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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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검술은 검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술 체계를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거쳐 각 민족의 문화와 함께 발전해왔다. 로마 시대에는 글라디우스와 스쿠툼을 활용한 검술이 군사 훈련의 핵심이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아밍 소드와 롱소드가 등장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독자적인 검술 학교가 발전했다. 근대에 들어 화기의 등장으로 군사적 중요성이 감소했으나, 스포츠로서의 검술은 18세기부터 도메니코 안젤로에 의해 발전했다. 검술은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각 지역의 특색을 반영하며 발전해왔으며, 검의 종류와 구조, 기본 기술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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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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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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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다른 이름 | 검객 |
파생 종목 | 펜싱 |
사용 무기 | 도검 |
분야 | |
주요 기술 | (서양) 검술 발도술 검도 격투 전술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결투 살진 스포츠 무술 무도 검 봉술 총검술 도검 기사 사무라이 서양 검술 발도술 검도 대한검도회 조선세법 본국검법 환도 장검 일본도 진검 목검 죽도 거합도 스포츠 기사 전쟁 밀리터리 |
서양 검술 | |
관련 무술 | 롱소드 레이피어 세이버 브로드소드 |
역사 | |
기원 | 유럽 |
관련 국가 | 유럽 |
기타 | |
관련 항목 | 펜싱 HEMA (역사 재구성 무술) |
2. 역사적 배경
고대 시대에는 로마군이 글라디우스와 스쿠툼 방패를 사용하여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다. 검투사들은 군대보다 짧은 글라디우스를 사용했고, 스파타는 켈트족 병사들이 사용하다가 로마 기병대에 통합되었다.[2][3][4] 로마 군인들은 엄격한 훈련을 받았으며, 나무 검과 짚 인형으로 연습했다.[5]
중세 초기에는 검 사용이 제한적이었고, 창, 도끼, 방패가 주요 무기였다. 패턴 용접 기술로 만들어진 검은 강도와 탄성이 뛰어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파타''는 아밍 소드로 발전했고, 최초의 검술 서적인 ''페흐트부흐'' (I.33)가 등장했다. 요하네스 리히테나우어와 그의 제자들은 독일 검술 학교를 대표하며, 롱소드가 발전하고 판금 갑옷에 대응하는 검술이 발전했다.
16세기에 화기가 등장하면서 검의 군사적 중요성은 감소했지만, 백소드는 기병과 장교들이 계속 사용했다. 민간 결투에서는 레이피어에서 스몰소드로, 결국 권총으로 무기가 변화했다. 독일 검술 학교는 쇠퇴하고 이탈리아 및 스페인 검술 학교가 주도권을 잡았다.
18세기 중반부터 검술은 스포츠로 전환되기 시작했으며, 도메니코 안젤로는 검술을 스포츠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 그는 현대 스포츠 검술의 규칙을 정립하고, 검술을 건강과 스포츠의 이점으로 강조했다.[8][9] 검술은 발전하면서 전투적 측면이 사라지고 스포츠 규칙만 남게 되었다.
2. 1. 고대

로마의 군단병과 2세기까지의 로마군은 전투에서 스쿠툼 방패와 함께 짧은 찌르기 검인 글라디우스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베게티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주로 언더핸드 찌르기를 사용했는데, 배를 찌르는 것이 베거나 자르는 것보다 더 빨리 적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로마 군인 묘사에서는 베거나 자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2][3][4] 검투사들은 군대보다 짧은 글라디우스를 사용했다. 스파타는 원래 켈트족 병사들만 사용하던 더 긴 양날 검이었으며, 나중에는 로마 기병대에 보조 부대로 통합되었지만, 2세기에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제국의 군단병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며, 규율을 중시했다. 이는 무기 훈련에도 적용되었을 것이지만, 로마 검술 매뉴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바르텐 홀리데이가 1661년에 번역한 유베날의 시에는 로마 훈련병들이 날카로운 강철 검을 사용하기 전에 나무 웨스터로 싸우는 법을 배웠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로마 검투사들은 짚 인형이나 ''팔루스''(나중에 나무 ''펠''의 초기 형태)라고 알려진 나무 기둥을 상대로 납으로 무게를 잡은 나무 검으로 훈련을 했다는 사실도 발견되었다.[5] 이러한 훈련은 로마 군인에게 실질적인 경험이나 추가적인 고급 훈련을 통해 향상될 수 있는 훌륭한 기술 기반을 제공했을 것이다.
서양 검술은 검이 실용적인 병기로서 전장에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술 체계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 시대에 더욱 세련되었고, 로마 시대에는 군대의 교련으로 필수였다. 바이킹이나 게르만, 노르만 등 각 민족이 독자적으로 문화를 퍼뜨렸고, 그 안에 검술이 있었던 것도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의 암흑 시대에는 충분한 자료가 없다.
