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사카이 다다카쓰 (1594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카이 다다카쓰는 1594년에 태어나 1647년에 사망한 인물로,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1618년 아버지 사카이 이에쓰구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했다. 이후 에치고, 시나노를 거쳐 데와 쇼나이 번의 번주가 되었다. 쇼나이 번 통치 기간 동안 가혹한 징세로 백성들이 도망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며, 동생과의 상속 분쟁인 사카이 나가토노카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다카쓰는 54세에 사망했으며, 로주의 판결에 따라 장남 사카이 다다마사가 번주직을 계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쓰시로번주 - 사나다 노부유키
    사나다 노부유키는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아버지와 함께 우에다 성을 지키고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이 되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후 가족을 구하고 영지를 계승하여 마쓰시로 번주로 번영을 이끌었다.
  • 마쓰시로번주 -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6남으로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를 계승하여 다이묘가 되었지만, 도쿠가와 히데타다와의 불화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유배된 비운의 인물이며, 마쓰시로번과 다카다번의 번주를 지냈고 다테 마사무네의 사위였으나 사후 300년 만에 사면되었다.
  • 쇼나이번주 - 사카이 다다카타
    사카이 다다카타는 마쓰야마 번주 사카이 다다노리의 아들로 태어나 쇼나이번 번주로서 번교 창설, 간척 사업, 양잠업 장려, 덴포 대기근 구제, 덴포 의민 사건 농민 요구 수용 등 번정 운영에 힘썼다.
  • 쇼나이번주 - 사카이 다다아리
    사카이 다다아리는 에도 시대 쇼나이 번의 5대 번주로, 혼마 미츠오카를 등용하여 재정 개혁, 덴메이 대기근 아사자 방지, 번교 치도칸 창설 등 번의 부흥에 기여한 인물이다.
  • 다카다번주 - 호리 히데하루
    호리 히데하루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아 분로쿠의 역에 참전하고 후시미 성 공사에 기여했으며, 에치고 가스가야마 영주로 봉해진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 다카다번주 -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6남으로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를 계승하여 다이묘가 되었지만, 도쿠가와 히데타다와의 불화로 영지를 몰수당하고 유배된 비운의 인물이며, 마쓰시로번과 다카다번의 번주를 지냈고 다테 마사무네의 사위였으나 사후 300년 만에 사면되었다.
사카이 다다카쓰 (159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사카이 다다카쓰
씨족사카이 씨 (사에몬노조 가)
별명고고로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후기 ~ 에도 시대 전기
출생1594년
사망1647년 11월 13일
묘소야마가타 현 쓰루오카 시
관위종4위 하, 궁내대보
정치
주군도쿠가와 히데타다 → 도쿠가와 이에미쓰
에치고 국 다카다 번 주 → 시나노 국 마쓰시로 번 주 → 데와 국 쇼나이 번 주
쇼나이 번 초대 번주 취임1622년
쇼나이 번 번주 퇴임1647년
마쓰시로 번 초대 번주 취임1619년
마쓰시로 번 번주 퇴임1622년
마쓰시로 번 선대 번주마쓰다이라 다다마사
마쓰시로 번 후대 번주사나다 노부유키
다카다 번 초대 번주 취임1618년
다카다 번 번주 퇴임1619년
다카다 번 선대 번주사카이 이에쓰구
다카다 번 후대 번주마쓰다이라 다다마사
가계
아버지사카이 이에쓰구
어머니사카키바라 마사요시의 딸
배우자도리이 다다마사의 딸
형제자매사카이 나오쓰구
사카이 다다시게
사카이 가쓰요시
사카이 노리쓰구
사카이 다다토키
시바타니 마사토키
자녀사카이 다다마사
사카이 다다토시
사카이 다다쓰네
사카이 다다쓰라
사카이 다다모리
사카이 다다나오
사카이 다다토키
사카이 다다오키
야마나 쓰네토요
딸 (다테 무네즈미의 정실)
딸 (미조구치 시게카쓰의 측실)
딸 (고이 마쓰다이라 다다토시의 정실 → 다키가와 도모이카라의 처)

2. 생애

사카이 다다카쓰는 분로쿠 3년(1594년) 사카이 이에쓰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아 '다다카쓰'라 불렸다.

