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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코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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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사키 코지로(佐々木小次郎)는 자신의 검술 유파인 암류(巌流)의 창시자이다. 그는 쇼우마키 지사이 또는 가네마키 지사이에게 츄죠류 검술을 배우고, 곡도를 쓰는 스승에게 대항하기 위해 노다치 또는 장도를 사용하며 실력을 키웠다. 1610년, 규슈 북부 고쿠라번의 최고 무기술 지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젠국 출신이라는 설과 에치젠국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아키국의 모리씨를 섬기며 검술 '쓰바메가에시'를 고안하여 간류 유파를 창시했으며, 고쿠라번의 검술 사범이 되었다. 미야모토 무사시와의 간류지마 결투에서 패배했으며, 그의 삶과 결투는 소설, 영화, 만화,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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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코지로
기본 정보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사사키 간류 (사사키 코지로) 그림 (1845년)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사사키 간류 (사사키 코지로) 그림 (1845년)
이름사사키 코지로
다른 이름간류 코지로
출생약 1585년
출생지후쿠이현
사망1612년 4월 13일
사망지간류 섬
유파간류
무술가 정보
스승정보 없음
제자정보 없음

2. 생애 및 배경

사사키 고지로는 암류(巌流)라는 검술 유파를 창시했으며, 1612년 미야모토 무사시와의 간류지마(巌流島) 결투로 유명하다.[2] 『이텐키』에는 고지로가 18세에 결투에서 패배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3] 출생년도가 불분명하여 실제 나이는 확실치 않다. 일각에서는 무사시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에도 시대 후기 우타가와 요시토라의 그림에서도 중년으로 묘사된다. 아사노 후미히로는 『이텐키』의 "18세"가 "78세"의 오기일 가능성을 제시했다.[3]

2. 1. 출생 및 가문

부젠국 다가와군 후케다쇼(현재의 후쿠오카현 다가와군 소에다정)의 유력 호족 사사키 씨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는 한편, 1776년(안에이 5년)에 쿠마모토번의 도요다 케이에이가 편찬한 『이텐키』에는 에치젠국 우사카쇼 조쿄지무라(현재의 후쿠이현 후쿠이시 조쿄지마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비검 "쓰바메가에시"는 후쿠이에 있는 이치죠 폭포에서 익혔다고 전해진다. 출생년은 덴쇼 또는 에이로쿠 연간으로 여겨진다.[2]

2. 2. 검술 스승 및 유파

사사키 고지로는 자신이 창시한 검술 유파의 이름이기도 한 암류(巌流)라는 싸움 이름을 사용했다. 사사키는 가네마키 지사이 또는 도다 세이겐으로부터 중조류(中条流) 검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도다 세이겐은 곡도(小太刀)의 달인이었다. 만약 사사키가 실제로 세이겐으로부터 중조류를 배웠다면, 그는 스승의 수련 상대였을 것이다. 스승이 곡도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사키는 그에 맞서 노다치(納刀) 혹은 장도(長刀)를 사용했고, 결국 그 사용에 능숙해졌다. 그는 스승의 동생을 물리친 후 유파를 떠나 암류를 창시했다. 1610년 그의 유파의 명성과 수많은 결투에서의 승리(1500년대 후반, 철선(鉄扇)으로 세 명의 상대를 격퇴한 적도 있음) 때문에 호소카와 다다오키 경으로부터 규슈(九州) 북부의 고쿠라번(小倉藩) 즉 호소카와 영지의 최고 무기술 지도관으로 임명되었다.

츄죠류 후타세이겐, 또는 후타세이겐 문하의 쇼우마키류의 쇼우마키 지사이의 제자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아키국모리씨를 섬겼다. 무사 수행을 위해 여러 지역을 떠돌며, "쓰바메가에시" 검법을 고안하여, "간류"라고 불리는 유파를 창시했으며, 고쿠라번의 검술 사범이 되었다.

2. 3. 초기 활동

사사키 고지로는 자신이 창시한 검술 유파의 이름이기도 한 암류(巌流, Ganryū)라는 싸움 이름을 사용했다. 사사키는 가네마키 지사이 또는 도다 세이겐으로부터 중조류(中条流) 검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도다 세이겐은 고다치(小太刀)의 달인이었다. 만약 사사키가 실제로 세이겐으로부터 중조류를 배웠다면, 그는 스승의 수련 상대였을 것이다. 스승이 고다치를 사용했기 때문에 사사키는 그에 맞서 노다치(納刀) 혹은 가타나(長刀)를 사용했고, 결국 그 사용에 능숙해졌다. 그는 스승의 동생을 물리친 후 유파를 떠나 암류를 창시했다. 그의 삶에 대한 최초의 신뢰할 만한 기록은 1610년에 그의 유파의 명성과 수많은 결투에서의 승리(1500년대 후반, 텟센(鉄扇)으로 세 명의 상대를 격퇴한 적도 있음) 때문에 사사키가 호소카와 다다오키 경으로부터 규슈 북부의 고쿠라번(小倉藩) 즉 호소카와 영지의 최고 무기술 지도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1]