2. 2. 중세
초기 중세 시대 검술 기술은 고고학적 증거나 예술 작품(바이킹 시대의 무기 및 갑옷 참조)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을 뿐, 자세히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바이킹과 북부 게르만 부족 사이에서 검의 사용은 제한적이었다. 이 시기에는 창, 도끼, 방패가 주요 무기였고, 검은 부유한 사람들만이 소유했다. 이 무기들은 초기 게르만족의 ''스파타''(spatha)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며 매우 훌륭한 품질을 자랑했다. 서기 2세기 말 로마 제국에서 발명된 패턴 용접 기술은 초기 로마의 철제 검인 글라디우스보다 강도와 탄성이 뛰어난 북부 무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1]
시간이 흐르면서 ''스파타''는 중세 시대 기사들이 흔히 사용하던 십자형 자루가 특징인 아밍 소드로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과 함께, 초기 검술 서적(''(페흐트부흐'')이 쓰여졌으며, 주로 아밍 소드와 버클러를 이용한 전투를 다루었다. 가장 오래된 ''페흐트부흐''인 I.33이 그 예시이다. 독일 검술 학교는 요하네스 리히테나우어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기원했으며, 이들은 지크문트 린게크, 한스 탈호퍼, 페터 폰 단치히, 파울루스 칼 등 15세기 독일 검술 대가들이다. 1410년경 이탈리아 검술 대가 피오레 데이 리베리가 쓴 플로스 듀엘라토룸은 독일 검술 학교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이 시기에 롱소드는 아밍 소드에서 발전하여 양손으로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칼날을 갖게 되었다. 판금 갑옷 등 갑옷 기술 또한 발전하면서 검술은 매우 잘 보호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맞춰 더욱 발전했다.[1]
초기 중세 시대 대부분 검은 지위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후기에는 생산 기술이 발전하면서 검은 여전히 특권층의 전유물이了지만, 가장 부유한 개인뿐 아니라 부유층 전체로 널리 보급되었다.[1]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세 검술 텍스트는 13세기 독일에서 무명의 수도사가 쓴 'I.33'(en)이다. 이 책은 브로드소드와 백러의 조합을 기술하고 있으며, 이 조합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인기 있는 스타일이었다.[1]
독일에서는 요하네스 리히테나우어 (Johannes Liechtenhauer)가 게르만 검술 스타일의 시조로 여겨진다. 그는 비밀주의자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암호와 같은 시(Merkverse)로 출판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15세기 초 지크몬트 링에크 (Sigmond Ringec)에게 이어졌고, 그는 Merkverse에 주석을 단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검술'이 발전했다. 북이탈리아의 피오레 데 리베리(Fiore di Liberi)는 15세기 페라라의 니콜로 3세 궁정 검술 지도자(마에스트로)였다. 그의 저서 『플로스 듀엘라토룸(Flos Duellatorrym, 싸움의 꽃)』은 현지 검호 "조반니 델레 반데네레(흑군 조반니)"를 모델로, 맨손 격투, 단검을 사용한 이도류, 롱소드, 장병기 등을 사용한 기술을 담고 있으며, 1410년에 출판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이후 한스 탈호퍼나 자코모 디 그라시 등이 대표적인 검술가로 꼽힌다.[1]
2. 3. 근대
16세기에 화기가 등장하면서 검술의 군사적 중요성은 급격히 감소했다. 마지막으로 사용된 주요 전장용 검은 백소드였는데, 기병 부대와 장교들이 사용하면서 다른 형태의 전쟁용 검보다 오래 살아남았다.하지만 화기의 위력, 정확성, 신뢰성이 계속해서 향상되면서, 검은 의례적인 목적 외에는 전장에서 설 자리를 거의 잃게 되었다. 민간 결투에서 선호되는 무기는 레이피어에서 더 빠르지만 짧은 스몰소드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화기 기술의 발전에 따라 검에서 권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민간 결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금지되었지만, 20세기 초까지 법에 관계없이 어느 정도 지속되었다.[6]

일반적으로 독일 검술 학교는 르네상스 시대에 쇠퇴기에 접어들었는데, 이는 레이피어와 민간 결투에 더 집중했던 이탈리아 및 스페인 검술 학교가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파울루스 헥토르 마이어(Paulus Hector Mair)가 1540년대에 엮은 총서는 이전 세기의 작업들을 되돌아보며 쇠퇴하는 기술을 재구성하고 보존하려는 시도였다. 요아힘 마이어(Joachim Meyer)의 논문은 1570년대에 작성되었으며, 이 스타일에 대한 과학적이고 완전한 접근 방식으로 유명하다(마이어의 제자들이 군사적 지식이 부족한 상태로 그에게 와서 더 기본적인 지침이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논문은 독일 검술 학교에 대한 마지막 주요 기록이며, 그 내용은 현재 거의 전적으로 스포츠와 관련되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 동안 긴 칼의 사용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는데, 이는 아르케부스의 효율성이 증가하고 강력한 전투 도구로서 파이크 사각형 대형의 사용이 늘어난 것이 특징이었다. 이 시기에 민간용 검은 "베고 찌르기" 검이라고도 알려진 사이드 소드로 진화했으며, 결국 17세기의 레이피어가 된 더 두껍고 뾰족한 검으로 발전했다. 이 새로운 무기는 거리에서의 방어와 결투 도구로 모두 인기가 있었지만, 전장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검술 학교는 이러한 민간 무기의 변화를 받아들여 레이피어 펜싱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러나 독일 검술 학교는 이 무기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으며, 그 이후에는 쇠퇴하게 된다.
군사 훈련보다는 스포츠로서의 검술로의 전환은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며, 1763년 칼라일 하우스, 소호, 런던에 검술 아카데미인 안젤로 무술 학교를 설립한 도메니코 안젤로가 주도했다.[7] 그는 그곳에서 이전에 대륙에 가서 배워야 했던 유행하는 검술을 귀족들에게 가르쳤고, 또한 집 뒤뜰에 승마 학교를 세웠다. 그는 영국 왕실의 검술 교관이었다. 그는 예술가 귄 델린의 도움을 받아 1763년 영국에서 25개의 고전적인 검술 자세를 보여주는 조각판이 담긴 교본을 출판했다. 그의 학교는 그의 가족의 3대에 걸쳐 운영되었으며 거의 1세기 동안 유럽 검술을 지배했다.[8]
