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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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 온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류큐 왕국의 학자 관료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중국 광저우에서 유학하며 경제, 지리, 정치 행정을 공부했고, 류큐 왕국으로 돌아와 태자의 스승, 산시칸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사이 온은 농업, 임업, 토지 개혁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여 류큐 왕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임업과 토지 보존에 대한 그의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오키나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또한 여러 저서를 남겼으나, 대부분의 저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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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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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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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삼사관 |
임기 시작 | 1728년 |
임기 종료 | 1752년 |
전임 | 나고 료이 |
후임 | 코진다 초에이 |
직함 1 | 국사 |
임기 시작 1 | 1712년 |
임기 종료 1 | 1762년 |
군주 | 쇼케이왕 쇼보쿠왕 |
출생일 | 1682년 10월 25일 |
출생지 | 류큐왕국 나하 가메무라 |
사망일 | 1762년 1월 23일 |
안장지 | 불명 |
아명 | 가마도 (蒲戸) |
일본식 이름 | 구시찬 분자쿠 (具志頭 文若) |
신분 | 우에카타 |
배우자 | 정보 없음 |
자녀 | 정보 없음 |
부모 | 아버지: 사이다쿠 어머니: 요씨 마고제이 (真呉瑞) |
소속 | 류큐 왕국 |
2. 생애
사이 온은 류큐 왕국의 주요 항구 도시 나하의 구메무라 마을에서 태어났다. 구메무라는 류큐 왕국의 행정을 담당하는 학자 관료들의 주요 배출지였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여러 차례 중국에 조공 사절로 다녀온 학자 관료였다.[3]
27세에 사이 온은 중국 광저우로 유학하여 전통적인 중국 고전과 함께 경제학, 지리학, 정치 행정 등을 공부했다.[4][5] 귀국 후에는 왕세자의 스승이 되었고, 1713년 왕세자가 쇼케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그의 정치적 지위와 영향력이 커졌다. 1716년에는 중국에 파견되는 책봉 사절단을 이끌었으며, 1728년에는 왕국의 최고 정책 결정 기구인 산시칸의 일원이 되었다. 왕족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내 개편을 통해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6]
사이 온의 주도하에 류큐 왕국은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토지 개간, 관개 시설 정비, 홍수 통제 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4], 농민들이 농업에 집중하도록 도시로 이주하거나 다른 수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했다. 이는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시행된 개혁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7] 이러한 정책 시행 몇 년 만에 왕국의 농업 생산량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증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6] 또한, 수공업 장려를 위해 1734년 도시 장인들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고[8],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이들을 포상하는 등 산업 진흥에도 힘썼다. 장인들은 나하와 슈리의 두 도시에 집중되었다.[7] 1723년부터는 각 지역의 세습 영주인 안지에게 정부 보조금을 쌀 형태로 지급하여 중앙 정부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경제적 안정을 도모했다.[8]
특히 사이 온은 당시 심각했던 삼림 벌채와 그로 인한 토양 침식, 산사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업 및 토양 보존 사업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으로 조성된 숲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사이 온 소나무"(蔡温松|사이온 마츠jpn; 蔡温並木|사이온 나미키jpn) 등으로 불리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의 임업 관련 저술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전후 류큐 열도 미국 민정청에 의해 번역되어 1952년에 출판 및 해외에 배포되기도 했다.[9] 그는 또한 지방 행정 지침서인 『요무이-칸』(用務彙函), 중국 파견 시 사쓰마 번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한 안내서 『료코닌 고코로에』(旅行人心得) 등 여러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10]
개혁 과정에서 1734년 헤시키야 쵸빈 등이 사이 온이 지나치게 친중국적이라며 비판하는 등 반대 세력의 도전도 있었으나, 이는 진압되었다.[11]
사이 온은 1752년 쇼케이 왕이 사망한 이듬해 산시칸 직에서 물러났지만, 1761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12]
2. 1. 유년 시절
쇼테이 왕 13년(1682년) 9월 25일(양력 10월 25일) 자시에 나하의 구메무라(久米村, 현재의 나하시 구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채씨 지타바쿠가(蔡氏志多伯家) 10세손인 채탁(蔡鐸)이고, 어머니는 정실 마고제이(真呉瑞)이다. 사이 온은 차남이었으나 정실 소생으로는 첫째 아들이었다. 동명(童名)은 호도(思徳)라고 했다. 그가 태어난 구메무라는 류큐 왕국의 행정을 담당하는 학자 관료 대부분을 배출한 곳이자, 고전 중국 학문의 주요 중심지였다.아버지 채탁은 구메무라의 최고 실력자인 총역(總役) 지위에 있었으며, 유교 경전을 배우고 여러 차례 중국에 조공 임무를 수행한 학자 관료였다.[3] 사이 온에게는 아버지의 측실 마타만(真蒲戸) 소생으로 두 살 많은 형 채연(蔡淵, 동명 지량)이 있었다.
