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설후는 동오의 관리로, 촉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촉의 멸망을 예견했다. 위남장군에 이르렀으며, 교지 원정에 참여했으나, 교지 정복 후 귀환 도중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71년 사망 - 배수 (서진)
배수는 위나라와 서진 시대의 관료이자 지리학자로, 사마소의 신임을 얻어 서진 건국에 기여했으며, 지도 제작의 기본 원칙인 제도육체를 정립하고 《우공지역도》를 제작하여 중국 지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 271년 사망 - 곽익
곽익은 촉한에서 서진 시대까지 유비와 유선을 섬긴 인물로, 촉한 멸망 후 위나라에 귀순하여 남중 지역을 다스리고 교지 평정에 기여한 공로로 열후에 봉해졌다. - 동오의 장군 - 사일
사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초 교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정궁을 보좌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합포 태수를 역임했으나, 손권에게 귀순 후 사휘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며 격변기의 사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 동오의 장군 - 미방
미방은 유비 휘하에서 활약하다 관우와의 불화로 손권에게 투항하여 오나라 장수가 되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에게 항복하려다 처형당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설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설후 |
원어 이름 | 薛珝 |
직위 | 위남장군 (威南將軍) |
사망 시기 | 기원후 271년경 (추정) |
관직 경력 | |
오관중랑장 (五官中郎將) | 손휴 시기 |
장작대장 (將作大匠) | 기원후 267년, 손호 시기 |
위남장군 (威南將軍) | 손호 시기, 기원후 271년경 사망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설종 |
형제 | 설영 |
2. 생애
설후는 경제 때 오관중랑장을 지냈으며, 촉한에 사신으로 가서는 촉의 폐정 실태를 보고했다.[10] 관직은 위남장군에 이르렀다.[9]
건형 원년(269년) 11월, 우사, 창오 태수 도황과 함께 위남장군 · 대도독[11]으로서 형주에서 출발하여 교지를 치러 갔다.[12] 진나라의 교지태수 양직(楊稷)과 싸워 패배한 도황을 꾸짖고 회군하려 했으나, 도황이 구진태수 동원(董元)을 습격하여 보물을 뺏어 오자 사례했다.[11]
건형 3년(271년), 도황, 우사와 함께 교지군을 함락시켰으나,[11][12] 귀환 도중 병사했다.[9]
2. 1. 초기 생애와 촉한 파견
설후의 본관은 죽읍현(竹邑縣), 패군(沛郡)에 있었으며, 현재의 쑤저우 근처이다. 그는 동오의 저명한 관리이자 학자였던 설종의 장남이었다.동오의 세 번째 황제 손휴 (재위 258년 ~ 264년) 통치 기간 동안, 설후는 오 정부에서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 직책을 맡았다. 손휴는 한때 그를 오의 동맹국인 촉한에 사신으로 보냈다.[1] 설후는 촉한에 사신으로 가서, 귀국 후 손휴에게 촉의 통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주군은 어둡고 어리석어 자신의 과오를 알지 못하며, 신하들 또한 보신에 급급하여 죄를 피하려 합니다. 성도의 조정에 참배해도 정론은 들리지 않고, 시골을 돌아다녀도 민중들은 안색을 잃었습니다. 처마에 사는 제비 어미와 새끼가 자신들의 안전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서까래가 타기 시작해도 제비는 마음이 들뜬 채 재난의 도래를 깨닫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아닐까요?"[5] 그는 촉의 상황을 관찰한 후, 촉이 곧 멸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263년, 조위가 촉과 오의 경쟁 국가인 촉을 정복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촉은 위나라에 의해 멸망했다.[5]
2. 2. 장작대장 임명과 청묘 건설
267년, 오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인 손호는 설후를 장작대장(將作大匠)으로 임명하여, 황제의 아버지인 손화의 능묘와 사당 건설을 감독하게 하였다.[1]2. 3. 교지 원정과 전사
경제 시절 설종의 아들 설후는 오관중랑장을 지냈으며, 촉에 말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경제가 촉의 정치를 묻자 그 폐정의 실태를 말했다.[10] 관위는 위남장군에 이르렀다.[9]건형 원년(269년) 11월, 우사, 창오 태수 도황과 함께 위남장군 · 대도독[11]으로서 형주에서 출발하여 교지를 치러 갔다.[12] 진나라의 교지태수 양직(楊稷)과 싸워 지자 꾸짖고 회군하려 했으나, 도황이 구진태수 동원(董元)을 습격하여 보물을 뺏어 돌아오자 사례했다.[11]
손호는 교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설후에게 형주에서 병력을 이끌고 합포군(현재 광시 좡족 자치구 합포현 북동쪽)에서 이욱과 서존이 이끄는 또 다른 군대와 합류하여 반란군을 함께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유사는 군 감찰관이었고, 도황은 창오군(蒼梧郡)의 태수로 설후의 부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욱과 서존이 이끄는 군대는 경로가 막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고, 설후가 이끄는 군대만이 반란군과 싸울 수 있었다. 당시 하급 관리였던 오염은 설후의 군대가 교지군으로 진격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2]
서진의 곽익은 교지군 태수 양직, 장군 모경, 구진군 태수 동원 등을 파견하여 익주에서 교지로 침입하게 하여 대도독 수칙, 교주 자사 유준을 참수했다. 설후는 위남장군, 대도독에 임명되어 우사, 도황과 함께 분수의 땅에서 양직의 진공을 막게 되었다[6].
절을 지팡이 삼아 남정을 향해 나아가는 설후의 진용은 매우 훌륭하여, 당시 하급 관리였던 오언을 동경하게 만들었다[7].
도황이 패배하여 두 장군을 잃자 설후는 화를 내며 "너는 적을 토벌하겠다고 상소를 올렸으면서 두 장군이나 잃었다. 누구의 책임인가?"라고 말했다. 도황이 "부하들이 작전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졌습니다."라고 변명하자 설후는 더욱 화를 내며 철수하려 했다. 이 때문에 도황은 동원을 야습하여 재물을 빼앗아 왔다. 설후는 겨우 사과하고 도황에게 교주를 관장하게 했다[8].
건형 3년(271년), 도황과 우사와 함께 교지군을 함몰했으나,[11][12] 귀로에 병사했다.[9] 설후는 도황의 제안에 따라 수로를 통해 교지군을 공격하고, 량기(梁奇)와 기타 교지의 지역 엘리트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을 포섭했다.[3] 271년, 설후의 군대는 교지군을 정복하고 구진과 일남 군을 탈환했다.
교주 원정 후, 손호는 유사를 교주의 자사(刺史)로 임명했지만, 유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고, 도황이 그의 뒤를 이었다. 설후 또한 오의 수도 건업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했다.[4] 이후에도 도황 등의 활약이 있어 마침내 교지의 판도 회복에 성공했다.[8] 그러나 설후는 교지 제압에서 귀환하는 도중 병에 걸려 사망했다.[5]
3. 가계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Jin Shu
[3]
서적
Jin Shu
[4]
서적
Sanguozhi
[5]
서적
『薛綜伝』
[6]
서적
『孫晧伝・晋書陶璜伝』
[7]
서적
『晋書吾彦伝』
[8]
서적
『晋書陶璜伝』
[9]
서적
삼국지
[10]
서적
한진춘추
[11]
서적
진서
[12]
서적
삼국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