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크라마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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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크라마쉴라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팔라 왕조의 다르마팔라 왕에 의해 건립된 고대 불교 대학이다. 티베트 자료에 따르면 날란다 등과 함께 5개의 주요 대학 중 하나였으며, 100명이 넘는 교원과 1000명 이상의 학생이 수학하는 대규모 수도원이었다. 철학, 문법, 탄트라 등을 가르쳤으며, 아티샤와 같은 저명한 학자를 배출하여 불교의 가르침을 해외로 전파했다. 1203년 튀르크-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현재 비하르 주에서 유적 발굴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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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인도의 대학교 - 날란다
날란다는 5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인도 마가다에 존재했던 대승불교 대학으로, 굽타 왕조와 하르샤 황제의 후원을 받아 번성했으나 1193년 파괴되었고, 201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대 날란다 대학교가 그 학문적 전통을 잇고 있다.
비크라마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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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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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바갈푸르, 비하르 주, 인도 |
유형 | 학습 센터 |
건축 시기 | 8세기–9세기 CE |
폐쇄 시기 | 13세기 CE |
파괴 | 무함마드 빈 바흐티야르 할지에 의해 1193년경 파괴됨 |
명칭 | |
다른 이름 | 비크라마실라 ヴィクラマシーラ僧院 (비쿠라마시라 소인) ヴィクラマシーラ大僧院 (비쿠라마시라 다이소인) 超岩寺 (초암사) 超戒寺 (초계사) |
상세 정보 |
2. 역사
비크라마쉴라 대학은 팔라 제국의 왕 다르마팔라에 의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사이에 고대 벵골과 마가다 지역에 세워졌다.[34][7] 티베트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인도에는 비크라마쉴라를 포함하여 날란다, 소마푸라, 오단타푸라, 자가달라 등 5개의 주요 불교 대학(마하비하라)이 있었으며, 이들은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며 운영되었다.[5][6]
비크라마쉴라는 이들 중 가장 큰 불교 대학 중 하나로, 100명이 넘는 교사와 1000명 이상의 학생이 머물렀다.[8][9] 이곳에서는 철학, 문법, 형이상학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으며, 특히 금강승(불교 탄트라) 연구가 활발했다.[9] 비크라마쉴라는 많은 저명한 학자를 배출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티샤 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아티샤 디팡카라 스리갸나sa이다. 그는 1042년 티베트로 건너가 티베트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약 4세기 동안 번성했던 비크라마쉴라는[7] 1193년 날란다가 파괴된 지 10년 후인 1203년,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할지가 이끄는 튀르크계 이슬람 세력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7][33] 이 사건은 인도 불교의 쇠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33]
비크라마쉴라의 역사와 활동에 대한 정보는 주로 티베트의 기록, 특히 16-17세기 티베트 승려이자 역사가인 타라나타(Tāranātha|타라나타bo, 1575-1634)의 저술을 통해 알려져 있다.[34][8][33]
2. 1. 설립과 발전