사이 온 스스로 남긴 자전에 따르면, 그는 반항적이고 게으른 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 채탁은 정실 소생인 사이 온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으나, 과거 측실에게서 장남이 태어나면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한 일 때문에 정실 마고제이와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부부간의 견해 차이가 소년 시절의 사이 온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15]
그러나 17세 때 학문에 뜻을 두어, 20세 무렵까지 논어(論語)를 비롯한 많은 책을 통독하였다. 쇼테이 왕 24년(1693년) 2월 15일, 12세의 나이로 약수재(若秀才)[14]가 되었고, 27년(1696년) 8월 22일에는 15세로 수재(秀才)[14]가 되었다. 이어 31년(1700년) 12월 1일, 19세에 통사(通事, 통역)로 임명되었으며, 21세에는 훈고사(訓詁師, 한문 독서 교사), 25세에는 강해사(講解師, 강담 교사)가 되었다.
2. 2. 청나라 유학과 관직 진출
1708년 2월 7일, 27세의 나이로 청에 파견되는 진공존류역(進貢存留役)에 임명되어, 존류통사(存留通事, 현지 통역)로서 복주로 갔다. 같은 해 11월 3일 나하를 출발하여 17일 복주에 도착했다. 복주의 류큐관(琉球館) 인근 능운사(凌雲寺) 주지의 소개로 '호광(湖広) 사람'이라 자칭하는 한 거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 거사로부터 "책 읽는 방법만 아는 지식은 쓸모없다"는 지적을 받고 실학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양명학에 대한 가르침도 받았다.1710년 1월 20일 복주를 떠나 29일에 귀국한 뒤, 직접 류큐 북부 지역을 시찰했다. 같은 해 6월 21일, 도통사(都通事)로 승진했다. 1711년 4월, 30세에 당시 황태자였던 쇼케이(尚敬)의 스승인 세자사직(世子師職) 겸 무근습역(務近習役)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712년 7월 15일, 쇼에키 왕이 세상을 떠나고 쇼케이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사이 온은 '''국사'''(国師)라는 특별한 지위에 올랐다. 국사라는 직책은 사이 온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것으로, 류큐 왕국 전체를 지도하는 막중한 역할이었다. 1714년 8월 1일, 33세의 나이로 정의대부(正義大夫)가 되었고, 같은 달 15일에는 장남이 태어났다.
1715년 1월 27일, 34세에 가쓰렌 마기리(勝連間切) 가미야(神谷) 지역의 지토(地頭)로 임명되어 가미야페쿠미(神谷親雲上)[14]가 되었다. 같은 해 슈리의 아카히라(赤平)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3월 18일에는 쇼케이 왕이 사이 온의 집을 방문했으며, 사이 온이 직접 차를 끓여 대접하기도 했다. 같은 해 8월 2일에는 정치와 도덕 등 제왕학의 기본 틀을 다룬 『요무휘편』(要務彙編)을 저술했다.
