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의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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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틀즈의 해산은 1970년 폴 매카트니의 솔로 앨범 발표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멤버 간의 불화, 매니저 문제, 음악적 견해 차이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매카트니는 비틀즈 해산을 암시하는 인터뷰로 인해 비난을 받았으나, 이후 오해를 해명하려 했다. 1970년 12월, 매카트니는 다른 멤버들을 상대로 파트너십 해산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1971년 5월에 비틀즈는 법적으로 해산되었다. 해산 이후에도 멤버들은 각자의 활동을 이어갔으며, 1970년대에 재결합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1980년 존 레논의 사망 이후, 1990년대에 미발표 데모곡을 활용한 신곡이 발표되었고, 2023년에는 마지막 신곡이 공개되었다. 비틀즈의 해산은 전 세계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대한민국에서도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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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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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쟁의 시작
1968년 8월, 비틀즈 멤버들 사이에서 불화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링고 스타는 화이트 앨범 녹음 도중 그룹을 떠났다가 며칠 만에 돌아왔다.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폴 매카트니가 린다를 스튜디오에 데려오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1969년에는 조지 해리슨이 《Let It Be》 음반 제작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팀을 탈퇴했다.
1970년 4월 9일, 폴 매카트니는 자신의 솔로 앨범 《McCartney》 발매를 앞두고 비틀즈와의 결별을 암시하는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개인차, 사업적 차이, 음악적 차이 모두 (이유가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 가족과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비틀즈 탈퇴가 일시적인지 영원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12] 다음 날, 신문들은 "폴, 비틀즈를 떠나다", "비틀즈 해산"과 같은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쏟아냈다. 이로 인해 매카트니는 비틀즈를 해산시킨 인물로 비난받았다.[13]
1970년 12월 31일, 폴 매카트니는 영국고등법원에 비틀즈 해산 및 애플에서의 공동 경영 해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44] 이 소송의 주된 목적은 앨런 클라인의 활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존 레논은 이미 비틀즈를 떠난 상태였고, 밴드는 사실상 해산된 상태였다. 그러나 애플 설립 당시 체결된 계약에 따라, 멤버 4명의 수입은 모두 클라인(ABCKO)이 관리하는 애플에 지불되고 있었다. 이 계약은 비틀즈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멤버 각자의 수입까지도 포함했다. 매카트니는 이러한 상황이 클라인에게 비틀즈의 재산을 장악당하고, 멤버들의 수익을 부당하게 갈취당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계약의 법적 무효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44]
1968년 8월, 링고 스타는 화이트 앨범 녹음 도중 그룹을 떠났다가 며칠 만에 돌아왔다. 그는 이 앨범을 녹음하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다고 밝혔다.[69] 존 레논이 스튜디오에 오노 요코를, 폴 매카트니가 린다를 데려온 것도 불화의 한 원인이었다. 1969년에는 조지 해리슨이 《Let It Be》 음반 제작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팀을 탈퇴하기도 했다.[69]
이후 앨런 클라인이 등장하면서 매니저 선임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존 레논은 1969년 12월에 비틀즈 탈퇴 의사를 밝혔으나, 클라인의 요청으로 비밀에 부쳐졌다.
3. 폴 매카트니의 발표
이에 당황한 매카트니는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는 런던의 《이브닝 스탠더드》 기자 레이 코놀리와의 인터뷰에서 "전부 오해다. 인터뷰에서 내가 비틀즈를 떠난다고 의도하고 쓴 부분은 없다. ... 지금의 비틀즈는 과거의 비틀즈와 달라졌지만, 그 누구도 파티가 끝났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이 되길 원치 않는 것뿐이다."라고 해명했다.[14] 그러나 1970년 8월, 매카트니는 《멜로디 메이커》지에 " '비틀즈가 재결합을 할 것인가'라는 당신들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비틀즈 재결합 가능성을 부인했다.[13]
4. 영국고등법원에서의 해산
재판 과정에서 매카트니 측은 클라인의 신뢰성에 대한 여러 문제점을 제기했다. 여기에는 앨범 《매카트니》의 발매 지연 시도, 〈더 롱 앤드 와인딩 로드〉에 대한 무단 수정, 애플 제작 영화 《렛 잇 비》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무단 양도 등이 포함되었다.[45] 또한, 클라인이 미국 인세 계약을 인상하면서 그 증가분의 20%를 수수료로 받기로 했으나, 실제로는 전체 인세의 20%를 부당하게 청구하여 이미 지급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부정행위들을 근거로, 재판부는 클라인을 "말솜씨 좋은 이류 세일즈맨"이자 "비틀즈의 재정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인물"로 판단하고, 1971년 3월 12일 파트너십 해소 판결을 내렸다. 레논 등은 항소를 포기했고, 4월 26일 판결이 확정되었다.[45]
