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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에지마 다네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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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일본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자 외교관, 서예가이다. 그는 영어와 서구 사상을 습득하여 메이지 유신 초기 임시 외무대신을 역임하며 마리아 루스 사건을 해결하고, 청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사할린 섬 경계 문제 조정과 류큐 상선 승무원 피살 사건에 대응하는 등 외교적 활동을 펼쳤다. 이후 내무대신을 역임하는 등 정치 경력을 이어갔으며, 서예가로서도 활동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생애는 일본 근대사의 명암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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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에지마 다네오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소에지마 다네오미 초상
이름소에지마 다네오미
일본어 표기副島 種臣 (そえじま たねおみ)
출생일1828년 10월 17일
출생지사가, 일본
사망일1905년 1월 31일
사망지도쿄, 일본
직업외교관, 정치인
국적일본
정치 경력
소속 정당애국공당
작위백작
관위정2위
훈장훈1등욱일동화대수장
주요 직책
내무대신제4대
내각제1차 마쓰카타 내각
임기 시작1892년 3월 11일
임기 종료1892년 6월 8일
추밀원 부의장제2대
임기 시작1891년 9월 10일
임기 종료1892년 3월 11일
임기 시작1873년 10월 13일
임기 종료1873년 10월 28일
외무경제3대
임기 시작1871년 12월 15일
임기 종료1873년 10월 13일
임기 시작1879년
임기 종료1886년
임기 시작1869년 7월 8일
임기 종료1871년 7월 24일
학력
출신 학교고도칸 순정 서원
가족 관계
배우자마사코 (기후현 사족 마쓰시마 겐스케 장녀)
자녀소에지마 미치마사 (삼남)
친족 (정치가)에다 요시카네 (형), 시마 요시타케 (종형제), 간데요코지 스케쓰구 (사위), 스후 가네미치 (사위), 모로오카 유키마로 (외손)

2. 생애

소에지마는 사가 히젠국(현재의 사가현)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지 학교의 교사이자 국학(고코가쿠) 학자였다. 1866년 소에지마는 영주 지도자들에 의해 나가사키로 보내져 영어를 공부했다. 그곳에서 네덜란드 선교사 귀도 베르벡 아래에서 미국 헌법과 신약성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공부했다.[1] 보신 전쟁 동안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려는 사가 군대의 군사 지도자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소에지마는 소참의 ''(산요)''가 되었고, 1868년 후쿠오카 다카치카를 도와 임시 메이지 정부의 구조를 초안했다. 이와쿠라 사절단미국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소에지마는 임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마리아 루스 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는 치외법권 문제와 불평등 조약과 관련된 페루 선박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 사건이었다. 소에지마는 이 사건을 처리한 것에 대해 청나라 정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

1871년, 그는 사할린 섬과 관련된 경계 문제 조정을 위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1] 1873년 소에지마는 타이완 남서쪽 끝에서 난파된 류큐 상선의 승무원 54명이 파이완족 원주민들에게 살해된 것에 항의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사절단을 이끌었다. (구 류큐 왕국은 1872년 9월부터 일본의 주권 영토로 공식적으로 주장되었다.) 소에지마는 마리아 루스 사건을 통해 얻은 호의를 바탕으로 동치제를 만나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의 보상 요구는 거절되었고, 이는 1874년 타이완 원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 사절단은 일본과 중국 간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1]

메이지 6년 정변으로 하야한 후,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과 함께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했다. 1876년 중국 방문 시 그는 그의 학식으로 인해 관료들로부터 높은 대우를 받았으며, 황제의 개인 고문이 되었다.[1]

소에지마는 1878년 궁내성에서 정부에 다시 복귀했다. 1888년 그는 추밀원에 임명되었고, 1891년에는 부의장이 되었다. 1892년, 그는 마츠카타 마사요시 제1차 마츠카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이 되었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분세이 11년(1828년) 9월 9일, 히젠국 사가성(현 사가현 사가시)에서 사가번의 무사 에다요시 난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류슈'''였다.[6] 아버지 난고는 국학(고코가쿠)에 통달하여 "일본 제일 군주론"을 제창하며 존황 사상을 설파했다.[7]