비크라마쉴라 대학은 팔라 제국의 왕 다르마팔라에 의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사이에 고대 벵골과 마가다 지역에 세워졌다.[34][7] 티베트 자료에 따르면, 팔라 시대에는 여러 불교 사원이 세워졌으며, 그중 5개의 뛰어난 마하비하라(대정사)가 있었다. 이들은 비크라마쉴라, 날란다, 소마푸라, 오단타푸라, 자가달라로, 당시 주요 대학들이었다.[5] 이 5개의 사원은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운영되었는데, 국가의 감독 아래 상호 조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뛰어난 학자들이 이들 사원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하며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다.[6]비크라마쉴라는 이 네트워크에서 가장 큰 불교 수도원 중 하나로, 100명이 넘는 교사와 1000명이 넘는 학생이 머물렀다.[8][9] 이곳에서는 철학, 문법, 형이상학, 인도 논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으며, 특히 금강승(불교 탄트라)이 가장 중요한 연구 분야였다.[9] 비크라마쉴라는 많은 저명한 학자를 배출했으며, 이들은 종종 외국으로 초청되어 불교의 가르침, 문화, 학문을 널리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 학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티샤 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아티샤 디팡카라 스리갸나sa이다. 그는 1042년 티베트 서부 구게 왕국의 초청을 받아 티베트로 가서, 이후 티베트 불교의 주요 종파인 까귀파, 사캬파, 겔룩파, 조낭파 등의 모태가 되는 신역파(Sarma)의 선구적인 가르침인 카담 법류를 세웠다. (후에 그의 제자 돔톤(Dromtön)이 카담파를 창시했다.) 아티샤의 가르침은 밀교의 중요한 흐름으로, 훗날 쫑카파의 겔룩파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크라마쉴라는 설립 이후 약 4세기 동안 번성했으나,[7] 1203년 무함마드 바크티야르 할지가 이끄는 튀르크-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었다. 비크라마쉴라의 역사와 활동은 주로 티베트의 기록, 특히 16-17세기 티베트 승려이자 역사가인 타라나타의 저술을 통해 오늘날 알려져 있다.[34][8][33]
2. 2. 쇠퇴와 파괴
1193년 날란다 사원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되고 10년 후인 1203년,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 무함마드 바흐티야르 할지가 이끄는 튀르크-이슬람 세력은 세나 왕조 침공 과정에서 비크라마쉴라 대학을 파괴하였다.[7][33] 이 사건으로 약 4세기 동안 번성했던 비크라마쉴라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7] 인도 불교의 명맥 또한 끊어지게 되었다.[33]파괴 이후 비크라마쉴라에 대한 정보는 주로 티베트 사료를 통해 전해졌다. 특히 16세기에서 17세기에 활동했던 티베트 승려이자 역사가인 타라나타(1575-1634년)의 저술이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34][8][33]
3. 조직
학자 수쿠마르 더트(Sukumar Dutt)에 따르면, 비크라마쉴라는 다른 마하비하라(대승원)에 비해 더욱 체계적이고 명확하게 구분된 위계 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0] 이 조직 구조는 수도원장(Adhyakṣa|아디약샤sa)을 정점으로 하여, 대학의 각 문을 책임지는 6명의 문지기 학자(Dvārapāla / Dvārapaṇḍita|드바라팔라 / 드바라판디타sa), 여러 등급의 학자들(Mahapaṇḍita|마하판디타sa, Paṇḍita|판디타sa), 교수와 스승들(Upādhyāya / Āchārya|우파디야야 / 아차리야sa), 그리고 다수의 거주 승려들(bhikṣu|빅슈sa)로 구성되었다.[10] 특히, 6명의 문지기 학자는 단순한 문지기가 아니라 각 방면의 학문을 대표하는 중요한 학자들로 여겨졌으며, 이는 비크라마쉴라의 학문적 권위와 체계적인 운영을 보여준다. 티베트 불교 역사가 타라나타의 기록에 따르면, 찬나카 왕(955–983) 통치 시기에는 라트나카라산티, 즈냐나스리미트라, 나로파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이 문지기 학자 역할을 수행했다.[10]
3. 1. 위계
학자 수쿠마르 더트에 따르면, 비크라마쉴라는 다른 마하비하라보다 더 명확하게 구분된 위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10] 주요 직책과 역할은 다음과 같다.직책 | 원어 명칭 | 역할 및 인원수 |
---|---|---|
수도원장 | Adhyakṣa|아디약샤sa | - |
문지기 (문학자) | Dvārapāla / Dvārapaṇḍita|드바라팔라 / 드바라판디타sa | 6명 (동, 서, 첫 번째 중앙, 두 번째 중앙, 북, 남쪽 문에 각각 1명씩 배치) |
대학자 | Mahapaṇḍita|마하판디타sa | - |
학자 | Paṇḍita|판디타sa | 약 108명 |
교수/스승 | Upādhyāya / Āchārya|우파디야야 / 아차리야sa | 약 160명 (학자 포함) |
거주 승려 | bhikṣu|빅슈sa | 약 1,000명 |
