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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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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예수의 비유로, 율법학자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자 예수께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답하며 제시한 이야기이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중 강도를 만나 상처 입은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외면했지만, 사마리아인은 자비를 베풀어 돌보았다는 내용이다. 이 비유는 종교적, 사회적 차이를 넘어선 진정한 이웃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며, 다양한 해석과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 또한, 예술 작품과 대중문화에서 널리 다루어지고 있으며, 법적인 측면에서도 '선한 사마리아인 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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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개요
에메 모로의 '선한 사마리아인'
에메 모로의 "선한 사마리아인" (1880).
정보
유형비유
포함된 성경누가 복음 10:25–37
관련된 예수의 가르침황금률, 가장 큰 계명

2. 내용

누가 복음 10장에서, 이 비유는 가장 큰 계명이라고 알려진 질문으로 시작된다.[2]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를 시험하여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라고 물으셨다.[2] 율법학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답했고,[2] 예수는 "옳게 대답했다. 그대로 행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 율법학자가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2] 예수는 이야기로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어 거의 죽게 된 채로 버려졌다.[3]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갔고, 레위인도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갔다.[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하게 여겨,[3]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 주었다.[3]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3]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아 드리리다.'라고 말했다.[3]

예수는 율법학자에게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고,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3]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다.[3]

2. 1. 성경 본문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선생님,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예수께서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시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다. 그렇게 행하여라.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사는 자기 입장을 변호하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했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어 거의 죽게 된 채로 버려졌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고,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는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는 곳을 지나가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다가가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를 감아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다음날 그는 데나리온 두 닢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갚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했고,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2. 2. 줄거리

누가 복음 10장에서, 이 비유는 가장 큰 계명이라고 알려진 질문으로 시작된다.[2]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를 시험하여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라고 물으셨다.[2] 율법학자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답했고,[2] 예수는 "옳게 대답했다. 그대로 행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 율법학자가 "그러면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2] 예수는 이야기로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입어 거의 죽게 된 채로 버려졌다.[3]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갔고, 레위인도 그를 보고 길 반대편으로 지나갔다.[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하게 여겨,[3]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 주었다.[3]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3]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아 드리리다.'라고 말했다.[3]

예수는 율법학자에게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고,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3]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다.[3]

3. 역사적 배경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성전의 직무를 맡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는 자였으며, 레위인은 이스라엘 12 지파 중 하나로 제사장에게 걸맞은 부족으로서 임무를 수행했지만, 예수 시대에는 제사장 직무의 역할이 세분화되면서 레위인은 제사장의 하위 계급이 되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이라고 불리게 된 역사가 있다. 솔로몬 왕의 죽음 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유다 왕국사마리아를 수도로 하는 북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그 후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했다. 얼마 남지 않은 사마리아인은 아시리아인의 피가 섞인 더러운 이스라엘인으로 남유다 왕국의 유대인에게 멸시받으며 게리짐 산에 신전을 세웠다. 그 후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은 바빌로니아 제국에 점령되어 함락된다. 바빌로니아는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 50년간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수도 바빌론에서 살게 했다(제2차 바빌론 포로). 그 후 유대인은 귀환이 허락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파괴된 성전의 재건에 힘썼다. 그렇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친척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꺼리는 관계가 예수 시대까지 이어졌다.[18]

3. 1.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

예수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위험하고 험난하기로 악명이 높았으며, "강도들이 사람들을 강탈하면서 그곳에서 자주 피가 흘렀기" 때문에 "피의 길"로 알려졌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그의 암살 전날, 이 길을 비유의 배경으로 사용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굽이진 길이어서 매복하기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예루살렘은 해발 약 1,200 미터이고, 여리고는 해발 2,200 미터 아래에 위치하여 15분에서 20분 만에 이동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예수 시대의 로마 유대 속주 지도. 여리고는 사해 바로 북쪽에 있으며, 예루살렘은 서쪽에 있다.