그는 현대 스포츠 검술을 지배하는 자세와 발놀림의 필수 규칙을 정립했지만, 그의 공격 및 방어 방법은 여전히 현재의 관행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제자들을 실제 전투에 대비시키려 했지만, 특히 1763년에 출판된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L'École des armes'(검술 학교)에서 검술을 살상 기술로 사용하는 것보다 건강과 스포츠의 이점을 강조한 최초의 검술 스승이었다.[8]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안젤로는 건강, 평정심, 우아함을 개발하는 수단으로 검술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통찰력과 영향력의 결과로 검술은 전쟁 기술에서 스포츠로 바뀌었다."[9]
검술이 발전하면서 전투적 측면은 서서히 사라지고 스포츠의 규칙만 남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가르쳐진 검술은 경쟁과 결투 모두를 위한 것이었지만(두 상황의 차이점을 이해하면서), 현대 스포츠 검술 살레에서 가르치는 검술은 스포츠 규칙 내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학생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진화가 계속됨에 따라 훈련과 기술은 그들의 무술 뿌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이러한 진화의 한 가지 원동력은 스포츠 검술에서 우선권을 가진 펜싱 선수에게 포인트를 수여하는 것이다. 이는 경쟁자들이 스포츠 경기에서 먼저 터치하는 결과를 낳지만 치명적인 무기를 가진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상대방에게서조차 반격에 무방비 상태로 만들 수 있는 득점 기술을 사용하도록 장려한다. 첫 번째 터치 규칙의 개발 자체는 결투가 죽음보다는 첫 피를 뽑기 위해 싸우는 경향이 증가함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첫 번째 터치를 위한 훈련은 상대를 죽이거나 무력화시키지 않고도 스포츠 경기뿐만 아니라 결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2. 4. 현대
군사 훈련보다는 스포츠로서의 검술로 전환은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며, 도메니코 안젤로가 주도했다. 그는 1763년 칼라일 하우스, 소호, 런던에 검술 아카데미인 안젤로 무술 학교를 설립했다.[7] 그는 그곳에서 귀족들에게 이전에 대륙에 가서 배워야 했던 유행하는 검술을 가르쳤고, 집 뒤뜰에 승마 학교도 세웠다. 그는 영국 왕실의 검술 교관이었다. 그는 예술가 귄 델린의 도움을 받아 1763년 영국에서 25개의 고전적인 검술 자세를 보여주는 조각판이 담긴 교본을 출판했다. 그의 학교는 그의 가족 3대에 걸쳐 운영되었으며 거의 1세기 동안 유럽 검술을 지배했다.[8]
그는 현대 스포츠 검술을 지배하는 자세와 발놀림의 필수 규칙을 정립했지만, 그의 공격 및 방어 방법은 여전히 현재의 관행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제자들을 실제 전투에 대비시키려 했지만, 특히 1763년에 출판된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L'École des armes'(검술 학교)에서 검술을 살상 기술로 사용하는 것보다 건강과 스포츠의 이점을 강조한 최초의 검술 스승이었다.[8]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안젤로는 건강, 평정심, 우아함을 개발하는 수단으로 검술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통찰력과 영향력의 결과로 검술은 전쟁 기술에서 스포츠로 바뀌었다."[9]
검술이 발전하면서 전투적 측면은 서서히 사라지고 스포츠 규칙만 남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가르쳐진 검술은 경쟁과 결투 모두를 위한 것이었지만(두 상황의 차이점을 이해하면서), 현대 스포츠 검술 살레에서 가르치는 검술은 스포츠 규칙 내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학생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진화가 계속됨에 따라 훈련과 기술은 무술 뿌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이러한 진화의 한 가지 원동력은 스포츠 검술에서 우선권을 가진 펜싱 선수에게 포인트를 수여하는 것이다. 이는 경쟁자들이 스포츠 경기에서 먼저 가격하는 결과를 낳지만, 치명적인 무기를 가진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상대방에게서조차 반격에 무방비 상태로 만들 수 있는 득점 기술을 사용하도록 장려한다. 첫 번째 가격 규칙의 개발 자체는 결투가 죽음보다는 첫 피를 뽑기 위해 싸우는 경향이 증가함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첫 번째 가격을 위한 훈련은 상대를 죽이거나 무력화시키지 않고도 스포츠 경기뿐만 아니라 결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3. 지역별 검술
각 지역별로 검술은 독특한 특징과 함께 발전해 왔다.
- 아시아
- '''한국''': 초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기마 전투에 적합한 곡선형 외날 검이 발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검술이 표준화되었으며, 《무예도보통지》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 '''중국''': 양날 검인 검과 외날 검인 도를 구분한다. 검은 숙련된 무기로, 도는 중국 무술 체계의 주요 무기 중 하나로 가르쳐졌다.
- '''일본''': 일본도는 사무라이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초기에는 곧은 검이었으나, 기마 전투에 유리한 곡선형 칼날이 도입되었다. 아이아이도, 아이아이주츠 등 다양한 유파가 발전했으며, 검도는 현대 스포츠로 이어졌다.
- '''필리핀''': 다양한 형태의 검이 존재했으며, 막탄 전투에서 라푸라푸 부족은 토착 검으로 페르디난드 마젤란 군대를 물리쳤다. 식민지 시대에는 농기구를 무기로 사용했으며, 에스크리마는 현대에도 전해진다.
- 유럽
- '''고대 로마''': 군단병은 글라디우스라는 짧은 찌르기 검을 사용했다. 스파타는 로마 기병대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이후 로마 제국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 '''중세''': 바이킹 시대에는 검의 사용이 제한적이었고, 창, 도끼, 방패가 주요 무기였다. 이후 아밍 소드가 등장했으며, 독일 검술 학교와 이탈리아 검술 학교에서 검술 서적(''페흐트부흐'')이 쓰여졌다. 롱소드는 판금 갑옷의 등장과 함께 발전했다.
- '''르네상스 시대''': 화기의 등장으로 검술의 군사적 중요성은 감소했다. 백소드는 기병 부대와 장교들이 사용했으며, 민간에서는 레이피어와 스몰소드가 결투에 사용되었다. 독일 검술 학교는 쇠퇴하고, 이탈리아 및 스페인 검술 학교가 주도권을 잡았다.
- '''근대''': 검술은 스포츠로 발전했으며, 도메니코 안젤로는 검술을 건강과 스포츠의 이점으로 강조한 최초의 검술 스승이었다. 현대 스포츠 검술은 경쟁 규칙에 맞춰 발전하면서 무술의 뿌리에서 멀어졌다.
- 아프리카
- '''고대 이집트''': 코페쉬egy 등 다양한 종류의 검이 사용되었다. 양날 그립-텅 검은 세르덴이 도입하여 근동 전역으로 퍼졌다. 이슬람교 도입 후에는 중동의 검이 우위를 차지했다.
- '''기타 지역''': 일부 공동체에서는 검을 왕족이나 부족 지도자에게만 제한했다. 소말리아, 니제르, 골드 코스트 등 지역마다 형태가 달랐다.