2. 3. 책봉 사절단 활동
쇼케이 왕 4년(1716년)에 쇼케이 왕의 즉위에 따라 청나라에 파견할 책봉사(冊封使)를 요청하는 사절단의 부사로 사이 온이 발탁되었다.[14] 같은 해 2월 25일, 35세의 나이로 신구좌(新 గు 座, 산시칸으로의 중개역)[14]가 되었고, 7월 23일에는 스에요시(末吉) 지두직(地頭職)에 임명되었다. 사절단은 11월 15일에 나하를 출발하여 베이징(北京)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12월 2일에 구메섬(久米島)에 표류했다.이듬해(1717년) 1월 20일에 다시 구메섬을 출발한 사절단은 2월 2일부터 7월 12일까지 청의 푸저우(福州)에 머무르다가 10월 28일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1718년 1월 8일에 베이징의 왕부(王府)에 공물을 바쳤고, 2월 27일에는 쇼케이 왕을 류큐 국왕으로 인정한다는 강희제(康熙帝)의 책봉 칙서를 받았다. 2월 29일에 베이징을 출발한 사신단은 푸저우를 거쳐 그해 8월 9일에 류큐로 귀국하였다.
쇼케이 왕 7년(1719년) 사이 온은 38세의 나이로 자금대부(紫金大夫)[14] 스에요시 오야카타(末吉親方)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청나라로부터 책봉 사절단이 탄 배가 나하에 도착했다. 이때 책봉사의 수행원들이 많은 양의 화물을 가져와 류큐 왕부에 구매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류큐 왕부에는 이 화물들을 모두 사들일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어 500명이나 되는 수행원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나하 왕부의 고위 관리들은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고, 결국 이 문제의 처리를 사이 온에게 일임했다. 사이 온은 류큐 왕부의 어려운 재정 상황을 차분히 설명하고 화물 평가에 직접 참여했으며, 나아가 나라 안에서 값을 치를 수 있는 물품들을 수소문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서 소동을 원만하게 수습했다. 청나라 책봉 사절단은 이듬해(1720년) 2월 16일에 나하를 떠났다. 이 해 6월 13일, 사이 온은 39세의 나이로 산시칸(三司官)이 될 수 있는 자격인 산시칸 자시키(三司官座敷)[14]를 인정받았다.
2. 4. 내정 개혁
사이 온이 산시칸(三司官)에 임명된 1728년 이후, 류큐 왕국은 그의 주도 아래 광범위한 내정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사쓰마 번의 영향력 아래 에도 막부의 검지(検地, 토지 조사) 요구 등으로 왕국의 자율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16], 사이 온은 왕국의 재정 안정과 생산력 증대를 목표로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그는 우선 왕국의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성문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730년에는 《계도좌규모장》(系図座規模帳)과 《대요좌규모장》(大与座規模帳)을 편찬했고, 이듬해에는 신분 질서를 규정한 《위계정》(位階定)을 완성하여 통치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또한 1732년에는 백성들의 도덕 규범과 생활 지침을 담은 《'''어교조'''》(御教条)를 반포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민중을 교화하고자 노력했다.[16][20] 이 책은 1879년 류큐 처분 때까지 교육 자료로 활용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 생산성 향상과 산림 자원 보호를 핵심 과제로 삼아 관련 정책들을 추진했다. 이는 하위 섹션 '농업 정책'과 '임업 정책'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더불어 수공업 장려를 위해 나하 지역 장인들에 대한 감세 조치를 시행하고[8],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이들을 포상하는 등 산업 진흥에도 힘썼다.
