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 데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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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샘 & 데이브는 1960년대 소울 음악의 대표적인 듀오로, 샘 무어와 데이브 프레이터로 구성되었다. 두 사람은 교회에서 복음성가를 부르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으며, 1961년 만나 아마추어 공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Atlantic Records의 Jerry Wexler의 소개로 Stax Records와 계약하여 "Hold On, I'm Comin'"(1966), "Soul Man"(1967), "I Thank You"(1968)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역동적인 라이브 공연으로 "Double Dynamite"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70년 한 차례 해체 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솔로 활동과 재결합을 반복했다. 샘 & 데이브는 1988년 데이브 프레이터의 사망으로 공식적으로 활동을 중단했으며, 그들의 음악은 영화, TV 프로그램, 광고 등 다양한 매체에서 사용되며 널리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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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 데이브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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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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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미국플로리다주마이애미 |
장르 | 솔 음악 리듬 앤 블루스 서던 솔 로큰롤 |
활동 기간 | 1961년–1970년, 1971년–1981년 |
레이블 | 룰렛 레코드 스타크스 레코드 애틀랜틱 레코드 구스토 레코드 |
이전 멤버 | 샘 무어 데이브 프레이터 |
2. 결성 이전
샘 무어와 데이브 프레이터는 각자 어린 시절부터 교회와 집에서 복음성가를 부르며 음악적 소양을 길렀다. 데이브는 형과 함께 복음 그룹 "The Sensational Hummingbirds"에서 활동하며 "Lord Teach Me" 등을 녹음했다. 샘은 두왑 그룹 "The Majestics"에서 "Nitey-Nite" 등을 녹음하고, 복음 그룹 "The Gales"와 "The Mellonaires"에서도 활동했다. 샘 & 데이브는 재키 윌슨과 샘 쿡을 자신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준 주요 인물로 꼽았으며,[5] 무어는 리틀 윌리 존에게도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초에 데이브와 함께 리틀 윌리 존과 공연하기도 했다.
2. 1. 만남과 초기 활동
샘 & 데이브는 어린 시절 집과 교회에서 복음성가를 듣고 부르며 음악적 배경을 쌓았다. 데이브 프레이터는 이후 형 JT 프레이터와 함께 복음 그룹 The Sensational Hummingbirds에서 노래했으며, 이들은 1950년대에 "Lord Teach Me"를 녹음했다. 샘 무어는 1954년 두왑 그룹 The Majestics와 함께 "Nitey-Nite"/"Caveman Rock"을 녹음했고, 이후 복음 그룹 The Gales와 The Mellonaires에서 노래했다. 무어와 프레이터는 그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준 인물로 재키 윌슨과 샘 쿡을 꼽았으며,[5] 무어는 또한 1960년대 초에 그와 데이브가 종종 함께 공연했던 리틀 윌리 존의 영향을 받았다.데이브 프레이터에 따르면, 샘 & 데이브는 복음 음악계에서 활동하며 만났고, 이후 1961년 마이애미의 한 클럽에서 열린 아마추어 야간 행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함께 노래하게 되었다.[6] 듀오는 마이애미의 "King of Hearts" 클럽에서 함께 공연하며 복음 음악에 기반을 둔 콜 앤 리스폰스 스타일의 라이브 공연을 발전시켰다.