3. 미야모토 무사시와의 결투 (간류지마 결투)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의 결투는 '''간류지마의 결투'''(巖流島の決闘)로 불리며, 1612년 4월 13일 혼슈와 큐슈 사이의 간류지마(후나시마)에서 벌어졌다. 이 결투는 여러 기록과 전설로 전해지지만, 세부 사항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결투의 진실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결투의 배경, 과정, 결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 미야모토 이오리가 건립한 고쿠라 비문(1654년)에는 무사시가 지각하지 않고 "3척의 흰 칼날"을 가진 간류를 "나무칼의 일격"으로 쓰러뜨렸다고 기록되어 있다.[6]
  • 호소카와가 가로 누마타 노부모토의 가인이 쓴 『누마타가키』(1672년)에는 무사시가 일대일 약속을 어기고 제자 4명을 데리고 갔으며, 고지로를 죽이지 못했지만 후에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7]
  • 『니텐키』(1776년)에는 고지로가 3의 노다치를 사용했고, 무사시는 토모(艫)를 깎은 큰 보쿠토를 사용했다고 한다.[8]
  • 쿠마자와 단안의 『무장감장기』에는 무사시가 카이(櫂)를 쪼개 나무칼 두 자루를 만들었다고 한다.
  • 후루카와 코쇼켄의 『세이유잡기』(1783년)에는 무사시 측이 약속을 어기고 여러 명을 데려갔고, 결국 고지로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가 간류지마(巌流島)에서 결투(1612)


결투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 무사시는 3시간 이상 늦게 도착하여 사사키를 도발했고, 사사키는 "제비 베기"로 공격했지만, 무사시가 110cm 길이의 보켄으로 사사키의 머리를 쳐서 승리했다.[7]
  • 무사시는 배의 를 깎아 만든 스부리토라는 보켄을 사용했다고 한다.[7]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무사시가 부정행위를 했는지, 환경을 이용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무사시가 배의 노를 깎아 보켄을 만들었다는 전설은 시간적, 물리적 제약을 고려할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3. 1. 결투 배경

사사키 고지로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랜 라이벌로, 무사시 자신도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고 평가했다. 결투에 대한 여러 기록이 있지만, 고지로의 패배라는 핵심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세부 사항이 대부분 다르다. 특히 고지로의 나이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크다.

니텐키에 따르면, 고지로는 어린 시절 도다 세이겐에게서 단도술을 배웠고, 장검 사용에서 스승을 능가했다. 스승의 남동생을 물리친 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간류(Ganryu)라는 자신의 문파를 창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니텐키는 결투 당시 사사키의 나이를 18세라고 기록하여 신뢰성이 떨어진다. 2년 전에 영지의 무기 책임자였던 점을 고려하면 16세에 그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다 세이겐이 1590년대에 사망했다는 점도 니텐키의 기록과 모순된다. 여러 학자들은 고지로의 스승이 세이겐이 아니라 카네마키 지사이라고 주장한다.

자료의 신뢰성이 낮아 사사키의 나이는 20대에서 50대 후반까지 다양하게 추정된다. 그의 성이 사사키인 이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어머니가 사사키 씨족 출신으로, 사생아로 그를 낳아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는 설.
  • 어머니가 사사키 씨족에 시집갔을 때 임신 사실을 몰랐고, 남편이 의심했지만 자신의 아들로 키웠다는 설.


상대인 무사시처럼 고지로는 키가 약 178cm로 당시 평균적인 일본인보다 훨씬 컸다.

