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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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인은 4세기 초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연의 인물로, 모용외의 아들이다. 정로장군으로 요동에 주둔하며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고, 후조의 공격을 격퇴하는 등 요동 지역을 방어하는 데 기여했다. 모용외 사후 동생 모용황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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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황은 333년부터 348년까지 전연을 통치한 인물로, 형제들과의 내분을 극복하고 전연을 건국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고 한화 정책을 통해 국가 체제를 정비하다가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
모용인 | |
---|---|
기본 정보 | |
이름 | 모용인 (慕容仁) |
출생지 | 차오양, 랴오닝 |
사망 | 336년 |
아명 | 천년 (千年) |
관직 | |
정로장군 (征虜將軍) | 319년 – 334년 |
군주 | 진 원제/진 명제/진 성제 |
차기장군 (車騎將軍) (자칭) | 333년 – 336년 |
군주 | 진 성제 |
평주자사 (平州刺史) | 334년 – 336년 |
군주 | 진 성제 |
작위 | |
시호 | 요동공 (遼東公) |
재위 기간 | 334년 – 336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모용훼 |
어머니 | 단씨 부인 (段氏) |
형제 | 모용황 (형), 모용조 (형), 모용한 (이복형) |
2. 생애
319년 모용외(慕容廆)가 동진(東晉)의 최비(崔毖)를 정벌할 당시 모용인은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임명되어 요동(遼東)에 주둔했으며, 고구려(高句麗)의 미천왕(美川王)이 침공해오자 모용한(慕容翰)과 함께 이를 방어한 뒤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1][2] 320년 고구려가 다시 요동을 공격하였으나 모용인은 이를 격파하였고,[1][2] 321년 모용외가 요동공(遼東公)이 되자 평곽(平郭)으로 이동하였다.[1][2] 325년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이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를 포섭해 공격해오자 모용외의 명에 따라 백림(柏林)에 배치되었으며, 우문걸득귀의 형인 우문실발퇴(宇文悉跋堆)를 죽인 뒤 모용외와 함께 우문선비(宇文鮮卑)의 중심지를 점령하고 우문걸득귀를 추격하였다.[3]
333년 모용외가 사망하고 모용황이 뒤를 이었다. 모용황은 형제인 모용인을 견제하였고, 이에 모용인은 동생 모용소와 함께 반란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모용황에게 발각되었고, 모용소는 죽임을 당했다. 이후 모용황은 고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형제들인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 모용한과 함께 모용인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모용인은 문성(汶城)에서 모용황의 군대에 승리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 등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또한 동수가 모용인에게 항복하였으며, 손기, 왕영 등도 모용인에게 귀순하였다. 이로써 모용인은 요동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고, 단부의 단료를 비롯한 여러 선비족 부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4][5][6]
이후 모용인은 스스로 거기장군, 평주자사, 요동공을 자칭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모용황의 계속된 공격과 내부 배신으로 인해 결국 336년에 패배하고 자결하였다.[7][9]
2. 1. 모용외 시대 (319년 ~ 333년)
319년 모용외가 동진의 최비를 정벌할 당시 모용인은 정로장군으로 임명되어 요동에 주둔했으며, 고구려의 미천왕이 침공해오자 모용한과 함께 이를 방어한 뒤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320년 고구려가 다시 요동을 공격하였으나 모용인은 이를 격파하였다. 321년 모용외가 요동공이 되자 모용인은 평곽으로 이동하였다. 325년 후조의 석륵이 우문걸득귀를 포섭해 공격해오자 모용외는 모용인을 백림에 배치했으며, 모용인은 우문걸득귀의 형인 우문실발퇴를 죽인 뒤 모용외와 함께 우문선비의 중심지를 점령하고 우문걸득귀를 추격하였다.333년 모용외가 죽고 모용황이 뒤를 이었다. 평소 모용황의 견제를 받던 모용한은 단부선비로 망명하였고, 모용인 또한 모용황의 견제를 받았다. 모용인은 동생 모용소와 의논한 뒤 반란을 계획했으나, 모용황에게 발각되어 모용소는 주살당했다. 모용인은 평곽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모용황은 고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형제인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 모용한과 함께 모용인을 공격했다. 모용인은 문성에서 승리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을 포획하고 동수의 항복을 받았다. 요동성을 사수하던 손기, 왕영 등이 귀순하자 봉혁은 모용한과 함께 퇴각하였고 봉추, 을일, 한교 등도 도주하였다.