티베트 불교 역사가 타라나타에 따르면, 찬나카 왕(955–983) 통치 기간 동안 비크라마쉴라가 번성했을 때의 문지기(Dvārapāla|드바라팔라sa)는 다음과 같았다.[10]
- 동문: 라트나카라산티 (Ratnākaraśānti|라트나카라샨티sa)
- 서문: 바기스와라키르티 (Vāgīśvarakīrti|바기슈와라키르티sa)
- 첫 번째 중앙 문: 라트나바지라 (Ratnavajra|라트나바즈라sa)
- 두 번째 중앙 문: 즈냐나스리미트라 (Jñānaśrīmitra|즈냐나슈리미트라sa)
- 북문: 나로파 (Naropa|나로파sa)
- 남문: 프라즈냐카라마티 (Prajñākaramati|프라즈냐카라마티sa)
3. 2. 주요 학자
비크라마쉴라는 100명 이상의 교사와 약 1,000명의 학생을 보유한 대규모 불교 대학이었으며, 이곳에서 배출된 저명한 학자들은 외국에 초청되어 불교 학문과 문화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이들 학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티샤( 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아티샤 디팡카라 스리즈냐나sa )이다. 그는 1042년 티베트 서부의 구게 왕국의 초빙을 받아 티베트로 가서, 티베트 불교의 까귀파, 사캬파, 겔룩파, 조난파 등 신역파(Sarma)의 선구자가 되는 카담의 법류를 세웠다. 이후 그의 제자인 돔톤(Dromtön)이 가담파를 창시했다. 비크라마쉴라에서는 철학, 문법, 형이상학, 인도 논리학 등 다양한 주제를 가르쳤지만, 특히 금강승(바즈라야나), 즉 불교 탄트라가 가장 중요한 학습 분야였다.[9] 아티샤의 가르침은 이후 쫑카파 대사의 겔룩파에도 영향을 미쳤다.
학자 수쿠마르 더트(Sukumar Dutt)에 따르면, 비크라마쉴라는 다른 마하비하라(대승원)보다 더 명확하게 구분된 위계 구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10]
- 수도원장 (''Adhyakṣa'')
- 6명의 문지기 학자 (''Dvārapāla'' 또는 ''Dvārapaṇḍita''): 동, 서, 제1 중앙, 제2 중앙, 북, 남문에 각각 1명씩 배치되었다.
- 거대학자 (''Mahapaṇḍita'')
- 학자 (''Paṇḍita''): 약 108명
- 교수 또는 스승 (''Upādhyāya'' 또는 ''Āchārya''): 학자를 포함하여 약 160명
- 거주 승려 (''bhikṣu''): 약 1,000명
타라나타에 따르면, 찬나카 왕(955–983)의 통치 기간 동안 비크라마쉴라가 절정에 달했을 때의 문지기 학자(Dvārapāla)는 다음과 같았다:[10]
- 동문: 라트나카라샨티
- 서문: 바기스와라키르티
- 제1 중앙 문: 라트나바지라
- 제2 중앙 문: 즈냐나스리미트라
- 북문: 나로파
- 남문: 프라즈냐카라마티


비크라마쉴라에서 공부하거나 가르쳤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비크라마쉴라는 금강승(바즈라야나)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여러 저명한 탄트라 스승들이 활동했다.[23] 주요 탄트라 스승들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 붓다즈냐나파다 (첫 번째 스승)[23]
# 디팜카라바드라[23]
# 자야바드라 (스리랑카 출신, 차크라삼바라 탄트라 최초의 저명한 해설자)[23]
# 슈리다라[24]
# 바바바타 (차크라삼바라의 저명한 해설자, 마하싯다 바드라파다일 가능성 있음)[24][25]
# 바뱌키르티 (차크라삼바라 해설자)[25]
# 릴라바즈라
# 두르자야찬드라 (차크라삼바라 해설자, 린첸 상포와 협력, 사캬파에 중요)[25]
# 사마야바즈라
# 타타가타라크시타 (차크라삼바라 해설자, 린첸 드락과 협력)[25]
# 보디바드라
# 카마라락시타
4. 유적
비크라마쉴라 대학의 유적은 인도 비하르 주 바갈푸르 구의 칼가온 인근에서 발굴되었으며, 현재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1960년대 파트나 대학교와 1970-80년대 인도 고고학 조사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발굴을 통해, 중앙에 십자형 탑이 있는 거대한 사각형 수도원, 도서관 건물, 그리고 여러 작은 보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26] 전체 유적은 100acre가 넘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주요 구조물로는 각 변의 길이가 330m에 달하는 사각형 수도원, 중앙에 위치한 2층 높이의 십자형 탑, 그리고 독특한 냉방 시설을 갖춘 도서관 건물이 확인되었다. 수도원은 승려들의 거주 공간으로 총 20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방 아래에서는 명상을 위한 지하 공간도 발견되었다. 중앙 탑은 예배의 중심지로, 내부에는 거대한 스투코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외벽은 정교한 테라코타 판으로 장식되어 당시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이는 같은 팔라 제국 시기에 지어진 소마푸라 마하비하라와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발굴된 유물들은 현장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도서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귀중한 필사본들은 역사적 격변과 기후 조건으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일부는 네팔과 티베트 등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28]