당시 약 29세였던 무사시는 사사키의 명성을 듣고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결투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다오키는 이를 승낙하고 1612년 4월 13일, 혼슈와 큐슈 사이 해협의 간류지마(후나시마)에서 결투가 벌어졌다. 외딴 곳에서 결투가 벌어진 이유는 사사키가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어 패배 시 제자들이 무사시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무사시는 3시간 이상 늦게 도착하여 사사키를 도발했다. 사사키의 공격은 무사시의 총각머리(chonmage)를 거의 벨 정도로 위협적이었으나, 무사시가 110cm 길이의 보켄(bokken)(나무 칼)으로 사사키의 머리를 쳐서 승리했다. 무사시는 배의 여분 를 다듬어 '스부리토(suburitō)'라는 과장된 보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무사시가 상대를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한 전술이었다.[1]

다른 버전에 따르면, 무사시가 도착했을 때 사사키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무사시는 미소를 지었다. 분노한 사사키는 "제비 베기"를 시도했지만, 무사시의 보켄이 먼저 사사키를 강타하여 왼쪽 갈비뼈를 부수고 폐를 뚫어 죽였다. 무사시는 서둘러 배로 돌아가 도망쳤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치명적인 결투였다.[2]

니텐키, '켄세츠', 요시다 세이켄의 기록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사시가 결투 장소로 가는 동안 보쿠토를 준비했는지, 와키자시로 단단한 나무를 다듬는 것이 가능한지, 그 작업으로 지치지 않았는지, 왜 섬 이름이 사사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지 등이 의문이다. 하라다 무카시 등 일부 학자들은 사사키가 무사시와 그의 제자들에게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사사키 씨족은 호소카와 경에게 정치적인 장애물이었고, 사사키를 제거하는 것은 그의 정적들에게 유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3]

무사시가 이 결투에서 부정행위를 했는지, 아니면 환경을 이용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무사시가 조수의 변화에 맞춰 도착 시간을 정했다는 이론도 있다. 승리 후 사사키의 지지자들에게 추격당할 것을 예상하고, 조수의 도움을 받아 도망쳤다는 것이다.[4]

가가와 구니요시(歌川国芳)가 그린 사사키 고지로(1845)


무사시와의 결투가 벌어진 "후나시마(舟島)"는 "간류지마(巌流島)"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 결투는 "'''간류지마의 결투'''"로 불리게 되었다. 기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에서는 무사시가 일부러 늦었다고 묘사했지만, 이는 『무공전(武公伝)』을 바탕으로 한 기카와의 창작이다.[5]

무사시의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가 세운 고쿠라 비문(1654년)에 따르면, "간류(岩流)"는 "3척의 흰 칼날"로 결투에 도전했고, 무사시는 "나무칼의 일격"으로 그를 쓰러뜨렸다. 이때 무사시의 일격은 "번개보다 더 빠른 것 같다"라고 표현되었다. 비문에는 "두 영웅이 동시에 만났다"라고 적혀 있어 무사시가 지각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6]

호소카와가 가로 누마타 노부모토의 가인이 쓴 『누마타가키』(1672년)에 따르면, 무사시는 일대일 약속을 어기고 제자 4명을 데리고 간류지마로 건너갔다. 결투에서 무사시는 고지로를 죽이지 못했고, 고지로는 얼마 후 숨을 되찾았으나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고지로의 제자들은 진상을 알고 분개하여 무사시를 습격했지만, 모지성으로 도망친 무사시는 성주 누마타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했다. 결투의 발단은 제자들이 서로의 스승의 우열을 다툰 것이었다.[7]

『니텐키』(1776년)에서는 "간류 고지로(岩流小次郎)", 주석에서는 "사사키 고지로(佐々木小次郎)"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 결투에서 고지로는 3(약 1미터) 길이의 노다치 "비젠나가미츠"를 사용했고, 무사시는 토모(艫)를 깎은 큰 보쿠토를 사용했다.[8]

쿠마자와 단안의 『무장감장기』에서는 무사시가 호소카와 타다토시를 섬기며 교토에서 고쿠라로 가던 중 "키시류(岸流)" 또는 "간류(岩流)"에게 도전을 받고 시모노세키에서 결투를 약속했다. 무사시는 카이를 둘로 쪼개 2척 5촌의 긴 나무칼과 1척 8촌의 짧은 나무칼을 만들었다.

후루카와 코쇼켄의 『세이유잡기』(1783년)에서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중개인"이 일대일 약속을 어기고 문인 수 명을 데리고 후나시마로 건너갔다. 어부들은 "사사키 간류(佐々木岩龍)" 또는 "키시류(岸龍)"를 막았지만, "무사가 약속을 어기는 것은 수치"라며 혼자 도전했다. 그러나 무사시 측에 4명의 문인이 가세하여 결국 간류(岩龍)는 죽임을 당했다. 어부들은 간류(岩龍)의 의기에 감동하여 후나시마에 무덤을 만들었고, 이후 "간류지마(岩龍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결투에 사용한 검은, 『코우카이후우한소』(1704년)에서는 "아오에(青江)", 『혼쵸부게이쇼덴』(1714년)에서는 "모노카케자오(物干ざほ)"라고 불리며, 대개 "3척", "3척 남짓"이라고 설명된다.