3. 2.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관계

예수 시대에 유대인사마리아인은 서로 극심한 반목 관계에 있었다.[18]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아시리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혈통이 더럽혀졌다고 멸시했고, 게리짐 산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파괴하기도 했다. 사마리아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혐오했다. 1세기 초, 사마리아인들이 유월절예루살렘 성전을 사람 뼈로 더럽힌 사건은 양측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율법학자가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자"(누가복음 10:37)[4]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은 사마리아인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솔로몬 왕 사후 이스라엘남유다 왕국북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었는데,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했다.[18] 남유다 왕국의 유대인들은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 남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멸시했다.[18]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후에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은 계속되었다.[18]

예수는 이러한 적대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을 이웃 사랑의 모범으로 제시함으로써 당시 유대인들의 편견을 깨뜨리고 진정한 이웃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3. 3. 제사장과 레위인

유대 문화에서 시신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게 여겨졌다. 특히 제사장들은 부정을 피하도록 명령받았다.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쓰러진 여행자가 죽었다고 짐작하고, 의례적으로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를 피했을 수 있다. 반면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의 내리막길 여행 묘사는 그들의 성전 임무가 이미 완료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미쉬나는 방치된 시신에 대한 예외를 두었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시신을 만지거나 무시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반대편으로 지나가는 것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성전의 직무를 맡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는 자였으며, 레위인은 이스라엘 12 지파 중 하나로 제사장에게 걸맞은 부족으로서 임무를 수행했지만, 예수 시대에는 제사장 직무의 역할이 세분화되면서 레위인은 제사장의 하위 계급이 되었다.

4. 해석

오리게네스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내려가던 사람은 아담이다. 예루살렘은 낙원이고, 여리고는 세상이다. 강도는 적대 세력이다. 제사장은 율법이고, 레위인은 선지자이며,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이다. 상처는 불순종이고, 짐승은 주의 몸이며,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여관]은 교회이다. [...] [여관]의 관리인은 교회의 머리이며, 그 관리가 맡겨져 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구세주의 재림을 나타낸다.

존 웰치는 이러한 해석이 초기 기독교 전체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가르쳐졌으며, 이레네우스, 클레멘트, 오리게네스가 옹호했고, 4, 5세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크리소스톰,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옹호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해석은 부르주와 상스의 프랑스 대성당에 있는 두 개의 중세 스테인드글라스 창에서 가장 완벽하게 찾아볼 수 있다.

6세기의 로사노 복음서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머리 주변에 십자가를 든 후광은 비유적 해석을 나타낸다. 첫 번째 장면에는 천사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비유적 해석은 동방 정교회에서도 전통적으로 사용된다. 존 뉴턴은 "선한 사마리아인은 얼마나 친절한가"라는 찬송가에서 비유적 해석을 언급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얼마나 친절한가

:강도들에게 떨어진 사람에게!

:그리하여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영혼이 받는 상처를 치유하신다.

정교회의 기도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있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와 주의 거룩한 계명에서 벗어나 예리코의 욕심에 이르렀으며, 생명의 염려에 이끌려 강도의 생각에 닿아, 이들에게서 아들로서의 은총의 옷을 벗겨지고 상처투성이로 기운을 잃은 자와 같이 누웠습니다. 제사장이 와서 상처를 보고 돌보지 않았고, "레위인"도 꺼려 지나갔습니다. 오직 주 하느님, 동정녀로부터 말씀하시기 어려운 몸을 취하신 주 하느님, 주의 구원의 옆구리에서 흘리신 피와 물을 기름과 같이 제 상처에 붓고, 그것을 치유하시어 자비하심으로 저를 천상의 모임에 합하게 하소서.

여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서 강도에게 습격당한 "어떤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죄에 빠진 자신을 나타내고,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상처의 치유는 교회에서의 성사를 나타낸다는 해석 등이 반영되어 있다.

로버트 펑크는 예수의 유대인 청중들이 강도질을 당하고 상처 입은 사람과 동일시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미움을 받는 사마리아인에게서 받는 도움은 예상치 못한 출처에서 은혜로 받는 하나님의 왕국과 같다고 보았다.