3. 초기 경력 (1961-1964)
샘 & 데이브는 마이애미의 "King of Hearts" 클럽에서 공연하던 중 소울 가수이자 음반 프로듀서인 스티브 알라이모에게 발탁되었다.[8] 1962년 초, 헨리 스톤이 소유한 지역 레이블 "Marlin Records"에서 두 개의 싱글을 발매했고, 이후 스톤의 도움으로 뉴욕의 Roulette Records와 계약을 맺고 1962년부터 1964년까지 6개의 싱글을 발매했다.[8] 이 시기 발매된 싱글들은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는 인기를 얻었지만, 전국 차트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8] 스티브 알라이모와 헨리 글로버가 제작한 이 곡들은 샘 쿡, 재키 윌슨, 리틀 윌리 존의 R&B 녹음과 유사한 스타일을 보였다.[8]
4. Stax Records 시절 (1965-1968)
샘 & 데이브는 1967년 8월 "소울 맨"을 발매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은 R&B 차트 1위, 팝 차트 2위를 기록했으며,[10] 1967년 그래미 상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그룹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하여 첫 골드 레코드를 획득했다. "소울 맨"은 1999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 ''롤링 스톤'', R.I.A.A.가 선정한 '50년 최고의 곡 또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곡'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11] 공동 작사가 아이작 헤이즈는 1967년 인종 폭동 이후 등장한 소울 자부심에 대한 뉴스 보도에서 영감을 받아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11] 2019년 "소울 맨"은 의회 도서관 국립 녹음 보관소 보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11]
1967년 10월 발매된 ''소울 맨'' LP는 샘 & 데이브의 세 번째 스택스 LP로(R&B #5/팝 #68),[12] 음악학자 롭 보우먼은 "역대 가장 위대한 소울 음악 앨범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4. 1. Stax 합류와 초기 싱글
1964년 헨리 스톤은 샘 & 데이브를 애틀랜틱 레코드의 제리 웩슬러에게 소개했고, 웩슬러는 이들과 계약을 체결했다. 웩슬러는 샘 & 데이브의 라이브 공연에서 나타나는 남부적 뿌리와 복음 스타일을 살리기 위해, 이들을 테네시주 멤피스에 기반을 둔 스택스 레코드에 대여했다. 스택스에서 샘 & 데이브는 프로듀서 겸 엔지니어 짐 스튜어트와 여러 작곡가들과 협업했다. 초기에는 MGs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크로퍼와 협업하여 4곡을 작곡하거나 공동 작곡했다. 이후, 비교적 신인이었던 아이작 헤이즈와 데이비드 포터가 듀오의 주요 히트곡들을 작곡하고 프로듀싱했다. 1965년에는 앨범 《Hold On, I'm Comin'》이 대히트했으며 타이틀곡도 싱글 히트하여 R&B 차트 1위를 기록했다. 1967년에는 "Soul Man"이 팝 2위, R&B 1위, 팝 연간 차트 20위의 대히트를 기록했다.[10]4. 2. "Hold On, I'm Comin'" 싱글과 앨범
Hold On, I'm Comin'영어은 1966년 3월에 발매된 싱글로, R&B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팝 차트에서는 21위까지 올랐다.[2] 이 곡은 1966년 빌보드 R&B 차트 1위를 기록했고, 1988년에는 롤링 스톤이 선정한 '지난 25년간 최고의 100곡' 중 하나로 뽑혔다.[2] 1995년에는 발매된 지 29년 만에 RIAA로부터 골드 레코드 인증을 받았다.[2]이 곡은 헤이즈와 포터가 화장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0분 만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발매 당시, 제목에 담긴 암시적인 의미 때문에 라디오 방송국에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Hold On, I'm A-Comin'영어으로 제목을 바꿔 다시 발매했다.[2]
동명의 앨범 ''Hold On, I'm Comin']''(1966)은 R&B 앨범 차트에서 19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2]
4. 3. "When Something is Wrong With My Baby", ''Double Dynamite''
When Something is Wrong With My Baby영어는 1967년 1월에 발매된 발라드 싱글로, R&B 차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데이브 프레이터가 첫 번째 구절을 혼자 부른 유일한 히트곡이다. 1966년 말, Said I Wasn't Gonna Tell Nobody영어와 You Got Me Hummin'영어이 R&B 10위 안에 진입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이 세 싱글은 앨범 《Double Dynamite영어》(1966)에 수록되었으며, 이 앨범은 R&B 차트 7위, 팝 차트 118위에 올랐다.[3]4. 4. "Soul Man" 싱글과 ''Soul Men'' 앨범