3. 2. 결투 과정 및 결과에 대한 다양한 기록

사사키 고지로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랜 라이벌이었으며, 무사시 자신도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고 평가한다. 결투에 대한 여러 기록이 존재하지만, 고지로의 패배와 같은 핵심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세부 사항이 대부분 다르다. 특히 고지로의 나이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크다.

'니텐키'에 따르면, 고지로는 어린 시절 도다 세이겐(Toda Seigen)에게서 단도술을 배웠고, 스승을 능가하는 장검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스승의 동생을 물리친 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간류(Ganryu)라는 자신의 문파를 창립했다고 한다.[1] 하지만 '니텐키'는 결투 당시 사사키의 나이를 18세라고 기록하여 신뢰성이 떨어진다. 2년 전에 영지의 무기 책임자였던 점을 고려하면 16세에 그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다 세이겐은 1590년대에 사망하여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2] 여러 학자들은 고지로의 스승이 세이겐이 아니라 카네마키 지사이(Kanemaki Jisai)의 제자였다고 주장한다.[3]

고지로의 성이 사사키인 이유는 두 가지 설이 있다.[4]

  • 어머니가 사사키 씨족 출신으로 사생아로 그를 낳았고, 결혼하지 않아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 어머니가 사사키 씨족에 시집갔을 때 임신 사실을 몰랐고, 남편은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아들로 키웠다.


상대인 무사시처럼 고지로는 키가 약 178cm로, 당시 평균적인 일본인보다 훨씬 컸다.[5]

당시 약 29세였던 무사시는 사사키의 명성을 듣고 호소카와 다다오키(Hosokawa Tadaoki)에게 결투를 요청했다. 다다오키는 1612년 4월 13일, 혼슈(Honshū)와 큐슈(Kyūshū) 사이의 간류지마(Ganryujima)에서 결투를 허락했다. 외딴 곳에서 결투가 벌어진 이유는 사사키가 많은 제자를 거느렸고, 패배할 경우 제자들이 무사시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6]

전설에 따르면 무사시는 3시간 이상 늦게 도착하여 사사키를 도발했다. 사사키의 공격은 무사시의 총각머리(chonmage)를 거의 벨 정도로 위협적이었으나, 무사시가 110cm 길이의 보켄(bokken)(나무 칼)으로 사사키의 머리를 쳐서 승리했다. 무사시는 배의 를 다듬어 '스부리토(suburitō)'라는 과장된 보켄을 만들었다고 하며, 이는 상대를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전술이었다.[7]

다른 버전에 따르면, 무사시가 도착했을 때 사사키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무사시는 미소를 지었다. 분노한 사사키는 "제비 베기"를 시도했지만, 무사시의 보켄이 먼저 사사키를 강타하여 왼쪽 갈비뼈를 부수고 폐를 뚫어 죽였다. 무사시는 서둘러 배로 돌아가 도망쳤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치명적인 결투였다.[8]

'니텐키', '켄세츠', 요시다 세이켄의 기록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사시가 결투 장소로 가는 동안 보쿠토를 준비했는지, 와키자시로 단단한 나무를 다듬을 시간이 있었는지, 그 작업으로 지치지 않았는지, 왜 섬 이름이 사사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지 등이 의문이다. 다른 기록들은 "늦은 도착" 부분을 생략하거나 행동 순서를 바꾸기도 한다. 하라다 무카시(Harada Mukashi) 등은 사사키가 무사시와 제자들에게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무사시가 이 결투에서 부정행위를 했는지, 환경을 이용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또 다른 이론은 무사시가 조수 변화에 맞춰 도착 시간을 정했고, 조수의 도움을 받아 도망쳤다는 것이다.

무사시와 결투를 벌인 "후나시마(舟島)"는 "간류지마(巌流島)"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 승부는 "'''간류지마의 결투(巖流島の決闘)'''"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에서는 "무사시가 결투에 일부러 늦었다"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무공전(武公伝)』을 소재로 한 기카와의 창작이다.

무사시의 양자인 미야모토 이오리(宮本伊織)가 건립한 고쿠라(小倉)의 현창비 『고쿠라 비문(小倉碑文)』(1654년)에 따르면, "간류(岩流)"는 "3척의 흰 칼날"을 가지고 결투에 도전했고, 무사시는 "나무칼의 일격"으로 그를 쓰러뜨렸다고 한다. 이때 무사시의 필살 일격은 "번개보다 더 빠른 것 같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한 비문에는 "두 영웅이 동시에 만났다"라고 적혀 있으며, 무사시는 지각하지 않았다.