게이초 14년(1609년) 구나이타이호에 임명되었고, 겐나 4년(1618년) 아버지 이에쓰구가 사망하자 가문을 이었다. 그러나 곧 에치고국 다카다번에서 시나노국 마쓰시로번으로, 다시 모가미 요시토시가 영지를 몰수당한 후 데와국 쇼나이번으로 옮겨졌다.

쇼나이에서는 가메가사키성 대신 쓰루가오카성을 중심으로 삼았으나, 가메가사키 성도 유지하여 이례적으로 두 성을 소유했다. 쓰루가오카성 정비는 손자 다다요시 대에 완료되었다.

다다카쓰는 토지조사를 통해 생산량을 늘렸지만, 가혹한 세금 징수와 쓰루가오카성 공사로 백성들이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다. 간에이 11년(1634년)에는 다카하시 다로자에몬이 막부에 직소하여 번의 통치가 흔들렸다.

만년인 간에이 19년(1642년)에는 동생 다다시게가 일으킨 사카이 나가토노카미 사건으로 상속 분쟁이 발생했다. 다다카쓰는 쇼호 4년(1647년)에 사망했고,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의 판정으로 다다마사가 번주직을 계승했다.

2. 1. 출생과 초기 이력

분로쿠 3년(1594년), 도쿠가와 씨의 가신 사카이 이에쓰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복할 때 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편휘를 받아 다다카쓰(忠勝일본어)라 하였다.[1]

게이초 14년(1609년) 1월 23일, 구나이타이호(宮内大輔일본어)에 임명되었다. 겐나 4년(1618년) 3월, 아버지 이에쓰구가 사망하여 가문을 계승하였다.

2. 2. 번주 시절

겐나 4년(1618년) 3월, 아버지 사카이 이에쓰구가 사망함에 따라 가문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상속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겐나 5년(1619년) 3월에치고국 다카다번 10만 석 영지에서 시나노국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3년 뒤인 겐나 8년(1622년) 6월 7일에는 모가미 요시토시가 영지를 몰수당함에 따라 데와국 쇼나이번 13만 8천 석으로 증가되어 전봉되었다.

쇼나이에 들어와서는 교통의 요충지인 사카타의 가메가사키성 대신 다이호지씨의 거점으로 삼고 있던 쓰루가오카성을 근거지로 정하였다. 그러나 가메가사키 성도 존속을 허락받아, 소규모 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두 개의 성을 가지게 되었다. 다다카쓰는 거점인 쓰루가오카성 정비에 힘썼는데, 완성을 본 것은 손자인 다다요시 대의 일이었다.

쇼나이번에 들어온 직후 토지조사에서는 수치 상 생산량보다 실제 생산량을 대폭 늘리는 데에 성공한 반면, 이것이 가혹한 징세로 이어져, 쓰루가오카성의 공사 등도 있어서, 영내 백성들이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특히 간에이 11년(1634년)에는 유사 향의 오키모이리였던 다카하시 다로자에몬이 막부에 직소하여 번의 통치는 흔들렸다.

다다카쓰의 만년인 간에이 19년(1642년)이 되어서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다다카쓰에게 맡겨져 있던 동생 사카이 다다시게가 다다카쓰의 적자 다다마사를 폐적시키고, 자신의 아들 다다히로에게 쇼나이 번을 계승하게 하려는 사카이 나가토노카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필두가로 고리키 기헤에 등이 추방되었고, 다다마사도 폐적될 뻔 하였으나, 그 직전인 쇼호 4년(1647년) 10월 17일, 다다카쓰는 향년 54세로 사망하였고, 로주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의 판정에 따라 다다마사가 번주직을 계승하게 되었다.[1]

2. 3. 통치와 갈등

겐나 4년(1618년) 3월, 아버지 이에쓰구가 사망함에 따라 가문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상속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겐나 5년(1619년) 3월에치고국 다카다번 10만 석 영지에서 시나노국 마쓰시로번 10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겐나 8년(1622년) 6월 7일에는 모가미 요시토시가 영지를 몰수당함에 따라 데와국 쇼나이번 13만 8천 석으로 증가되어 전봉되었다.[4][5]

쇼나이에 들어와서는 교통의 요충지인 사카타의 가메가사키성 대신 다이호지씨의 거점으로 삼고 있던 쓰루가오카성을 근거지로 정하였다. 그러나 가메가사키 성도 존속을 허락받아, 소규모 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두 개의 성을 가지게 되었다. 다다카쓰는 거점인 쓰루가오카성 정비에 힘썼는데, 완성을 본 것은 손자인 다다요시 대의 일이었다.