- 중동
- '''고대''': 아시리아인과 히타이트인은 ''남사루''(namsaru)라는 검을 사용했다. 검은 항상 보조 무기였으며, 주 무기는 활, 창, 투석기였다.
- '''이슬람 시대''': 아라비아 검은 곧은 양날 검 형태였으며, 십자형 자루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다마스쿠스는 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곡선형 스미터 칼날은 튀르크 셀주크의 영향으로 중동 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3. 1. 아시아
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검술로는 검도, 해동검도, 에스크리마 등이 있다.3. 1. 1. 한국

가장 초기의 한국 검은 중국의 검에서 유래한 양날의 곧은 칼이었다. 한국의 전쟁은 기마 전투를 선호했기 때문에, 말 위에서는 곡선형의 외날 칼이 더 효과적이었다. 조선의 중앙 집권 정부와 잦은 외침을 막아야 할 필요성은 검술을 표준화된 군사 훈련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른 무술 체계와 함께 검술의 형태는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한 군사 교범 《무예제보》(1610)와 개정판인 《무예신보》(1759), 《무예도보통지》(1790)에 공식화되었다. 《무예도보통지》는 또한 사용된 검의 표준 길이와 무게를 설명한다. 검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23개의 장 중 8개가 검술에 할애되어, 총기가 근접전에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던 시대의 필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3. 1. 2. 중국
중국에서는 "검"(양날 검)과 "칼"(외날 검)을 구분한다. 중국 문화에서 양날 검인 검은 숙련된 무기 또는 신사의 무기로 여겨진다. 검은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며, 군대 지휘관들이 병사들 사이를 쉽게 이동하기 위해 선호했다. 중국에서 검은 무기의 "섬세한 여성"으로 묘사되며,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적합한 무기로 여겨진다. 외날 검은 도라고 한다. 검과 도는 중국 무술 체계에서 가르치는 네 가지 주요 무기 중 하나이며, 다른 두 가지는 봉(staff)과 창(spear)이다. 이 무기를 가르치는 순서는 학교와 스타일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검은 네 가지 중 마지막으로 가르친다.[1]
3. 1. 3. 일본
일본도는 사무라이가 무기에 쏟는 존경과 관리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랫동안 일본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녀왔다. 일본 최초의 칼은 중국 초기 검인 젠을 기반으로 곧게 뻗어 있었다. 8세기 말에는 당시의 곡선 단조 기술이 도입되면서 곡선 칼날이 더 흔해졌다. 이 형태는 말을 타고 싸울 때 더 효율적이었다. 일본 검술은 기본적으로 양손으로 검을 휘두르며, 앞손은 아래로 밀고 뒷손은 위로 당기면서 기본적인 수직 베기를 가한다. 사무라이는 종종 더 긴 카타나와 더 짧은 와키자시 두 자루의 칼을 휴대했으며, 일반적으로 각각 사용했지만, 두 자루를 한 쌍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초기의 타치는 주로 말 위에서 사용하도록 고안되어 칼날이 아래를 향하도록 착용했지만, 후기의 카타나는 칼날이 위를 향하도록 착용했다. 이러한 간단한 변화는 칼을 뽑는 즉시 무기나 몸의 방향을 바꿀 필요 없이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해주어 근접 전투 시나리오(당시에는 기마 전투보다 더 흔해짐)에 맞춰진 보다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최적화로 입증되었다. 이 기술을 기반으로 한 전체 시스템은 아이아이도, 아이아이주츠, 바토도 또는 바토주츠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이후부터 실제 칼로 훈련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에 수련자들은 목검(보켄 또는 보쿠토) 또는 대나무 검(시나이)으로 훈련하면서 갑옷을 착용했다. 공공 장소에서 칼을 휴대하는 것이 불법이 되면서 이것이 현대 스포츠인 검도로 이어졌다. 일부 고대 유파는 일부 현대 유파와 함께 여전히 존재한다. 많은 유파는 또한 귀족 가문이 특정 스승을 후원하면서 발전한 검술에 거의 전적으로 집중한다.
3. 1. 4. 필리핀
필리핀의 검은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인접한 보르네오와 대만의 부족들이 사용하던 곧거나 약간 곡선 형태의 베는 유형과 일치한다. 이는 캄필란과 다홍 팔레이의 디자인에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형태의 검도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칼라사그라고 불리는 직사각형 방패와 짝을 이루었다. 막탄 전투에서 라푸라푸의 부족은 총과 대포로 무장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토착 검과 창을 사용했다.[1]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도착은 서양 검의 영향을 가져왔으며, 이는 피누티의 핸드 가드와 세이버와 같은 칼날의 기원일 가능성이 높다. 필리핀이 스페인에 의해 식민지화되었을 때, 전통적인 검과 무기의 사용은 즉시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필리핀인들은 반란에서 싸우기 위해 농기구를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과 같은 다른 외국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이후의 반란에서, 그들은 다시 이러한 즉석 무기를 사용해야 했다.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일본군과 싸울 탄약이 부족했기 때문에 필리핀인들은 백병전 무기와 검을 사용하여 일본군 진영을 습격하는 게릴라전을 사용했다. 필리핀 검술은 속도에 크게 의존하며, 오늘날에도 필리핀 해병대는 곡선형 단일 칼날 검을 사용하여 에스크리마의 한 형태를 훈련한다.[1]
3. 2. 유럽
로마의 군단병과 2세기까지의 로마군은 전투에서 ''스쿠툼''이라는 방패와 함께 짧은 찌르기 검인 글라디우스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베게티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주로 언더핸드 찌르기를 사용했는데, 배를 찌르는 것이 베거나 자르는 것보다 더 빨리 적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로마 군인 묘사에서는 베거나 자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2][3][4] 검투사들은 군대보다 짧은 글라디우스를 사용했다. 스파타는 원래 켈트족 병사들만 사용하던 더 긴 양날 검이었으며, 나중에는 로마 기병대에 보조 부대로 통합되었지만, 2세기에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제국의 군단병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며, 규율을 중시했다. 이는 무기 훈련에도 적용되었을 것이지만, 로마 검술 매뉴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바르텐 홀리데이가 1661년에 번역한 유베날의 시에는 로마 훈련병들이 날카로운 강철 검을 사용하기 전에 나무 웨스터로 싸우는 법을 배웠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로마 검투사들은 짚 인형이나 ''팔루스''(나무 ''펠''의 초기 형태)라는 나무 기둥을 상대로 납을 넣은 나무 검으로 훈련했다는 사실도 발견되었다.[5] 이러한 훈련은 로마 군인에게 실전 경험이나 추가적인 고급 훈련을 통해 향상될 수 있는 훌륭한 기술 기반을 제공했을 것이다.
