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조번 (이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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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조번은 이요국에 위치했던 번으로, 1636년 히토츠야나기 나오모리가 6만 8천 석으로 사이조로 전봉되면서 시작되었다. 나오모리 사후 세 아들에게 영지가 분할되었고, 2대 번주 히토츠야나기 나오시게가 사이조 진야를 건설했다. 1665년 나오오키가 개역되면서 덴료가 되었다가, 1670년 마쓰다이라 요리즈미가 3만 석으로 재건했다. 사이조번은 와카야마번의 지번으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메이지 유신 시기 신정부에 협력하여 보신 전쟁에 참전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사이조현이 되었고, 이후 에히메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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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모리번은 겐로쿠 10년부터 쇼토쿠 원년까지 에치젠국 뉴군 다카모리에 위치했던 번으로, 기슈 마쓰다이라가와 혼조 마쓰다이라가가 다스렸으나 후사 없이 폐번되어 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 기슈번의 지번 - 가즈라노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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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요리즈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삼촌으로, 이요 사이조 3만 석을 받아 상근 교대를 하지 않는 정부 다이묘가 되었으며, 그의 사후 가독은 아들 도쿠가와 요리치가 계승하였다. - 사이조 마쓰다이라가 - 도쿠가와 무네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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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야번은 1623년 가토 나오야스가 1만 석을 분지받아 성립된 번으로, 번내 분치임에도 다이묘로 인정받은 유일한 사례이며 폐번치현 이후 에히메현에 편입되었고 진야는 린포카쿠로 남아있다. - 이요국의 번 - 오즈번 (이요국)
오즈번은 에도 시대 이요국에 존재했던 번으로, 와키자카 가문이 다스리다 가토 가문으로 교체되었고, 막부 말기 존왕양이 사상을 지지했으며 이로하마루 사건과 관련되어 폐번치현 이후 에히메현에 편입, 가토 가문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사이조번 (이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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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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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 사이조 번 |
일본어 명칭 | 西条藩 (さいじょうはん) |
위치 | 이요국 |
현재 위치 | 에히메현 |
중심지 | 사이조 진야 |
역사 | |
성립 | 1636년 |
폐지 | 판적봉환 |
폐지일 | 1871년 |
시대 | 에도 시대 |
통치 | |
정치 체제 | 번 (봉건 영지) |
영주 | 다이묘 |
통계 | |
면적 | 불명 |
인구 | 불명 |
가문 정보 | |
가문 | 마쓰다이라 가문 |
2. 번의 역사
1636년(간에이 13년), 히토츠야나기 나오모리가 이세 간베에서 이요 사이조로 옮겨오면서 사이조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오모리는 같은 해 오사카에서 사망했고, 그의 영지는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히토츠야나기 나오시게는 3만 석을 상속받아 사이조 번주가 되었고, 차남과 삼남은 각각 다른 번을 다스리게 되었다.
2대 번주 나오시게는 사이조 진야와 진야마치의 원형을 구축하며 사이조번의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3대 번주 히토츠야나기 나오오키 대에 이르러 직무 태만과 부정부패를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사이조번은 막부 직할령인 텐료가 되었다.
1670년(간분 10년),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셋째 아들 마쓰다이라 요리즈미가 3만 석으로 사이조번에 봉해지면서 사이조번이 재건되었다. 이 번은 와카야마번의 지번(支藩)으로, 기이 도쿠가와 가문이 단절될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과 같은 역할을 했다. 와카야마번과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여, 번사나 가족들이 에도와 영지를 왕래할 때 와카야마를 경유하는 일이 잦았고, 번주뿐만 아니라 가신 간의 이동도 빈번했다.
1694년(겐로쿠 7년)에는 사이조번 번사들이 다카다노바바 결투에 참여하여 명성을 얻기도 했다.
이후 사이조번은 여러 번주를 거치면서 번 재정 재건, 번교 설립, 영내 지지 편찬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8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유키는 번교 이젠도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고, 9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사토는 약 100년 만에 사이조에 입성하여 영내를 순시하고 『사이조지』 편찬을 명했다.
막부 말기에는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메이지 유신에 기여했다.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사이조번은 사이조현이 되었고, 이후 에히메현에 통합되었다.
2. 1. 히토츠야나기가 시대
간에이 13년(1636년), 이세 고베 5만 석의 영주였던 히토츠야나기 나오모리가 1만 8천 석을 가증받아 총 6만 8천 석으로[7] 이요 사이조로 전봉되었다. 이 중 5천 석은 차남 나오이에에게 분할했기 때문에 6만 3천 석으로 기록되기도 한다.[8] 이로 인해 이요 국 니이군, 우마군, 슈후군 및 하리마 가토군에 걸쳐 영지를 가진 사이조번이 성립되었지만, 나오모리는 같은 해 입봉 도중 오사카에서 사망했다. 나오모리의 유령은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실질적으로 사이조 3만 석을 성립시킨 것은 2대 히토츠야나기 나오시게였다. 그는 사이조 진야 및 진야마치의 원형을 구축했다. 나오시게의 아들 나오오키는 동생 나오테루에게 5천 석을 분봉하여 사이조 번은 2만 5천 석이 되었다. 그러나 간분 5년(1665년), 나오오키는 직무 태만과 실정 등을 이유로 개역 처분을 받았다. 이후 사이조 영지는 도쿠시마번, 이요 마쓰야마 번의 보관지를 거쳐 공의어령(다이칸 지배지)이 되었다.
