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궤구고두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삼궤구고두례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세 번 조아리는 예법이다. 황제 앞에서 신하들이 행하는 국가 의례로, 류큐 왕국에서는 중국 칙사를 맞이할 때,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항복할 때 사용되었다. 1793년 영국 외교관 조지 매카트니는 건륭제 알현 시 삼궤구고두례를 거부하고 영국식으로 의례를 치렀으며, 1873년 일본 특명전권대사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동치제 알현 시 삼궤구고두례를 거절하고 입례를 하였다. 이후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 황제 알현 시 삼궤구고두례를 거부하고 입례를 하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만주족의 문화 - 변발
변발은 중국어에서 유래된 땋은 머리를 의미하며, 청나라 시기 한족에게 강요되어 정치적 복종과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중화민국 수립 이후 사라져 중국의 문화적 상징으로 남아있다. - 만주족의 문화 - 만주 이름
만주 이름은 만주족이 사용한 이름으로, 개인 이름과 족외혼 단위인 무쿤으로 이루어진 씨족 이름으로 구성되었으나, 청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한족의 성씨를 채택하며 변화를 겪었다. - 청나라의 정치 - 의정왕대신회의
의정왕대신회의는 청나라 초기에 설립된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초기에는 황족과 고위 관리들이 군사 문제를 심의했으나 옹정제 시대에 대각원에 의해 기능이 대체되며 권한이 축소되었다. - 청나라의 정치 - 향신
향신은 군주제 중국에서 과거를 통해 직함을 얻은 사람들로, 지방 사회에서 관원과 민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토지개혁으로 소멸되었다. - 예절 - 건배
건배는 축하, 기념, 존경의 의미로 술잔을 함께 들고 마시는 행위이며, 독살 방지 또는 토스트 관습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형태와 예절이 존재하며, 한국에서는 술잔을 부딪히지 않고 낮은 위치에서 술을 다 마시는 예절이 있다. - 예절 - 청첩장
결혼을 알리고 예식에 초대하는 청첩장은 인쇄술 발달과 사회 변화에 따라 형태와 디자인이 변화해 왔으며, 신랑 신부의 개성을 반영한 디자인과 온라인 주문이 보편화되고 결혼식 간소화 추세에 따라 생략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다.
삼궤구고두례 | |
---|---|
의례 정보 | |
이름 | 삼궤구고두례 |
한자 표기 | 三跪九叩頭之禮 |
로마자 표기 | San gue gu go du rye |
중국어 표기 (정체자) | 三跪九叩頭之禮 |
중국어 병음 | Sān guì jiǔ kòutóu zhī lǐ |
몽골어 표기 | ᠢᠯᠠᠨ ᠨᡳᠶᠠᡴᡡᠨ ᡠᠶᡠᠨ ᡥᡝᠩᡴᡳᠨ ᡳ ᡩᠣᡵᠣ |
개요 | |
정의 |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례 |
설명 | 신하나 백성이 임금에게, 혹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큰 경의를 표하는 의례 중국에서 유래 한국에서는 조선시대에 왕에게 행해짐 |
![]() |
2. 방식
"궤"(跪)의 명령을 들으면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류큐의 제2차 쇼씨 왕조 시대에 청나라 책봉사가 도착하면 국왕과 관원들은 황제에 대한 예를 의미하는 ‘수례지방’(守禮之邦)의 편액이 걸린 슈레이 문에서 책봉사를 맞이하였고, 슈리성의 궁전에서 삼궤구고두례 의식을 행하였다.
'''구고두례'''(叩頭)는 이마를 땅에 닿게 하여 행하는 예법이다. 삼궤구고두례에서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른다.