윤리적 해석은 종교적, 민족적, 사회적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이웃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10][11][12] 존 칼빈은 이 비유를 통해 "인류는 거룩한 매듭으로 묶여 있다"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되며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0] 프랜시스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동료 인간을 배제하고 믿는 형제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본보기를 따를 것을 촉구했다.[10]

G. B. 케어드와 조엘 B. 그린 등 현대 신학자들은 이 비유가 "누구든지" 이웃이 될 수 있으며, 사랑의 행동은 제한이 없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10] 특히 그린은 예수께서 "정결-거룩 행렬"을 뒤집어 사회적 부랑자에 대한 배려를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했다고 강조한다.[10]

해방 신학과 인도의 달리트 신학은 이 비유를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관점에서 해석한다.[10] 해방 신학은 이 비유를 통해 "연대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도달"을 강조하며,[10] 달리트 신학은 "소외된 달리트들에게 생명을 주는 메시지와 비달리트들에게 도전적인 메시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0]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이 비유를 통해 사회 구조적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언젠가 우리는 삶의 고속도로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구타당하고 강탈당하지 않도록 예리코 길 전체를 변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0] 즉, 진정한 연민은 단순한 자선을 넘어 사회 구조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불평등 해소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가톨릭 교회의 유스투스 크네히트는 이 비유를 통해, 죄와 악마에게 상처 입은 인류를 그리스도가 치유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12]

마틴 가드너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이 비유를 인종차별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소개한다.[32][33][34] 가드너는 당시 미국에서 경멸받던 소수 민족이었던 사마리아인을 언급하며, 당시 사회상에 맞게 "사마리아인 대신 흑인을 놓았을 때 비로소 당신은 이 비유의 의미를 당시 그리스도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해한 대로 이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32]

킹은 흑인 차별의 실태로, 흑인 대학생 농구팀의 교통사고 사례를 들며, 구급대원과 의사가 인종을 이유로 도움을 거부했던 사례를 비판하며,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은 그를 우선 인간으로 보았을 뿐이며, 그것이 우연히 유대인이었을 뿐이다."라고 지적했다.[32]

또한 킹은 "에이브러햄 링컨은 '만약 내가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고, 사유 노예제에 종지부를 찍는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만약 내가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국가와 엄청난 수의 흑인들은 어떻게 될까.'라고 질문했다."[33]라고 지적했다. 또한 여리고 가는 길은 치안이 좋지 않은 "위험한 길"이었다고 지적한 뒤, "레위인은 '만약 내가 여행자를 돕기 위해 멈춘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을 가졌고, 사마리아인은 반대로 '만약 내가 여행자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을 가졌다."[34]라고 말했다.

개신교에서는 이 비유를 이신칭의와 연결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려는 유대교 율법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볼 때 여전히 불충분하지만 자기 의로움의 오류를 논파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21]

새뮤얼 닉슨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세인트 폴 교회에 전시되어 있다.(핼리팩스, 노바스코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 외에도,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종교적 관용이 중요한 메시지였다고 제안한다. 예수는 유대인 청중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을 도덕적 주인공으로 선택함으로써 종교적 차이를 경시하고 도덕성과 선행에 집중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예수가 반 기성 체제 메시지, 특히 종교적 위선 거부를 전달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멸시받는 종교인의 고귀한 행위와 유대교 종교 기득권층인 제사장, 레위인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행위를 대조함으로써 종교적 계층에서의 지위나 성경 지식보다 종교적 원칙의 실천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현대 유대교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사랑의 명령이며 유대교의 기본 원리라고 본다. 1906년 ''유대 백과사전''의 "형제애" 기사에 따르면,[13]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웃"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강도에게 붙잡힌 사람들을 구출한 친절한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못한 제사장 및 레위인과 대조된다. 본래 "이스라엘인"이었던 것을 반유대교 복음서 저자가 "사마리아인"으로 대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암시한다.

유대교 교사들은 "이웃"이라는 용어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Tanna debe Eliyahu R. xv.에는 "네 이웃은 네 형제와 같고, 네 형제는 네 이웃과 같다"라고 적혀 있다. 16세기의 아론 벤 아브라함 이븐 하임, 카발리스트인 하임 비탈, 18세기의 모세 하기스 등은 율법의 이웃 사랑이 이스라엘인과 비 이스라엘인을 모두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1869년 라이프치히 시노드와 1885년 독일-이스라엘 회중 연합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사랑의 명령이며 유대교의 기본 원리라고 선언했다.