어린 시절부터 사가번 번교인 홍도관에서 고가 세이리의 주자학과 하가쿠레를 배웠다.[7] 6세에 홍도관 외생료의 집법(교수 조수)이 되었고, 14세에 원복하여 '''소에지마 지로 류슈'''라고 칭했다.[7]

형 에다요시 신요는 에도로 나가 쇼헤이코에 입학하고, 가에이 원년(1848년)에 사가로 귀향하여 홍도관 교수에 취임하자, 다네오미는 내생료 수반이 되었다.[7] 가에이 3년(1850년), 형과 함께 구스노키 마사시게 전몰일을 기하여 매림암에서 "의제동맹"을 결성하여 주최했다.[7]

가에이 5년(1852년)에 황학 연구를 위해 24세의 나이로 교토에 유학했다. 쥰쇼 서원에 들어가 야노 겐도 등 히라타파 국학자들과 교류하고, 개국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8] 안세이 2년(1855년)에 다시 교토에 유학하여, 존양 지사 이케우치 다이가쿠와 함께 쇼군 선하 폐지를 주장하는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8]

안세이 6년(1859년)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같은 해에 사가번사 소에지마 리타다의 양자가 되어 소에지마 성을 따르게 되었다.[5] 근신이 풀린 후 홍도관 교수로 임명되었다.

2. 2. 막부 말기 활동

안세이 5개국 조약 이후, 나가사키에서 미국 성공회 소속 존 리긴스와 차닝 윌리엄스(릿쿄 대학 설립자), 미국 네덜란드 개혁 교회 소속 귀도 풀베키에게 오쿠마 하치타로 (시게노부)와 함께 영어를 배웠다.[9] 이들은 막부 양학소인 제미관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소에지마는 귀도 베르벡에게서 미국 헌법과 신약성서를 배우며 서양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

나베시마 나오마사사가 번에 란학료를 설치한 후, 새롭게 영학숙·번학계고소(후의 치엔칸)를 개교하면서 소에지마에게 독학 임무를 맡도록 권유했고, 소에지마는 이를 수락했다.[10] 고이데 센노스케, 이시마루 토라고로 야스요, 나카무타 구라노스케, 오쿠마 시게노부, 마와타 하치로 토시마이는 풀베키에게 영어 교육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오키 다미히라(교임)는 응하지 않았다.

1867년(게이오 3년), 나가사키 고토마치에 번학계고소(다음 해 치엔칸으로 개칭)가 개교하자,[11][12] 사가번은 풀베키를 초빙하여 영학을 가르치게 했다. 사가라 코안, 아야베 신고로(오기), 모토노 슈조 (세이코)(구보타), 야마구치 시게조 (나오요시)(다케오) 등이 와서 배웠고, 소에지마는 화한학을 가르치면서 풀베키에게 영어를 배웠다.

같은 해 3월, 소에지마는 나가사키에 체류 중이던 도사번 사무라이 고토 쇼지로의 여관을 방문,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건의하기 위해 나가사키에서 오사카로 가는 도사번 배 "아사히마루"를 타고 교토로 갔다. 교토에서 막부 메츠케 하라 이치노신(후지타 토코의 조카)을 만나 대정봉환을 설득했으나 실패하고, 사가번 저택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가 나중에 풀려났다.[13]

도바·후시미 전투가 시작되자 사가번 가로 나베시마 마고로쿠로가 병사를 이끌고 상경했다. 나가사키 도사 저택에 체류 중이던 사사키 산시로(다카유키)가 나가사키 봉행 저택을 접수, 나가사키 회의소라 칭하고 해원대 사무라이 요시이 겐바, 사쓰마번 사무라이 마쓰카타 스케자에몬(마사요시) 등이 각국 영사를 초청하여 통상을 보장했다. 소에지마는 나가사키 각국 영사의 결정 보고를 위해 사쓰마번 사무라이 오키 나오지로(잇페이)와 교토로 가서 사이고 다카모리, 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보고했다. 1868년(게이오 4년) 3월 13일, 소에지마는 메이지 신정부로부터 징사·참여로 임명받았다.[14]