호소카와가(細川家) 가로(家老) 누마타 노부모토(沼田延元)의 가인에 의한 『누마타가키(沼田家記)』(1672년 완성)에 따르면, 무사시는 "고지로(小次郎)"라는 간류(岩流) 사용자와의 결투 당시, 일대일 약속을 어기고 제자 4명을 데리고 간류지마(巌流島)로 건너갔고, 결투에서는 무사시는 고지로를 죽일 수 없었고, 고지로는 얼마 후 숨을 되찾았고, 그 후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고지로의 제자들은 결투의 진상을 알고 분개하여 무사시를 습격하지만, 모지성(門司城)으로 도망치고, 성주 누마타의 도움으로 무사시는 무사히 도망쳤다고 한다.

『니텐키(二天記)』(1776년)에서는 "간류 고지로(岩流小次郎)", 주석에서는 "사사키 고지로(佐々木小次郎)"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이 결투에서 날 길이 3(약 1미터)의 노다치(野太刀) "비젠(備前)나가미츠(長光)(びぜんながみつ)"를 사용했고, 무사시는 토모(艫)를 깎은 큰 보쿠토(木刀)를 사용하여 이것을 부수었다고 한다.

쿠마자와 단안(熊沢淡庵)의 『무장감장기(武将感状記)』에서는, 무사시는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를 섬기며 교토에서 고쿠라로 향하는 도중 "키시류(岸流)" 또는 "간류(岩流)"(병기)로부터 도전을 받고, 시모노세키에서의 결투를 약속했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무사시는 카이(櫂)를 둘로 쪼개고, 손잡이를 깎아 2척 5촌의 긴 나무칼과 1척 8촌의 짧은 나무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후루카와 코쇼켄(古川古松軒)의 『세이유잡기(西遊雑記)』(1783년)에서는, 일대일 약속을 "미야모토 무사시의 중개인"이 어기고 문인 수 명을 데리고 후나시마(舟島)로 건너간 것을 본 어부들이 "사사키 간류(佐々木岩龍)" 또는 "키시류(岸龍)"를 막았지만, "무사가 약속을 어기는 것은 수치"라며 이에 혼자 도전한다. 그러나 무사시에게는 4명의 문인이 가세하고 있었고, 결국 간류(岩龍)는 죽임을 당한다. 어부들은 간류(岩龍)의 의기에 감동하여 이 후나시마(舟島)에 무덤을 만들고 명복을 빌었고, 그 이후로 여기를 "간류지마(岩龍島)"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결투에 사용한 검은, 『코우카이후우한소(江海風帆草)』(1704년)에서는 "아오에(青江)", 『혼쵸부게이쇼덴(本朝武芸小伝)』(1714년)에서는 "모노카케자오(物干ざほ)"(자신이 지은 이름이라고 쓰여 있다)라고 되어 있으며, 대개 "3척", "3척 남짓"이라고 설명된다.

3. 3. 결투의 진실 논란

사사키 고지로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라이벌로 알려져 있으며, 무사시 자신도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고 평가했다. 결투에 대한 기록은 여럿 남아있지만, 고지로가 패배했다는 মূল বিষয়을 제외하고 세부 사항은 대부분 다르다. 특히 고지로의 나이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크다.[1]

'니텐키'에 따르면, 고지로는 어린 시절 도다 세이겐에게서 단도술을 배웠고, 장검 사용에서 스승을 능가했다. 스승의 동생을 물리친 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간류(Ganryu)라는 자신의 문파를 창립했다고 한다.[1] 하지만 '니텐키'는 결투 당시 사사키의 나이를 18세라고 기록하여 신뢰성이 떨어진다. 2년 전에 영지의 무기 책임자였던 점을 고려하면 16세에 그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다 세이겐은 1590년대에 사망했다. 이러한 자료의 신뢰성 문제로 인해 사사키의 나이는 20대에서 50대 후반까지 다양하게 추정된다.[2]

몇몇 학자들은 고지로의 스승이 세이겐이 아니라 카네마키 지사이의 제자였다고 주장한다. '니텐키'의 인터뷰 대상이 고지로의 나이를 말했지만, 저자가 앞부분을 놓치고 18(十八)이라는 뒷부분만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어 숫자는 48(四十八)을 "욘쥬하치"처럼 십의 자리와 일의 자리로 말한다.[3]

그의 성이 사사키인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3]

  • 어머니가 사사키 씨족의 일원이었고 사생아로 그를 낳아 어머니의 성을 따랐으며, 후에 어머니가 같은 성을 가진 사촌과 결혼하여 그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다는 설.
  • 어머니가 사사키 씨족에 시집갔을 때 임신 사실을 몰랐고, 남편은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자신의 아들로 키웠다는 설.