오랜 기간 방치되어 손상된 유적을 복원하고 개발하려는 노력이 인도 고고학 조사국을 중심으로 진행 중이며,[8][29][30] 날란다 대학교처럼 대학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려는 계획도 추진되고 있다.[31]
4. 1. 발굴과 배치

수도원의 유적은 인도 비하르 주 바갈푸르 구의 칼가온에서 부분적으로 발굴되었으며, 현재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 유적지에 대한 세밀한 발굴 작업은 초기에 파트나 대학교의 B. P. 신하(1960년–1969년)가 진행했고, 이후 인도 고고학 조사국(1972년–1982년)이 이어받아 진행했다. 이 발굴을 통해 중앙에 십자형 탑이 있는 거대한 사각형 수도원, 도서관 건물, 그리고 작은 보탑들의 무리가 드러났다.[26] 수도원 북쪽에서는 티베트 사원과 힌두 사원을 포함한 여러 흩어진 구조물들이 발견되었다. 전체 부지는 100acre가 넘는 면적에 걸쳐 있다.
승려들의 거주지였던 수도원은 거대한 사각형 구조로, 각 변의 길이가 330m에 달한다. 총 208개의 방이 있으며, 네 면 각각 52개의 방이 공통 현관으로 연결되는 구조이다. 일부 방 아래에서는 벽돌로 아치형 천장을 만든 지하 공간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승려들이 명상을 위해 사용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예배를 위해 세워진 주요 탑은 사각형 수도원 중앙에 위치하며, 진흙 모르타르를 사용하여 벽돌로 지어졌다. 이 탑은 2층 높이에 평면이 십자형이며, 북쪽에 있는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지면에서의 높이는 약 15m이다. 탑의 동서남북 네 방향에는 각각 기둥이 있는 전실과 그 앞에 별도의 기둥이 있는 만다파(예배 공간)가 딸린 방이 돌출되어 있다. 탑의 네 방에는 원래 앉아 있는 부처의 거대한 스투코(치장 벽토) 조각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중 세 개는 제자리에서 발견되었다. 북쪽에 있던 나머지 하나는 점토상이 손상된 후 석조상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도원 남서쪽 모서리에서 약 32m 떨어진 곳에는 직사각형 구조의 건물이 있는데, 좁은 복도를 통해 주요 수도원과 연결된다. 이 건물은 도서관으로 확인되었다. 건물 뒤편 벽에는 여러 개의 통풍구가 있어, 인접한 저수지의 차가운 물을 이용해 실내를 시원하게 유지하는 냉방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섬세한 필사본들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
발굴 과정에서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이 유물들은 인도 고고학 조사국이 관리하는 현장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 2. 주요 탑
숭배를 목적으로 세워진 비크라마쉴라의 주요 탑은 사각형 수도원의 중앙에 위치하며, 진흙 모르타르를 이용해 벽돌로 지어졌다.[26] 이 탑은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평면은 십자형이고 지상에서의 높이는 약 15m에 달한다. 하층의 높이는 약 2.25m이며, 상층도 비슷한 높이로 지어졌다. 두 층 모두에는 순례길이 마련되어 있는데, 하층 순례길의 폭은 약 4.5m, 상층 순례길의 폭은 약 3m이다.[27]
탑의 상층부로는 북쪽에 있는 계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네 개의 주요 방향에는 각각 기둥이 있는 앞방(전실)과 그 앞에 별도의 기둥을 갖춘 만다파가 돌출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탑 내부의 네 방에는 앉아 있는 부처의 거대한 스투코 조각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중 세 개는 원래 위치에서 발견되었으나, 북쪽에 있던 조각상은 점토상이 손상된 후 석상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안타깝게도 발견된 모든 스투코상은 허리 윗부분이 파손된 상태였다. 이 불상들은 벽돌로 만들어진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으며, 받침대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안료로 칠해진 흔적이 남아 있다. 방과 앞방의 벽과 바닥은 석회로 마감되었다.
