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락해방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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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락해방동맹은 일본의 부락 차별 철폐를 목표로 하는 단체이다. 1922년 전국수평사로 시작하여, 1955년 현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초기에는 일본사회당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나, 현재는 민주당, 입헌민주당 등 여러 정당을 지지하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정당과 관계를 맺고 있다. 사야마 사건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현재도 재심 신청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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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진당 - 민진당 (일본)
민진당은 2016년 민주당과 유신당의 합당으로 창당되어 평화주의 헌법 보호와 아베노믹스 반대를 주요 강령으로 내세웠으나, 2018년 국민민주당으로 재편되었다.
부락해방동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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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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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명칭 | 部落解放同盟 |
약칭 | 해방동맹 |
전신 | 전국수평사 |
유형 | 동화단체 |
설립 | 1948년 (부락해방전국위원회 설립) |
설립자 | 마쓰모토 지이치로 |
목적 | 부라쿠민 차별 철폐 및 차별받는 부락 해방, 인권확립사회 실현 |
본부 | 일본 도쿄도 주오구 이리후네 1-7-1 |
회장 | 니시지마 후지히코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2. 약칭과 명칭
부락해방동맹은 해방동맹(解放同盟|かいほうどうめい일본어)을 공식 약칭으로 사용하며, 관계자들은 "동맹"이라고도 부른다. "해동"이라는 약칭도 부락해방동맹의 오가 마사유키가 사용한 적이 있으며,[3] 부락해방동맹 후쿠오카현 가와사키정 연락협의회에서도 사용되었다. 일본공산당은 "「解同」"이라는 약칭을 사용한다.
1922년 3월, 부락해방동맹의 전신인 전국수평사가 교토시 오카자키 공회당에서 결성되었다.[6][7]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의 전전 운동은 1940년 대회에서 일본의 국가 제창, 궁성요배, 영령에 대한 묵념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이어졌다.
재판소에서 "부해동"(部解同)이라 약칭한 적도 있고,[4] 아사히 신문은 "해방동"(解放同)이라 약칭한 적도 있다.[5]
3. 역사
1955년 부락해방전국위원회는 대중단체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부락해방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9] 1960년 5월 10일 일본 자유민주당 계열의 전일본동화회가 결성되었고,[10] 1970년에는 일본공산당 계열의 부락해방동맹정상화전국연락회의(약칭 정상화련)가 설립되었다.
초대 위원장인 마쓰모토 지이치로와 오랫동안 서기장을 역임한 다나카 오리노신은 일본사회당의 국회의원이었으며, 한때는 마쓰모토 에이치, 우에다 다쿠미, 다니하타 다카시 등 사회당과 주로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현재는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일본 내 많은 정당과 관계를 맺고 있다.
55년 체제 붕괴 이후 일본 정계가 개편되면서 주요 협력 정당을 새롭게 창당된 민주당으로 옮겼다. 2004년 부락해방동맹 중앙서기장이었던 마쓰오카 도루가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 선거 비례대표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민주당 "차기내각"의 법무부대신(2007년 9월 취임)이 되었다.[15] 부락해방동맹 부위원장이었던 마쓰모토 류도 민주당에 소속되었다.[16][17][18]
입헌민주당의 주요 지지 단체 중 하나이며 입헌민주당 내에 조직 내 후보를 배출하고 있지만, 지역에 따라 자유민주당,[19] 공명당, 국민민주당, 국민민주당, 사회민주당, 신사회당 등을 지지하기도 한다. 관련 정치단체인 디구레 포럼에서는 도민퍼스트회,[20] 일본유신회,[21] 오사카 유신회[22][23] 의원이 소속되어 있는 등 다양한 정당과 관계를 맺고 있다.