1967년 8월, 싱글 "소울 맨"이 발매되어 R&B 차트 1위, 팝 차트 2위를 기록하며 샘 & 데이브의 최대 히트곡이 되었다.[16] 이 곡은 1967년 그래미 상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그룹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하며 샘 & 데이브에게 첫 골드 레코드를 안겨주었다.[16] 1999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 롤링 스톤, R.I.A.A.가 선정한 '50년 최고의 곡 또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곡'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16] 공동 작사가 아이작 헤이즈는 1967년 인종 폭동 이후 등장한 소울 자부심에 대한 뉴스 보도에서 영감을 받아 "소울 맨"이라는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16] 2019년, "소울 맨"은 의회 도서관에 의해 국립 녹음 보관소 보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16]앨범 ''소울 맨''(1967)은 R&B 차트 5위, 팝 차트 68위에 올랐으며,[16] 음악학자 롭 보우먼은 이 앨범을 "역대 가장 위대한 소울 음악 앨범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16]
4. 5. "I Thank You" 싱글과 ''I Thank You'' 앨범
1968년, 샘 & 데이브는 가스펠에서 영감을 얻은 "I Thank You/Wrap It Up"으로 다시 차트에 올랐다(R&B 4위/팝 9위).[18] B-사이드 "Wrap It Up"은 더 패뷸러스 썬더버즈(The Fabulous Thunderbirds)에 의해 커버되어 히트하기도 했다.[18] 1968년 5월, 스택스와 애틀랜틱 레코드(Atlantic Records) 사이의 유통 계약 종료로 인해, "I Thank You"는 샘 & 데이브의 마지막 스택스 싱글이 되었다.[18] 이후 샘 & 데이브는 애틀랜틱 레코드에서 활동했지만, 스택스에서 헤이즈/포터와 함께 작업한 곡들을 계속 발매했다.[18] "I Thank You"는 백만 장 이상 판매되어 골드 레코드 인증을 받았다.[18]앨범 ''I Thank You''(1968)는 스택스와 애틀랜틱에서 발매된 1968년 싱글들을 수록하고 있으며, R&B 차트 38위에 올랐다.
4. 6. 라이브 공연
샘 & 데이브는 에너지 넘치는 라이브 공연으로 "더블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얻었다.[1] 오티스 레딩의 매니저 필 월든은 "샘 & 데이브는 역대 최고의 라이브 공연으로 시대를 초월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1] 1968년 10월 ''타임'' 기사에는 "모든 R&B 가수들 중에서 샘 & 데이브처럼 공연장을 뜨겁게 달구는 사람은 없다"라는 묘사가 있을 정도였다.[1]1967년 3월, 샘 & 데이브는 부커 T & The MGs, 더 마키스, 에디 플로이드, 칼라 토마스, 아서 콩리와 함께 유럽에서 열린 스탁스/볼트 레뷔(Stax/Volt Revue)에 참여했다.[1] 오티스 레딩이 투어의 헤드라이너였지만, 많은 이들은 샘 & 데이브의 폭발적인 공연을 극찬했다.[1]
이들은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연평균 280회의 공연을 펼쳤으며, 1967년에는 단 열흘만 쉬었다고 한다.[1] 주요 공연으로는 1967년 몬트리올 세계 박람회,[1] 1968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추모 공연,[1] 1969년 텍사스 국제 팝 페스티벌 등이 있었다.[1] 또한 에드 설리번 쇼,[1] 더 투나잇 쇼,[1] 아메리칸 밴드스탠드,[1] 마이크 더글러스 쇼 등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1]
5. Atlantic Records 시절 (1968-1972)
샘 & 데이브는 1967년 1월 발라드 싱글 "When Something is Wrong With My Baby"를 발매하여 큰 R&B 히트를 기록했다. 스택스(Stax)의 롭 보우먼은 이 곡을 "소울 음악 역사상 가장 숭고한 레코드 중 하나"라고 칭했으며, 웨인 잭슨은 자신이 들어본 최고의 노래라고 말했다.[17] 이 곡은 데이브가 첫 구절을 혼자 부른 유일한 히트곡이었다. 이후 이 곡은 남녀 가수가 듀엣으로 함께 녹음하고 공연하는 곡이 되었다. 1966년 말, 이 듀오는 "Said I Wasn't Gonna Tell Nobody"와 "You Got Me Hummin'"으로 R&B 10위 안에 들었다. 이 세 싱글은 다른 트랙과 함께 샘 & 데이브의 두 번째 LP ''Double Dynamite''(1966년 12월 발매)에 수록되었으며, 이 LP는 R&B 차트 7위, 팝 차트 118위에 올랐다.