예수 세미나는 이 비유가 진실이라고 투표했으며, 펠로우의 60%가 이를 "빨간색"(진실)으로, 29%가 "분홍색"(아마 진실)으로 평가했다. 싫어하는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돕는 역설은 예수의 도발적인 비유의 전형이며, 이 비유의 의도적인 특징이다. 헬라어 본문에서 사마리아인의 등장은 33절 문장의 시작 부분에서 강조된 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예수 세미나의 멤버인 버나드 브랜든 스콧은 비유의 맥락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비유가 원래 이웃 사랑에 대한 질문과는 별도로 유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가복음 12:28–34와 마태복음 22:34–40,에 변호사의 질문이 존재한다는 점과, 누가의 광범위한 편집 증거를 들어 비유와 그 맥락이 "누가에 의해 편집적으로 결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시사한다. 다른 많은 논평가들도 이러한 의견을 공유하고 있으며, 예수 세미나의 합의는 누가복음 10:36–37절이 누가에 의해 "변호사의 질문과 연결하기 위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랍비들의 예리한 관심"은 누가가 질문이 제기되는 다른 사건을 설명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의 타당성을 무효화할 수 있다. 복음서 간의 차이점은 누가복음이 마가와 마태와는 다른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음을 시사하며, 클라인 스노드그래스는 "누가가 원래 분리된 두 개의 이야기를 결합했음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설득력이 없다"고 적고 있다.

조셉 할레비는 이 비유가 원래 "제사장, 레위인, 이스라엘인"을 포함했으며, 당대의 유대 이야기와 일치하며, 누가가 이방인 청중에게 더 친숙하도록 비유를 변경했다는 것을 제안했다. 할레비는 또한 실제 생활에서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과 예리코 사이의 길에서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낮았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유대 영토에서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윌리엄 C. 플래처는 그러한 논쟁이 비유의 성경적 장르를 잘못 해석한다고 지적하며,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도덕적 요점을 설명한다. 그는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때 예루살렘-예리코 고속도로 순찰대의 경찰 기록과 대조해 보려는 경향이 없다. 우리는 예수가 도덕적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며, 그러한 이야기는 종종 실제 사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이야기가 할레비가 제안한 대로 당시 유대 이야기의 제사장-레위인-이스라엘인 순서를 따랐다면, 전통적으로 이해되는 이야기의 윤리적 도덕은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경우, 그것은 논의 중인 레위기 19:18 계명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이스라엘 내 관계를 다루었을 것이다.

에메 모로의 '선한 사마리아인'(1880)은 부상자를 여관으로 데려가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묘사하고 있다.

4. 1. 우의적 해석

오리게네스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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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웰치는 이러한 해석이 초기 기독교 전체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가르쳐졌으며, 이레네우스, 클레멘트, 오리게네스가 옹호했고, 4, 5세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크리소스톰,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옹호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해석은 부르주와 상스의 프랑스 대성당에 있는 두 개의 중세 스테인드글라스 창에서 가장 완벽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비유적 해석은 동방 정교회에서도 전통적으로 사용된다. 존 뉴턴은 "선한 사마리아인은 얼마나 친절한가"라는 찬송가에서 비유적 해석을 언급했다.

{{시 인용구|

선한 사마리아인은 얼마나 친절한가

강도들에게 떨어진 사람에게!

그리하여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영혼이 받는 상처를 치유하신다.

}}

정교회의 기도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서 강도에게 습격당한 "어떤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죄에 빠진 자신을 나타내고,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상처의 치유는 교회에서의 성사를 나타낸다는 해석 등이 반영되어 있다.

로버트 펑크는 예수의 유대인 청중들이 강도질을 당하고 상처 입은 사람과 동일시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미움을 받는 사마리아인에게서 받는 도움은 예상치 못한 출처에서 은혜로 받는 하나님의 왕국과 같다고 보았다.

4. 2. 윤리적 해석

윤리적 해석은 종교적, 민족적, 사회적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이웃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10][11][12] 존 칼빈은 이 비유를 통해 "인류는 거룩한 매듭으로 묶여 있다"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되며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0] 프랜시스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동료 인간을 배제하고 믿는 형제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본보기를 따를 것을 촉구했다.[10]

G. B. 케어드와 조엘 B. 그린 등 현대 신학자들은 이 비유가 "누구든지" 이웃이 될 수 있으며, 사랑의 행동은 제한이 없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10] 특히 그린은 예수께서 "정결-거룩 행렬"을 뒤집어 사회적 부랑자에 대한 배려를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했다고 강조한다.[10]

