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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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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 영화는 1896년 영화가 브라질에 처음 소개된 이후 다큐멘터리, 드라마, 코미디, 액션 등 다양한 장르를 거치며 발전해 왔다. 1960년대 시네마 노부 운동을 통해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이 등장했고, 군사정권 시기에는 검열과 억압 속에서도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1985년 민주화 이후에는 국가 지원을 통해 영화 제작이 활성화되었으며, "센트럴 스테이션"과 "시티 오브 갓"과 같은 작품들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브라질 영화는 사회적, 정치적 주제 의식을 반영하며,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통해 브라질 문화와 정체성을 담아내고 있다. 주요 영화사로는 시네지아, 아틀란티다 시네마토그라피카, 베라 크루즈 영화사 등이 있으며,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글라우베르 로샤, 엑토르 바벤코 등의 감독들이 브라질 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에는 "센트럴 스테이션"을 비롯한 여러 브라질 영화가 소개되었으며,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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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영화
브라질의 영화
스크린 수 (2015년)3,005개
인구당 스크린 수 (2015년)10만 명당 1.6개
배급사유니버셜 (20.8%)
디즈니 (17.3%)
영화 제작 (2015년)
총 제작 영화 수79편
장르별 제작 비율극영화: 61.2%
애니메이션: 0%
다큐멘터리: 38.8%
관객 수 (2015년)
총 관객 수172,943,242명
자국 영화 관객 수22,485,736명 (13%)

2. 역사

브라질 영화는 19세기 말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상영되면서 시작되었지만,[14]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 형태로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브라질 영화 산업은 국가의 자금 지원 및 인센티브에 대한 의존도를 반영하여 부침을 겪었다.[13]

브라질 영화 역사는 초창기, 시네마 노부 운동, 군사정권 시기, 그리고 현재까지 각 시기별 특징을 보이며 발전했다.


  • 초창기(19세기 말~1960년대): 1898년 아폰수 세그레토가 과나바라 만을 촬영한 것이 브라질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었으며,[14] 초기에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1908년 최초의 극영화가 제작되었고,[14] 1920년대에는 여러 지역에서 영화 제작이 활발했다. 1930년대에는 카르멘 미란다 주연의 영화들이 국제적으로 성공했다.[16]
  • 시네마 노부 운동(1960년대~1970년대 초): 쿠바 혁명프랑스 누벨바그 등의 영향으로 시작된 시네마 노부는[19] 사회 비판적인 영화를 제작했다.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글라우베르 로샤,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등이 있다.
  • 군사정권 시기(1964년~1985년): 군사 쿠데타 이후 검열과 탄압 속에서 "포르노찬차다"와 같은 장르가 유행하기도 했다.[9] 국영 기관 엠브라필메의 지원을 받는 영화들이 제작되었지만,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9]
  • 민주화 이후(1985년~현재): 1990년대 초 국가 재정 지원 감소로 침체기를 겪었으나, 1990년대 중반 장려 법안 도입으로 다시 활기를 띠었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 등장했으며, 사회 비판적인 경향은 여전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2. 1. 초창기 (19세기 말 ~ 1960년대)

1896년 7월 8일, 리우데자네이루 오비도르 거리에서 프랑스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영화가 상영되면서 브라질에 영화가 처음 소개되었다.[14] 1898년 6월, 이탈리아 이민자 아폰수 세그레토가 과나바라 만을 촬영한 것이 브라질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었다.[14] 초기에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1908년에는 최초의 극영화 "아나스타시오 할아버지의 여행"(''Nhô Anastácio Chegou de Viagem'')이 제작되었다.[14] 1920년대에는 헤시피, 캄피나스, 카타구아제스 등 여러 지역에서 영화 제작이 활발했다.