개혁 과정에서 헤시키야 쵸빈(平敷屋朝敏) 등 반대 세력의 도전도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개혁을 이어나갔으며[11], 1750년에는 수도 이전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나고에 삼부용맥비(三府龍脈碑)를 세우는 등[17] 정치적 안정을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사이 온의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개혁은 당시 류큐 왕국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사회 안정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6]
2. 4. 1. 농업 정책
사이 온은 류큐 왕국의 농업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사쓰마 번은 에도 막부의 명령으로 검지(検地, 토지 조사)를 실시했는데(1722년 교호 검지, 1736년 겐몬 검지), 사이 온은 이것이 류큐에 대한 증세의 구실이 될 것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16]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왕국의 농업 기반을 강화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1728년 최고위직인 산시칸에 오른 사이 온은 농업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여러 개혁을 시행했다. 농경지 확보를 위한 토지 개간, 정착지 재배치 및 건설, 관개 시설 정비, 홍수 통제 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4], 농민들이 농업에 집중하도록 도시로 이주하거나 다른 수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했다. 이는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시행된 개혁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7] 이러한 정책 시행 몇 년 만에 왕국의 농업 생산량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증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6]
사이 온은 농업 정책의 이론적 기반 마련과 보급에도 힘썼다. 1734년에는 농업 제도와 경영 방법을 상세히 설명한 '''농무장'''(農務帳)을 저술하여 관리와 농민들에게 지침을 제공했다.[16] 또한 농업 기반 시설 정비에도 직접 나섰는데, 1735년 하지오오카와(羽地大川)에서 큰 수해가 발생하자 직접 현장으로 가서 하천 개수 공사를 지휘하여 완공시켰다.[16]
농업 정책과 더불어 농촌 사회 안정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723년부터는 각 지역을 다스리던 세습 영주인 안지들에게 정부 보조금을 쌀 형태로 지급했다. 이는 안지들을 중앙 정부에 경제적으로 예속시켜 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그들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여 결과적으로 농촌 사회 안정에 기여하는 효과를 가져왔다.[8]
사이 온의 농업 정책은 당시 심각했던 삼림 벌채와 그로 인한 토양 침식, 산사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업 및 토양 보존 노력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추진되었다.[9]
2. 4. 2. 임업 정책
사이 온은 류큐 왕국의 산림 자원 고갈과 자연재해 문제 해결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오키나와는 목재 수요가 숲의 재생 능력을 넘어서면서 심각한 삼림 벌채 문제를 겪고 있었다. 여기에 잦은 태풍과 많은 비가 더해져 토양 침식과 산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9]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이 온은 적극적인 임업 및 토양 보존 정책을 추진했다. 1735년 하지오오카와에서 큰 수해가 발생하자, 그는 즉시 하천 개수 작업에 착수하여 약 3개월 만에 완공시켰다. 같은 해 12월 10일에는 산림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건륭 원년(1736년) 11월 13일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 약 4개월간 직접 류큐 북부 산림 지역을 순시하며 현장을 점검하고, 각 지역의 관리들에게 치산(治山) 사업을 지도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체계적인 산림 관리 방법을 담은 『소산법식』(杣山法式)을 저술하여 보급했다. 이후 건륭 12년(1747년) 9월에는 내용을 보완한 『소산법식시차』(杣山法式仕次)를 추가로 저술하였다.
사이 온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조성된 숲과 나무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남아 "사이 온 소나무"(蔡温松|사이 온 마츠/시 운 마치jpn; 蔡温並木|사이 온 나미키jpn) 등으로 불리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9] 그의 임업 및 보존 관련 저술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류큐 열도 미국 민정청에 의해 번역되어 1952년에 출판 및 해외에 배포되기도 했다.[9]
2. 4. 3. 기타 정책
1722년 에도 막부가 일본 내에서 교호 검지(享保検地)라는 검지(検地, 토지 조사)를 명하자, 류큐 왕국 내에서는 사쓰마 번에 의한 지배가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사이 온은 직접적인 지배 강화는 아니더라도 이것이 류큐에 대한 증세의 구실이 될 것이라 예측했고, 이는 실제로 현실화되었다. 그는 1726년 쇼케이 왕과 신하 305명이 류큐 북부 지역을 시찰하도록 독려했다.1728년 10월, 47세의 나이로 정부 고관들의 추천을 받아 최고위직인 산시칸(三司官)에 임명되었다. 그는 류큐 왕국의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데 힘썼다. 1730년에는 《계도좌규모장》(系図座規模帳)과 《대요좌규모장》(大与座規模帳)을 편찬했고, 이듬해에는 신분 질서를 규정한 《위계정》(位階定)을 완성했다. 그의 저서로 알려진 《가내물어》(家内物語)도 이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1732년 11월 18일, 사이 온은 관리와 백성들의 도덕 규범 및 생활 지침서인 《'''어교조'''》(御教条)를 공포했다. 이 책은 사이 온의 사상을 바탕으로 도요카와 웨카타(豊川親方)가 기록한 것으로, 《가언록》(家言録), 《성몽요론》(醒夢要論), 《도치요전》(図治要伝) 등의 내용이 인용되었다. 《어교조》는 류큐 각지에서 정기적으로 낭독회가 열렸으며, 1879년 류큐 처분으로 왕국이 폐지될 때까지 교과서처럼 널리 사용되었다.[16][20] 1735년에는 나하 인근에 거주하는 직공들을 위해 세금을 감면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사이 온의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반대 세력과의 갈등도 있었다. 1734년, 헤시키야 쵸빈(平敷屋朝敏) 등은 사이 온이 지나치게 친중국적이라며 비판하는 글을 사쓰마 번에 보냈다. 그러나 사쓰마 번은 이를 문제 삼지 않고 류큐 왕부로 돌려보냈고, 결국 쵸빈을 포함한 15명이 1734년 6월 29일에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헤시키야·토모요 사건으로도 불린다.[11]
같은 해 8월, 사이 온은 농업 제도와 경영 방법을 해설한 《'''농무장'''》(農務帳)을 저술했다. 이듬해 하네지 오오카와(羽地大川)에서 홍수가 발생하자, 8월 16일 하천 개수 명령을 받고 직접 현장 지휘에 나서 11월 17일에 공사를 완료했다. 또한 12월 10일에는 산림 관리 책임자로 임명되어, 1736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류큐 북부 산림을 직접 순시하며 치산 사업을 지도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산림 관리 지침서인 《산산법식》(杣山法式)을 편찬했다.