상대인 무사시처럼 고지로도 키가 약 178cm로, 당시 평균적인 일본인보다 훨씬 컸다.[3]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1612년 4월 13일, 혼슈와 큐슈 사이 해협의 외딴 섬인 후나시마의 간류지마에서 결투를 주선했다. 당시 사사키가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사키가 패배할 경우 제자들이 무사시를 죽이려 할 가능성이 있어 외딴 곳에서 결투가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4]

전설에 따르면, 무사시는 3시간 이상 늦게 도착하여 사사키를 도발했다. 사사키의 공격은 무사시의 총각머리(chonmage)를 거의 벨 정도로 위협적이었고 여러 번 승리에 가까워졌지만, 무사시 뒤편의 석양에 눈이 부셔, 무사시가 110cm 길이의 보켄(bokken)으로 사사키의 머리를 쳤다고 한다. 무사시는 자신의 와키자시(wakizashi)와 함께 결투에 도착했던 배의 여분 를 다듬어 '스부리토(suburitō)'라고 불리는 보켄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4] 무사시는 상대를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 고의로 늦게 도착했는데, 이는 요시오카 검객들과의 결투에서 사용했던 전술과 유사하다.[4]

다른 버전에 따르면, 무사시가 도착했을 때 사사키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무사시는 미소를 지었다. 분노한 사사키는 자신의 "제비 베기"를 시도했지만, 무사시의 보켄이 먼저 사사키를 강타하여 넘어뜨렸다. 사사키가 제비 베기를 끝내기 전에 무사시는 사사키의 왼쪽 갈비뼈를 부수어 폐를 뚫어 죽였고, 서둘러 배로 돌아가 도망쳤다. 이것이 무사시의 마지막 치명적인 결투였다고 한다.[5]

'니텐키', '켄세츠', 요시다 세이켄의 기록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5] 무사시가 결투 장소로 가는 동안에만 보쿠토를 준비했을지, 와키자시로 단단한 나무를 다듬어 제때 준비할 수 있었을지, 그 작업으로 지치지 않았을지 의문이다. 또한 섬 이름이 무사시가 아닌 사사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유도 불분명하다. 다른 기록들은 "늦은 도착" 부분을 생략하거나 행동 순서를 바꾸기도 한다.[5] 하라다 무카시 등은 사사키가 무사시와 그의 제자들에게 암살당했다고 믿는다. 사사키 씨족은 호소카와 경에게 정치적인 장애물이었고, 사사키를 제거하는 것은 그의 종교적, 정치적 적들에게 타격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5]

무사시가 이기기 위해 부정행위를 했는지, 환경을 이용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또 다른 이론은 무사시가 조수의 변화에 맞춰 도착 시간을 정했다는 것이다. 승리할 경우 사사키의 지지자들에게 추격당할 것을 예상하여, 조수가 그를 섬으로 데려다주고 싸움이 끝날 무렵 다시 바뀌어 무사시가 즉시 배에 올라타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5]

기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에서는 무사시가 결투에 일부러 늦었다고 묘사했지만, 이는 『무공전(武公伝)』을 소재로 한 창작이다.[6]

무사시의 양자인 미야모토 이오리가 세운 고쿠라 비문(1654년)에 따르면, "간류"는 "3척의 흰 칼날"을 가지고 결투에 도전했고, 무사시는 "나무칼의 일격"으로 그를 쓰러뜨렸으며, 이때 무사시의 일격은 "번개보다 더 빠른 것 같다"라고 표현되었다. 비문에는 "두 영웅이 동시에 만났다"라고 적혀 있어 무사시가 지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6]

호소카와가 가로(家老) 누마타 노부모토의 가인에 의한 『누마타가키』(1672년)에 따르면, 무사시는 일대일 약속을 어기고 제자 4명을 데리고 간류섬으로 건너갔고, 결투에서 고지로를 죽이지 못했으며, 고지로는 얼마 후 숨을 되찾았지만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고지로의 제자들은 진상을 알고 무사시를 습격했지만, 모지성으로 도망친 무사시는 성주 누마타의 도움으로 무사히 도망쳤다고 한다. 제자들이 스승의 우열을 두고 다툰 것이 결투의 발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6]

『니텐키』(1776년)에서는 "간류 고지로", 주석에서는 "사사키 고지로"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이 결투에서 3(약 1미터)의 노다치(野太刀) "비젠나가미츠"를 사용했고, 무사시는 토모(艫)를 깎은 큰 보쿠토(木刀)를 사용했다고 한다.[6]

