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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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종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맹상군의 후예이며, 뛰어난 문장가이자 외교관이었다. 어려서 교주로 피난하여 학문을 닦았으며, 사섭이 손권에게 귀순한 후 오나라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합포 태수, 교지 태수를 역임했다. 여대를 따라 교주를 안정시키고, 손권의 총애를 받아 요동 정벌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말년에는 태자소부를 지냈으며, 저서로 《사재》, 《오종도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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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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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薛綜 (Xue Zong) |
한국어 이름 | 설종 |
로마자 표기 | Seol Jong |
자 | 敬文 (Jingwen) |
출생 | 생년 미상 |
출생지 | 예주 패군 죽읍현 |
사망 | 243년 |
직업 | 시인, 정치인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설서 설영 |
관직 | |
태자소부 | 242년 – 243년 |
선조상서 | 240년 – 242년 |
상서복야 | ? – 240년 |
적조상서 | 232년 – ? |
장사 | 손려 휘하, 231년 – 232년 |
알자복야 | 220년대 – 231년 |
오관중랑장 | 재임 기간 미상 |
섬긴 군주 | |
군주 | 손권 |
관련 인물 | |
승상 | 고옹 |
알자복야 재임 당시 승상 | 손소 (222–225) 고옹 (225년 이후) |
2. 출신
설종의 선조는 설읍에 봉해진 제나라의 맹상군이다.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면서 맹상군의 제사도 끊기고 자손은 각지로 흩어졌다. 전한이 중국을 통일한 후, 맹상군의 자손을 찾아 능(陵)과 국(國)이라는 사람을 찾아 봉해주려 했다. 능과 국 형제는 서로 추천하고 받지 않고 죽읍으로 떠나, 옛 봉읍을 따라 성을 “설”이라 했다. 설종은 국의 후예다.[4]
설종은 어려서 교주로 피란하여 유희(劉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3] 사섭이 손권에게 복종한 후, 손권의 부름을 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합포·교지태수를 역임하고, 여대를 따라 구진군까지 정벌에 참여했다.[3] 이후 서울로 돌아와 알자복야가 되었다.[3]
3. 생애
촉에서 온 사신과의 외교적인 논쟁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오나라의 위신을 높였다.[3] 강표전에 기록된 또 다른 일화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3] 여대가 교주자사를 마치자 후임자 선정의 중요성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는 당시 교주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3]
황룡 3년(231년), 손려의 장사가 되었고, 가화 원년(232년) 손려 사후에는 적조상서, 상서복야를 역임했다.[3] 공손연 토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3] 손권의 명으로 특별한 축조문을 지어 문장 실력을 인정받았다.[3]
적오 3년(240년), 고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오히려 선조상서로 승진했다.[3] 적오 5년(242년) 태자소부가 되어 황태자 손화를 보좌했고, 이듬해 봄에 사망했다.[3]
3. 1. 초기 생애와 학문
어려서 교주로 피란하여, 유희(劉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3] 사섭이 손권에게 복종한 후, 손권의 부름을 받아 오관중랑장이 되었고, 합포·교지태수를 역임했다.[3] 교주자사 여대를 따라 바다를 건너 남정하여 구진군에까지 이르렀다.[3] 일이 끝나자 서울로 돌아와 알자복야가 되었다.[3]
젊은 시절부터 변설에 뛰어나고, 글에도 능숙했다. 전란을 피해 일족이 살고 있던 교주로 이주하여 유학자인 유희에게 사사했다.
건안 15년(210년), 사섭이 손권에게 귀순했을 무렵부터 손권을 섬겼으며, 오관중랑장이 되었고, 전후하여 합포태수·교지 태수가 되었다.
3. 2. 오나라 임관과 외교 활동
교주에서 학문을 배운 설종은 사섭이 손권에게 복종한 후, 손권의 부름을 받아 오관중랑장이 되었고, 합포·교지태수를 역임했다.[3] 교주자사 여대를 따라 남정하여 구진군까지 진출했다.[3] 이후 서울로 돌아와 알자복야가 되었다.[3]
촉에서 온 사신 장봉(張奉)이 감택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자, 설종은 촉(蜀) 자를 분해하여 조롱하였고, 장봉이 힐문하자 오(吳) 자를 분해하여 오나라를 높였다.[3]
강표전에 따르면, 촉의 비의가 오를 방문했을 때, 비의는 제갈각과 설전을 벌이다 오와 촉의 우열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다. 비의가 "촉(蜀)이라는 글자는 어떤 의미인가"라고 묻자, 설종은 "물이 있으면 흐리고, 물이 없는 것이 蜀입니다. 눈을 가로로 하고(罒) 몸을 굽히고(勹), 배에는 벌레가 들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비의가 "오(吳)라는 글자는 무슨 의미인가"라고 묻자, 설종은 "입이 없으면 天(천)이고, 입이 있으면 吳(오)이다. 백성은 청해(청해)를 마주하고 있으며, 바로 천자의 제국입니다"라고 말했다.[3]