right은 나하의 시세이뵤 유교 사원에 있는 사이 온에게 헌정되었다.]]
사이 온은 삼림 벌채와 태풍으로 인한 토양 침식 및 산사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업과 토양 보존 사업에 특히 힘썼다. 그의 노력 덕분에 조성된 숲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사이 온 소나무"(蔡温松, ''Sai On matsu/see un machi'') 또는 "사이 온 가로수"(蔡温並木, ''Sai On namiki'')로 불린다. 그의 임업 및 보존 관련 저술은 후대에도 높이 평가받아, 전후 류큐 열도 미국 민정청은 1952년 이를 번역하여 해외에 배포하기도 했다.[9]
1736년부터 에도 막부는 다시 겐몬 검지(元文検地)를 실시했다. 사이 온은 이에 대응하는 한편, 1746년에는 《사옹편언》(簔翁片言)을, 이듬해 9월에는 《산산법식사차》(杣山法式仕次)를 저술하여 정책을 보완했다. 1750년, 수도를 슈리에서 나고(名護)로 옮기거나 나고로 이어지는 운하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자, 사이 온은 이러한 논쟁을 수습하기 위해 나고에 삼부용맥비(三府龍脈碑)를 세워 풍수지리적으로 슈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7] 같은 해에 《독물어》(独物語)를 저술했다.
이 외에도 사이 온은 지방 행정 관리들을 위한 실무 지침서인 《요무이-칸》(用務彙函)과, 중국에 파견된 류큐인들이 사쓰마 번과의 관계를 중국 측에 숨기도록 돕기 위한 안내서인 《료코닌 고코로에》(旅行人心得, 여행자 수칙)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10] 그는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토지 개간, 관개 시설 확충, 홍수 통제, 식림 사업 등 다양한 토지 개혁을 추진했다.[4] 농민들이 도시로 이동하거나 농업 외의 수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제한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였고, 장인들은 나하와 슈리 두 도시에 집중시켰다.[7] 이러한 개혁을 통해 류큐 왕국의 생산량은 크게 증가했다.[6]
또한 1723년부터는 각 지역의 세습 영주인 안지(按司)에게 정부 보조금을 쌀 형태로 지급하여 중앙 정부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경제적 안정을 도모했다. 귀족들이 신분을 유지하면서 장인이 될 수 있도록 장려했으며, 1734년에는 도시 장인들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여 수공업 생산을 더욱 활성화했다. 뛰어난 장인, 예술가, 공연가들을 공식적으로 포상하는 제도도 도입했다.[8]
사이 온은 쇼케이 왕이 사망한 다음 해인 1752년에 산시칸 직에서 물러났으나, 1761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12]
2. 5. 만년
쇼케이 왕이 재위 40년 만인 서기 1752년에 사망하자 사이 온은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했지만, 사쓰마 번의 지시로 산시칸에서 물러나는 것 외에는 나머지 지위를 그대로 유지해야 했다. 같은 해 9월 29일에 산시칸에서 물러났고, 10월 2일에 자지오색화식관(紫地五色花織冠)의 지위를 받았다.쇼보쿠 왕 3년(1754년)에는 《성몽요론》(醒夢要論)을 저술했다. 동왕 5년(1756년) 6월에 청나라의 책봉사가 방문했을 때에도 사이 온이 나서서 화물 평가를 맡았다. 이듬해인 1757년 1월 29일에 책봉사가 돌아가고 나서, 2월 21일에 76세의 나이로 다시 은거를 청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자서전(自叙伝)은 이 무렵에 저술된 것으로 여겨진다.