탑의 두 층 벽면은 다양한 테라코타 판과 몰딩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는 팔라 시대(8세기~12세기)에 이 지역에서 번성했던 테라코타 예술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테라코타 판에는 부처,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미륵, 잠발라, 마리치, 타라와 같은 여러 불교 신들과 불교 관련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일부 사회 생활이나 사냥 장면, 비슈누, 파르바티, 아르다나리쉬바라, 하누만과 같은 다른 힌두교 신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은둔자, 요가 수행자, 설교자, 악사, 전사, 궁수, 뱀 조련사 등 다양한 인간의 모습과 원숭이, 코끼리, 말, 사슴, 멧돼지, 표범, 사자, 늑대, 새 등 여러 동물들의 형상도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탑의 건축 양식과 테라코타 판 장식은 같은 팔라 제국의 왕 다르마팔라가 세운 방글라데시의 소마푸라 마하비하라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4. 3. 도서관
수도원 남서쪽 모서리에서 약 32m 떨어진 곳에 직사각형 구조의 건물이 있으며, 좁은 복도를 통해 주요 수도원과 연결된다. 이 건물은 도서관으로 확인되었다. 도서관 건물은 뒷벽에 설치된 여러 통풍구를 통해 인접한 저수지의 차가운 물을 이용한 냉방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섬세한 필사본들을 효과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장치로 추정된다.그러나 비크라마쉴라 도서관에 소장되었던 대다수의 필사본은 바크티야르 킬지가 이끈 이슬람 세력의 침략과 같은 여러 역사적 격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또한 인도-갠지스 평원의 습한 기후는 야자 잎으로 만들어진 필사본 보존에 적합하지 않아 자연적으로 훼손된 경우도 많았다.
다행히 일부 필사본은 수도원이 파괴될 당시 많은 불교 승려들이 네팔과 티베트 등지로 피신하면서 함께 옮겨져 보존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비크라마쉴라와의 관련성이 확인된 필사본은 총 5개이다. 그중 하나는 현재 대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제작 장소로 '비크라마쉴라 왕의 영광스러운 대수도원'(śrīmadvikramaśīladevamahāvihāra)을 명시하고 있다. 이 필사본에는 아슈타사하스리카 프라즈냐파라미타의 내용이 담겨 있다.[28]
4. 4. 복원 노력
비크라마쉴라는 수년 동안 방치되어 유적이 광범위하게 손상되었다. 현재 인도 고고학 조사국은 비크라마쉴라 발굴 현장을 개발할 계획이다.[8][29][30]2009년부터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곳을 유지 관리하고 미화하는 작업이 상당히 진행되었다. 갠지스 강에서 강 크루즈를 하는 동안 서양 관광객의 유입도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오랫동안 날란다 대학교처럼 이 대학을 부활시켜 달라고 요구해 왔다. 2015년,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대학 부활을 위해 50억인도 루피 규모의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주 정부가 약 500acre의 토지를 제공해야 했지만,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프라나브 무케르지 대통령은 2017년 비크람쉴라 대학교의 발굴된 유적을 방문했다. 그는 대학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서 대학 부활을 위해 총리에게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31]
5. 현대적 의의
비크라마쉴라는 고대 인도의 중요한 불교 대학이었으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오랫동안 잊혔다. 그러나 주로 티베트의 불교 관련 기록들을 통해 그 존재와 중요성이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비크라마쉴라는 인도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학술적으로도 고대 인도 불교, 특히 밀교와 티베트 불교 연구에 있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학문적 가치를 바탕으로 비크라마쉴라 유적과 그 의미를 기리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른 문화권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5. 1. 문화유산