해방 신학과 인도의 달리트 신학은 이 비유를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관점에서 해석한다.[10] 해방 신학은 이 비유를 통해 "연대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도달"을 강조하며,[10] 달리트 신학은 "소외된 달리트들에게 생명을 주는 메시지와 비달리트들에게 도전적인 메시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0]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이 비유를 통해 사회 구조적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언젠가 우리는 삶의 고속도로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구타당하고 강탈당하지 않도록 예리코 길 전체를 변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0] 즉, 진정한 연민은 단순한 자선을 넘어 사회 구조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유스투스 크네히트는 이 비유를 통해, 죄와 악마에게 상처 입은 인류를 그리스도가 치유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12]

마틴 가드너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이 비유를 인종차별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소개한다.[32][33][34] 가드너는 당시 미국에서 경멸받던 소수 민족이었던 사마리아인을 언급하며, 당시 사회상에 맞게 "사마리아인 대신 흑인을 놓았을 때 비로소 당신은 이 비유의 의미를 당시 그리스도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해한 대로 이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32]

킹은 흑인 차별의 실태로, 흑인 대학생 농구팀의 교통사고 사례를 들며, 구급대원과 의사가 인종을 이유로 도움을 거부했던 사례를 비판하며,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은 그를 우선 인간으로 보았을 뿐이며, 그것이 우연히 유대인이었을 뿐이다."라고 지적했다.[32]

또한 킹은 "에이브러햄 링컨은 '만약 내가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고, 사유 노예제에 종지부를 찍는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만약 내가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국가와 엄청난 수의 흑인들은 어떻게 될까.'라고 질문했다."[33]라고 지적했다. 또한 여리고 가는 길은 치안이 좋지 않은 "위험한 길"이었다고 지적한 뒤, "레위인은 '만약 내가 여행자를 돕기 위해 멈춘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을 가졌고, 사마리아인은 반대로 '만약 내가 여행자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을 가졌다."[34]라고 말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이 비유를 이신칭의와 연결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려는 유대교 율법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볼 때 여전히 불충분하지만 자기 의로움의 오류를 논파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21]

4. 3. 기타 해석

새뮤얼 닉슨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세인트 폴 교회에 전시되어 있다.(핼리팩스, 노바스코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 외에도,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종교적 관용이 중요한 메시지였다고 제안한다. 예수는 유대인 청중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을 도덕적 주인공으로 선택함으로써 종교적 차이를 경시하고 도덕성과 선행에 집중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예수가 반 기성 체제 메시지, 특히 종교적 위선 거부를 전달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멸시받는 종교인의 고귀한 행위와 유대교 종교 기득권층인 제사장, 레위인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행위를 대조함으로써 종교적 계층에서의 지위나 성경 지식보다 종교적 원칙의 실천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현대 유대교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사랑의 명령이며 유대교의 기본 원리라고 본다. 1906년 ''유대 백과사전''의 "형제애" 기사에 따르면,[13]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웃"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강도에게 붙잡힌 사람들을 구출한 친절한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못한 제사장 및 레위인과 대조된다. 본래 "이스라엘인"이었던 것을 반유대교 복음서 저자가 "사마리아인"으로 대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암시한다.

유대교 교사들은 "이웃"이라는 용어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Tanna debe Eliyahu R. xv.에는 "네 이웃은 네 형제와 같고, 네 형제는 네 이웃과 같다"라고 적혀 있다. 16세기의 아론 벤 아브라함 이븐 하임, 카발리스트인 하임 비탈, 18세기의 모세 하기스 등은 율법의 이웃 사랑이 이스라엘인과 비 이스라엘인을 모두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1869년 라이프치히 시노드와 1885년 독일-이스라엘 회중 연합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사랑의 명령이며 유대교의 기본 원리라고 선언했다.