도바·후시미 전투 직후인 1월 7일, 유신 정부는 재경 번주를 소집, 도쿠가와 요시노부 토벌령을 발포하여 여러 다이묘에게 거취를 결정하게 했지만, 사가번은 번주와 중신 모두 재경하지 않아 교토 정국에 늦게 등장했다. 이로 인해 사가번은 기회주의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5월 우에노 전쟁, 9월 아이즈 전쟁에서 사가번 암스트롱 포와 소에지마, 오키, 에토 등의 분전으로 군사적 공헌을 하여 신정권 내 지위를 높였다.[15] 소에지마는 보상·이와쿠라 도모미 밑에서 후지카와 산케이와 함께 오우 토벌 군감으로 활동하며, 적은 병력으로 분전했다.

2. 3. 메이지 유신과 외교 활동

메이지 유신 이후 소에지마는 신정부의 참여(参与) 겸 제도사무국 판사(制度事務局判事)가 되어 후쿠오카 다카치카와 함께 정체서를 기초했다.[3] 이와쿠라 사절단미국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소에지마는 임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마리아 루스 호 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는 치외법권 문제와 불평등 조약과 관련된 페루 선박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 사건이었다. 소에지마는 이 사건을 처리한 것에 대해 청나라 정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

1871년, 그는 사할린 섬과 관련된 경계 문제 조정을 위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1] 1873년 소에지마는 타이완 남서쪽 끝에서 난파된 류큐 상선의 승무원 54명이 파이완족 원주민들에게 살해된 것에 항의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사절단을 이끌었다. (구 류큐 왕국은 1872년 9월부터 일본의 주권 영토로 공식적으로 주장되었다.) 소에지마는 마리아 루스 호 사건을 통해 얻은 호의를 바탕으로 동치제를 만나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의 보상 요구는 거절되었고, 이는 1874년 타이완 원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 사절단은 일본과 중국 간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데는 성공했다.[1]

특명전권대사로서 청나라에 건너가 조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을 교환하고 목종 동치제를 알현했다.[3] 사할린 국경 문제, 류큐 귀속, 마리아 루스호 사건 등을 담당했다.[3]

2. 4. 메이지 6년 정변과 이후 활동

메이지 6년 정변으로 하야한 후,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과 함께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했다.[4] 1874년(메이지 7년) 1월 12일 소에지마 저택에서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등이 모여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1월 17일에는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좌원에 제출하였다.[28] 그 후, 약 3년 동안 중국 대륙을 유람하며 이홍장 등과 교분을 쌓았다.[4] 1876년(메이지 9년) 9월 20일 수행원 한 명을 데리고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상하이로 건너가 쑤저우, 항저우의 명승지를 방문하고, 톈진에서 이홍장과 회견하였다. 이홍장은 청 제국에 헌신할 것을 권했지만 소에지마는 이를 거절하였다.[29] 1878년(메이지 11년)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28]

1879년(메이지 12년) 4월 21일 궁내성 어용괘 1등 시강 겸 시강국 총재에 임명되어, 매주 화요일에 메이지 천황에게 대학, 중용, 상서를 진강했다.[30] 1886년(메이지 19년) 시강직 폐지 때까지 메이지 천황에게 진강을 계속했다.[30] 궁중 고문관, 추밀 고문관, 내무대신을 역임했다.[4] 1888년 추밀원에 임명되었고, 1891년에는 부의장이 되었다. 1892년, 마쓰카타 마사요시 제1차 마츠카타 내각에서 내무대신이 되었다.[1] 재야에서는 동방협회 회장을 맡아 아시아인들과 교류했다.[4] 청나라의 계몽 사상가 량치차오는 일본 망명 중에 소에지마를 찾아 동방협회의 회원이 되었다.[51]

3. 사상과 평가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사가번 출신의 무사로,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정체서 기초에 참여하고, 외무경으로서 청나라와 외교 교섭을 담당했으며, 마리아 루스호 사건 등을 처리했다.[3] 메이지 6년의 정변 이후에는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궁중 고문관, 추밀 고문관, 내무대신을 역임했다.[4]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며 동방협회 회장을 맡아 아시아인들과 교류했다. 창해라는 호로 한시서예에도 능했다.

