친은 봉석이며, 형제는 봉준, 자녀는 봉유, 종자는 봉방과 봉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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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봉추 |
원어명 | 封抽 |
국가 | 전연 |
직책 | 유주참군 |
출생지 | 기주 발해군 |
국적 | 전연→후조→고구려 |
본관 | 발해 |
성별 | 남성 |
아버지 | 봉석 |
2. 생애
봉추는 서진을 섬기며 유주 참군을 지냈다.[1] 이후 고구려로 망명하여 4세기 고구려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중국인 유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고구려에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여 국정 정비, 군비 확충, 그리고 적극적인 외교 정책 추진에 기여하였다.[1]
2. 1. 서진과 모용외 시기
영가 5년(311년) 12월, 부친 봉석의 상을 치르기 위해 형인 기주 주부 봉준과 함께 선비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에게 갔다. 모용외는 봉추 등을 보고 천 근의 거세된 황소의 가치가 있다며 감탄했다. 봉추 등은 귀로가 막혀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머물면서 모용외를 섬기기로 했다. 봉추는 장사에 임명되었다.[1]건흥 원년(313년), 유수, 방선, 서방건, 송석, 배개와 함께 고굉에 임명되었고, 그 후 동이교위에 임명되었다.[1]
함화 6년(331년) 9월, 모용외의 사자로서 요동상 한교 등 30여 명과 함께 동진의 태위 도간에게 상소를 전달했다. 상소의 내용은 모용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연왕으로 봉해달라는 청원이었다. 도간은 답서를 보내 이 청원을 동진 조정의 의제로 올릴 것을 약속했지만, 조정은 의결하지 않았다.[1]
함화 8년(333년) 10월, 정로장군 모용인이 선비 모용부의 수장 모용황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요동은 모용인의 지배하에 놓였고, 봉추는 한교, 동이호군 을일 등과 함께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1]
함강 4년(338년) 5월, 후조의 천왕 석호는 전연 국내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동이교위 봉추, 호군장군 송황, 성주내사 최도, 무원현령 상패, 거취현령 유홍 등이 이에 응했고, 후조는 36개 성을 얻었다.[1]
연왕 모용황은 군대를 보내 후조에 호응한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패배한 봉추는 송황, 유홍과 함께 고구려로 도주했다.[1]
2. 2. 모용황과 후조 시기
영가 5년(311년) 12월, 아버지 봉석의 상을 치르기 위해 형인 기주 주부 봉준과 함께 선비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에게 갔다. 모용외는 봉추 등을 보고 큰 가치가 있다며 감탄했다. 봉추 등은 돌아갈 길이 막혀 모용외를 섬기기로 하고, 장사에 임명되었다.건흥 원년(313년), 유수, 방선, 서방건, 송석, 배개와 함께 고굉에 임명되었고, 이후 동이교위에 임명되었다.
함화 6년(331년) 9월, 모용외의 사자로서 요동상 한교 등 30여 명과 함께 동진의 태위 도간에게 모용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연왕으로 봉해달라는 상소를 전달했다. 도간은 답서를 보내 조정에 올릴 것을 약속했지만, 조정은 의결하지 않았다.
함화 8년(333년) 10월, 정로장군 모용인이 모용황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요동이 모용인의 지배하에 놓이자, 봉추는 한교, 동이호군 을일 등과 함께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함강 4년(338년) 5월, 후조의 천왕 석호는 전연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동이교위 봉추, 호군장군 송황, 성주내사 최도, 무원현령 상패, 거취현령 유홍 등이 이에 응했고, 후조는 36개 성을 얻었다.
연왕 모용황은 군대를 보내 후조에 호응한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패배한 봉추는 송황, 유홍과 함께 고구려로 도주했다.[1]
2. 3. 고구려 망명과 영향
영가 5년(311년) 12월, 부친 봉석의 상을 치르기 위해 형인 기주 주부 봉준과 함께 선비모용부의 수장 모용외의 곁으로 갔다. 모용외는 봉추 등을 보고 천 근의 거세된 황소의 가치가 있다며 감탄했다. 봉추 등은 귀로가 막혀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머물면서 모용외를 섬기기로 했고, 봉추는 장사에 임명되었다.[1]건흥 원년(313년), 유수, 방선, 서방건, 송석, 배개와 함께 고굉에 임명되었고, 이후 동이교위에 임명되었다.[1]
함화 6년(331년) 9월, 모용외의 사자로서 요동상 한교 등 30여 명과 함께 동진의 태위 도간에게 상소를 전달했다. 상소는 모용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연왕으로 봉해달라는 청원이었다. 도간은 답서를 보내 이 청원을 동진 조정의 의제로 올릴 것을 약속했지만, 조정은 의결하지 않았다.[1]
함화 8년(333년) 10월, 정로장군 모용인이 선비 모용부의 수장 모용황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요동은 모용인의 지배하에 놓였고, 봉추는 한교, 동이호군 을일 등과 함께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1]
함강 4년(338년) 5월, 후조의 천왕 석호는 전연 국내에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동이교위 봉추, 호군장군 송황, 성주내사 최도, 무원현령 상패, 거취현령 유홍 등이 이에 응했고, 후조는 36개 성을 얻었다.[1]
연왕 모용황은 군대를 보내 후조에 호응한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패배한 봉추는 송황, 유홍과 함께 고구려로 도주했다.[1]
봉추는 고구려의 4세기 이후 국가 발전에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 중국인 고구려 유입자이며, 고구려에 새로운 문화를 가져와 국정 정비와 군비 확충,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1]
3. 가계
봉추는 봉석의 아들이며,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봉진이고, 장녀는 봉선이다. 자녀로는 봉유가 있으며, 봉방, 봉혁은 봉추의 종자이다.
3. 1. 부친
봉추의 부친은 봉석이다.3. 2. 형제
봉추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봉진이고, 장녀는 봉선이다.3. 3. 자녀
봉추는 봉유를 자녀로 두었다.3. 4. 종자
봉추의 종자에 대한 내용은 봉방, 봉혁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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