비틀즈 멤버 4명이 해산 합의서에 최종 서명한 것은 1974년 12월이었으며, 매카트니의 제소 이후 약 4년이 지난 1975년 1월 9일에 비틀즈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44]
5. 해산 이후
1971년 5월 비틀즈가 법적으로 해산된 후에도 레논과 그의 전 작곡 파트너 폴 매카트니 사이에는 의견 차이와 논쟁이 계속되었다. 1971년 11월, 매카트니는 《멜로디 메이커》지에서 "저는 그저 우리 넷이 어딘가에 모여서 다 끝났으며 그 돈을 넷으로 나누길 원한다고 적힌 서류에 서명하길 바랬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그냥 우리가 서류에 서명하고 이 서류를 사업하는 사람들한테 전달해서 처리하라고 하면 되거든요."라며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러면서 "그게 지금 제가 바라는 전부인데 존이 안 하려고 합니다."라고 덧붙였다.[11]
한 달 뒤 레논은 답장을 보냈다. 레논은 그룹 해산과 돈을 나누는 문제가 그의 전 밴드 동료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금은 어쩌고?"라고 반문하며, "우리가 그딴 서류 한 장에 서명할 수 없다는 것은 너도 뻔히 잘 알고 있잖아"라고 말했다. 또 "너는 '존이 안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지? 만약 네가 세무서한테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한다면 나는 할 거야!"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레논은 추신에 자신의 아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금쯤'은 알아 들은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나는 '존이자 요코'야."[11]
이후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는 1995년 레논의 노래 〈Free as a Bird〉를 새로 작업하려고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났다.[11]
6. 해산에 이르기까지의 배경
앨런 클라인의 등장은 폴 매카트니와 다른 멤버들 사이에 매니저 선임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비틀즈에게 더 이상 매니저가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69] 존은 1969년 12월에 비틀즈에서 탈퇴했다고 밝혔지만, 클라인의 요청으로 《Let It Be》 발매 전까지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70] 존은 1969년 8월 29일 비틀즈 멤버와 마지막으로 만났고, 1970년 1월 4일 조지 해리슨의
1970년 4월 9일, 매카트니는 자신의 솔로 앨범 《McCartney》 발매를 앞두고 가진 사전 인터뷰에서 비틀즈와 더 이상 작업할 계획이 없으며, 존 레논과 다시 작업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비틀즈 탈퇴가 일시적인지 영원한지, 개인차 때문인지 음악적 차이 때문인지 묻는 질문에 "개인차, 사업적 차이, 음악적 차이 모두 해당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족과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지 영원한지는 나도 모르겠다"고 답했다.[69] 다음 날 신문들은 "폴, 비틀즈를 떠나다", "비틀즈 해산"과 같은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쏟아냈고, 매카트니는 비틀즈를 해산시킨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69]
매카트니는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런던의 《이브닝 스탠더드》 기자 레이 코놀리와의 인터뷰에서 "전부 오해다. 인터뷰에서 내가 비틀즈를 떠난다고 의도하고 쓴 부분은 없다. 나는 비틀즈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의 비틀즈는 과거의 비틀즈와 달라졌지만, 그 누구도 파티가 끝났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이 되길 원치 않는 것뿐이다"라고 해명했다.[70] 넉 달 뒤, 매카트니는 《멜로디 메이커》지에 "비틀즈가 재결합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는 편지를 보냈다.[69]
1970년 12월, 매카트니는 영국고등법원에 그룹의 나머지 멤버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1967년 설립한 비틀즈 앤 컴퍼니의 파트너십을 무효화하고 법정 관리인을 임명하려 했다. 1971년 3월, 법원은 레논, 해리슨, 스타가 매카트니와 상의 없이 클라인을 매니저로 임명하고 클라인에게 더 많은 돈을 주기로 승인한 것은 매카트니에 대한 책무를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69]
1971년 5월, 레논, 해리슨, 스타는 매카트니의 소송에 항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법원은 비틀즈 네 멤버 모두가 현명한 합의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비틀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1975년에 비틀즈 앤 컴퍼니 파트너십이 정식으로 무효화되었다.[69]
1969년 9월 9일, 앨범 『애비 로드』 발매를 앞두고, 링고 스타를 제외한 세 멤버는 다음 앨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그룹 존속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했다. 그러나 9월 20일, 존 레논은 클라인과 함께 미국 캐피털 레코드와의 계약 갱신을 위해 애플 본사에서 가진 회합에서 폴 매카트니와 말다툼을 벌이다 "나는 이제 비틀즈를 그만두기로 했어."라고 선언했다. 레논의 탈퇴는 비밀로 하기로 했지만, 레논은 이후 비틀즈로서 스튜디오로 돌아오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비틀즈는 해산했다.