쿠마자와 단안의 『무장감장기』에서는 무사시가 호소카와 타다토시를 섬기며 "키시류" 또는 "간류"(병기)로부터 도전을 받고, 시모노세키에서의 결투를 약속했다고 되어 있다. 무사시는 카이(櫂)를 둘로 쪼개고 손잡이를 깎아 2척 5촌의 긴 나무칼과 1척 8촌의 짧은 나무칼을 만들었다고 한다.[6]

후루카와 코쇼켄의 『세이유잡기』(1783년)에서는, 일대일 약속을 "미야모토 무사시의 중개인"이 어기고 문인 수 명을 데리고 후나시마로 건너간 것을 본 어부들이 "사사키 간류" 또는 "키시류"를 막았지만, "무사가 약속을 어기는 것은 수치"라며 혼자 도전했고, 결국 간류는 죽임을 당한다. 어부들은 간류의 의기에 감동하여 후나시마에 무덤을 만들고 명복을 빌었고, 그 이후로 "간류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6]

결투에 사용한 검은, 『코우카이후우한소』(1704년)에서는 "아오에", 『혼쵸부게이쇼덴』(1714년)에서는 "모노카케자오"(자신이 지은 이름)라고 되어 있으며, 대개 "3척", "3척 남짓"이라고 설명된다.[6]

4. 사사키 고지로의 이름 표기

『고쿠라 비문(小倉碑文)』에는 고지로의 이름이 "간류(巖流)"로만 기록되어 있으며, 앞서 언급된 『누마타가키(沼田家記)』에는 "고지로(小次郎)"(초출)로만 기록되는 등, 문헌에 따라 성명에 차이가 있다. "사사키 고지로(佐々木小次郎)"가 함께 기록된 것은 무사시 사후 130년이 지난 1776년에 쓰여진 『니텐키(二天記)』의 주석에서이다(본문에서는 "간류 고지로(巖流小次郎)"로 되어 있으며, 이름인지 검호(劍號)인지 불명확하다). 더 오래된 자료에는 사사키(佐々木) 성은 보이지 않으며, 『니텐키(二天記)』가 준거한 『무공전(武公伝)』(1755년)에는 "간류 고지라(巌流小次良)" "간류 고지로(巌流小次郎)"라고 되어 있다.

우오즈미 타카유키(魚住孝至)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에서 사사키(佐々木) 성은 『니텐키(二天記)』 40년 전인 1737년에 상연된 교겐 『가타키우치 간류지마(敵討巖流島)』에 등장하는 "사사키 간류(佐々木巖流)"에서 따온 것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참고로, 1746년 상연된 조루리 『하나이카다 간류지마(花筏巖流島)』에는 "사사키 간류(佐々木巖流)", 1774년의 조루리 『하나다스키 카이케이 카쓰후 솜(花襷会稽褐布染)』에는 "사사키 간류(佐崎巖流)"가 등장하는 등, 『니텐키(二天記)』가 쓰여질 무렵에는 "사사키(ささき)" 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성은 사사키(佐々木) 외에도 『단지미네히토키(丹治峯均筆記)』(1727년)에는 "쓰다(津田)"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로다 번의 중신인 오가와가(小河家)의 문서에는 "와타나베(渡辺)"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카이후한소(江海風帆草)』의 "우에다 소뉴(上田宗入)", 『간류검술비서(巖流剣術秘書)』의 "다타 시로(多田市郎)" 등, "사사키(佐々木)"도 "고지로(小次郎)"도 아닌 성명도 알려져 있다.

5. 대중문화 속 사사키 고지로

사사키 코지로는 당대 유명한 무사들처럼 여러 매체에서 등장한다.


  •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무사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의 삶은 평행적인 줄거리로 묘사된다.
  •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야기 또는 사사키 코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한 여러 영화에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의 ''속 미야모토 무사시: 일조지의 결투''(1955년)가 있다.
  • 만화 바가본드에서 무사시와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으며, 청각 장애인으로 묘사된다.
  • 컴퓨터 게임 사무라이 쇼다운의 등장인물 타치바나 우쿄는 사사키 코지로를 모델로 한 인물이며, 하오마루는 미야모토 무사시를 모델로 했다. 그의 특기 기술은 "츠바메가에시(つばめ返し)"이다.
  • 비주얼 노벨 및 애니메이션 페이트/스테이 나이트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 비디오 게임 브레이브 펜서 무사시에서 주인공(무사시)의 라이벌의 이름이 그를 따서 지어졌다.
  • 포켓몬스터 시리즈에서 비행 타입 기술인 에어슬래시의 일본어 원래 이름은 "츠바메가에시(つばめ返し)"이다. 또한,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등장인물 로켓단의 무사시와 코지로는 일본어 더빙판에서 각각 무사시와 코지로로 불린다.
  • 애니메이션과 만화 신의 퍼즐에서 사사키는 라그나로크 토너먼트에서 인류를 대표하는 13명의 전사 중 한 명이다. "역사상 가장 큰 패배자"로 알려진 그는 그리스 신 포세이돈과 대결하여 토너먼트 3라운드에서 그를 물리친다.
  • "세탁 봉(Washing Pole)"이라는 이름의 오다치는 2011년 액션 RPG 다크 소울과 그 후속작 다크 소울 II, 다크 소울 III에서 플레이어가 획득할 수 있는 무기이다.
  • 애니메이션과 만화 하지메의 이프에서 코지로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그의 검술 동작은 권투 펀치로 재해석된다. 주인공 막노우치 이포와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제비의 비상"을 사용하는 인물은 사나다 카즈키이다.