모용인은 요동 일대를 평정하고 단부선비의 단료 및 각 선비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적해를 동이교위, 방감을 요동상에 임명하고 스스로 거기장군 · 평주자사 · 요동공에 올랐다. 이후 모용황은 요동을 재차 침공해 양평까지 진격하였고, 적해와 방감은 도주했으며, 모용황은 거취와 신창을 점령하였다. 모용인은 신창 탈환을 위해 공격했으나 왕우에게 패했다. 우문선비와 단부선비가 모용인을 지원했으나 장영이 이를 토벌하였다. 모용황은 동생 모용평과 함께 창려에서 평곽으로 이동했으며, 모용인은 모용황과의 결전에서 패배한 뒤 부하에게 배신당해 사로잡혀 자결하였다.
2. 1. 1. 요동 수비 및 고구려와의 관계
319년 모용외(慕容廆)가 동진(東晉)의 최비(崔毖)를 정벌할 당시 모용인은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임명되어 요동(遼東)에 주둔했다.[1] 요동에 있는 동안 모용인은 지방 관리들이 이전과 동일한 직책을 유지하도록 허락하여 지역의 지지를 얻었다.당시 고구려(高句麗)의 미천왕(美川王)은 자주 병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습격했다. 모용외의 명에 따라 모용인은 모용한(慕容翰)과 함께 이를 방어했다.[2] 그해 말, 고구려가 여러 차례 요동을 침략했고, 모용인은 모용한과 함께 고구려에 맞서 싸웠으며, 이후 미천왕으로부터 화친과 동맹을 제안받았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후, 그들은 돌아왔다.[2]
320년 고구려가 다시 요동을 공격하였으나 모용인은 이를 격파하였으며,[1] 크게 물리쳤다. 이 이후로 고구려는 모용인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다.[2] 321년 모용외가 요동공(遼東公)이 되자 모용인은 평곽(平郭, 현재 랴오닝성 잉커우시)으로 이동하였고, 모용한이 요동의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1][2]
325년, 후조(後趙)의 군주 석륵(石勒)은 화친 제안을 거부한 모용외를 공격하도록 우문부의 수장 우문걸득귀(宇文乞得龜)를 관직과 작위로 설득했다. 모용황은 우문부에 맞서 군대를 이끌도록 명을 받았고, 모용인은 그의 좌익을 지휘했다. 우문걸득귀가 모용황과 싸우는 동안, 그의 조카 우문실발웅을 모용인에게 보냈다. 모용인은 우문실발웅을 격파하고 참수한 후 모용황과 합류하여 우문걸득귀를 압도했다. 우문걸득귀는 그의 군대를 버리고 도망쳤고, 모용황과 모용인은 그들을 추격하기 위해 기병을 보냈고, 그를 멀리 쫓아낸 후에야 돌아왔다. 한편, 형제들은 우문부가 통치하는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그들의 보물과 가축을 빼앗았다. 도시의 주민들도 모용외에게 항복하고 그의 영토로 이주했다.[3]
2. 1. 2. 우문부 격퇴 (325년)
325년 1월, 우문부의 우문걸득귀가 모용부를 습격하자, 모용외는 모용황을 총대장으로 임명하고, 모용인을 평곽에서 불러 백림에 배치하여 군의 좌익을 맡겼다. 우문걸득귀는 형 우문실발퇴에게 모용인 군을 공격하게 했지만, 모용인은 이를 격퇴하고 우문실발퇴를 죽였으며, 병사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모용인은 모용황과 합류하여 우문걸득귀의 본대에 공격, 크게 승리했다. 우문부 군이 붕괴되고 우문걸득귀는 도주했으며, 모용인은 모용황과 함께 우문부의 도성으로 진입했다. 모용인은 기병을 파견하여 우문걸득귀를 추격, 300리 넘게 몰아냈다. 이 승리로 보물을 모두 획득했고, 가축은 백만에 달했으며, 귀순한 백성은 수만 명에 달했다.2. 2. 모용황과의 대립 (333년 ~ 336년)
333년 모용외가 사망하고 모용황이 그 뒤를 이었다. 모용황은 형제인 모용인을 견제하였고, 이에 모용인은 동생 모용소와 함께 반란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모용황에게 발각되었고, 모용소는 죽임을 당했다. 모용황은 고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형제들인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 모용한과 함께 모용인을 공격하도록 하였다.모용인은 문성(汶城)에서 모용황의 군대에 승리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 등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또한 동수가 모용인에게 항복하였으며, 손기, 왕영 등도 모용인에게 귀순하였다. 이로써 모용인은 요동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고, 단부의 단요를 비롯한 여러 선비족 부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4][5][6]
이후 모용인은 스스로 거기장군, 평주자사, 요동공을 자칭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모용황의 계속된 공격과 내부 배신으로 인해 결국 336년에 패배하고 자결하였다.