제리 웩슬러는 톰 다우드와 함께 애틀랜틱 작곡가 및 뮤지션들과 뉴욕에서 샘 & 데이브를 프로듀싱하려 했다. 그러나 1969년 8월에 발매된 첫 애틀랜틱 싱글 "Ooh, Ooh, Ooh"는 샘 본인도 인정했듯이 좋지 않은 음반이었고, 4년 만에 처음으로 샘 & 데이브 싱글이 차트에 진입하지 못했다.
1970년에는 "Baby, Baby, Don't Stop Now"와 "One Part Love, Two Parts Pain" 두 싱글이 더 발매되었으나, 둘 다 차트에 진입하지 못했다. 웩슬러는 "우리는 그들과 함께 엉망진창인 음반을 만들었다"고 말했다.[18] 웩슬러는 듀오를 머슬 쇼얼스와 마이애미로 보내 브래드 샤피로와 데이브 크로포드와 함께 작업하게 했지만, 싱글 "Knock It Out The Park" 역시 차트에 진입하지 못했다.
샘 & 데이브는 1970년 6월에 해체되었다. 무어는 듀오에 대한 불만족과 솔로 경력을 추구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했고,[19][20] 프레이터는 무어가 혼자서 원하는 것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어는 1970년에 자신의 리뷰와 함께 공연했고,[19] 다음 해에 애틀랜틱에서 세 개의 솔로 싱글을 녹음했지만 차트에 오르지 못했다. 프레이터는 알스톤에서 싱글을 녹음했다. 둘 다 솔로 활동으로는 성공하지 못했고, 1971년 8월에 재결합했다.
1971년 10월, 마지막 애틀랜틱 싱글인 "Don't Pull Your Love"는 해밀턴, 조 프랭크 & 레이놀즈의 히트곡을 커버한 곡이었다. 이 곡은 작은 히트곡(R&B #36/팝 #102)이었지만, 듀오가 레이블과 계약을 유지할 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샘 & 데이브는 1972년 8월에 애틀랜틱을 위해 마지막으로 4곡을 녹음했지만, 레이블에서 발매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애틀랜틱과의 계약이 만료되었다.