사야마 사건 항소심이 시작된 이듬해인 1965년 5월 29일, 도쿄고등법원 제2차 현장검증에 사이타마현과 도쿄도의 부락해방동맹 대표들이 참여했다.[11] 같은 해 10월 5일에 열린 제20차전국대회에서 사야마 사건 공정재판 요구 결의안을 채택했다.[11] 1968년 10월 1일에는 "사야마 사건 제1차 현지조사"를 실시했다.[12]
1969년 3월 3일과 4일에 열린 제24차전국대회에서는 사야마 사건 지원 특별결의문을 채택했다. 같은 해 7월 10일 중앙본부에는 이시카와 청년구호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사야마 사건의 진상"이라는 팜플렛을 발행했다.[11] 1970년 3월 13일에 열린 제25차전국대회에서 "사야마 차별재판 규탄" 방침을 결정했다.[11] 같은 해 5월 18일 부락해방 국민대행동에 돌입해 사야마 차별재판 반대를 호소했고, 6월 17일까지 일본 전역을 행진했다.[11]
1974년 10월 31일, 도쿄고등법원은 변호인단의 무죄 주장을 배척하고 원심을 파기하며 무기징역을 선고했고,[13] 1977년 최고재판소 판결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14] 현재 제3차 재심 신청이 진행 중이며 부락해방동맹이 이를 지원하고 있다.
3. 1. 전국수평사 창립과 초기 활동 (제1기)
1922년 3월, 부락해방동맹의 전신인 전국수평사가 교토시 오카자키 공회당에서 결성되었다.[6][7]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의 전전 운동은 1940년 대회에서 일본의 국가 제창, 궁성요배, 영령에 대한 묵념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이어졌다.
3. 2. 부락해방전국위원회 결성과 부락해방동맹으로의 개칭 (제2기)
1955년 부락해방전국위원회는 대중단체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부락해방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9] 1960년 5월 10일 일본 자유민주당 계열의 전일본동화회가 결성되었다.[10] 1970년에는 일본공산당 계열의 부락해방동맹정상화전국연락회의(약칭 정상화련)가 설립되었다.
3. 3. 정치 세력과의 관계 및 분열
초대 위원장인 마쓰모토 지이치로와 오랫동안 서기장을 역임한 다나카 오리노신은 일본사회당의 국회의원이었으며 한때는 마쓰모토 에이치, 우에다 다쿠미, 다니하타 다카시 등 사회당과 주로 깊은 관계를 맺어왔으나 현재는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일본 내 많은 정당과 관계를 맺고 있다.
55년 체제가 붕괴된 이후 일본 정계가 개편되는 가운데 주요 협력 정당을 새롭게 창당된 민주당으로 옮겨 2004년 부락해방동맹 중앙서기장이었던 마쓰오카 도루가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참의원 선거 비례대표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민주당 "차기내각"의 법무부대신(2007년 9월 취임)이 되었으며[15] 부락해방동맹 부위원장이었던 마쓰모토 류도 민주당에 소속되었다.[16][17][18]
입헌민주당의 주요 지지 단체 중 하나이며 입헌민주당 내에 조직 내 후보를 배출하고 있지만 지역에 따라 자유민주당,[19] 공명당, 국민민주당, 국민민주당, 사회민주당, 신사회당 등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으며 관련 정치단체인 디구레 포럼에서는 도민퍼스트회,[20] 일본유신회,[21] 오사카 유신회[22][23]의 의원이 소속되어 있는 등 다양한 정당관 관계를 맺고 있다.
3. 4. 사야마 사건 지원 활동
사야마 사건 항소심이 시작된 이듬해인 1965년 5월 29일, 도쿄고등법원 제2차 현장검증에 사이타마현과 도쿄도의 부락해방동맹 대표들이 참여했다.[11] 같은 해 10월 5일에 열린 제20차전국대회에서 사야마 사건 공정재판 요구 결의안을 채택했다.[11] 1968년 10월 1일에는 "사야마 사건 제1차 현지조사"를 실시했다.[12]
1969년 3월 3일과 4일에 열린 제24차전국대회에서는 사야마 사건 지원 특별결의문을 채택했다. 같은 해 7월 10일 중앙본부에는 이시카와 청년구호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사야마 사건의 진상"이라는 팜플렛을 발행했다.[11] 1970년 3월 13일에 열린 제25차전국대회에서 "사야마 차별재판 규탄" 방침을 결정했다.[11] 같은 해 5월 18일 부락해방 국민대행동에 돌입해 사야마 차별재판 반대를 호소했고 6월 17일까지 일본 전역을 행진했다.[11]
하지만 1974년 10월 31일 도쿄고등법원은 변호인단의 무죄 주장을 배척하고 원심을 파기하며 무기징역 판결을 내렸으며,[13] 1977년 최고재판소 판결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14] 현재 제3차 재심 신청이 진행 중이며 부락해방동맹이 이를 지원하고 있다.