2. 2. 1. 요동 장악 (333년)
333년 모용외가 사망하고 모용황이 그 뒤를 이었다. 모용황은 이미 321년에 황태자로 확정되었지만, 형제들인 모용인, 모용소, 모용한을 시기했다. 이들은 모두 아버지 모용외로부터 모용황과 동등한 총애를 받았고, 모용인과 모용한은 뛰어난 장군이었으며, 모용소는 재능으로 명성이 높았다. 모용황의 즉위 직후, 모용한은 자신의 입지를 불안하게 여겨 아들들과 함께 단부로 망명하였다.[1]모용인은 평곽(平郭)의 직책을 사임하고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극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모용소에게 모용황의 지나치게 엄격한 법과 자신들에게 충분한 예의를 표하지 않은 것에 대해 걱정을 표했다. 모용소는 모용인에게 핑구로 돌아가 모용황에게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자신은 남아서 모용황의 상황을 내부에서 지켜보라고 말했다. 모용인은 그의 계획에 동의했고, 핑구로 돌아간 후 서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4]
그러나 누군가가 모용인과 모용소의 계획을 모용황에게 누설했다. 모용황은 처음에는 완전히 믿지 않았고, 모용인에게 사자를 보내 진실인지 확인했다. 모용인은 사자들이 그에게 도착했을 때 황강(黃河)에 도착했고, 자신의 음모가 발각된 것을 알게 되자 사자들의 목을 베고 핑구로 돌아갔다. 모용황은 모용소에게 자결을 강요한 후, 동수와 모용황의 이복 형제인 모용유, 모용치, 모용준, 모용한에게 5,000명의 군대를 주어 모용인을 토벌하게 했다. 또한 육군 제사, 풍이를 보내 요동을 안정시켰다.
모용인은 문성(汶城) 북쪽에서 이복 형제들과 동수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모용유, 모용치, 모용준은 포로로 잡혔고 동수는 모용인의 전 부하였기에 그에게 항복했다. 왕빙과 손기 장군은 모용인과 연합하여 샹핑을 그에게 넘겨주었고, 봉추, 을일, 한교, 고후 등은 도시를 버리고 모용황에게 도망쳤다. 모용한은 탈출하여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던 풍이와 함께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문성에서의 승리는 요동을 모용인의 지배하에 두었고, 모용황의 영토를 둘로 나누었다.[5]
함화 8년(333년) 5월, 모용외가 사망하자, 동복 형제인 모용황이 뒤를 이었다. 평소 모용인은 서장형인 모용한과 동복 동생인 모용소와 함께 아버지의 총애를 받아왔고, 모용황은 이 사실을 늘 시샘했다. 그 때문에 형제 관계는 결코 좋지 않았으며, 모용황이 뒤를 이으면서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같은 해 10월, 모용한은 모용황에게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단부로 망명했다.
같은 달, 모용인은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평곽을 출발하여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본거지인 극성으로 갔다. 이때, 몰래 모용소에게 "우리는 평소에 군주(모용황)에게 거만하게 굴고 많은 무례를 범했습니다. 군주는 강직하고 엄중한 성격이라 죄가 없어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데, 죄가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이에 모용소는 "우리는 모두 적자(모용외의 정실의 아들)이므로 국토를 나눠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형님(모용인)은 예전부터 병사들에게 칭송받고 있고, 저는 내(극성)에 있으면서 의심을 받고 있지 않으니, 틈을 엿보아 그를 없애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형님이 밖에서 거병하고, 제가 내부에서 이에 호응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저에게 요동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낱 사내아이가 한번 사업을 시작하면, 실패하면 죽음뿐입니다. 잘못해서 건위(모용한)처럼 이국 땅에서 쓸쓸히 인생을 보내는 짓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둘이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했다. 모용인은 이를 듣고 "좋다!"라고 말하며 깊이 동의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내심 간직한 채, 장례를 마치고 평곽으로 돌아왔다.