비크라마쉴라는 주로 티베트 사료를 통해 그 중요성이 알려져 있으며, 특히 16세기에서 17세기에 활동한 티베트 승려 타라나타(1575-1634년)가 쓴 티베트 사원의 역사 기록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34]현대에 와서도 비크라마쉴라의 역사적 가치는 여러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인도 철도는 델리의 아난드 비하르에서 비하르 주의 바갈푸르까지 운행하는 12367/12368 열차에 비크라마쉴라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을 붙여 이곳을 기리고 있다. 또한, 비크라마쉴라 유적지에서는 매년 2월 '비크라마쉴라 마호차브'(Vikramashila Mahotsav)라는 축제가 열려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5. 2. 학술 연구
비크라마쉴라 대학에 대한 연구는 주로 티베트의 역사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16세기에서 17세기에 활동했던 티베트 승려 타라나타(Tāranātha|타라나타bo)가 저술한 티베트 불교 역사 기록은 비크라마쉴라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34] 티베트 사료를 통해 비크라마쉴라의 설립 과정, 규모, 학문적 성과 및 티베트 불교 발전에 미친 영향 등을 파악할 수 있다.티베트 기록에 따르면, 비크라마쉴라는 팔라 제국의 다르마팔라 왕에 의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사이에 세워졌으며, 100명 이상의 교수와 1000명 이상의 학생이 있었던 대규모 불교 교육기관이었다. 이곳에서는 철학, 문법, 형이상학, 인도 불교 등 다양한 학문이 교육되었으며, 특히 밀교 연구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비크라마쉴라 출신의 저명한 학자들은 외국에 초빙되어 불교 학문과 문화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1042년 티베트 서부의 구게 왕국 초빙으로 건너가 티베트 불교의 까귀파, 사캬파, 겔룩파, 조난파 등 신역파(Sarma)의 선구자가 되는 카담의 법류(후에 제자 돔톤(Dromtön)이 가담파를 창시)를 세운 아띠샤(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아띠샤 디빵까라 스리갸나bo)이다. 그의 가르침은 이후 겔룩파 등 티베트 불교의 주요 종파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비크라마쉴라는 고대 남아시아 불교 연구, 특히 티베트 불교의 발전과 전파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1193년 날란다 사원이 파괴된 지 10년 후인 1203년, 아이바크 휘하의 장군 무하마드 바프티야르 할지(Muhammad Bakhtiyar Khalji)가 이끄는 튀르크계 이슬람교 세력의 세나 왕조 침공 과정에서 비크라마쉴라 대학 역시 파괴되면서 인도 불교의 학문적 전통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역시 티베트 사료 등을 통해 연구되고 있다.
5. 3. 한국 불교와의 연관성 (추가)
비크라마쉴라 대학과 한국 불교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나 영향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하지만 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다. 비크라마쉴라 출신의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 명인 아티샤(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아티샤 디팡카라 슈리갸나sa)는 1042년 티베트로 건너가 티베트 불교의 개혁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후대 카규파, 사캬파, 겔룩파 등 신역파(新訳派, Sarma)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티베트 불교는 이후 원나라 시기 등을 통해 고려에도 전래되어 영향을 미쳤으므로, 티베트 불교 형성에 기여한 아티샤와 그의 모교인 비크라마쉴라의 학풍이 간접적으로나마 한국 불교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비크라마쉴라는 철학, 문법, 형이상학 등 다양한 학문과 함께 특히 밀교(탄트라 불교)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한국 불교 역시 삼국 시대 말부터 밀교 사상을 수용하여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 인도 불교의 주요 밀교 중심지였던 비크라마쉴라의 학문적 성과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한국의 밀교 전통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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