1930년대에는 카르멘 미란다 주연의 영화들이 국제적으로 성공했다.[16] 1941년 아틀란티다 시네마토그라피카가 설립되었고,[14] 1949년 베라 크루즈 영화사가 상파울루에 설립되었으나 1954년 파산했다.[14] 베라 크루즈 영화사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리마 바헤토 감독의 오 캉가세이루(1953)는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2. 2. 시네마 노부 운동 (1960년대 ~ 1970년대 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쿠바 혁명,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네오리얼리즘의 영향으로 라틴 아메리카 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19] 리우데자네이루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영화 운동인 시네마 노부는 세 시기로 나뉜다. 1960년부터 1964년 브라질 쿠데타가 발발한 1964년까지가 제1기, 1964년부터 군정령 제5호가 발령된 1968년까지가 제2기, 1968년부터 시네마 노보가 종언을 맞이한 1972년까지가 제3기이다.[17]

시네마 노부 운동의 핵심 인물인 감독 글라우베르 로샤


글라우베르 로샤는 종종 자신의 영화가 빈곤을 이국적이고 멀리 떨어진 현실로 여기는 식민주의자의 관점과 자신의 제3세계적 지위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피식민주의자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참함, 굶주림, 그리고 그것이 낳는 폭력을 묘사하여 혁명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태양의 땅의 신과 악마와 광란의 대지가 있다.

시네마 노보 운동의 다른 주요 감독으로는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루이 게라, 레옹 이르츠만, 카를로스 디에게스가 있다. 1964년 브라질 쿠데타 이후 몇 년 동안 탄압이 증가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할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들었고, 많은 마르크스주의 또는 공산주의 성향의 예술가들이 망명을 강요받았다. 군사 정권이 종식된 1985년, 이들 예술가와 가수들은 브라질로 돌아왔다.

시네마 노보 운동을 통해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감독의 건조한 삶(1963), 내가 먹은 프랑스인(1970), 루이 게라 감독의 (1963), 신들과 죽은 자들(1970), 글라우베르 로샤 감독의 태양의 땅의 신과 악마(1964), 광란의 대지(1967), 안토니오 다스 모르테스, 파울루 세자르 사라세니 감독의 도전(1965), 구스타부 다리 감독의 용감한 용사, 조아킹 페드루 지 안드라지 감독의 마쿠나이마(1969) 등이 제작되었다.

2. 3. 군사정권 시기 (1964년 ~ 1985년)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브라질 영화는 검열과 탄압을 받았다. 많은 영화인들이 망명하거나 정치적인 표현을 자제했다. 이 시기에는 "포르노찬차다"라는 장르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사회적 억압 속에서 대중들의 욕망을 분출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9]

상파울루에서는 "보카 드 리소" 지역과 관련된 "주변 영화"가 등장했다. 1968년, 로제리오 스간젤라는 당시 악명 높은 범죄자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인 붉은 빛 강도를 발표했다. 이듬해, 줄리오 브레산의 영화 가족을 죽이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의 행위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시기의 주변 영화는 때때로 영어 단어 언더그라운드를 조롱하는 "우디그루디"라고도 불렸다. 배우이자 호러 영화 감독인 주제 모지카 마린스의 스크린 속 또 다른 자아인 제 두 카이샤웅 또한 인기를 끌었다.[9]

포르노찬차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섹스 코미디였지만, 섹스를 노골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주변 영화들이 번성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영화관들이 자국 영화의 할당량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관의 많은 소유주들은 포르노 콘텐츠를 포함한 저예산 영화에 자금을 지원했다. 비록 그 당시 국가는 군사 정권 하에 있었지만, 검열은 문화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경향이 더 강했다. 이러한 영화들이 번성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주는 원인이 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충분한 관객을 끌어모아 그 시기 동안 꾸준히 시장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9]

이 시기의 영화들은 국영 기관, 특히 엠브라필메의 지원을 받았다. 엠브라필메의 역할은 다소 모호하게 인식되었다. 의심스러운 선정 기준, 관료주의, 편애로 비판받았으며, 예술 작품에 대한 정부 통제의 한 형태로 여겨졌다. 반면, 이 시기의 많은 작품들은 엠브라필메의 존재 때문에 제작되었다.[9]

아르날두 자보르가 넬송 호드리게스의 ''모든 노출은 처벌받는다''(1973)를 각색한 작품, 카를루스 디에지스의 ''브라질, 안녕''(1979), 엑토르 바벤코의 ''픽소테''(1981), 넬송 페레이라 도 산토스의 ''감옥의 회고록''(1984) 등 다양하고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조르제 아마두의 ''도나 플로와 그녀의 두 남편''(1976)을 브루노 바레투가 각색한 영화는 브라질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영화 중 하나이다.[9]

