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서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봉서원은 1573년 남언경이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도봉산 자락에 세운 사당에서 시작된 서원이다. 1696년부터 송시열의 위패를 함께 모셨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70년 사당이 복원되었다.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하고, 많은 유생들이 학문을 익히던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었으며, 현재는 사당의 기단과 각석군이 남아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울 도봉구의 문화유산 - 연산군묘
연산군묘는 폐위된 조선 10대 왕 연산군의 묘로, 왕릉의 격식을 갖추지 못한 형태로 서울 도봉구에 위치하며, 의정궁주 조씨묘, 휘순공주와 능양위 구운경의 묘 등과 함께 자리하고 있고, 조선왕릉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 - 서울 도봉구의 문화유산 - 서울 천축사 목조불단
서울 천축사 목조불단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소나무 재질의 화려한 수미단 형식 목조 불단으로, 대웅전 중앙에서 석가모니불을 모시며 예배와 의례의 중심 역할을 하고, 왕실 발원 불감의 새로운 조형 형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 보신각
보신각은 조선 시대 한양 도성의 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리던 종루에서 유래하여 고종이 이름을 내린 종각으로, 현재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어 매년 제야의 종 타종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며 한국 전통 범종의 의미를 공유한다. -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 낙성대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 설화에서 유래된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의 관악구 지명으로, 안국사, 낙성대 공원, 삼층석탑 등의 유적지가 있으며 역사적 근거에 대한 논란과 함께 서울대학교를 은유하는 표현으로도 쓰인다.
서울 도봉서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도봉서원과 각석군 | |
국가 | 서울특별시 |
유형 | 기념물 |
번호 | 28 |
지정일 | 2009년 10월 22일 |
주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번지 등 |
시대 | 조선시대 |
면적 | 20,557.4m2 |
문화재청 ID | 23,00280000,11 |
2. 역사
1573년(선조 6) 남언경이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도봉산 자락에 사당을 세우면서 도봉서원이 시작되었다. 1696년(숙종 22)부터는 송시열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 전후로 사당이 재건되었고, 강당은 1630년(인조 8) 이전에 중건되었다.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존경각(尊經閣)은 강당 중건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신축된 것으로 보인다.
도봉서원은 조선 전·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하고, 많은 유생들이 학문을 익히던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었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현재는 1970년 복원된 사당만이 원래의 기단 위에 남아 있다.
2. 1. 건립 배경
1573년(선조 6)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사당 등을 세워 조광조를 모시고 기린 데서 도봉서원이 출발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 따르면 도봉서원이 세워진 터는 원래 영국사(寧國寺)라고 하는 사찰이 있던 곳인데 어느 시기엔가 절은 폐사(廢寺)되었지만 일대가 절의 이름을 따 여전히 영국동(寧國洞)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조광조는 젊었을 때 그곳의 경치를 몹시도 좋아해 자주 찾았고, 조정에 나아가서도 공무(公務)를 마치고 나면 수레를 몰아 찾아가 놀았다 한다.권상하(權尙夏:1641~1721)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본래부터 경기 일원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라고 했고, 이정구(李廷龜:1564~1635)는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고 하면 꼭 도봉산과 삼각산을 말하게 되는데 그 계곡과 수석(水石)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寧國洞)과 중흥동(重興洞)이 가장 뛰어나다.'라고 썼으며, 이식(李植:1584~1647)은 ‘도봉서원은 본래 사찰이 자리잡고 있던 곳인데 경치가 아름답기로 경기(京畿) 안에서 으뜸으로 꼽히고 있으니 이곳에 몸을 담고서 옛 사람의 글을 읽는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 하겠다'라고 하였다.
남언경이 도봉서원을 처음 세웠을 때의 상황과 건물들의 배치 양상은 이이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 가장 상세히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광조가 즐겨 찾던 골짜기를 찾아가 보고 선생의 유적을 애처롭게 생각하던 끝에 지역 선비들에게 자문하여 우러러 사모할 곳을 의논하였는데 모든 사람들의 뜻이 모아져 곧 절터에 사당을 건립하고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고을 사람들이 몸소 참여하고 많은 기술자들이 부지런히 힘써서 다음해(1574년) 여름 사당과 서원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목수의 일은 1574년 거의 다 완성되었지만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는 않은 상황에서 남언경이 질병으로 양주목사를 그만두게 되자 새로운 목사로 오게 된 이제민(李齊閔:1528~1608)과 이정암(李廷馣:1541~1600)이 그 일을 이어받아 추진해 서고(書庫)와 주방(廚房)을 차례로 완성시키니 사우 건립 착수 이후 6년만인 1579년(선조 12) 비로소 서원 전체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2. 2. 초기 역사 (1573년 ~ 1696년)
1573년(선조 6)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사당 등을 세워 조광조를 모시고 기린 데서 도봉서원이 출발하였다. 1696년(숙종 22)부터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위패까지 함께 모셨다.이이(李珥 : 1536~1584)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 따르면, 도봉서원이 세워진 터는 원래 영국사(寧國寺)라고 하는 사찰이 있던 곳인데, 절은 폐사(廢寺)되었지만 일대가 절의 이름을 따 여전히 영국동(寧國洞)으로 불리고 있었다. 조광조는 젊었을 때 그곳의 경치를 좋아해 자주 찾았고, 조정에 나아가서도 공무를 마치고 나면 수레를 몰아 찾아가 놀았다고 한다.