4. 4. 역사적 진실성

예수 세미나는 이 비유가 진실이라고 투표했으며, 펠로우의 60%가 이를 "빨간색"(진실)으로, 29%가 "분홍색"(아마 진실)으로 평가했다. 싫어하는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돕는 역설은 예수의 도발적인 비유의 전형이며, 이 비유의 의도적인 특징이다. 헬라어 본문에서 사마리아인의 등장은 33절 문장의 시작 부분에서 강조된 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예수 세미나의 멤버인 버나드 브랜든 스콧은 비유의 맥락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비유가 원래 이웃 사랑에 대한 질문과는 별도로 유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가복음 12:28–34와 마태복음 22:34–40,에 변호사의 질문이 존재한다는 점과, 누가의 광범위한 편집 증거를 들어 비유와 그 맥락이 "누가에 의해 편집적으로 결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시사한다. 다른 많은 논평가들도 이러한 의견을 공유하고 있으며, 예수 세미나의 합의는 누가복음 10:36–37절이 누가에 의해 "변호사의 질문과 연결하기 위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랍비들의 예리한 관심"은 누가가 질문이 제기되는 다른 사건을 설명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의 타당성을 무효화할 수 있다. 복음서 간의 차이점은 누가복음이 마가와 마태와는 다른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음을 시사하며, 클라인 스노드그래스는 "누가가 원래 분리된 두 개의 이야기를 결합했음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설득력이 없다"고 적고 있다.

조셉 할레비는 이 비유가 원래 "제사장, 레위인, 이스라엘인"을 포함했으며, 당대의 유대 이야기와 일치하며, 누가가 이방인 청중에게 더 친숙하도록 비유를 변경했다는 것을 제안했다. 할레비는 또한 실제 생활에서 사마리아인이 예루살렘과 예리코 사이의 길에서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낮았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유대 영토에서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윌리엄 C. 플래처는 그러한 논쟁이 비유의 성경적 장르를 잘못 해석한다고 지적하며,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도덕적 요점을 설명한다. 그는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때 예루살렘-예리코 고속도로 순찰대의 경찰 기록과 대조해 보려는 경향이 없다. 우리는 예수가 도덕적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며, 그러한 이야기는 종종 실제 사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이야기가 할레비가 제안한 대로 당시 유대 이야기의 제사장-레위인-이스라엘인 순서를 따랐다면, 전통적으로 이해되는 이야기의 윤리적 도덕은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경우, 그것은 논의 중인 레위기 19:18 계명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이스라엘 내 관계를 다루었을 것이다.

5. 은유와 명칭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용어는 자선을 베푸는 사람, 어려움에 처한 낯선 사람을 돕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은유로 사용된다. 이 명칭은 자살 방지 단체 사마리탄스(Samaritans (charity)), 사마리탄의 지갑(Samaritan's Purse), 선한 사마리아 수녀회(Sisters of the Good Samaritan), 홍콩 사마리탄 친구들(The Samaritan Befrienders Hong Kong)과 같은 여러 자선 단체, 그리고 굿 사마리탄 병원 (동음이의어)(Good Samaritan Hospital (disambiguation))과 같은 병원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레거시 굿 사마리탄 메디컬 센터(Legacy Good Samaritan Medical Center)와 같이 많은 병원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가르침은 레거시 굿 사마리탄 메디컬 센터(Legacy Good Samaritan Medical Center)와 같이 많은 병원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게 했다.


선한 사마리아인 법(Good Samaritan law)은 부상당하거나 아픈 사람을 돕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보호한다. 현재 미국 등에서 도입된 선한 사마리아인 법은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선의로 행동을 한 경우, 구조 결과에 중대한 과실이 없으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취지의 법이다.

6. 예술과 대중문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중세 미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묘사하는 우화적인 해석이 자주 삽화로 그려졌으며, 동방 정교회의 성상에서는 십자가가 새겨진 후광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임을 명확히 나타내기도 했다.

이 비유를 묘사한 수많은 후대 예술 작품에는 렘브란트, 얀 비난츠, 빈센트 반 고흐, 에메 모로, 도메니코 페티, 요한 카를 로트, 조지 프레데릭 와츠, 자코모 콘티 등이 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은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강조하는 역전된 계층 구조를 담아내고 있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위 서열의 최상위에 있었고 사마리아인은 최하위에 있었지만, 반 고흐는 그림에서 이 계층을 뒤집었다.