1762년 1월 23일, 사이 온은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이쇼 4년(1915년)에는 정5위로 추증되었다.[18]

3. 정책
사이 온은 1713년 쇼케이 왕이 즉위한 후 태자의 스승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으며, 1716년 중국으로의 책봉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728년에는 왕국의 최고 국정 자문 기구인 산시칸의 일원이 되었다. 비록 왕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최고 관직인 세세이에는 오를 수 없었으나, 정부 내 조직 개편을 통해 실질적으로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아 국정 개혁을 주도했다.[6]
그의 지도 아래 류큐 왕국은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는 토지 개간, 정착지 재배치, 관개 시설 정비, 홍수 통제 등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반 시설 확충에 힘썼다.[4] 또한 농민들이 농업에 전념하도록 도시 이주나 부업(목공, 금속 가공 등)을 엄격히 제한했으며, 이를 통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장인들을 나하와 슈리 두 도시에 집중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7] 임업 분야에서도 심각한 삼림 벌채와 침식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림 사업과 토양 보존 정책을 펼쳤다.[9] 이러한 농업 및 임업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룬다.
경제 정책 측면에서는 1723년부터 각 지역의 세습 영주인 안지에게 쌀 형태의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여 중앙 정부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경제적 안정을 도모했다.[8] 귀족들이 신분을 유지하면서 장인이 되는 것을 장려하고, 1734년에는 도시 장인들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여 수공업 생산을 활성화했다. 또한, 뛰어난 장인, 예술가, 공연가들을 공식적으로 포상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기술 및 예술 발전을 장려했다.[8] 이러한 경제 개혁과 인프라 구축 노력 덕분에 사이 온의 정책이 시행된 지 몇 년 만에 왕국의 생산량은 이전보다 크게 증가했다.[6]
right은 나하의 시세이뵤 유교 사원에 있는 사이 온에게 헌정되었다.]]
행정 및 외교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지방 행정 관리들을 위한 실무 지침서인 『요무이-칸』을 편찬했으며[10], 당시 사쓰마 번의 지배 하에 있던 류큐 왕국의 미묘한 위치를 고려하여, 중국과의 교류 시 사쓰마 번과의 관계를 숨기도록 조언하는 내용의 『료코닌 고코로에』(旅行人心得, 여행자 조언)를 저술하기도 했다.[10] 그는 쇼케이 왕에게 "청나라와의 교류는 어렵지 않지만, 사쓰마 번과의 교류에는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충언하며 현실적인 외교 노선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과 친중국적인 성향은 반발을 사기도 했다. 1734년, 헤시키야 쵸빈과 토모요세 안조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가 사이 온을 비판하며 세력을 규합했으나, 음모가 실행되기 전에 발각되어 쵸빈을 포함한 15명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1]
사이 온의 정책은 하지 조슈의 개혁을 계승하여 이후 류큐 왕국의 기본적인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쓰마 번의 지배라는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도 왕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중요한 개혁가로 평가받는다.