11월, 모용인은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모용황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몰래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극성 안에 있던 어떤 인물이 모용인과 모용소의 모략을 몰래 듣고 있었고, 이 사실을 모용황에게 밀고했다. 모용황은 처음에는 이것을 믿지 않았지만, 만약을 위해 모용인의 휘하에 사자를 파견하여 그 동향을 확인하게 했다. 이때, 모용인은 이미 황수까지 군사를 진군시켰지만, 사자가 도착하자 계획이 모용황에게 발각된 것을 알고 계획을 중단하고 그 사자를 살해한 뒤 평곽으로 돌아왔다. 모용황은 이를 받아들여 즉시 모용소에게 자결을 명하는 동시에 모용인 토벌의 군사를 일으켰다. 현토군 태수 고후에게 5천의 군사를 주고, 서제인 건무장군 모용유, 모용치, 광위장군 모용군, 영원장군 모용한, 사마 동수 등과 함께 평곽으로 쳐들어갔다. 모용인은 문성 북쪽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워 크게 승리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 등을 모두 사로잡았다. 동수는 과거 모용인의 사마로 섬긴 적이 있었으므로, 그 또한 항복하여 모용인에게 귀순했다.
요동에서는 대사농이었던 손기와 양평현령 왕영 등이 요동성째 모용인에게 호응하자, 동이교위 봉추, 호군 을일, 요동상 한교 등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이로 인해 모용인은 요동의 거의 전부를 영유하게 되었고, 단부의 어른 단요를 비롯한 선비의 여러 부족들은 모두 모용인을 따랐다.
2. 2. 2. 모용황의 반격과 패배 (334년 ~ 336년)
333년 모용외가 사망하고 모용황이 뒤를 잇자, 모용황의 견제를 받던 모용인은 동생 모용소와 반란을 모의했다. 그러나 계획이 발각되어 모용소는 주살되고 모용인은 평곽(平郭)으로 복귀했다. 모용황은 고후(高詡)를 총사령관으로, 형제들인 모용유(慕容幼), 모용치(慕容稚), 모용군(慕容軍), 모용한을 보내 모용인을 공격하게 했다. 모용인은 문성(汶城)에서 승리하여 모용유, 모용치, 모용군을 포로로 잡고 동수의 항복을 받았다. 손기(孫機), 왕영(王永) 등이 귀순하고, 봉혁은 모용한과 퇴각, 봉추(封抽), 을일(乙逸), 한교(韓矯) 등도 도주했다.[6]모용인은 요동 일대를 평정하고 단부선비의 단료 및 여러 선비족의 지지를 받았다. 적해(翟楷)를 동이교위(東夷校尉), 방감(龐鑒)을 요동상(遼東相)에 임명하고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 · 평주자사(平州刺史) · 요동공(遼東公)을 칭했다. 모용황은 재차 요동을 침공, 양평(襄平)까지 진격하여 적해와 방감은 도주하고 거취(居就)와 신창(新昌)을 점령했다. 모용인은 신창 탈환을 시도했으나 왕우에게 패배했고, 우문선비와 단부선비의 지원도 장영에게 저지당했다.[7]
336년 2월, 모용황은 모용평 등과 함께 창려(昌黎)에서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평곽을 기습했다. 모용인은 모용황의 직접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장영의 기습으로 오인하여 방심했다. 모용군(慕容軍)이 모용황에게 항복하면서 모용인 군은 동요했고, 모용황은 이 틈을 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모용인은 생포되었고, 모용황은 그를 배신한 부하들을 처형한 후 모용인에게 자결을 명했다. 모용인의 측근들도 처형되거나 도주했으며, 모용황은 모용인을 따랐던 관료와 백성들은 죄를 묻지 않았다. 이로써 모용황과 모용인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9]
3. 평가
모용인은 용맹함과 지략을 겸비하여 아버지 모용외의 총애를 받았다. 전장에 나가 여러 차례 공적을 세워 병사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었다. 모용외 시대에 그의 서형 모용한은 호족과 한족을 가리지 않고 잘 위무하여 위엄과 자애를 겸비했다고 칭찬받았는데, 모용인 또한 이에 못지않은 평판을 얻었다고 한다.
참조
[1]
서적
Book of Jin, Volume 109
[2]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1
[3]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3
[4]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5
[5]
서적
Book of Jin, Volume 109
[6]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5
[7]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5
[8]
서적
Book of Jin, Volume 109
[9]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5
[10]
서적
十六国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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