권상하(權尙夏:1641~1721)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본래부터 경기 일원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라 했고, 이정구(李廷龜:1564~1635)는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고 하면 꼭 도봉산과 삼각산을 말하게 되는데 그 계곡과 수석(水石)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寧國洞)과 중흥동(重興洞)이 가장 뛰어나다. 이식(李植:1584~1647)은 ‘도봉서원은 본래 사찰이 자리잡고 있던 곳인데 경치가 아름답기로 경기(京畿) 안에서 으뜸으로 꼽히고 있으니 이곳에 몸을 담고서 옛 사람의 글을 읽는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 하겠다’라고 하였다.
남언경이 도봉서원을 처음 세웠을 때의 상황과 건물들의 배치 양상은 이이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 상세히 나와 있다. 1573년 남언경이 지역 선비들에게 자문하여 사당을 건립하고 서원을 세웠으며, 고을 사람들이 몸소 참여하고 많은 기술자들이 힘써서 다음해(1574년) 여름 사당과 서원이 완공되었다.
1574년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는 않은 상황에서 남언경이 질병으로 양주목사를 그만두게 되자, 새로운 목사로 오게 된 이제민(李齊閔:1528~1608)과 이정암(李廷馣:1541~1600)이 그 일을 이어받아 추진해 서고(書庫)와 주방(廚房)을 차례로 완성시켰다. 사우 건립 착수 이후 6년만인 1579년(선조 12) 비로소 서원 전체가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조성된 도봉서원은 서울 동쪽 교외의 대유원(大儒院)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규모가 관학(官學)인 성균관(成均館)에 다음 가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몰려들었다.
처음 세워질 무렵의 도봉서원은 일반적인 서원 배치형식을 따르면서도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들을 적절히 배치하였다. 사당은 북쪽에 있었고 그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두었다. 서원은 사당의 남쪽에 있었는데 중간에 강당을 설치하고, 두 개의 협실(夾室)로써 강당의 날개를 삼았다. 행랑채는 계곡가에 있고 행랑채 옆에 문을 세웠다.
2. 3. 중건과 발전 (1696년 ~ 1871년)
1573년(선조 6) 남언경이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도봉산 자락에 사당 등을 세워 도봉서원을 창건했다. 1579년(선조 12) 서고와 주방이 완공되며 서원 전체가 완성되었다. 이후 1696년(숙종 22) 송시열의 위패가 추가로 모셔졌다.도봉서원은 영국사(寧國寺)라는 사찰이 있던 터에 세워졌으며,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경기 지역에서 으뜸으로 꼽혔다. 이이의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 따르면, 초기 도봉서원은 사당, 동재, 서재, 강당,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사당은 1608년 전후로 재건되었으며, '정로사(靜老祠)'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강당은 1630년(인조 8) 이전에 중건되었으며, '계개당(繼開堂)'이라 불렸다. 1759년 영조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이라 쓴 어필 현판을 하사했다. 강당 북쪽 벽에는 송시열의 「제도봉서원(題道峯書院)」 시가 걸려 있었다.
존경각(尊經閣)은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곳으로, 강당 중건과 비슷한 시기에 신축되었다. 강당 남쪽 계곡에는 누각인 침류당(枕流堂)이 있었는데, 1582년(선조 15) 이전에 건립되었고 1615년(광해군 7) 동루가 증축되었다. 침류당 맞은편에는 광풍당(光風堂)이 있었는데, 유생들이 주로 거처하는 공간이었다.
강당 서쪽 시내 위에는 무우대(舞雩臺)가 있었고, 동쪽에는 영귀문(咏歸門)이 있었다. 1653년 여름 큰 홍수로 무우대와 영귀문이 유실되자, 윤봉구가 침류당 남쪽 빈터에 영귀문을, 절벽 꼭대기에 무우대를 다시 세웠다. 무우대 맞은편에는 모정(茅亭)인 소광정(昭曠亭)이 세워졌다.
도봉서원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2. 4. 훼철과 복원 (1871년 ~ 현재)
도봉서원은 학덕이 높은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역 인재들을 교육하던 지방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오늘날 서울 지역 내에는 도봉서원ㆍ사충서원ㆍ노강서원ㆍ민절서원ㆍ구암서원 등 총 5개의 서원이 분포했다. 그 가운데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1574년(선조 7)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광조를 모시기 위해 사당 등을 세워 시작되었고, 1696년(숙종 22)부터 송시열의 위패까지 함께 모시던 서원이다.이이의 「도봉서원기」에 따르면 도봉서원이 세워진 터는 원래 영국사(寧國寺)라고 하는 사찰이 있던 곳인데, 어느 시기엔가 절은 폐사(廢寺)되었지만 일대가 절의 이름을 따 여전히 영국동(寧國洞)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조광조가 젊었을 때 그곳의 경치를 좋아해 자주 찾았고, 조정에 나아가서도 공무(公務)를 마치고 나면 수레를 몰아 찾아가 놀았다고 한다.