쇼나이번에 들어온 직후 토지조사에서는 수치 상 생산량보다 실제 생산량을 대폭 늘리는 데에 성공한 반면, 이것이 가혹한 징세로 이어져, 쓰루가오카성의 공사 등도 있어서, 영내 백성들이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특히 간에이 11년(1634년)에는 유사 향의 오키모이리였던 다카하시 타로자에몬이 막부에 직소하여 번의 통치는 흔들렸다.

다다카쓰의 만년인 간에이 19년(1642년)이 되어서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다다카쓰에게 맡겨져 있던 동생 사카이 다다시게가 다다카쓰의 적자 다다마사를 폐적시키고, 자신의 아들 다다히로에게 쇼나이 번을 계승하게 하려는 사카이 나가토노카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필두가로 고리키 기헤에 등이 추방되었고, 다다마사도 폐적될 뻔 하였으나, 그 직전인 쇼호 4년(1647년) 10월 17일, 다다카쓰는 향년 54세로 사망하였고, 로주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의 판정에 따라 다다마사가 번주직을 계승하게 되었다.

2. 4. 말년과 상속 분쟁

간에이 19년(1642년), 사카이 다다카쓰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자신에게 맡겨져 있던 동생 사카이 다다시게가 일으킨 상속 분쟁에 휘말렸다. 다다시게는 다다카쓰의 적자 다다마사를 폐적시키고, 자신의 아들 다다히로(忠広일본어)에게 쇼나이번을 계승하게 하려는 사카이 나가토노카미 사건(酒井長門守一件일본어)을 일으켰다.[1] 이때 필두가로 고리키 기헤에(高力喜兵衛일본어) 등이 추방되었고, 다다마사도 폐적될 뻔 하였다.[4]

그러나 이 소동 와중인 쇼호 4년(1647년) 10월 17일, 다다카쓰는 54세로 사망하였고, 로주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의 판정에 따라 다다마사가 번주직을 계승하게 되었다.[4]

3. 가계

관계이름
아버지사카이 이에쓰구
어머니사카키바라 마사요시의 딸
정실토리이 타다마사의 딸
측실하나마루 (니시다 쓰기마사의 딸)
측실고하나마루(반세이) (니시다 쓰기마사의 양녀, 오쿠노 유키쓰구의 딸)
측실구메 (타케야마 칸자에몬의 딸)
장남사카이 타다마사 (1617-1660)
차남사카이 타다토시
삼남사카이 타다쓰네 (1639-1675)
사남사카이 타다쓰라
오남사카이 타다모리
육남사카이 타다나오 (1643-1700)
칠남사카이 타다토키 (1643-1668)
남자사카이 타다오키[2]
남자야마나 쓰네토요
여자 (생모 불명)다테 무네스미 정실
여자 (생모 불명)미조구치 시게오 계실
여자 (생모 불명)마쓰다이라 타다토시 정실, 후에 다키가와 구사의 처


참조

[1] 서적 Japan's Name Culture: The Significance of Names in a Religious, Political and Social Context https://books.google[...] 1995
[2] 문서 数馬、善左衛門。旗本戸川安平の養子。のち離縁。安平は越後騒動に連座して南部藩預け。
[3] 웹사이트 酒井忠勝_(出羽国庄内藩主)とは - わかりやすく解説 Weblio辞書 https://www.weblio.j[...] 2022-07-26
[4] 문서 交代で、松代10万石の[[松平忠昌]]が越後高田25万石に移封。
[5] 문서 入部後に忠勝の弟直次の遺領を編入するなどして、最終的には14万石となってい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