초기 중세 시대의 검술 기술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증거와 예술적 묘사(바이킹 시대의 무기 및 갑옷 참조)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바이킹과 북부 게르만 부족 사이에서는 바이킹 시대에 검의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이 시기에는 창, 도끼, 방패가 주요 무기였으며, 검은 부유한 개인만이 소유했다. 이러한 무기는 초기 게르만족의 ''스파타''(spatha)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며 매우 훌륭한 품질을 자랑했다. 서기 2세기 말 로마 제국에서 발명된 패턴 용접 기술은 초기 로마의 철제 검인 글라디우스보다 강도와 탄성이 뛰어난 북부 무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파타''는 중세 시대의 기사들에게 흔히 사용되던 십자형 자루가 특징인 아밍 소드로 진화했다. 이러한 진화 이후, 가장 초기의 검술 서적(''(페흐트부흐'')이 쓰여졌으며, 주로 아밍 소드와 버클러를 이용한 전투를 다루었다. 가장 오래된 ''페흐트부흐''인 I.33이 그 예시이다. 독일 검술 학교는 요하네스 리히테나우어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기원했으며, 이들은 후에 지크문트 린게크, 한스 탈호퍼, 페터 폰 단치히, 파울루스 칼을 포함한 15세기의 독일 검술 대가들이 되었다. 이탈리아 검술 대가 피오레 데이 리베리가 1410년경에 쓴 이탈리아 검술 서적인 플로스 듀엘라토룸은 독일 검술 학교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이 시기에 롱소드는 아밍 소드에서 발전했으며, 양손으로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칼날을 갖게 되었다. 갑옷 기술 또한 발전하여 판금 갑옷이 등장했고, 검술은 고도로 방호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맞춰 발전했다.
초기 중세 시대의 대부분 동안, 검은 지위의 상징이었다. 후기에는 생산 기술이 발전하면서 검은 여전히 특권층의 전유물이었지만, 부유층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16세기에 화기의 등장으로 검술의 군사적 중요성은 급격히 감소했다. 마지막으로 사용된 주요 전장용 검은 백소드였다. 백소드는 새로운 발명품은 아니었지만, 기병 부대와 장교들이 사용하면서 다른 형태의 전쟁용 검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화기의 위력, 정확성, 신뢰성이 향상되면서 검은 의례적인 목적 외에는 전장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민간 결투에서 선호되는 무기는 레이피어에서 더 빠르지만 짧은 스몰소드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화기 기술의 발전에 따라 검에서 권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민간 결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금지되었지만, 20세기 초까지 법에 관계없이 어느 정도 지속되었다.
일반적으로 독일 검술 학교는 르네상스 시대에 쇠퇴기에 접어들었는데, 레이피어와 민간 결투에 더 집중했던 이탈리아 및 스페인 검술 학교가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파울루스 헥토르 마이어(Paulus Hector Mair)가 1540년대에 엮은 총서는 이전 세기의 작업들을 되돌아보며 쇠퇴하는 기술을 재구성하고 보존하려는 시도였다. 요아힘 마이어(Joachim Meyer)의 논문은 1570년대에 작성되었으며, 이 스타일에 대한 과학적이고 완전한 접근 방식으로 유명하다. 이 논문은 독일 검술 학교에 대한 마지막 주요 기록이며, 그 내용은 현재 거의 스포츠와 관련되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 동안 긴 칼의 사용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는데, 아르케부스의 효율성이 증가하고 파이크 사각형 대형이 강력한 전투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민간용 검은 "베고 찌르기" 검이라고도 알려진 사이드 소드로 진화했으며, 결국 17세기의 레이피어가 된 더 두껍고 뾰족한 검으로 발전했다. 이 새로운 무기는 거리에서의 방어와 결투 도구로 모두 인기가 있었지만, 전장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검술 학교는 이러한 민간 무기의 변화를 받아들여 레이피어 펜싱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러나 독일 검술 학교는 이 무기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는 쇠퇴하게 된다.