2. 1. 1. 역대 번주 (히토츠야나기가)
대 | 이름 | 원호 | 관위 | 재임 기간 | 향년 | 출신 가문 |
---|---|---|---|---|---|---|
1 | 히토츠야나기 나오모리 | 타호인(多宝院) | 종5위하 겐모쓰 | 간에이 13년 (1636년) | 73 | 히토츠야나기가 |
2 | 히토츠야나기 나오시게 | 지키시인(直指院) | 종5위하 단고노카미 | 간에이 13년 - 쇼호 2년 (1636년 - 1645년) | 48 | 히토츠야나기가 |
3 | 히토츠야나기 나오오키 | 단스이인(醰粋院) | 종5위하 겐모쓰 | 쇼호 2년 - 간분 5년 (1645년 - 1665년) | 79 | 히토츠야나기가 |
간에이 13년(1636년), 히토츠야나기 나오모리는 이세 간베 번 5만 석 영주에서 1만 8천 석을 가증받아 총 6만 8천 석으로[7] 이요 사이조로 전봉되었다. 이 중 5천 석은 차남 나오이에에게 분할했기 때문에 6만 3천 석으로 기록되기도 한다.[8] 나오모리는 같은 해 오사카에서 사망했고, 영지는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 나오시게가 3만 석을 상속받아 사이죠 번주가 되었고, 차남 나오이에는 2만 8천 석 (이요 가와노에번 → 하리마 오노번), 3남 나오요리는 1만 석 (이요 고마쓰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사이죠 3만 석을 성립시킨 것은 2대 히토츠야나기 나오시게였다. 그는 사이조 진야 및 진야마치의 원형을 구축했다. 나오시게의 아들 나오오키는 동생 나오테루에게 5천 석을 분봉하여 사이죠 번은 2만 5천 석이 되었다. 그러나 간분 5년(1665년), 나오오키는 직무 태만과 실정 등을 이유로 개역 처분을 받았다. 이후 사이조 영지는 도쿠시마번, 이요 마쓰야마 번의 보관지를 거쳐 공의어령(다이칸 지배지)이 되었다.
2. 2. 사이죠 마츠다이라가 시대
향토사 분야에서는 히토츠야나기씨의 사이조번을 "제1차 사이조번", 마쓰다이라씨의 사이조번을 "제2차 사이조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670년(간분 10년), 와카야마번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셋째 아들 마쓰다이라 요리즈미가 3만 석으로 입봉하면서 사이조번이 다시 세워졌다. 이 번은 와카야마번의 지번(支藩)으로, 키이 도쿠가와 가문(와카야마번 번주 가문)이 끊어질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과 같은 역할을 했다. 와카야마번과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여, 번사나 가족들이 에도와 영지를 왕래할 때 와카야마를 경유하는 일이 잦았고, 번주뿐만 아니라 가신 간의 이동도 빈번했다.
1694년(겐로쿠 7년)에 벌어진 타카다노바바 결투는 사이조번 번사 스가노 로쿠로자에몬과 무라카미 쇼자에몬이 벌인 결투 사건으로, 호리베 타케츠네의 조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이 되었을 때, 사이조번 2대 번주 요리요시가 와카야마번을 이어 도쿠가와 무네나오라 칭했으며, 동생 요리야스(후의 마쓰다이라 요리타다)가 사이조번을 상속받았다.
4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사토는 번 재정 재건을 위해 검약령을 내렸으나, 병약함을 이유로 번정 개혁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22세에 은거했다. 이후 키이 도쿠가와 가문에서 도쿠가와 무네나오의 3남 마쓰다이라 요리아츠를 5대 번주로 맞이했다. 요리아츠 역시 와카야마번을 이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하루사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요리아츠의 후계는 와카야마번 번주 도쿠가와 무네마사의 아들 마쓰다이라 요리카타가 이었다.
8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유키는 사이조에 번교 "이젠도"를 열었다. 9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사토는 요리타다 이후 약 100년 만에 사이조에 입성하는 동시에, 1832년(덴포 7년)에 영내의 지지(地誌) 『사이조지』의 편찬을 명했다 (완성은 덴포 13년).
막부 말기의 번주는 9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사토이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도쿠가와 일문의 신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유신 때에는 재빨리 신정부에 공순(恭順)의 자세를 보여 관군으로서 보신 전쟁에 참전하였다.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과 동시에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히데는 번지사가 되어 화족에 올랐다.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에 의해 사이조현이 되었다. 후에 마쓰야마현, 이시즈치현을 거쳐 에히메현에 편입되었다.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으로 요리히데는 자작에 서임되었다.
사이조 마쓰다이라 가문은 정부 다이묘였기 때문에 번주가 영지에 들어갈 기회가 적었다. 초대 번주 요리즈미는 약 40년간의 치세 동안 5번 사이조에 입성했다. 이후 사이조 마쓰다이라 씨 10대 200년 동안 영지에 입성한 횟수는 총 9번뿐이었다.
2. 2. 1. 역대 번주 (사이죠 마츠다이라가)
우쿄노다이후1670년 - 1711년
사쿄노다이후
1711년 - 1716년
사쿄노다이부
1716년 - 1738년
사쿄노다이부
1738년 - 1753년
사쿄노다이부
1753년 - 1775년
시키부노다이스케
1775년 - 1795년
아악두
1795년 - 1797년
시키부노다이스케
1797년 - 1832년
시종
1832년 - 1862년
사쿄노다이부
1862년 - 187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