조제 데 아렌카르 원작, 조르제 보단스키 감독의 『이라세마』(1974), 조르제 아마두 원작, 브루노 바레토 감독의 『도나 플로와 그녀의 두 남편』(1976)과 『가브리에라』(1984), 그라실리아노 라모스 원작, 넬송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감독의 『감옥의 추억』(1983), 마누엘 푸이그 원작, 엑토르 바벤코 감독의 『거미 여인의 키스』(1985) 등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나, 아마존 열대 우림 개발 문제를 다룬 카를루스 지에지스 감독의 『바이바이 브라질』(1979), 일본계 브라질인을 다룬 치즈카 야마자키 감독의 『가이진, 자유로 가는 길』(1979)과 같은 영화가 제작되었다.[9]

2. 4. 민주화 이후 (1985년 ~ 현재)

페르난두 콜루 정부 시절인 1990년대 초, 국가 재정 지원이 크게 줄어들어 1989년에는 영화 제작이 사실상 중단되고 엠브라필메가 폐쇄되었다.[14] 그러나 1990년대 중반, FHC 정부 하에서 장려 법안이 도입되면서 영화 제작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95년에 개봉한 코미디 영화 《카를로타 조아키나 - 브라질의 공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브라질 영화 제작 부활, 즉 ''retomada''의 첫 작품으로 꼽힌다. 이후 《

3. 주요 특징

브라질 영화는 오랜 역사와 풍부한 유산을 바탕으로 드라마, 다큐멘터리, 범죄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에서 세계 영화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브라질 영화는 생동감 넘치는 스토리텔링과 강력한 문화적 주제를 통해 브라질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정치적 환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페르난두 메이렐레스, 와그네르 모라, 조제 파디야와 같은 유명 감독들은 브라질 영화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1]

1990년대 초 페르난두 콜루 정부 시절, 국가 재정 지원 감소로 영화 제작이 중단되고 엠브라필메가 폐쇄되는 위기를 겪었지만, 1990년대 중반 페르난두 엔히케 카르도주 정부의 장려 법안 도입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이 시기에는 《카를로타 조아키나 - 브라질의 공주》(1995)를 시작으로, 《O Quatrilho》, 《Four Days in September》, 《중앙역》, 《시티 오브 갓》 등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 등장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1]

헤지 글로부와 같은 방송사의 영화 제작 참여는 상업적인 성공을 가져왔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상업화된 영화 제작 환경을 우려하며 독립 영화 제작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한편, 에두아르두 쿠티뉴, 주앙 모레이라 살레스와 같은 감독들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브라질 영화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2007년 영화 《엘리트 스쿼드]》는

3. 1. 사회적, 정치적 주제의식

브라질 영화는 '''드라마, 다큐멘터리, 범죄 스릴러'''와 같은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의 다양한 사회 및 정치적 환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60년대 시네마 노보 운동은 브라질 사회의 현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조명하는 영화들을 탄생시켰다.[17] 쿠바 혁명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이 운동은[19] 사회 불평등, 빈곤, 인종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주제를 다루며 사회 변화를 촉구했다.

시네마 노보는 세 시기로 나뉜다.

  • 제1기: 1960년부터 브라질 쿠데타가 발발한 1964년까지
  • 제2기: 1964년부터 군정령 제5호가 발령된 1968년까지
  • 제3기: 1968년부터 시네마 노보가 종언을 맞이한 1972년까지[17]


이 시기에는 넬송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감독의 『건조한 삶』(1963), 『내가 먹은 프랑스인』(1970), 루이 게라 감독의 『총』(1963), 『신들과 죽은 자들』(1970), 글라우베르 로샤 감독의 『태양의 땅의 신과 악마』(1964), 『광란의 대지』(1967), 『안토니오 다스 모르테스』, 파울루 세자르 사라세니 감독의 『도전』(1965), 구스타부 다리 감독의 『용감한 용사』, 조아킹 페드루 지 안드라지 감독의 『마쿠나이마』(1969) 등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까지 이어져, 많은 브라질 영화들이 '''파벨라''', '''사회 경제적 격차''' 등과 같은 지역 문제를 다루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3. 2.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

로제리오 스간젤라는 1968년에 당시 악명 높았던 범죄자를 다룬 이야기인 붉은 빛 강도를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가족을 죽이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개봉되었는데, 제목 그대로의 행동을 하는 주인공을 묘사했다. 이 시기 주변 영화는 영어 단어 언더그라운드를 풍자하여 "우디그루디"라고 불리기도 했다. 배우이자 공포 영화 감독인 주제 모지카 마린스의 또 다른 자아인 제 두 카이샤웅도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에는 포르노찬차다라는 장르가 인기를 끌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섹스 코미디였지만, 노골적으로 성적인 장면을 묘사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영화들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관들이 자국 영화 상영 할당량을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관 소유주들은 포르노를 포함한 저예산 영화에 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군사 정권 하에 있었지만, 검열은 문화적인 것보다는 정치적인 경향이 강했다.