4. 정계와의 관계
초대 위원장인 마쓰모토 지이치로와 오랫동안 서기장을 역임한 다나카 오리노신은 일본사회당의 국회의원이었으며, 한때는 마쓰모토 에이이치, 우에다 다쿠미, 다니하타 다카시 등 사회당과 주로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현재는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일본 내 많은 정당과 관계를 맺고 있다.
55년 체제가 붕괴된 이후 일본 정계가 개편되는 가운데 주요 협력 정당을 새롭게 창당된 민주당으로 옮겼다. 2004년 부락해방동맹 중앙서기장이었던 마쓰오카 도루가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참의원 선거 비례대표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마쓰오카 도루는 민주당 "차기내각"의 법무부대신(2007년 9월 취임)이 되었으며,[15] 부락해방동맹 부위원장이었던 마쓰모토 류도 민주당에 소속되었다.[16][17][18]
입헌민주당의 주요 지지 단체 중 하나이며, 입헌민주당 내에 조직 내 후보를 배출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자유민주당,[19] 공명당, 국민민주당, 국민민주당, 사회민주당, 신사회당 등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 정치단체인 디구레 포럼에서는 도민퍼스트회,[20] 일본유신회,[21] 오사카 유신회[22][23]의 의원이 소속되어 있는 등 다양한 정당과 관계를 맺고 있다.
5. 역대 위원장
재임 기간 | 이름 |
---|---|
1955년 ~ 1966년 | 마쓰모토 지이치로 |
1966년 ~ 1975년 | 아사다 젠노스케 |
1975년 ~ 1982년 | 마쓰이 히사키치 |
1982년 ~ 1996년 | 우에스기 사이치로 |
1996년 ~ 1998년 | 우에다 다쿠미 |
1998년 ~ 2022년 | 구미사카 시게유키 |
2022년 ~ 현재 | 니시지마 후지히코 |
참조
[1]
Kotobank
部落解放同盟
2018-10-06
[2]
웹사이트
部落解放同盟 綱領
http://www.bll.gr.jp[...]
2020-07-29
[3]
웹사이트
部落解放理論をめぐる諸問題―元解同中執、北原泰作氏の分裂策動と日共宮本一派との野合―北原理論=近代化論を批判する:1975-10|書誌詳細|国立国会図書館サーチ
https://iss.ndl.go.j[...]
[4]
서적
戦後部落問題関係判例:資料編
部落解放研究所
1995
[5]
뉴스
解放同支部長ら四人逮捕
朝日新聞
1974-12-03
[6]
문서
馬原
1992
[7]
문서
黒川・寺木
2016
[8]
문서
黒川
2011
[9]
문서
黒川
2011
[10]
문서
黒川
2011
[11]
문서
部落解放同盟中央本部中央狭山闘争本部編
1988
[12]
뉴스
解放新聞
1969-03-05
[13]
간행물
判例時報
[14]
간행물
判例時報
[15]
웹사이트
松岡徹公式サイト
http://www.matsuoka-[...]
[16]
웹인용
参議院選挙闘争の態勢を早急に整え、推薦候補の必勝をかちとろう
http://www.bll.gr.jp[...]
部落解放同盟公式ホームページ
2007-06-18
[17]
웹인용
参議院選挙闘争に全力でとりくみ、改憲策動を阻止しよう
http://www.bll.gr.jp[...]
部落解放同盟公式ホームページ
2013-06-03
[18]
웹인용
部落解放・人権政策確立に向け、参議院選挙闘争に全力を
http://www.bll.gr.jp[...]
部落解放同盟公式ホームページ
2016-06-20
[19]
뉴스
2007年3月4日付『しんぶん赤旗』
https://www.jcp.or.j[...]
2007-03-04
[20]
웹인용
尾崎 大介
https://www.tigrefor[...]
2022-09-18
[21]
웹인용
今井 豊
https://www.tigrefor[...]
2022-09-18
[22]
웹인용
つるた 将良|維新の会メンバー|大阪維新の会
https://oneosaka.jp/[...]
2022-09-18
[23]
웹인용
ティグレ顧問・谷畑孝元厚生労働副大臣旭日大綬章受賞
https://www.tigrefor[...]
2022-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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