매카트니는 레논의 탈퇴 선언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스코틀랜드의 농장에 틀어박혔다. 1970년 1월, 클레인은 보류되었던 "겟 백 세션"을 다큐멘터리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으로 발매할 계획을 세우고, 필 스펙터를 초대했다. 레논과 해리슨은 스펙터의 작업을 높이 평가했지만, 매카트니는 더 롱 앤드 와인딩 로드에 추가된 코러스나 오케스트라 편성에 강한 불만을 품고 앨범 발매 중지를 요구하며 소송을 검토했다. 클레인은 『렛 잇 비』의 발매를 우선하기 위해 매카트니의 솔로 앨범 발매일을 연기하려 했고, 이는 매카트니를 격노하게 했다. 결국 『매카트니』는 예정대로 발매되었고, 1970년 4월 10일, 매카트니가 그룹을 탈퇴할 의향이 있다는 것이 영국의 대중지 『데일리 미러』에 보도되면서 비틀즈는 사실상 해산했다.
6. 1. 공연 활동 종료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1965년 말, 비틀즈는 라이브 공연에 지쳐갔다.[12] 조지 해리슨은 비틀마니아에 가장 먼저 싫증을 느꼈고, 폴 매카트니는 정기적인 투어 일정과 라이브 쇼를 계속하는 것을 지지했다. 매카트니는 결국 1966년 1966년 8월 미국 투어가 끝날 무렵, 투어를 중단하라는 밴드 멤버들의 주장에 따랐다.[13] 그 후, 해리슨은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에게 밴드를 떠나겠다고 알렸지만, 더 이상 투어는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잔류하도록 설득되었다.[14]
1966년 8월 29일, 비틀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다.[15]
엡스타인은 1964년 미국 첫 상륙 당시 과밀한 스케줄에 지친 멤버들을 보고, 다음 해에는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장 등을 공연장으로 사용하여 여유를 갖게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관객과의 거리가 멀어져, 더 큰 비명을 지르는 팬들로부터 발생하는 큰 소리에 대항하여 강력한 앰프를 준비해도 음악을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밴드는 라이브 방식에 점차 불만을 갖게 되었다.[16] 게다가 뮌헨에서 시작된 1966년 투어는 다양한 문제에 시달렸는데, 특히 다음 세 가지 사건이 이러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1967년 8월 27일, 엡스타인이 자택 침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수면제나 진통제 등의 과다 복용에 의한 사고사로 처리되었다.[27] 비틀즈는 엡스타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28] 비틀즈의 라이브 활동 종료로 엡스타인은 역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고 말해지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밴드의 대인 관계 및 재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투어 종료 후 해리슨이 그룹에서 탈퇴를 신청했을 때도,[29] 더 이상 투어는 일체 하지 않겠다는 것을 확약하며, 마음을 돌리게 했다.
엡스타인의 매니지먼트 스타일은 밴드가 그들의 음악적 개념과 프로젝트를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었고, 갈등이 있을 때 자주 중재했다. 이러한 역할은 1966년 밴드가 투어를 중단한 후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엡스타인은 여전히 밴드의 대인 관계와 재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7년 중반, 애플 사(Apple Corps)는 엡스타인의 감독 하에 절세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7년 8월 27일, 엡스타인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그의 부재의 결과는 비틀즈가 사업가로서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과 결합되어, 앞으로 몇 달 동안 밴드에게 예상치 못한 혼란스러운 벤처를 야기하여 스트레스를 더했다.[2]
엡스타인의 죽음은 비틀즈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했다.[30] 폴 매카트니는 밴드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려 했지만, 그의 밴드 멤버들은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밴드 사업에서도 그가 점점 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3] 존 레논은 나중에 매카트니의 노력이 밴드의 생존에 중요했다고 회상했지만, 매카트니의 돕고자 하는 열망은 그가 솔로 경력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4] 매카트니는 네 멤버가 음악가에서 사업가로 진화한 것이 밴드 해체의 핵심이라고 느꼈다.[5] 엡스타인의 밴드 매니저 역할은 결코 대체되지 않았고, 결국 강력한 매니지먼트 리더십의 부재는 밴드 해체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6]
6. 2. 멤버 간의 음악적, 개인적 차이
1966년 11월, 비틀즈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녹음할 당시, 멤버들 간의 개인적인 차이가 뚜렷해졌다.[2] 폴 매카트니는 다른 멤버들보다 영국과 미국의 팝 음악 트렌드와 스타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반면, 조지 해리슨은 인도 음악과 종교에 관심을 가졌고, 존 레논의 작곡은 더욱 내성적이고 실험적이 되었다.[1]
비틀즈 역사학자 마크 루이스혼에 따르면, ''Sgt. Pepper''는 밴드의 마지막 통일된 노력이었고, 앨범 완성 직후부터 이러한 응집력은 악화되어 1968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경력 후반기에 해리슨이 작곡가로서 성장한 것은 분열의 또 다른 요인이었다.[7] 그의 많은 곡 아이디어는 레논과 매카트니에 의해 거부되었고, 특히 1968년부터는 더욱 심해졌다.[8]
6. 3. 오노 요코의 등장
1968년 5월 30일, 비틀즈는 EMI 레코딩 스튜디오에 모여 화이트 앨범 녹음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 존 레논은 오노 요코를 데려왔다. 이전까지 비틀즈는 녹음실에 외부인은 물론 파트너조차 데려오지 않는다는 불문율[97]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레논은 자신의 곡[92]에 실험 음악 요소를 도입하기 위해 오노를 세션에 참여시키려 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사전 통보 없이 오노를 데려온 레논의 행동에 놀랐다.