# "궤(跪)" 구령에 따라 무릎을 꿇는다.
# "일고(一叩, 또는 '일구두(一叩頭)')" 구령에 따라 손을 땅에 대고, 이마를 땅에 닿게 하여 소리를 낸다.
# "이고(二叩, 또는 '재구두(再叩頭)')" 구령에 따라 손을 땅에 대고, 이마를 땅에 닿게 하여 소리를 낸다.
# "삼고(三叩, 또는 '삼구두(三叩頭)')" 구령에 따라 손을 땅에 대고, 이마를 땅에 닿게 하여 소리를 낸다.
# "기(起)" 구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것을 총 3번 반복하므로, 총 9번 "손을 땅에 대고, 이마를 땅에 닿게 하는" 것이다.
자금성 앞뜰에서 거행된 국가 의례에서 황제 앞에서 신하들이 일제히 행했다. 류큐 왕국에서는 중국에서 온 칙사에 대해 국왕이 왕도의 교외로 나가 직접 삼궤구고두례로 맞이했다. 그 교외의 땅이 류큐의 경우에는 슈레이문이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사신을 국왕이 직접 교외에서 맞이하지 않았다.
3. 역사
후금의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새롭게 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조선에 조공과 명나라 출병을 요구하였다. 인조가 이를 거절하자 숭덕제는 1636년 12월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하였고, 조선은 불과 두 달 만에 항복하였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에 삼전도(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석촌호수 부근)에서 숭덕제를 향해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며 항복 의식을 하였다.[1]
1793년 대영 제국의 외교관 조지 매카트니가 건륭제를 알현할 때 청나라는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하였고, 매카트니는 영국식을 고집하였으나 쟁론 끝에 왼쪽 무릎을 굽히는 것으로 타협하였다.[2] 1816년 윌리엄 애머스트(William Amherst)도 삼궤구고두례를 요구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여 가경제를 알현하지 못하였다.
1873년 일본 제국의 특명전권대사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동치제를 알현할 때 청나라 예부에서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여 입례(立禮)를 하였다.[3]
이후 청나라는 나날히 교묘해지고 해가 지날수록 심해지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쇠퇴하는 가운데 열강의 외교관들은 하나같이 청나라 예부의 삼궤구고두례 요청을 거절하고 입례(立禮)로 알현하였다.
3. 1. 기원
叩頭禮는 본래 신불(神佛)이나 직계 존속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행해진 예였다. 명나라 시대에 들어서면서 대신들이 황제에게 보이는 일종의 예의로서 叩頭禮가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오배삼고두례"였다. 번속국(藩屬國)의 조공 사신이 입경하여 황제를 만날 때도 이 예(禮)를 행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만주족은 천에 대한 예배에 삼궤구고두례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청이 북경에 들어온 후 삼궤구고두례가 명나라 시대의 오배삼고두례를 대체하게 되었다.
3. 2. 조선과 삼궤구고두례
류큐의 제2차 쇼씨 왕조 시대에 청나라 책봉사가 도착하면 국왕과 관원들은 황제에 대한 예를 의미하는 ‘수례지방’(守禮之邦)의 편액이 걸린 슈레이 문에서 책봉사를 맞이하였고, 슈리성의 궁전에서 삼궤구고두례의 의식을 행하였다.
후금의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새롭게 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조선에 조공과 명나라 출병을 요구하였다. 조선 국왕 인조가 이를 거절하자 숭덕제는 1636년 12월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하였고, 조선은 불과 두 달 만에 항복하였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에 삼전도(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석촌호수 부근)에서 숭덕제를 향해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며 항복 의식을 하였다.[1]
1636년, 홍타이지는 조선에 군신 관계를 맺고 조공과 복속을 요구했으나, 인조가 이를 거부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항복하였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며 용서를 빌었다. 이 때, 화의 조건 중 하나로 대청황제공덕비가 건립되었다.