생화학자이자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는 에세이 ''번역의 오류''에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그의 견해로는 이것이 비유의 절반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시모프는 이 이야기를 1950년 알라바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비유하며, 시장과 목사가 구타당하고 강도질을 당한 사람을 무시하는 가운데, 가난한 흑인 소작농이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한다고 예를 들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마블 데어데블'' 전체에 걸쳐 묘사된다. 또한, 2003년 3월 12일에 주조된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자선 기념 주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주화는 부상당한 남자를 말에 태우고 치료를 위해 여관으로 데려가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보여준다. 이 주제를 다룬 오래된 주화는 1652년에 발행된 미국의 "선한 사마리아인 실링"이다.

호주 시인 헨리 로슨은 이 비유에 관한 시("선한 사마리아인")를 썼다. 존 가디너 칼킨스 브레이너드 또한 이 주제에 관한 시를 썼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각색한 드라마 영화로는 현대적 맥락을 설정한 단편 영화 ''사마리아인''(2006)이 있다.[17]

영국의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은 적십자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칸타타 미제리코르디움을 작곡했는데, 이 곡은 파트릭 윌킨슨이 쓴 라틴어 텍스트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담고 있으며 1963년 제네바에서 초연되었다.

1973년 이전에 실제 심리학 실험에서, 이 비유를 가르치기 위해 서두르던 여러 신학교 학생들이 길가에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진 사람을 돕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7. 법적 영향

영국 과실법에서 과실의 의무를 확립할 때, ''도노휴 대 스티븐슨'' 사건에서 애트킨 경은 이웃 원칙을 적용했는데, 이는 황금률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다. 현재 미국 등에서 도입된 선한 사마리아인 법은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선의로 행동을 한 경우, 구조 결과에 중대한 과실이 없으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취지의 법이다.

참조

[1] 성경 Luke 10:25–37
[2] 성경 Luke 10:25–29
[3] 성경 Luke 10:30–37
[4] 성경 Luke 10:37
[5] 성경 Leviticus 19:18
[6] 성경 Luke 17:11–19
[7] 성경 Luke 9:51–56
[8] 성경 Matthew 10:5–8
[9] 성경 2 Chronicles 28:8–15
[10] 성경 John 5:25
[11] 서적 Ninety-nine Homilies of S. Thomas Aquinas Upon the Epistles and Gospels for Forty-nine Sundays of the Christian Year Church Press Company
[12] 서적 A Practical Commentary on Holy Scripture B. Herder
[13] 웹사이트 Brotherly Love http://jewishencyclo[...]
[14] 성경 Mark 12:28–34
[15] 성경 Matthew 22:34–40
[16] 성경 Luke 10:36–37
[17] 웹사이트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n Interview With Thomas Purifoy http://www.holidayat[...] 2009-01-31
[18] 서적 イエスのたとえ話
[19] 서적 "[[路加福音書注解]]" "{{NDLDC|825713/1}}" 明治27年12月
[20] 서적 新約聖書 "[[講談社]]"
[21] 서적 "[[新聖書注解]] 新約 1" "[[いのちのことば社]]" 1973
[22] 서적 ルカによる福音書 "[[サンパウロ出版]]" 1975
[23] 문서 正教会による注解『路加福音書注解』(前掲)では「全律法の神髄」とまで言い表されている。
[24] 서적 ルカによる福音書 改訂新版
[25] 서적 イエスのたとえ話
[26] 서적 イエスの譬話
[27] 웹사이트 教皇ベネディクト十六世の2010年7月11日の「お告げの祈り」のことば よいサマリア人 https://www.cbcj.cat[...] 2018-09-12
[28] 간행물 貧しい人々との連帯 -カトリック教会における新しい問題意識の覚醒- http://www.ic.nanzan[...] 1983-02
[29] 서적 ルカによる福音書 改訂新版
[30] 서적 キリスト教神学事典 教文館 2005
[31] 서적 新約聖書注解 1 マタイによる福音書 - 使徒言行録 新共同訳 "[[日本基督教団]]出版局" 1991
[32] 서적 汝の敵を愛せよ 新教出版社 1974-05-31
[33] 서적 汝の敵を愛せよ 新教出版社 1974-05-31
[34] 웹사이트 “I’ve Been to the Mountaintop” by Dr. Martin Luther King, Jr. https://www.afscme.o[...] 1968-04-03
[35] 웹사이트 第11話「善きサマリア人」The Good Samaritan (No. 106) http://www.superdram[...]
[36] 성경 Luke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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