이후 오노는 레논과 항상 함께하며 비틀즈의 작업에 관여했고, 이는 멤버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조지 해리슨은 1965년부터 레논과 LSD와 인도 영성에 대한 실험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했었기에 오노의 등장을 더욱 불쾌하게 여겼다.[13]
킨폰스에서의 데모 세션[99]에서 잠시 회복되었던 멤버 간의 유대감은 오노의 등장으로 다시 약화되었다. 멤버들은 각자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비틀즈 해산의 원인이 오노 요코"라는 주장에 대해 폴 매카트니는 2012년 옵서버 지와의 인터뷰에서 "요코가 비틀즈를 뿔뿔이 흩어지게 한 건 아니야. 비틀즈는 스스로 뿔뿔이 흩어졌어"라고 반박했다.[98] 2021년 인터뷰에서도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책임이 없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레논과 오노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해리슨 역시 "그룹 해산에 요코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6. 4. 앨런 클라인과 애플 코어
1969년 초, 애플 사는 경영 부실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2] 존 레논은 앨런 클라인에게 비틀즈의 사업적 이익을 대변해 줄 것을 요청했고, 폴 매카트니는 리 이스트먼과 존 이스트먼을 선택했다.[6] 클라인과 이스트먼 가문 사이의 갈등은 밴드 멤버들 간의 불화를 더욱 악화시켰다.[68]
결국 클라인은 비틀즈의 사업 매니저로 임명되었지만, 이는 밴드 내의 불신과 반감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6] 1971년 3월, 법원은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매카트니와 상의 없이 클라인을 매니저 자리에 앉히고, 클라인에게 이전에 협의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기로 승인한 것은 매카트니에 대한 책무를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68]
7. 1970년대 재결합 시도와 좌절
1970년대 미국에서는 비틀즈에 대한 향수와 재결합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여러 기업가들이 비틀즈에게 재결합 콘서트를 제안했다.
- 1974년 프로모터 빌 서전트는 비틀즈에게 재결합 콘서트 대가로 처음 1000만달러를 제안했다. 그는 1976년 1월에 제안을 3000만달러로 올렸고, 다음 달에는 5000만달러로 올렸다.[70][71]
- 1976년 4월 24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방송 중에 프로듀서 로른 마이클스는 비틀즈에게 쇼에서 재결합하는 조건으로 3,000달러를 제안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당시 레논의 뉴욕 다코타 아파트에서 함께 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스튜디오에 가서 마이클스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72]
- 1976년 6월, 기업가 앨런 앰론은 비틀즈 재결합을 위한 국제 위원회를 만들어 전 세계 비틀즈 팬들에게 1달러씩 보내 비틀즈의 재결합에 대한 자금으로 제안하도록 요청했다.[73][74]
- 1976년 9월, 콘서트 프로모터 시드 번스타인은 비틀즈에게 자선 단체를 위해 2.3억달러를 모금하는 콘서트를 위해 재결합해 달라는 전면 광고를 신문에 게재했다.[75][76][77]
- 1977년 1월, 앰론은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제휴하여 비틀즈에게 2억달러 규모의 자선 기금 조성을 돕기 위해 재결합을 제안했다.[78][79]
- 1978년 3월, 환경 단체인 프로젝트 인터스피크는 비틀즈가 참여할 것을 제안하며 반고래잡이 활동을 위한 기금 마련 콘서트를 계획하고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80][81][82]
- 1979년 9월, 번스타인은 다시 비틀즈에게 전면 광고를 게재하여 베트남 보트 피플을 돕기 위한 세 번의 콘서트를 열어달라고 요청했다.[83] 국제 연합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도 같은 목적의 재결합을 시도했다.