이 시기 영화들은 국영 기관, 특히 엠브라필메의 지원을 받았다. 엠브라필메는 선정 기준, 관료주의, 편애 등으로 비판받으며 정부 통제의 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엠브라필메 덕분에 많은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

아르날두 자보르가 넬송 호드리게스의 ''모든 노출은 처벌받는다''(1973)를 각색한 작품, 카를루스 디에지스의 ''브라질, 안녕''(1979), 엑토르 바벤코의 ''픽소테''(1981), 넬송 페레이라 도 산토스의 ''감옥의 회고록''(1984) 등 다양하고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브루노 바레투가 조르제 아마두의 ''도나 플로와 그녀의 두 남편''(1976)을 각색한 영화는 브라질 영화 역사상 가장 흥행한 영화 중 하나이다.

3. 3. 브라질 문화와 정체성 반영

브라질 영화는 브라질의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매체이다. 브라질 영화를 통해 브라질의 역사, 음악, 춤, 종교, 민속 등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접할 수 있다. 특히, 파벨라, 사회 경제적 격차, 브라질 민속과 같은 지역 문제에 초점을 맞춘 영화들은 브라질 국민들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다.[1]

4. 주요 영화사 및 제작사


  • 시네지아(Cinédia)
  • 아틀란티다 시네마토그라피카(Atlântida Cinematográfica)
  • 베라 크루스 영화사(Companhia Cinematográfica Vera Cruz)
  • 브라질 영화 배급 공사(Embrafilme): 1990년 3월 페르난두 콜로르 대통령에 의해 폐지되면서 브라질 영화 산업은 공적 지원이 끊기고 제작 편수가 0편으로 추락했다.[14]

5. 주요 감독


  • 아폰수 세그레토(Afonso Segreto): 1898년(메이지 시대 31년) 6월, 브라질 최초의 영상으로 과나바라 만의 실경을 촬영했다.[14]
  • 프란체스코 산토스(Francesco Santos): 1913년(다이쇼 시대 2년)에 최초의 장편 영화 『파나오스의 범죄』를 제작했다.[15]
  • 마리오 페이쇼토(Mário Peixoto): 1930년대에 브라질 무성 영화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16] 『한계』(1931)를 제작했다.
  • 움베르토 마우로(Humberto Mauro): 아데마르 곤자가와 공동 감독한 『잔혹한 족쇄』(1933)는 브라질 무성 영화의 마지막 작품이다.
  • 아데마르 곤자가(Adhemar Gonzaga): 움베르토 마우로와 공동 감독한 『잔혹한 족쇄』(1933)는 브라질 무성 영화의 마지막 작품이다. 카르멘 미란다 주연의 영화 『아로 아로 브라질』(1934)은 국제적으로 성공했다.[16]
  • 리마 바헤토(Lima Barreto): 1950년대에 국제적으로 평가를 받은 『캉가세이루』(1952)를 제작했다.
  •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 이후 시네마 노부 운동으로 이어지는 『리우 40도』(1955)를 제작했다. 시네마 노부 운동에서는 『건조한 삶』(1963), 『내가 먹은 프랑스인』(1970)를 제작했다. 그라실리아노 라모스 원작의 『감옥의 추억』(1983)을 제작했다.
  • 루이 게라(Ruy Guerra): 시네마 노부 운동에서 『총』(1963), 『신들과 죽은 자들』(1970)을 제작했다.
  • 글라우베르 로샤(Glauber Rocha): 시네마 노부 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종종 자신의 영화가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참함, 굶주림, 그리고 그것이 낳는 폭력을 묘사하여 혁명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태양의 땅의 신과 악마''와 ''혼돈의 땅''이 있다.
  • 파울루 세자르 사라세니(Paulo César Saraceni): 시네마 노부 운동에서 『도전』(1965)을 제작했다.
  • 구스타부 다리(Gustavo Dahl): 시네마 노부 운동에서 『용감한 용사』를 제작했다.
  • 조아킹 페드루 지 안드라지(Joaquim Pedro de Andrade): 시네마 노부 운동에서 『마쿠나이마』(1969)를 제작했다.
  • 조르제 보단스키(Jorge Bodanzky): 조제 데 아렌카르 원작의 『이라세마』(1974)를 제작했다.
  • 엑토르 바벤코(Héctor Babenco): 마누엘 푸이그 원작의 『거미 여인의 키스』(1985)를 제작했다.
  • 카를루스 지에지스(Carlos Diegues): 아마존 열대 우림 개발 문제를 다룬 『바이바이 브라질』(1979)을 제작했다.
  • 치즈카 야마자키(Tizuka Yamasaki): 일본계 브라질인을 다룬 『가이진, 자유로 가는 길』(1979)을 제작했다.
  • 브루누 바레투(Bruno Barreto): 조르제 아마두 원작의 『도나 플로와 그녀의 두 남편』(1976), 『가브리에라』(1984)를 제작했다.
  • 발테르 살레스(Walter Salles)
  • 안셀모 두아르테(Anselmo Duarte)
  • 시쿠 부아르키(Chico Buarque)
  • 아나 레젠데(Ana Rezende)
  • 페르난두 메이렐레스(Fernando Meirelles): Freecine APK는 페르난두 메이렐레스와 같은 유명 브라질 감독들의 다양한 영화를 제공한다.