남언경이 도봉서원을 처음 세웠을 때의 상황과 건물들의 배치 양상은 이이의 「도봉서원기」에 가장 상세히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이 조광조가 즐겨 찾던 골짜기를 찾아가 보고 선생의 유적을 애처롭게 생각하던 끝에 지역 선비들에게 자문하여 우러러 사모할 곳을 의논하였는데 모든 사람들의 뜻이 모아져 곧 절터에 사당을 건립하고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고을 사람들이 몸소 참여하고 많은 기술자들이 부지런히 힘써서 다음해(1574년) 여름 사당과 서원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조성된 도봉서원은 서울 동교(東郊 : 동쪽 교외)의 대유원(大儒院)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규모가 관학(官學)인 성균관에 다음 가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수해 등을 거치면서 몇 차례 중건(重建)되고 또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면서 배치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당과 함께 훼손된 강당은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쓴 「도봉서원 강당 중건 상량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사우 중건 때까지 강당이 폐허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당이 다시 세워지는 1608년 이후, 그리고 상량문을 쓴 이경석이 세상을 떠나는 1671년(현종 12) 이전까지는 강당 중건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선 짐작할 수 있는데, 윤순거(尹舜擧:1596~1668)의 「도봉서원 석지기(道峯書院 石池記)」를 보면 윤순거가 경오년(庚午年)에 도봉서원을 방문하여 강당과 침류당을 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바 경오년인 1630년(인조 8)에 강당은 이미 중건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존경각(尊經閣)은 서원 초창 당시에는 재력이 부족해 세우지 못하고 조선 후기에 비로소 세워졌는데 강당의 중건 상량문을 쓴 이경석이 존경각의 상량문〔도봉서원 존경각 상량문(道峯書院 尊經閣 上梁文)〕을 함께 쓴 것을 보면 강당 중건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신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도봉서원은 조선 전ㆍ후기를 대표하는 두 유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하고, 도성의 많은 유생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학문을 익혔으며,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오늘날 서울 지역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었지만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단행한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현재는 원래의 기단 위에 1970년 복원한 사당만이 남아 있으나 도봉서원의 터임은 도봉서원 관련 옛 사료들의 기록과 동 기록에 등장하는 바위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상태이다.
도봉서원은 조선 전ㆍ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配享: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냄)한 사액서원(賜額書院: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으로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오늘날 서울 지역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다. 비록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적의 대부분이 멸실되었으나 서울 지역 내 다른 서원과 달리 사당의 기단과 옛 사료상의 도봉서원 유적으로 소개된 각석군(刻石群)이 서원 터 앞 계곡에 대부분 원형대로 남아 있어 유적의 경계를 비교적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3. 주요 건물 및 시설
3. 1. 정로사(靜老祠)
3. 2. 강당 (계개당(繼開堂))
3. 3. 동재(습시재(習時齋))와 서재(의인재(依仁齋))
3. 4. 존경각(尊經閣)
3. 5. 침류당(枕流堂)과 광풍당(光風堂)
3. 6. 무우대(舞雩臺)와 영귀문(永歸門)
3. 7. 소광정(昭曠亭)
4. 도봉서원 각석군
4. 1. 주요 각석
5. 문화재적 가치
도봉서원은 조선 전ㆍ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配享: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냄)한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ㆍ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오늘날 서울 지역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다.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적의 대부분이 멸실되었으나 서울 지역 내 다른 서원과 달리 사당의 기단과 옛 사료상의 도봉서원 유적으로 소개된 각석군(刻石群)이 서원 터 앞 계곡에 대부분 원형대로 남아 있어 유적의 경계를 비교적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유적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각종 문헌이나 시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히던 경승지(景勝地)에 해당하므로 보존가치가 크다. 따라서 도봉서원과 통합된 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도봉동문(道峰洞門)에서 복호동천(伏虎洞天)까지의 계곡, 그리고 이들 계곡 안팎에 분포하고 송시열 등 명필들의 글씨 또는 시문이 새겨진 각석(刻石)들을 일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 보존하고자 한다.
6. 지정 현황
도봉서원은 조선 전ㆍ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配享: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냄)한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백사 이항복 등 저명한 시인ㆍ묵객들이 시문을 남긴 오늘날 서울 지역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다.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적의 대부분이 멸실되었으나 서울 지역 내 다른 서원과 달리 사당의 기단과 옛 사료상의 도봉서원 유적으로 소개된 각석군(刻石群)이 서원 터 앞 계곡에 대부분 원형대로 남아 있어 유적의 경계를 비교적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유적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각종 문헌이나 시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히던 경승지(景勝地)에 해당하므로 보존가치가 크다. 따라서 도봉서원과 통합된 경관을 형성하고 있는 도봉동문(道峰洞門)에서 복호동천(伏虎洞天)까지의 계곡, 그리고 이들 계곡 안팎에 분포하고 송시열 등 명필들의 글씨 또는 시문이 새겨진 각석(刻石)들을 일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 보존하고자 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