5. 1. ''Best of'' 앨범, Stax 녹음 싱글 (1969)
1969년 1월, 애틀랜틱에서 발매된 베스트 앨범 ''The Best of Sam & Dave''는 R&B LP 차트 24위, 빌보드 LP 차트 89위에 올랐다.[16] 이 음반에는 "A Place Nobody Can Find"를 제외한 모든 스택스 A 사이드 곡과 몇몇 B 사이드 곡이 포함되었다. 같은 해, 싱글 "Soul Sister, Brown Sugar"는 샘 & 데이브를 R&B 20위권으로 다시 진입시켰고, 영국에서 15위를 기록했다.[17] 후속곡 "Born Again"은 차트 하위권에 진입했으며, 샘 & 데이브가 스택스에서 녹음한 마지막 싱글이었다.5. 2. Atlantic 제작 음반, 첫 번째 해체와 재결합 (1969-1972)
샘 & 데이브는 21년 동안 함께 활동했지만, 그들의 파트너십은 매우 불안정했다. 무어는 13년 가까이 무대 밖에서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1970년대에는 여러 번 헤어졌는데, 공연에 따로 나타나고, 별도의 대기실을 요구했으며, 무대에서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중개자를 통해 소통하는 경우가 많았다.[28] 1970년대에는 둘 중 한 명만 공연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고, 결국 무어가 탈퇴하면서 프레이터가 보컬리스트 샘 다니엘스와 함께 "샘 & 데이브"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게 되었다. 무어는 프레이터와의 개인적인 문제, 약물 사용, 투어의 피로감, 그리고 새로운 곡으로 자신만의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열망 등이 결별과 데이브 교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한다.[20] 프레이터는 샘 & 데이브의 노래를 반복해서 공연하는 것에 싫증을 느낀 무어가 자신만의 활동을 하고 싶어 했고, 다양성을 추구하려 했기 때문에 갈등과 결별이 발생했다고 말했다.[6]6. 후기 활동 (1972-1981)
애틀랜틱을 떠난 후, 샘 & 데이브는 메이저 음반사를 찾지 못했지만, 유럽 등지에서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21] 1972년 봄에는 터키, 1973년 봄에는 잉글랜드에서 순회공연을 펼쳤다. 미드나잇 스페셜, 마이크 더글라스 쇼 등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21] 샘은 1970년대 미국의 대부분의 쇼는 작은 클럽, 올드 쇼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약물 사용과 듀오 간의 불화 때문이었다고 회상했다.
1974년과 1975년, 샘 & 데이브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Back at Cha'' 앨범을 녹음하고 발매했다.[22] 이 앨범은 스티브 크로퍼가 프로듀싱하고 MG와 멤피스 혼이 참여했으며, 싱글 "A Little Bit of Good"(R&B #89)을 포함했다. 작곡가로는 크로퍼, 앨런 투생, 지미 클리프가 참여했다.[22]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다. 1976년,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Come On, Come Over"에 보컬로 참여했다.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샘 & 데이브는 영국에서 존 애비와 함께 노래를 녹음하고 두 개의 싱글을 발매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듀오의 마지막 싱글 중 하나는 비틀즈의 "We Can Work It Out"의 커버였다. 1977년에 잠시 은퇴했으며, 데이브는 뉴저지주 폰티악 대리점에서 일했고, 샘은 텍사스주 오스틴의 로펌에서 공시 집행인으로 일했다.
1978년, 샘 & 데이브는 LP ''Sweet & Funky Gold''(Gusto)를 위해 옛 히트곡을 다시 녹음했고, K-Tel Records에서 ''The Original Soul Man'' 앨범을 녹음했다.[23] 같은 해 여름에는 2주 동안 독일을 순회했다.
1979년, 블루스 브라더스가 "Soul Man"을 커버하여 히트하면서 샘 & 데이브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댄 애크로이드는 샘 & 데이브가 블루스 브라더스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1980년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에는 샘 & 데이브에 대한 헌사 장면이 포함되었다.
1979년, 샘 & 데이브는 클래쉬의 미국 투어 오프닝 쇼를 열었다. 1980년, 폴 사이먼의 영화 ''원 트릭 포니''에 출연하고,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했다. 같은 해 샤 나 나의 미국 투어 오프닝에도 출연했다.
1981년, 앨범 ''Soul Study Vol. 1''과 ''Soul Study Vol. 2''(Odyssey)를 발매하고, 많은 히트곡을 다시 녹음했다. 같은 해 새해 전날, 샌프란시스코의 올드 월도프에서 마지막 공연을 펼쳤다. 무어는 이때가 그들이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건 것이라고 회상했다.[24]
7. 데이브 프레이터와 샘 다니엘스 (1982-1988)
1982년, 프레이터는 샘 다니엘스와 함께 "샘 & 데이브"라는 이름으로 또는 "뉴 샘 & 데이브 리뷰"라는 이름으로 투어를 시작했다. 다니엘스는 1982년 10월부터 1988년 데이브가 사망할 때까지 데이브와 함께 공연했다. 무어는 프레이터가 그룹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대체로 실패했다.[25] 이들은 7년 동안 유럽, 일본, 캐나다 등지에서 연간 100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다.
