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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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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혜청은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경기도에 대동법이 실시될 때 경기청과 상평청을 병합하여 설치된 조선 후기의 재정 기관이다. 여러 도에 대동법이 확대되면서 대동청을 흡수하고 균역청을 산하에 두어 호조를 능가하는 최대 재정 기관이 되었다. 물가 조절과 진휼 모곡을 담당하는 상평청, 진구를 전담하는 진휼청, 균역법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균역청 등이 선혜청에 속했다. 선혜청은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겸직하는 도제조, 제조, 낭청 등으로 구성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대동법 폐지와 함께 혁파되었으며, 청사는 현재 서울특별시 세종로의 남대문시장 자리에 있었다.

2. 연혁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대동법이 실시될 때 경기청과 상평청을 병합하여 선혜청이 설치되었다. 지방에는 경기·강원·호서·호남·영남·해서에 8개 지청(支廳)을 두었다.

여러 도(道)에 대동법이 확장 실시됨에 따라 시책 및 사무 일원화를 위해 해당 도(道)의 대동청을 흡수하여 확대되었으며, 균역청까지 산하에 둠으로써 조선 후기에서 가장 비대한 재정 기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산하의 각 청은 전반적인 시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당 청(廳)의 낭청(郎廳)에 의해 독립적으로 사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물가조절과 진휼모곡(賑恤耗穀)을 겸했던 상평청(常平廳), 진구(賑救)를 전담했던 진휼청(賑恤廳), 균역법(均役法)에서의 군관포(軍官布)와 결작미(結作米) 및 어·염·선세(魚鹽船稅) 등을 관리했던 균역청(均役廳)이 순차로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호조를 능가하는 최대 재정기관이 되었다.

선혜청은 조선 말까지 존속하다가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대동법의 폐지와 함께 혁파되었다.

2. 1. 설치와 확장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대동법이 실시될 때 경기청과 상평청을 병합하여 선혜청이 설치되었다. 여러 도(道)에 대동법이 확장 실시됨에 따라 시책 및 사무 일원화를 위해 해당 도(道)의 대동청을 흡수하여 확대되었으며, 균역청까지 산하에 둠으로써 조선 후기에서 가장 비대한 재정 기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산하의 각 청은 전반적인 시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당 청(廳)의 낭청(郎廳)에 의해 독립적으로 사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지방에는 경기·강원·호서·호남·영남·해서에 8개 지청(支廳)을 두었다. 물가조절과 진휼모곡(賑恤耗穀)을 겸했던 상평청(常平廳), 진구(賑救)를 전담했던 진휼청(賑恤廳), 균역법(均役法)에서의 군관포(軍官布)와 결작미(結作米) 및 어·염·선세(魚鹽船稅) 등을 관리했던 균역청(均役廳)이 순차로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호조를 능가하는 최대 재정기관이 되었다.

2. 2. 폐지

대동법경기도에 실시될 때 경기청과 상평청을 병합하여 발족한 관청인 선혜청은 여러 도(道)에 대동법이 확장 실시됨에 따라 시책 및 사무 일원화를 위해 해도(該道)의 대동청을 흡수하여 확대되어 갔다. 균역청까지 산하에 둠으로써 조선 후기에서 가장 비대한 재정 기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물가조절과 진휼모곡(賑恤耗穀)을 겸했던 상평청(常平廳), 진구(賑救)를 전담했던 진휼청(賑恤廳), 균역법(均役法)에서의 군관포(軍官布)와 결작미(結作米) 및 어·염·선세(魚鹽船稅) 등을 관리했던 균역청(均役廳)이 순차로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호조를 능가하는 최대 재정기관이 되었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대동법의 폐지와 함께 혁파되었다.

3. 기능

3. 1. 주요 기능

3. 2. 산하 관청

4. 조직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겸직하는 정1품 도제조(都提調) 3명과 종2품 이상 관원이 겸직하는 제조(提調) 3명(1명은 호조판서 겸직), 그리고 종6품 낭청(郎廳)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4. 1. 관원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겸직하는 정1품 도제조(都提調) 3명과 종2품 이상 관원이 겸직하는 제조(提調) 3명(1명은 호조판서 겸직), 그리고 종6품 낭청(郎廳)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4. 2. 독립성

5. 청사 및 창고

선혜청 청사는 현재 서울특별시 세종로에 있는 숭례문 동편의 남대문시장 자리에 있었다. 대동법 폐지로 선혜청이 혁파되자 숭례문 주변 길가에 있던 시장이 선혜청 안쪽으로 이전되었다. 선혜청 청사는 선혜청 관원이 근무하는 상대청(上大廳)과 부속 건물인 하대청(下大廳), 신대청(新大廳) 등 10여 동의 건물 및 경기고(京畿庫), 강원고(江原庫) 등 80여 칸의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혜청 본청은 숭례문 남동쪽에 있었으며, 본청에는 내청고(內廳庫)라는 창고가 있었다. 이외에도 별창(別倉)은 소의문 안에, 남창(南倉)은 주자동(鑄子洞)에, 북창(北倉)은 삼청동(三淸洞)에 있었다. 용산(龍山)에는 강창(江倉)이 있었고, 그 뒤에는 예전 진휼청 창고였던 구진창(舊賑倉)이 있었다. 만리현(萬里峴)에는 신창(新倉)이,[1] 창의문 밖 탕춘대(蕩春臺)에는 평창(平倉)이 있었다. 예전 장용영 창고였던 동창(東倉)은 이현(梨峴)에 있었다.[2]

5. 1. 청사

선혜청 청사는 현재 서울특별시 세종로에 있는 숭례문 동편의 남대문시장 자리에 있었다. 대동법 폐지로 선혜청이 혁파되자 숭례문 주변 길가에 있던 시장이 선혜청 안쪽으로 이전되었다. 선혜청 청사는 선혜청 관원이 근무하는 상대청(上大廳)과 부속 건물인 하대청(下大廳), 신대청(新大廳) 등 10여 동의 건물 및 경기고(京畿庫), 강원고(江原庫) 등 80여 칸의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혜청 본청은 숭례문 남동쪽에 있었으며, 본청에는 내청고(內廳庫)라는 창고가 있었다. 이외에도 별창(別倉)은 소의문 안에, 남창(南倉)은 주자동(鑄子洞)에, 북창(北倉)은 삼청동(三淸洞)에 있었다. 용산(龍山)에는 강창(江倉)이 있었고, 그 뒤에는 예전 진휼청 창고였던 구진창(舊賑倉)이 있었다. 만리현(萬里峴)에는 신창(新倉)이,[1] 창의문 밖 탕춘대(蕩春臺)에는 평창(平倉)이 있었다. 예전 장용영 창고였던 동창(東倉)은 이현(梨峴)에 있었다.[2]

5. 2. 창고

선혜청 청사는 숭례문 동편의 남대문시장 자리에 있었으며, 경기고(京畿庫), 강원고(江原庫) 등 80여 칸의 창고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청 소재 창고인 내청고(內廳庫) 외에 별창(別倉)은 소의문 안에, 남창(南倉)은 주자동(鑄子洞)에, 북창(北倉)은 삼청동(三淸洞)에 있었다. 강창(江倉)은 용산(龍山)에 있었고, 그 뒤에 예전 진휼청 창고였던 구진창(舊賑倉)이 있었다. 신창(新倉)은 만리현(萬里峴)에,[1] 평창(平倉)은 창의문 밖 탕춘대(蕩春臺)에, 동창(東倉)은 이현(梨峴)에 있었으며 예전 장용영 창고였다.[2]

참조

[1] 설명
[2]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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