3. 3. 류큐 왕국과 삼궤구고두례
류큐의 제2차 쇼씨 왕조 시대에 청나라 책봉사가 도착하면 국왕과 관원들은 황제에 대한 예를 의미하는 ‘수례지방’(守禮之邦)의 편액이 걸린 슈레이 문에서 책봉사를 맞이하였고, 슈리성의 궁전에서 삼궤구고두례 의식을 행하였다. 류큐 왕국은 책봉사를 맞이하기 위해 훌륭한 문인 슈레이 문을 만들어 "수례지방"의 편액을 걸고, 궁궐에서 이 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 "수례지방"의 수례는 황제에 대한 예를 의미한다.[1]
文化일본어 5년 무진년(1808년) 6월 17일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3. 4. 일본과 삼궤구고두례
1873년 일본 제국의 특명전권대사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동치제를 알현할 때 청나라 예부에서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절하고 입례(立禮)를 하였다.[3]
1873년, 대만 사건 처리와 청일수호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파견된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동치제 알현에 앞서 청나라 측으로부터 삼궤구고두례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소에지마는 자신이 조공국의 사신이 아니라 대등한 국가의 전권 대사임을 강조하였다. 당시 베이징에 주재하던 구미 열강의 공사들도 황제의 성혼과 친정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대등한 의식에 따른 알현을 시도했지만, 여러 번 실패하였다. 소에지마는 오륜을 인용하여 일청 관계를 "붕우지교(朋友之交)"에 비유하며 입례에 의한 알현을 주장하면서 귀국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알현 문제에 대해 타협하려던 이홍장의 양해를 얻어, 같은 해 6월 29일 소에지마는 당초 요구대로 입례를 통해 동치제를 알현하였다. 이는 전근대 이래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입례를 통해 정식으로 황제를 알현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3. 5. 서구 열강과 삼궤구고두례
1793년 대영 제국의 외교관 조지 매카트니가 건륭제를 알현할 때 청나라에서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하였다. 매카트니는 영국식을 고집하였으나, 쟁론 끝에 왼쪽 무릎을 굽히는 것으로 타협하였다.[2] 1816년 윌리엄 애머스트(William Amherst)도 삼궤구고두례를 요구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여 가경제를 알현하지 못하였다.
1873년 일본 제국의 특명전권대사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동치제를 알현할 때 청나라 예부에서 삼궤구고두례를 요구하였지만,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이를 거절하고 입례(立禮)를 하였다.[3]
이후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쇠퇴하면서,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은 청나라 예부의 삼궤구고두례 요청을 거절하고 입례(立禮)로 알현하였다.
다음은 청나라 황제 알현 시 삼궤구고두례를 실행한 경우이다.
연도 | 국가 | 사절 |
---|---|---|
1655년 (순치 11년) | 네덜란드 | 고엘 및 하이젤 |
1664년 (강희 3년) | 네덜란드 | 그루니 |
1727년 (옹정 5년) | 포르투갈 | 알렉산드르 메텔로 |
1753년 (건륭 18년) | 네덜란드 | 공사 |
1753년 (건륭 18년) | 포르투갈 | 공사 |
1793년 (건륭 58년) | 네덜란드 | 이사크 티칭 |
1522년 (명나라 가정 원년) 닝보에 내항하여 무역을 시작한 포르투갈인들은 불과 20년 만에 거류지를 쫓겨났고, 도망친 샤먼에서도 추방당했다. 이후 유럽인들은 무력을 동원한 위협으로 중국과의 무역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여러 차례 실패로 끝나자 중국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변경하여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1544년 (명나라 가정 23년) 이후, 중국에 내항하는 유럽인들은 무역으로 얻는 이익을 위해 자국의 명예를 버리고, 단지 명령에 따르는 데 이르렀다.
참조
[1]
웹인용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2013-06-16
[2]
뉴스
오늘의 경제소사/9월14일 <1500> 매카트니 사건
https://news.naver.c[...]
서울경제
2013-06-16
[3]
웹인용
일본 외교 문서 디지털 아카이브 제6권 (메이지 6년/1873년) 청국과의 수호조규통상장정체결에 관한 건
http://www.mofa.go.j[...]
2013-06-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