검술은 중세 토너먼트 이전부터 현대 시대에 이르기까지 스포츠적 측면을 포함했다.[6]
군사 훈련보다는 스포츠로서의 검술로의 전환은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며, 1763년 칼라일 하우스, 소호, 런던에 검술 아카데미인 안젤로 무술 학교를 설립한 도메니코 안젤로가 주도했다.[7] 그는 그곳에서 이전에 대륙에 가서 배워야 했던 유행하는 검술을 귀족들에게 가르쳤고, 집 뒤뜰에 승마 학교를 세웠다. 그는 영국 왕실의 검술 교관이었다. 그는 예술가 귄 델린의 도움을 받아 1763년 영국에서 25개의 고전적인 검술 자세를 보여주는 조각판이 담긴 교본을 출판했다. 그의 학교는 그의 가족 3대에 걸쳐 운영되었으며 거의 1세기 동안 유럽 검술을 지배했다.[8]
그는 현대 스포츠 검술을 지배하는 자세와 발놀림의 필수 규칙을 정립했지만, 공격 및 방어 방법은 현재의 관행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제자들을 실제 전투에 대비시키려 했지만, 1763년에 출판된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L'École des armes'(검술 학교)에서 검술을 살상 기술로 사용하는 것보다 건강과 스포츠의 이점을 강조한 최초의 검술 스승이었다.[8]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안젤로는 건강, 평정심, 우아함을 개발하는 수단으로 검술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통찰력과 영향력의 결과로 검술은 전쟁 기술에서 스포츠로 바뀌었다."[9]
검술이 발전하면서 전투적 측면은 서서히 사라지고 스포츠의 규칙만 남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가르쳐진 검술은 경쟁과 결투 모두를 위한 것이었지만(두 상황의 차이점을 이해하면서), 현대 스포츠 검술에서 가르치는 검술은 스포츠 규칙 내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학생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진화가 계속됨에 따라 훈련과 기술은 무술의 뿌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스포츠 검술에서 우선권을 가진 펜싱 선수에게 포인트를 수여하는 규칙은 경쟁자들이 스포츠 경기에서 먼저 터치하는 결과를 낳지만, 치명적인 무기를 가진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상대방에게서조차 반격에 무방비 상태로 만들 수 있는 득점 기술을 사용하도록 장려한다. 첫 번째 터치 규칙의 개발 자체는 결투가 죽음보다는 첫 피를 뽑기 위해 싸우는 경향이 증가함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첫 번째 터치를 위한 훈련은 상대를 죽이거나 무력화시키지 않고도 스포츠 경기뿐만 아니라 결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3. 3. 아프리카
고대 이집트의 검은 sfetegy, seftegy, nakhtuiegy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검은 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에서는 사냥용 막대에서 유래한 '마(ma)' 또는 부메랑 검, '카트(kat)' 또는 칼 검, 낫에서 유래한 코페쉬egy 또는 팔치온, 그리고 곧고 긴 검 등 네 종류의 검이 사용되었다. 코페쉬egy는 기원전 3000년경 제6왕조부터 묘사되었으며, 지역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다. 코페쉬는 두껍고 청동으로 무게를 두었으며, 파라오의 경우 금으로 손잡이를 만들기도 했다. 칼날은 한쪽 또는 양쪽에 날이 있었고, 구리 합금, 청동, 철 또는 청색 강철로 만들어졌다. 양날 그립-텅 검은 세르덴이 도입하여 근동 전역으로 널리 퍼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검들은 길이가 다양했으며, 방패와 함께 사용되었다. 잎 모양의 칼날을 가졌고, 중앙이 움푹 들어가고 양쪽 끝이 두꺼워지는 손잡이가 있었다. 이슬람교 도입 후, 북아프리카에서는 중동의 검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후 이 지역의 검술은 아라비아 또는 중동 검술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일부 공동체에서는 검을 왕족이나 부족 지도자에게만 제한했다. 소말리아의 빌라오, 니제르의 부메랑 검, 골드 코스트의 외날 검 등 지역마다 형태가 달랐다. 아비시니아의 쇼텔은 이집트의 코페쉬처럼 큰 낫 형태였으며, 10cm의 작은 나무 손잡이가 있었다. 날은 칼날 안쪽에 있었고, 전체 길이를 따라 융기선이 있었다. 타코바와 카스카라처럼 유럽과 고대 아라비아의 검과 유사한 양날 검도 일부 지역에서 나타났다. 잔지바르에는 두 종류의 검이 있었는데, 하나는 30cm 길이의 단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76cm-90cm 길이의 칼날에 원통형 손잡이가 달린 표준 검이었다. 후자는 쿼터스태프처럼 양손으로 휘둘렀다.
3. 4. 중동
고대 이집트의 검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주로 sfetegy, seftegy, nakhtuiegy 등의 변형이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청동검은 4000년 전의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사냥용 막대에서 유래한 '마(ma)' 또는 부메랑 검, '카트(kat)' 또는 칼 검, 낫에서 유래한 코페쉬egy, 그리고 곧고 긴 검의 네 종류가 사용되었다. 코페쉬egy는 기원전 3000년경 제6왕조부터 묘사되었으며, 두껍고 청동으로 무게를 두었고, 파라오의 경우 금으로 손잡이를 만들기도 했다. 칼날은 한쪽 또는 양쪽에 날이 있었고, 구리 합금, 청동, 철, 청색 강철 등으로 만들어졌다. 양날 그립-텅 검은 세르덴에 의해 도입되어 근동 전역으로 퍼졌으며, 잎 모양 칼날에 중앙이 움푹 들어가고 양 끝이 두꺼워지는 손잡이를 가졌다.중동 지역에서는 이슬람교 도입 이후 아라비아 또는 중동 검술 형태가 우세해졌다. 검은 단검과 낫에서 진화했으며, 초기에는 구리로, 이후에는 청동, 최종적으로는 철로 만들어졌다. 페르시아인과 히브리인 등의 사회에서는 로마의 글라디우스와 유사한 짧은 검이 사용되었지만, 이집트의 코페쉬egy와 유사한 장검, 약간 굽은 검, 낫 모양 검도 존재했다. 일부 칼날은 크기가 다양하여 단검과 검의 구분이 어려워 '단검-검'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대 이란에서는 'razmafzar'라는 전통 페르시아 무술이 재구성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단검, 쌍검, 방패를 든 검 등이 포함된다.
아시리아인과 히타이트인은 ''남사루''(namsaru)라는 가늘고 긴 칼날을 가진 검을 사용했다. 고대 중동에서 검은 항상 보조 무기였으며, 아시리아인들은 근접 전투에서 검과 단검을 사용했지만 주 무기는 활, 창, 투석기였다. 이슬람교 창시 이전에는 이라크의 우불라에서 검을 수입했다.
아라비아 검은 무함마드 시대에 곧은 양날 검 형태였으며, 굽은 손잡이를 제외하면 중세 유럽의 무장 검과 기능 및 디자인이 유사했다. 십자형 자루를 가진 경우가 많았고 베고 찌르는 기술을 선호했으며, 방패나 작은 방패와 함께 사용되거나 단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검술과 검무는 오만 등 중동 여러 지역에서 여전히 행해지고 있으며, 방패나 다양한 종류의 단검과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이슬람교의 확산은 중동 지역을 통합하고 무역로를 원활하게 했으며, 다마스쿠스는 시리아, 페르시아, 스페인에서 수입된 검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9세기 이슬람 학자 알킨디는 예멘, 이란, 프랑스, 러시아 등 বিভিন্ন 지역의 25가지 검 제작 기술을 연구했다.
