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페르디낭 다르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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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는 프랑스 왕손으로, 베리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1820년 암살당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망명 생활을 했고, 콩데 군대에서 복무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영국에서 13년간 머물렀으며, 프랑스로 돌아와 나폴레옹 1세가 엘바 섬에서 돌아오자 파리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백일천하 동안 헨트로 물러났다. 1816년 나폴리의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한 명은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샤를 페르디낭은 오페라 하우스를 떠나던 중 암살당했으며, 그의 손자는 프랑스 군사 지휘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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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페르디낭 다르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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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샤를 페르디낭 드 부르봉 |
칭호 | 베리 공작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
사망지 | 부르봉 왕정복고, 파리 |
매장지 | France, Saint-Denis, Basilica of Saint-Denis |
![]() | |
서명 | Undated signature of Charles Ferdinand d'Artois, Duke of Berry.JPG |
가문 | |
왕가 | 부르봉가 |
아버지 | 샤를 10세 |
어머니 | 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아 왕녀 |
혼인과 자녀 | |
배우자 1 | 마리 카롤린 드 부르봉시실리 (1816년 결혼) |
배우자 2 | 에이미 브라운 |
자녀 | 루이즈 엘리자베트 |
경력 | |
작위 | 베리 공작 |
2. 생애
프랑스 왕족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는 1778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당시 아르투아 백작이었던 샤를 필리프와 사르데냐의 마리 테레즈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왕의 직계 아들이 아니었기에 왕손의 지위를 가졌으며,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하여 '아르투아'를 성으로 사용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792년부터 1797년까지 사촌 콩데 공 루이 조제프가 이끄는 반혁명 콩데 군대에 복무하며 1796년 라인 전역 등에서 활동했다.[1] 이후 러시아 군대를 거쳐 1801년부터 영국에서 13년간 망명 생활을 이어갔으며, 이 시기 영국 여성 에이미 브라운 프리먼과 관계를 맺고 두 딸을 두었다. 이 관계는 정식 결혼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2]
1814년 부르봉 왕정복고와 함께 프랑스로 귀국한 그는 개방적인 태도로 일부 호감을 얻었으나, 정치적으로는 1814년 헌장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왕당파, 즉 울트라와 가까웠다. 나폴레옹 1세의 백일천하 시기에는 루이 18세에 의해 파리 주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군의 충성을 얻지 못하고 헨트로 피신하기도 했다.
1816년 양시칠리아 왕국의 프란체스코 1세 국왕의 장녀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와 결혼하여 딸 루이즈 다르투아를 포함한 자녀를 두었다.
1820년 2월 13일,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를 나오던 중 나폴레옹주의자이자 군주정 반대자인 루이 피에르 루벨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7개월 뒤 태어난 아들 앙리는 정통왕조주의자들에 의해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여겨졌다.[3] 샤를 페르디낭의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망명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는 1778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당시 아르투아 백작이었던 샤를 필리프와 사르데냐의 마리 테레즈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왕자의 아들이었으나 왕위 상속자가 아니었기에 왕손의 지위에 있었다. 망명 중에는 아버지의 작위였던 '아르투아'를 성처럼 사용했다. 그의 외조부모는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아버지 아르투아 백작과 함께 프랑스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1792년부터 1797년까지 사촌 콩데 공 루이 조제프가 이끌던 반혁명 군대인 콩데 군대에 합류하여 복무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796년 라인 전역에 참전하여 에멘딩겐 전투와 슐리엔 전투 등에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냈다.[1]
콩데 군대 해산 후 잠시 러시아 군대에 몸담았다가 1801년 영국으로 건너가 13년 동안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그는 영국 여성 Amy Brown Freeman|에이미 브라운 프리먼eng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다. 일부 자료, 예를 들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에서는 그녀를 그의 아내로 기술하기도 했으나,[2] 이 관계는 프랑스 왕가나 가톨릭교회로부터 공식적인 결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2. 2. 프랑스 귀국과 결혼
프랑스 혁명 발발 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를 떠났던 샤를 페르디낭은 1792년부터 1797년까지 사촌 콩데 공 루이 조제프가 이끄는 반혁명 콩데 군대에서 복무했다. 이후 러시아 군대를 거쳐 1801년 영국에 정착하여 13년간 머물렀다. 이 시기 영국 여성 에이미 브라운 프리먼과 관계를 맺고 두 딸을 두었으나, 이 관계는 교회와 국왕으로부터 정식 결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2]1814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의 솔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는 국민들에게 호감을 주었으며, 루이 18세는 나폴레옹 1세가 엘바에서 복귀하자 그를 파리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군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지 못했고, 백일천하 기간 동안 헨트로 물러나야 했다.
1816년 6월 17일, 프랑스 대사 블라카스 공작의 중재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양시칠리아 왕국의 프란체스코 1세 국왕의 장녀인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1798–1870)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아내와의 사이는 좋았다고 전해지나, 코미디 프랑세즈 소속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이 결혼을 통해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딸 루이즈 다르투아(1819년 출생)가 성년까지 생존하여 훗날 파르마의 카를로 3세와 결혼했다.
2. 3. 암살과 유산


1820년 2월 13일, 베리 공작은 아내 마리 카롤린과 함께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를 떠나던 중 칼에 찔리는 치명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했다. 범인은 나폴레옹주의자이자 군주정에 반대하는 안장 제작자 루이 피에르 루벨이었다. 루벨은 1815년의 파리 조약 체결의 책임이 부르봉가에 있다고 여겨 왕가의 혈통을 끊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고 전해진다. 샤를 페르디낭은 1814년 헌장에 반대하며 반동적인 왕당파였던 울트라와 결탁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공작이 사망하기 전 마리 카롤린과의 사이에서 세 자녀가 태어났으나, 딸 루이즈 다르투아(1819년생)만이 유아기를 넘겨 생존했고, 훗날 파르마의 카를로 3세와 결혼했다. 샤를 페르디낭이 사망한 지 7개월 후, 공작 부인 마리 카롤린은 네 번째 아이인 아들 앙리를 낳았다. 앙리는 보르도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역사에서는 샹보르 백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3] 정통왕조주의자들은 그를 1844년부터 1883년까지 프랑스의 정식 국왕 앙리 5세로 간주했다.
한편, 샤를 페르디낭이 영국 망명 시절 평민 여성 에이미 브라운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은 교회와 국왕으로부터 정식 자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샤를 페르디낭 사후, 루이 18세는 이 두 딸에게 각각 비에르종 여백작과 디스당 여백작 작위를 수여하고 연금을 지급하도록 조치했다.
베리 공작의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손자 중 한 명인 아타나즈-샤를-마리 샤레트 드 라 콩트리는 훗날 프랑스 등에서 활동한 군사 지휘관이 되었다.
3. 자녀
베리 공작은 정식 부인인 마리아 카롤리나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자녀는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와 앙리 다르투아 두 명뿐이었다. 또한 여러 명의 사생아를 두었으며, 이들 중 네 명(앙리 다르투아, 페르디낭 오레이 드 카리에르, 샤를 드 라 로슈, 알릭스 멜라니 코스네프로이 드 생-앙주)은 공작이 사망한 후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