3. 1. 농업 정책
논과 밭의 전환을 금지하고 경사지 개간을 제한하는 한편, 농민에게 경작지의 영구 경작권을 부여하여 농지의 지력 보호를 꾀했다. 또한 농업용 수로의 정비를 추진했다. 마을과 마지리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토지 소유를 확실히 하고, 한발과 폭풍에 대비한 식량 비축 제도를 충실하게 했다. 농민들을 조합에 소속시켜 납세에 대한 연대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농민 간 협력을 촉진하는 동시에 상호 감시를 통해 세수 안정화를 꾀했다. 이 조합 조직은 후에 유히조(유히마와루, 유이마르)라고 불렸다. 그러나 사이 온 사후 유력한 후계자가 나타나지 않아 이러한 정책은 충분히 침투하지 못했다.[20]3. 2. 임업 정책
오키나와는 당시 목재 수요가 숲의 자연적인 재생 능력을 초과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로 인해 삼림 벌채가 심화되었고, 잦은 태풍과 많은 강수량 때문에 광범위한 침식과 산사태가 발생하는 등 심각한 환경 문제를 겪고 있었다.[9]사이 온은 이러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임업 및 토양 보존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섬 곳곳의 특정 나무와 숲은 오늘날에도 '사이 온 소나무'(蔡温松|사이온 마츠jpn/see un machi|시 운 마치ryu; 蔡温並木|사이온 나미키jpn)라고 불리며 기념되고 있다. 사이 온이 남긴 임업 및 보존에 관한 에세이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류큐 열도 미국 민정청에 의해 1952년에 번역되어 해외에 출판 및 배포되기도 했다.[9]
사이 온은 1736년 11월 13일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 직접 류큐 왕국 북부의 산림을 순시하며 각 지역의 치산을 지도했고, 이때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산림 관리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소산법식』을 저술했다.
구체적인 임업 정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20]
- 목재 수급 관리: 각 섬의 목재 보유 상황을 고려하여 차등적인 관리 방침을 세웠다. 산림이 충분한 섬은 자체적으로 목재를 조달하도록 하고, 산림이 부족한 섬에는 오키나와 본섬 중부나 북부에서 목재를 공급했다. 야에야마 제도의 산림은 미래를 위한 예비 자원으로 보존하도록 했다.
- 산림 경계 관리: 산림과 논, 밭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여 관리를 강화했다.
- 조림 장려: 적극적인 조림 사업을 추진했다. 해안 지역에는 아단, 류큐 소나무, 테리하보쿠 등을 심어 해풍을 막는 '시오가키'라는 방풍림을 조성했고, 내륙의 주요 지점에는 소나무 등을 심어 '포호'라는 보호림을 만들었다.
- 산림 자원 보호: 산림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제한 조치를 시행했다. 새로운 집이나 배의 건조를 제한하고, 장작 사용량도 통제했다. 특히, 통나무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드는 전통적인 통나무배("구리배")의 제조를 금지했다.[20]
4. 저서
실학을 중시했던 사이 온은 여러 분야에 걸쳐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1724년 아버지 사이 타쿠가 저술한 역사서 『추잔 세이후』(中山世譜)를 편집했는데, 이는 친중국적인 관점을 반영하기 위한 작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3]
사이 온의 저술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임업 및 토양 보존에 관한 에세이들이다. 당시 류큐 왕국은 삼림 벌채와 태풍으로 인한 토양 침식 문제에 직면해 있었는데, 사이 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며 관련 저술을 남겼다. 이 에세이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류큐 열도 미국 민정청에 의해 1952년 번역되어 해외에 배포되기도 했다.[9]
이 외에도 지방 행정 관료들을 위한 실무 지침서인 『요무이-칸』(要務彙編)과, 중국에 파견된 류큐인들이 사쓰마 번과의 관계를 숨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안내서 『료코닌 고코로에』(旅行人心得, 여행자 마음가짐) 등 다양한 목적의 저술을 남겼다.[10]
사이 온의 저서는 『담원전집』(澹園全集)으로 묶이기도 하는데,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객간록』(隙間錄)
- 『가언록』(家言錄)
- 『일언록』(日言錄)
- 『미옹편언』(微翁片言)
- 『도치요전』(図治要伝)
- 『치가첩경』(治家捷径)
- 『거가필람』(居家必覧)
- 『성몽요론』(醒夢要論)
- 『실학진비』(実学尋弁)
- 『요무비편』(要務備編) - 『요무이-칸』과 동일 저작으로 추정됨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저서들이 전해진다.
- 『산림진비』(山林尋弁)
- 『어교조』(御教条)
- 『가내물어』(家内物語)
- 『독물어』(独物語)
- 『임정팔서』(林政八書)
- 『농무장』(農務帳)
- 『자서전』(自敍傳)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저서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오키나와 전투 과정에서 소실되었다.