(하위 섹션 '서예가로서의 면모'와 중복되는 내용: 그의 서예는 근대 서도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여러 전시회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

3. 1. 서예가로서의 면모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한시(漢詩)와 서예에 능통하여 창해(蒼海)라는 호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아들 소에지마 미치마사와 문인들이 편찬한 『창해전집』(1917년)에는 2천 편이 넘는 한시가 포함되어 있다.[49]

그의 서예는 근대 서도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여러 전시회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주요 저서 및 소개된 자료는 다음과 같다.

  • 『蒼海 副島種臣書』 (이시카와 큐요 편, 니겐샤, 2003년)
  • 『서의 우주 24-서의 근대 가능성, 메이지 전후』 (이시카와 큐요 편, 니겐샤, 2000년)
  • 『근대 서사』 (이시카와 큐요 저, 나고야 대학 출판회, 2009년)


2005년에는 NHK 프로그램 『신 일요 미술관』에서 서예가로서의 측면을 조명한 특집이 방영되었고, 1999년에는 「예술신조」 (신초샤) 9월호에 「메이지 유신을 필적으로 읽다: 지사들의 서」에서 소개되었다.

2006년 사가현립 미술관, 2007년 도쿄 고토 미술관에서 서거 100주년 기념 특별전 「蒼海 副島種臣 - 전심의 서 - 전」이 개최되었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사가현립 사가성 혼마루 역사관에서 『알려지지 않은 메이지 유신: 소에지마 다네오미의 서』가 개최되었다.

대표작으로는 「귀운비우」, 홍엽관 (사가현립 미술관 소장), 「신비수 인실수신」, 「춘일기사구」 등이 있다.[50]

3. 2. 중도 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일본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려 한 균형 잡힌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맹목적인 서구화를 경계하고 동양의 가치를 존중하며 자주적인 외교를 추구했다.[37] 이러한 면모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날아오르는 듯"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소에지마는 마리아 루스호 사건에서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청나라 노예들을 해방하는 등 인권 존중의 면모를 보였다.[20] 또한, 외교에서는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힘쓰고, 러시아와는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을 체결하는 등 유연성을 발휘했다.[26]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소에지마를 태정대신이 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며,[45] 사이고 다카모리는 서로 존경하는 친구 사이였다. 사이고는 죽기 전 "소에지마에게 기대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소에지마의 정한론과 타이완 출병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에지마는 흥아회興亞會|흥아회중국어와 동방협회 회장을 맡아 아시아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아시아 연대주의를 주장했다.[31][32] 청나라의 계몽 사상가 량치차오는 일본 망명 중에 소에지마를 찾아 동방협회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51]

3. 3.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인물, 사건 서술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외교 분야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에 가담한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소에지마는 1871년 외무경에 취임하여 마리아 루스호 사건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해결하고, 청나라, 페루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873년 특명전권대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타이완 출병 문제를 처리하고, 류큐를 일본에 병합하는 과정에 참여한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소에지마는 타이완 출병을 주장한 리젠돌을 외무성에 고용하고, 타이완 진공책(정대론)을 주장하는 등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이는 정한론과 더불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다.

또한, 소에지마는 사할린 매수 문제에서 구로다 기요타카와 대립하며 사할린 전 섬 매수를 주장했지만, 결국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소에지마의 영토 확장에 대한 야심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소에지마는 흥아회와 동방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아시아 연대론을 주장했지만, 이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청일 전쟁러일 전쟁 이후 1905년 사망할 때까지, 소에지마의 행적은 일본 제국주의의 명암을 동시에 보여준다.