6. 주요 배우

배우설명
카르멘 미란다[16]1930년대에 아데마르 곤자가 감독의 영화 『아로 아로 브라질』(1934)에 출연하여 국제적으로 성공했다.
페르난다 몬테네그루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된 최초이자 유일한 브라질 여배우이다.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으며,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
호드리고 산토루안드레 리스텀의 영화 My Country(《Meu País》)로 제44회 브라질리아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앨리스 브라가
소냐 브라가
헤베 카마르고
호날두 골리아테
이베치 상갈루
조 소아레스
안셀모 두아르테
나이르 베로
실라 멜루
아드리아나 리마


7. 주요 영화제


  • 상파울루 국제 영화제
  • 브라질리아 영화제 (브라질리아 영화제)
  • 그라마두 영화제 (그라마두 영화제)
  • 리오 영화제 (리오 영화제)
  • 헤시피 영화제 (헤시피 영화제)

8. 한국과의 관계

브라질 영화는 한국과 특별한 관계는 없지만, 몇몇 작품들이 한국에 소개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페르난다 몬테네그루 주연의 센트럴 스테이션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시티 오브 갓엘리트 스쿼드 등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8. 1. 한국에 소개된 브라질 영화

페르난다 몬테네그루가 주연한 센트럴 스테이션은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후 한국 극장에서도 개봉되었다.[5] 이 영화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지명되었고,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

시티 오브 갓엘리트 스쿼드 등 다른 브라질 영화들도 한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참조

[1] 웹사이트 Table 8: Cinema Infrastructure - Capacity http://data.uis.unes[...] UNESCO Institute for Statistics 2018-01-01
[2] 웹사이트 Table 6: Share of Top 3 distributors (Excel) http://stats.uis.une[...] UNESCO Institute for Statistics 2018-01-01
[3] 웹사이트 Table 1: Feature Film Production - Genre/Method of Shooting http://stats.uis.une[...] UNESCO Institute for Statistics 2018-01-01
[4] 웹사이트 Table 11: Exhibition – Admissions & Gross Box Office (GBO) http://stats.uis.une[...] UNESCO Institute for Statistics 2018-01-01
[5] 서적 Brazilian Cinema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6] 논문 Slow Fade to Afro: The Black Presence in Brazilian Cinema 1982-12
[7] 논문 The Art of Seduction: Representation of Women in Brazilian Silent Cinema 1993
[8] 웹사이트 Hollywood Filmograph (Jun-Aug 1929) https://archive.org/[...] Hollywood Filmograph, inc. 1929-06-01
[9] 서적 Stars and Stardom in Brazilian Cinema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16-12-01
[10] 뉴스 Success of the film Elite Squad https://observatorio[...]
[11] 간행물 Cinemark in Latin America 2000-03-03
[12] 뉴스 Cinema of Brazil https://antigo.ancin[...]
[13] 문서 住田(2000:158)
[14] 문서 映画、駐日ブラジル大使館、2010年10月13日閲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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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IMDB인물 201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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