1979년 발트하임의 비틀즈 재결합 시도는 12월 매카트니와 그의 밴드 윙스가 참여한 캄푸치아 인민을 위한 콘서트로 이어졌지만, 비틀즈의 재결합은 성사되지 않았다.
7. 1. 부분적인 재결합 시도
1970년대 동안, 비틀즈 멤버들은 가끔 협업했지만, 4명 모두가 동시에 함께 작업하는 일은 없었다. 1971년, 조지 해리슨은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에 전 밴드 멤버들을 초대했으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거절했다.[72] 1973년, 해리슨, 레논, 링고 스타, 클라우스 부어만은 스타의 앨범 《Ringo》에 수록된 "I'm the Greatest"를 녹음했다.[106] 1973년 후반, 매카트니는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1974년 2월에 멤버들이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7. 2. 재결합 제안과 거절
1970년대 미국에서는 비틀즈에 대한 향수와 재결합에 대한 끊임없는 소문이 돌면서, 여러 기업가들이 이들에게 재결합 콘서트를 제안했다.연도 | 제안자 | 제안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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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 빌 서전트 | 재결합 콘서트 대가로 1000만달러 제안. 이후 1976년 1월에 3000만달러, 2월에 5000만달러로 인상.[70][71] |
1976년 4월 24일 | 로른 마이클스 |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출연 조건으로 3,000달러 제안.[72] |
1976년 6월 | 앨런 앰론 | 비틀즈 재결합을 위한 국제 위원회 결성, 전 세계 팬들에게 1달러씩 모금 제안.[73][74] |
1976년 9월 | 시드 번스타인 | 자선 콘서트 대가로 2.3억달러 제안 (신문 전면 광고).[75][76][77] |
1977년 1월 | 앨런 앰론, 무하마드 알리 | 2억달러 규모 자선 기금 조성 위한 재결합 제안.[78][79] |
1978년 3월 | 프로젝트 인터스피크 | 반고래잡이 활동 기금 마련 콘서트 계획 발표, 비틀즈 참여 제안.[80][81][82] |
1979년 9월 | 시드 번스타인 | 베트남 보트 피플 돕기 위한 콘서트 개최 제안 (신문 전면 광고).[83] 쿠르트 발트하임 사무총장도 같은 목적의 재결합 시도. |
레논과 매카트니는 1976년 4월 24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가 방송될 당시 레논의 뉴욕 다코타 아파트에서 함께 시청하고 있었다. 이들은 NBC 스튜디오가 가까웠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스튜디오에 가서 마이클스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고민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만두었다.[72]
1979년 9월 쿠르트 발트하임의 비틀즈 재결합 시도는 12월 매카트니와 그의 밴드 윙스가 참여한 캄푸치아 인민을 위한 콘서트로 이어졌지만, 비틀즈의 재결합은 성사되지 않았다.
8. 존 레논의 죽음과 앤솔로지 프로젝트
1971년 5월 비틀즈가 법적으로 해산한 뒤에도 존 레논과 그의 전 작곡 파트너 폴 매카트니 사이에는 의견 차이와 논쟁이 계속되었다. 1971년 11월 매카트니는 《멜로디 메이커》지에서 "그저 우리 넷이 어딘가에 모여서 다 끝났으며 그 돈을 넷으로 나누길 원한다고 적힌 서류에 서명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우리가 서류에 서명하고 이 서류를 사업하는 사람들한테 전달해서 처리하라고 하면 되거든요."라고 덧붙였다.
레논은 한 달 뒤 답장에서 그룹 해산과 돈을 나누는 문제가 그의 전 밴드 동료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마 어딘가에는 해답이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지난 수년간 백만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잖아. '세금은 어쩌고?'"라며, "'존이 안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지? 만약 네가 세무서한테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한다면 나는 할 거야!"라고 말했다. 끝으로 레논은 "'린다와 요코를 빼고' 만나자는 말이었어. '지금쯤'은 알아 들은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나는 '존이자 요코'야."라며 자신의 아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후 두 음악가 사이의 공개적 서신은 끝났다.
이후 매카트니와 해리슨, 스타가 레논의 1995년도 노래 Free as a Bird를 새로 작업하려고 1995년 스튜디오에서 모이기 전까지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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