곡선형 스미터 칼날은 튀르크 셀주크의 중앙 아시아에서 아나톨리아로의 이주 이후 중동 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셀주크는 기병 사용을 위해 기존 비잔틴 검 디자인을 대중화시켰고, 이는 지역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곡선형 칼날은 튀르크의 기마 문화에 적합했으며, 찌르기보다는 베고 자르는 기술에 유리했다.
4. 검의 종류와 구조
검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다.[1]
명칭 | 설명 |
---|---|
포인트(point) | 칼끝 |
블레이드(blade) | 검신 |
에지(cutting edge) | 날 |
키용(quillon) | 십자 가드. 단순한 막대 모양부터 손가락 고리가 달린 형태, 화려한 곡선의 레이피어, 갈고리 형태, 권총 방어가 있는 사브르 등 다양하다. 디자인은 장식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도 가진다. 키용은 주먹을 보호하고, 근접전에서 타격에도 사용된다. 서양 검술에서 키용을 다루는 방식은 중요한 요소이다. |
힐트(hilt) | 자루 |
폼멜(pommel) | 자루 머리. 금속 덩어리로, 블레이드를 나사로 조여 고정하는 너트 역할을 하며, 검의 균형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근접전에서 타격용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조각이나 보석으로 장식되기도 한다. |
리캇소(ricasso) | 검신 뿌리 부분으로, 가드에서부터 십여 cm에서 수십 cm 정도까지 날이 없는 부분이다. 손질 시 부상을 방지하고, 가드 근처에서 벨 일이 없으므로 날이 불필요하며, 하프 그립 또는 하프 소드처럼 리캇소를 잡고 봉술과 유사하게 사용하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롱소드를 사용하는 이탈리아 검술에서는 "리캇소를 길게 잡도록" 가르친다. 실제로 날이 있는 부분은 칼끝에서 1/3 정도였다. |
4. 1. 종류
검은 칼과 달리 양날검이다. 상대를 향한 쪽의 날을 앞날(longedge), 반대쪽(엄지와 검지 사이)을 뒷날(shortedge)이라고 부른다. 뒷날은 검의 주요 기술이며, 각도를 주어 상대의 뒤쪽을 찌르거나 베는 데 사용된다. 공격 라인이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다.[1];브로드소드
: 한손 검으로, 단비라라고도 불린다. 이는 후세의 가느다란 레이피어에 비해 폭이 넓은 한손 검을 이렇게 불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스키아보나와 스코티시 브로드소드가 있다. 무게는 1.2kg 정도이며, 칼날 폭은 3cm-5cm, 칼날 길이는 60cm 정도이다.[1]
: 큰 바구니 형태의 호권이 특징이며, 보통 왼손에 방패를 든다.[1]
;롱소드
: 기사가 사용하는 검으로, 길이는 90cm-, 무게는 1.5kg-1.8kg이다. 십자형의 칼자루가 특징인데, 이는 기독교의 십자가 개념이 있는 듯하다. 바이킹, 노르만인, 십자군 기사부터 백년 전쟁까지 사용되었다. 원래는 말 위에서도 사용되던 것을 보병용 짧은 검과 구별하여 이렇게 불렀다. 그 전까지는 검은 모두 (sword)라고 불렸다. 롱소드는 칼날도 길지만, 손잡이가 양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길어졌다.[1]
: 서양의 대형 검은 자칫 힘으로 휘두르는 느낌을 주지만, 이는 현대 창작물의 영향이며, 실제로는 움직임이 작다.[1]
; 핸드 앤드 어 하프
: 한 손 반 검 또는 바스타드 소드라고도 한다(바스타드 - 혼혈). 양손으로도 한 손으로도 사용할 수 있으며, 브로드소드보다 길다.[1]
: 혹은 손잡이를 길게 한 브로드소드를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다. 칼날 길이는 70cm-, 무게는 1.3kg-이다.
; 투핸디드 소드
: 투핸드 소드라고도 한다. 양손 검으로, 거대한 검이다. 이것을 사용하려면 기술보다는 체력이 필요하다. 독일의 츠바이헨더도 같은 종류의 무기이다. 리카소(칼날의 칼자루에 가까운, 칼날이 없는 부분)가 길어, 이곳을 잡기 위해 가죽 등을 감았다. 리카소와 칼날의 경계에는 작은 칼자루가 있다. 이것들은 검이라기보다는 폴암으로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무게는 2kg, 길이는 160cm 정도이다.[1]
; 에스톡, 턱
: 양손으로 잡는 찌르기 검이다. 칼날이 없고, 가늘고 긴 각뿔 또는 원뿔 모양을 하고 있다.[1]
: 체인 메일을 입은 상대를 꿰뚫기 위한 것이다.[1]
; 레이피어(레피어)
: 한 손 가는 검으로, 삼총사 등에서 익숙한 검이다. 보기보다 무거우며, 무게는 1.2kg-1.5kg, 칼날 길이는 90cm 정도나 된다. 르네상스 중기에 나타났다. 보통은 단검을 왼손에 드는 이도류이다. 없는 경우에는 백러(소형 방패)나 칼집, 망토 등으로 방어를 한다.[1]
: 펜싱 검처럼 휘지 않는다.[1]
; 스몰소드
: 레이피어이지만, 더욱 가늘고 가벼워졌다. 한 손만 사용한다.[1]
; 사브르
: 한쪽 날의 기마용 도검으로, 아시아의 영향이 있으며 헝가리인이 기병대에 가져왔다.[1]
: 펜싱의 사브르와 비교하면 매우 무겁고, 칼날이 두꺼워, 일격으로 목을 베는 위력이 있다.[1]
서양 검은 날카롭지 않다고 말해진다. 확실히 롱소드 등 갑옷용 검은 날카롭지 않다. 갑옷 상대로는 칼날이 있어도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창 등 관통력이 있는 무기가 더 유용하게 여겨졌고, 검의 용도는 타격 등이 된다. 따라서, "날카롭지 않았다"라기보다는 "날카로울 필요가 없었다"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외의 검은 사실 매우 날카롭다.[1]
- 실험 영상에서는 스코티시 브로드소드나 나폴레옹 시대의 기병 사브르는 한 손으로 지름 40cm 정도의 매달린 육괴(肉塊)를 양단할 수 있다.[1]
- 물을 채운 페트병을 아랫부분을 남긴 채, 베어 날린다. 사브르는 손목의 스냅만으로 고기에 칼날의 뒷면으로 10cm 정도 베어 넣는다.[1]
- 레이피어는 한 손의 찌르기만으로 고기의 뒤에서 칼끝이 30cm 정도 뚫고 나온다.[1]
- 양손검(투핸드 소드)의 찌르기는 자동차 문을 관통시킨다.[1]
- 롱소드는 일격에 평평하게 놓인 전화번호부를 양단하고, 매달린 소의 대퇴부(넙적다리뼈)를 절단한다.[1]
4. 2. 구조
검은 칼과 달리 양날검이다. 상대를 향한 쪽의 날을 앞날(longedge), 반대쪽(엄지와 검지 사이)을 뒷날(shortedge)이라고 부른다. 뒷날은 검의 주요 기술이며, 각도를 주어 상대의 뒤쪽을 찌르거나 베는 데 사용된다. 공격 라인이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다.검의 각 부분별 명칭은 다음과 같다.