1985년, 프레이터와 샘 다니엘스는 네덜란드에서 샘 & 데이브의 히트곡 메들리를 녹음해 발표했는데, 이 메들리는 R&B 차트 92위에 올랐고 "샘 & 데이브"로 표기되었다. 샘 무어는 음반 회사에 허가 없이 "샘 & 데이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며 싱글 회수를 요청했고, 음반은 "뉴 샘 & 데이브 리뷰"로 다시 표기되어 재발매되었다.[27]
프레이터는 1988년 4월 3일, 아틀랜타 시민 센터에서 열린 스택스 동창회에서 샘 다니엘스와 마지막으로 공연했다. 이 행사에는 아이작 헤이즈, 에디 플로이드, 루퍼스와 칼라 토마스도 출연했다. 6일 후인 1988년 4월 9일, 프레이터는 조지아 주 시카모어에서 어머니 집으로 운전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8. 샘 무어 솔로 활동 (1982-현재)
샘 무어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계속 공연하고 녹음했으며, 다른 인기 아티스트들과 수많은 듀엣으로 공연하기도 했다.
9. 무어와 프레이터 간의 갈등
샘 & 데이브는 21년간 활동하면서 매우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어는 그들이 거의 13년 동안 무대 밖에서는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28] 1970년대에는 여러 차례 결별했으며, 공연장에 따로 도착하고, 별도의 대기실을 요구하고, 무대 위에서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중개인을 통해서만 소통하는 등 갈등이 심했다.[28]
1970년대에는 둘 중 한 명만 공연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결국 무어가 탈퇴하고 프레이터가 보컬리스트 샘 다니엘스와 함께 "샘 & 데이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갔다.[20] 무어는 프레이터와의 개인적인 문제, 약물 사용, 순회공연의 피로감, 새로운 곡으로 자신의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열망 등이 결별과 데이브를 다른 인물로 교체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한다.[20] 프레이터는 무어가 샘 & 데이브의 곡을 반복해서 공연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활동을 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좌절감이 갈등과 결별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프레이터는 무어가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6]
10. 다른 아티스트들의 커버 / 대중문화에서의 사용
샘 & 데이브의 노래는 ZZ Top, The Fabulous Thunderbirds, 제임스 & 바비 퓨리파이, 린다 론스타트, 척 잭슨, 맥신 브라운, 엘비스 코스텔로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커버했고, 영화, TV 사운드트랙, 광고 등에도 자주 사용되었다.[29]
2003년, 멤피스에 스택스 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샘 & 데이브는 박물관 영화 ''Soulsville''에 등장하고, 영구적인 벽-비디오 디스플레이를 가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샘 무어가 사용 중단을 요청하기 전까지 "Hold On, I'm Comin'"을 선거 유세 테마곡으로 사용했다.
1986년 영화 ''소울 맨''과 1997-1998년 텔레비전 시리즈는 샘 & 데이브의 "Soul Man"을 제목과 주제곡으로 사용했다.
11. 음반 목록
샘 & 데이브는 1966년에 Hold On, I'm Comin'과 ''Double Dynamite''을 발매했고, 1967년에는 Soul Men을 발매했다. 1968년에는 ''I Thank You''를, 1975년에는 ''Back at Cha''를 발매했다.[1]
11. 1. 정규 앨범
발매 연도 | 앨범 제목 | 레이블 | 차트 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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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 '11. 2. 컴필레이션 앨범
참조
[1]
CD Liner Notes
An Anthology of Sam & Dave: The Stax Years: 1965 to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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