4. 영전

위계훈장 등


5. 저서 및 작품

아들 소에지마 미치마사와 문인 다케이 요시, 스즈키 오토노스케, 사사키 뎃타로 등이 편찬한 『창해전집』(蒼海全集, 1917년)에는 2천 편이 넘는 한시가 포함되어 있다.[49]


  • 玉帛朝貢絶 山陵草古木 天子方憂思 人臣焉安處

  • 소에지마를 한산사로 안내한 청나라 관료가 호리바시 근처에서 연 시회에서 장계(『당시선』)의 시와 비슷한 한 수를 지어 놀라게 했다.[50]

  • 野富烟霞色天縦花柳春


소에지마 다네오미의 서예가로서의 업적은 『蒼海 副島種臣書』(이시카와 큐요 편, 니겐샤, 2003년)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주요 작품은 『서의 우주 24-서의 근대 가능성, 메이지 전후』 (이시카와 큐요 편, 니겐샤, 2000년) 및 『근대 서사』(이시카와 큐요 저, 나고야 대학 출판회, 2009년)에서도 소개되었다.

대표작으로는 「귀운비우」(歸雲飛雨), 홍엽관 (사가현립 미술관 소장)이 있으며, 「신비수 인실수신」(神非守人失守神), 「춘일기사구」(春日竒事句) 등 다수가 있다.

6. 등장 작품

나는 듯이 (1990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사카베 후미아키)[1]

참조

[1] Americana Soyeshima, Tanéomi
[2] 사전 副島種臣 https://kotobank.jp/[...]
[3] 서적 安岡2012
[4] 서적 安岡2012
[5] 서적 安岡2012
[6] 서적 佐賀県立美術館2006
[7] 서적 安岡2012
[8] 서적 安岡2012
[9] 서적 大隈侯昔日譚 https://dl.ndl.go.jp[...] 新潮社
[10] 서적 安岡2012
[11] 웹사이트 佐賀藩関係年表 http://saga-museum.j[...] 佐賀城本丸歴史館 2023-02-10
[12] 학술지 풀베키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 http://id.nii.ac.jp/[...] 桃山学院大学総合研究所
[13] 서적 安岡2012
[14] 서적 安岡2012
[15] 문서 岩倉具視関係文書
[16] 서적 安岡2012
[17] 서적 安岡2012
[18] 서적 安岡2012
[19] 서적 安岡2012
[20] 서적 安岡2012
[21] 서적 安岡2012
[22] 서적 安岡2012
[23] 서적 安岡2012
[24] 서적 琉球処分
[25] 서적 安岡2012
[26] 서적 樺太基本年表
[27] 서적 安岡2012
[28] 서적 折田年秀日記
[29] 서적 安岡2012
[30] 서적 安岡2012
[31] 서적 安岡2012
[32] 뉴스 東京日日新聞 "1900-06-23"
[33]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34] 서적 安岡2012
[35] 서적 前原一誠伝
[36] 서적 懐旧九十年 岩波文庫
[37] 문서 安岡2012、103頁
[38] 간행물 文學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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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문서 安岡2012、217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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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인용구
[50] 간행물 文學界 2001
[51] 논문 清廷の大謁見 中央公論 1906-11
[52] 문서 使清日記
[53] 인용구
[54] 관보 叙任及辞令 官報 1886-10-21
[55] 관보 叙任及辞令 官報 1887-04-14
[56] 관보 叙任及辞令 官報 1892-04-28
[57] 관보 叙任及辞令 官報 1902-06-21
[58] 관보 叙任及辞令 官報 1884-07-18
[59] 관보 叙任及辞令 官報 1889-11-30
[60] 관보 叙任及辞令 官報 1905-02-02
[61] 관보 賞勲叙任 官報 1885-05-09
[62] 서적 중국과 일본ː 1500년 중일관계의 역사를 직시하다 까치글방 202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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