- 포인트(point): 칼끝.
- 블레이드(blade): 검신.
- 에지(cutting edge): 날.
- 키용(quillon): 십자 가드. 단순한 막대 가드부터 손가락 고리가 달린 것, 화려한 곡선의 레이피어, 갈고리가 있는 것, 권총 방어가 있는 세이버 검 등 다채로우며, 각 디자인은 장식뿐만 아니라 실용성이 있다. 키용은 주먹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근접하여 때릴 때도 사용한다. 서양 검술에서 키용을 다루는 방법은 큰 요소라고 할 수 있다.
- 힐트(hilt): 자루.
- 폼멜(pommel): 자루 머리. 금속 덩어리로, 블레이드를 나사로 조이는 너트이며, 균형을 조절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근접전에서는 여기로 때리기도 한다. 조각이나 보석으로 장식된 경우도 많다.
- 리캇소(ricasso): 검신의 뿌리, 가드에서 십여 센티미터에서 수십 센티미터 부분으로, 일부러 날을 세우지 않은 부분이다. 손질할 때 부주의로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가드 근처에서 베는 일은 없으므로 날이 불필요하며, 하프 그립, 하프 소드라는 리캇소를 잡고 사용하는 봉술적인 취급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롱소드에서 이탈리아 검술에서는 "리캇소를 길게 잡도록"이라고 한다. 실제로 날이 있는 부분은 칼끝에서 1/3 정도였다.
5. 검술의 기본
검술의 기본은 자세, 발놀림, 베기, 찌르기 등으로 구성된다.
검은 칼과 달리 양날검이다. 상대를 향한 쪽의 날을 앞날(longedge), 반대쪽(엄지와 검지 사이)을 뒷날(shortedge)이라고 부른다.[1] 뒷날은 검의 주요 기술이며, 각도를 주어 상대의 뒤쪽을 찌르거나 베는 데 사용된다.[1] 공격 라인이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다.[1]
독일 검술에서의 롱소드 잡는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1] 하나는 엄지손가락 뿌리,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의 V자형 골 부분(손금의 지능선 입구)에 손잡이의 뒷날 쪽(한쪽 날의 등 쪽)을 맞춰 잡는 방법이다.[1] 다른 하나는 네 손가락의 뿌리 관절, 즉 손등에 네 개 튀어나온 관절의 뒷면(손금의 감정선)에 날을 맞추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잡는 방법이다.[1] 엄지손가락을 좌우로 슬라이드함으로써 검의 앞날, 뒷날을 부드럽게 바꿔 쥘 수 있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지지함으로써 쥐는 법이 안정된다.[1]
검술에는 여러 가지 자세가 있는데, 예를 들어 검을 이마 위에 평행으로 들어 올려 머리를 보호하는 자세, 어깨에 걸치는 자세(피로가 덜하고, 그대로 폼멜로 치듯이 밀어내며, 손목을 사용하여 좌우에서 공격할 수 있다), 팔을 아래로 내리는 자세(피로가 덜하고, 방패 뒤에 숨어 상대방에게 공격이 보이지 않게 됨) 등이 있다.[1]
무거운 브로드소드(broadsword)의 공격은 모두 허리의 회전에서 시작된다.[1] 참격의 경우 오른발로 내딛지만, 허리의 비틀림을 전달하듯이 어깨, 팔꿈치, 손목을 펴고 검이 뻗어진 후에 처음으로 발이 착지하도록 한다.[1] 검, 발의 순서는 찌르기의 경우에도 같으며, 레이피어(rapier) 기술과도 통한다.[1] 기본적인 참격은 좌우 수평, 좌우 위쪽 대각선, 바로 위이다.[1] 연속 공격이 중요시되며, 공격으로 생긴 빈틈이나 방패에 튕겨진 힘을 그대로 사용하여 반대쪽을 공격하는 것이 권장된다.[1]
찌르기의 경우 먼저 팔꿈치를 펴고, 턱을 들어 올려 콧날로 상대방을 내려다보듯이 찌른다.[1] 머리를 숙이면 어깨도 내려가 5cm나 도달 거리가 짧아지고, 목표도 흐트러진다고 한다.[1] 찌를 때 손등이 위로 향하고 있다면 손목을 돌려 오른쪽에서 수평으로 베고, 손등이 아래라면 왼쪽에서 베기로 연결한다.[1]
칼날 뒷면을 사용한 공격(랩 샷)에서는 상대의 등 뒤를 노린다.[1] 검을 세우고 펀치를 치듯이 오른쪽 40도로 찌른 후, 그대로 손목을 안쪽으로 돌려 크게 오른쪽으로 내딛는다.[1] 그리고 검을 끌어당기듯이 어깨, 팔꿈치, 손목을 돌려 칼날 뒷면으로 벤다.[1] 상대는 정면을 향한 채로 뒤통수, 엉덩이를 베이게 된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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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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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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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o: Great Sword F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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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dney Theatre Company
201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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