5. 평가 및 영향
사이 온은 류큐 왕국의 산시칸(三司官, 삼사관)으로서 강력한 권한을 바탕으로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6] 그의 주도로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토지 개간, 정착지 재배치, 관개 시설 정비, 홍수 통제 등 여러 토지 개혁이 시행되었다.[4] 이는 당시 일본에서 시행된 개혁과 유사하게 농민의 도시 이동을 제한하고 특정 공예 작업만 허용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인들은 나하와 슈리 두 도시에 집중되었다.[7] 이러한 경제 개혁과 건설 및 보존 사업 덕분에 왕국의 생산량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6]
또한, 1723년부터는 각 지역의 세습 영주인 안지에게 정부 보조금을 쌀 형태로 지급하여 중앙 정부와의 유대를 강화하고 경제적 안정을 도모했다. 귀족들도 신분을 유지한 채 장인이 되도록 장려했으며, 1734년에는 도시 장인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여 공예 생산을 더욱 활성화했다. 우수한 장인, 예술가, 공연가에 대한 정부 차원의 포상 제도도 도입되었다.[8]
사이 온은 특히 임업 및 토양 보존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당시 오키나와는 과도한 벌목과 잦은 태풍으로 인한 삼림 벌채, 토양 침식, 산사태 문제가 심각했다. 사이 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가 조성한 숲과 나무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사이 온 소나무"(蔡温松|사이 온 마츠일본어; 蔡温並木|사이 온 나미키일본어)로 불린다. 그의 임업 및 보존 관련 저술은 매우 가치 있게 평가되어, 전후 류큐 열도 미국 민정청이 1952년에 번역하여 해외에 배포하기도 했다.[9]
실학(実学)을 중시했던 사이 온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했으며, 특히 산림 보전이나 하천 정비 사업에는 직접 현장을 찾아 지휘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는 지방 행정 관리를 위한 지침서인 『요무이-칸』(要務彙編), 중국에서 사쓰마 번과 오키나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한 안내서 『료코닌 고코로에』(旅行人心得, 여행자 조언)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10]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으며, 이를 묶어 『담원전집』(담원전집)이라고도 부른다.
저서명 | 원제 |
---|---|
『객간록』 | 客間録 |
『가언록』 | 家言録 |
『일언록』 | 一言録 |
『미옹편언』 | 微翁片言 |
『도치요전』 | 図治要伝 |
『치가첩경』 | 治家捷径 |
『거가필람』 | 居家必覧 |
『성몽요론』 | 醒夢要論 |
『실학진비』 | 実学尋弁 |
『요무비편』 | 要務備編 |
『산림진비』 | 山林尋弁 |
『어교조』 | 御教条 |
『가내물어』 | 家内物語 |
『독물어』 | 独物語 |
『임정팔서』 | 林政八書 |
『농무장』 | 農務帳 |
『자서전』 | 自叙伝 |
안타깝게도 많은 저서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오키나와 전투 중에 소실되었다.
한편, 1734년에는 사이 온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헤시키야 쵸빈(平敷屋 朝敏)과 토모요세 안조(友寄 安乗) 등 일부 학자 관료들은 그가 지나치게 친중국적이라고 비판하며 반발했으나, 이들은 음모가 실행되기 전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11]
사이 온은 1752년 쇼케이 왕 사망 이듬해에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1761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12] 그의 개혁 정책과 실용주의적 사상은 류큐 왕국의 발전과 안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환경 보전 노력은 현대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참조
[1]
논문
The Transmission of Neo-Confucianism to the Ryukyu (Liuqiu) Islands and Its Historical Significance
http://chinajapan.or[...]
1998
[2]
문서
Okinawan family name
[3]
기타
presentation at "Interpreting Parades and Processions of Edo Japan" symposium, 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2013-02-11
[4]
서적
Sai On
Okinawa Bunka-sha
1996
[5]
서적
Okinawa: the History of an Island People
Tuttle Publishing
2000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웹사이트
蔡温
2022-02-12
[14]
문서
琉球の位階
[15]
서적
蔡温・伝記と思想
[16]
문서
新城俊昭「琉球・沖縄史」
[17]
서적
名護碑文記 増補版
名護市教育委員会
2001
[18]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1975
[19]
서적
蔡温・伝記と思想
[20]
서적
沖縄史の五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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