미야모토 무사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TV 드라마 등에 자주 등장한다.

;『소지로 무정(小次郎無情)』

일본 컬럼비아(日本コロムビア)에서 발매된 기부네 스이후(貴船翠風)의 가요.

;『사사키 코지로(佐々木小次郎)』

:1950년 무라카미 겐조(村上元三)의 신문 연재 소설.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1935년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신문 연재 소설. 무사시와 코지로의 이름을 일약 유명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코지로가 스오 국(周防国) 이와쿠니(현재의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 출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사키 코지로 역을 수많은 배우가 연기했으며, 모두 미남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무사시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많아 코지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적다.

제목연도제작사감독원작주연
사사키 코지로1950년도호이나가키 히로시오타니 토모우에몬(7대)
속 사사키 코지로1951년도호이나가키 히로시오타니 토모우에몬(7대)
완결 사사키 코지로1951년도호이나가키 히로시오타니 토모우에몬(7대)
사사키 코지로 전편1957년도에이사에키 키요시히가시 치요노스케
사사키 코지로 후편1957년도에이사에키 키요시히가시 치요노스케
사사키 코지로1967년도호이나가키 히로시오노에 키쿠노스케
宮本武蔵 제1부·초분의 사람들1940년닛카쓰이나가키 고츠키가타 류노스케[6]
宮本武蔵 제2부·영달의 문1940년닛카쓰이나가키 고츠키가타 류노스케[7]
宮本武蔵 제3부·검심일로1940년닛카쓰이나가키 고츠키가타 류노스케
宮本武蔵 일승사 결투1942년닛카쓰이나가키 고불명[8]
속 宮본 무사시 일승사의 결투1955년도호이나가키 고츠루타 코지
宮本武蔵 완결편 결투 간류지마1956년도호이나가키 고츠루타 코지
두 사람의 무사시1960년

6. 사사키 고지로 관련 명소

북큐슈시 고쿠라키타구의 타무케야마 공원에는 1950년 무라카미 겐조의 『사사키 코지로』 완성을 기념하여 "코지로의 비"가 세워져 있다.

기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에서는 야마구치현에 있는 긴타이교를 코지로가 "츠바메가에시"를 고안해낸 장소로 하고 있으며, 근처 버드나무에는 "간류 유카리의 버드나무"라는 표주도 설치되어 있다. 실제로 이 다리는 "간류섬의 결투" 60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그 "츠바메가에시"는 "토라키리"라고 불리는 검법의 형태이며, 모두 기카와의 창작이다.[4]

1956년 도호 영화 『미야모토 무사시 완결편 결투 간류섬』에서는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이 시즈오카현이즈의 이마이하마에 콘크리트 바위를 임시로 설치하여 "간류섬의 결투"를 촬영했다. 이 인공 바위는 관광과의 요청으로 그대로 남아, 이후 관광지가 되었다.[5]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의 키카공원이나, 후쿠이현의 일승폭포에는 코지로의 동상이 있으며, 야마구치현 아부정 대자 후쿠다에는 코지로의 것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http://www.town.abu.lg.jp/kojiro/index.html 아부정청 사사키 코지로의 무덤]).

참조

[1] 서적 Bokken – Art of the Japanese Wooden Sword Ohara Publications 1986
[2] 문서 관문해협
[3] 뉴스 니혼 에모노가타리: 사사키 코지로 - 18세 천재 검객, 사실은 78세? 読売新聞 2021-04-18
[4] 방송 암류도 미스터리: 무사시가 지운 코지로의 진실 2007-11-12
[5] 서적 턱수염과 댕기머리 마이니치신문사
[6] 서적 턱수염과 댕기머리 마이니치신문사
[7] 서적 일본영화흥망사Ⅱ·일활시대극 와이즈출판 1940-03-31
[8] 문서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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