여대가 교주자사를 마치자, 설종은 상소를 올려 후임자 선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상소문은 후한 말 유표와 오거 등의 움직임, 사섭 일가의 몰락, 지방 풍습과 민심 등을 담고 있어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3]
황룡 3년(231년), 건창후 손려가 진군대장군이 되어 반주에 주둔하자 설종은 그의 장사가 되었다.[3] 가화 원년(232년) 손려가 죽자 적조상서를 지내고 상서복야로 전임되었다.[3] 공손연이 오나라에 항복했다가 배반하여 손권이 분노하여 공손연을 치려 하자, 설종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3]
손권은 설종에게 특별한 축조문을 짓도록 명령했고, 설종은 뛰어난 글솜씨로 칭찬을 받았다.[3]
3. 3. 교주 안정에 대한 상소
여대가 중앙으로 돌아가게 되자, 설종은 교주의 사정을 보고하여 후임자가 교주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도록 상소를 올렸다.[3] 이 상소문은 설종전에 남아 있는데, 후한 말 유표와 오거 등의 움직임, 사섭 일가의 몰락, 지방 풍습과 민심 등을 담고 있어, 후한 말기부터 삼국시대 초기의 교주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3]
3. 4. 손려 휘하에서의 활동과 중앙 관직
어려서 교주로 피란하여, 유희(劉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3] 사섭이 손권에게 복종한 후에, 손권의 부름을 받아 오관중랑장이 되었고, 합포·교지태수를 역임했다.[3] 교주자사 여대를 따라 바다를 건너 남정하여 구진군에까지 미쳤다.[3] 일이 끝나자 서울로 돌아와 알자복야가 되었다.[3] 촉에서 온 사신 장봉(張奉)이 감택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자, 설종은 촉(蜀) 자를 분해하여 조롱하였고, 장봉의 힐문을 받자 오(吳) 자를 분해하여 오나라를 높였다.[3]
여대가 교주자사를 마치자, 설종은 여대의 뒤를 이을 자가 없음을 걱정하여 상소를 올렸다.[3] 이 상소문은 설종전에 남아 있는데, 후한 말 유표와 오거 등의 움직임, 사섭 일가의 몰락, 지방 풍습과 민심 등을 담고 있다.[3]
황룡 3년(231년), 건창후 손려가 진군대장군이 되어 반주에 주둔하자 설종은 그 장사가 되었다.[3] 가화 원년(232년) 손려가 죽자 적조상서를 지내고 상서복야로 전임되었다.[3] 공손연이 오나라에 항복했다가 배반하여 손권이 분노하여 공손연을 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3]
손권이 명령을 내려 축조문을 짓되 통용되는 문장을 쓰지 말라고 하자, 설종은 조서에 따라 글을 지었는데 그 언사가 찬란했다.[3] 손권이 이를 보고 2편을 더 지어 3편으로 한 묶음을 만들게 하자, 설종은 이를 모두 완전히 새로 써 칭찬받았다.[3]
적오 3년(240년), 그 자신은 고담에게 사양했으나,[5] 선조상서로 승진했다.[3] 동 5년(242년)에는 태자소부가 되었고, 선조상서의 임무는 계속 겸임했다.[3] 동 6년(243년) 봄에 죽었다.[3]
3. 5. 뛰어난 문장력
어려서 교주로 피란하여, 유희(劉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3] 촉한에서 온 사신 장봉(張奉)이 감택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자, 설종은 촉(蜀) 자를 분해하여 조롱하였고, 장봉의 힐문을 받자 오(吳) 자를 분해하여 오나라를 높였다.[3]
손권이 명령을 내려 축조문을 짓되 통용되는 문장을 쓰지 말라고 하자, 설종은 조서에 따라 글을 지었는데 그 언사가 찬란했다.[3] 손권이 이를 보고 2편을 더 지어 3편으로 한 묶음을 만들게 하자, 설종은 이를 모두 완전히 새로 써 칭찬받았다.[3]
젊은 시절부터 변설에 뛰어나고, 글에도 능숙했다.
어느 날, 손권이 설종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축사를 단기간에 작성하도록 명령했지만, 설종은 이를 해냈다. 손권이 세 편을 한 세트로 만들기 위해, 더욱 두 편의 축사를 작성하도록 명령했지만, 설종은 이것 또한 완수했다. 세 편 모두 훌륭한 작품이었으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대전의 장면에서 조조에게 항복을 주장하는 신하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제갈량에게 논전을 걸지만 간파당한다. 어느 날 촉한의 사신 장봉이 손권 앞에서 감택의 성명을 분해하여 심술궂은 해석을 붙여 웃음거리로 만들었지만, 감택은 맞받아칠 수 없었다. 이때, 설종은 스스로 술을 따라 돌며 술을 권하는 틈을 타 "촉이란 무엇일까요. 개(犭변)가 있으면 獨(독)이 되고, 개가 없으면 蜀이 됩니다. 잘 보면 눈을 가로로 하고(罒) 몸을 굽히고(勹), 배에는 벌레가 들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봉이 "오(吳)라는 글자도 분해해서 해석해 주지 않겠소?"라고 묻자, 설종은 즉시 "입이 없으면 天(천)이 되고, 입이 있으면 吳(오)가 됩니다. 만방을 군림하고 있으며, 천자의 도읍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손권과 여러 신하들은 기뻐하며 떠들썩했지만, 장봉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과 행동의 민첩함은 모두 이때의 일화와 같았다고 한다.
『강표전』에서는 이야기의 내용과 등장인물이 바뀌어 있다. 촉의 비의가 오를 공식 방문하여 어전에서 알현했을 때, 공경과 시신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술이 나와 연회가 무르익어 갈 무렵, 비의는 제갈각을 상대로 서로 헐뜯는 말을 주고받다가, 화제가 오와 촉의 우열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비의가 "촉(蜀)이라는 글자는 어떤 의미인가"라고 묻자, 설종은 "물이 있으면 흐리고, 물이 없는 것이 蜀입니다. 눈을 가로로 하고(罒) 몸을 굽히고(勹), 배에는 벌레가 들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더 나아가 비의가 "오(吳)라는 글자는 무슨 의미인가"라고 묻자, 설종은 "입이 없으면 天(천)이고, 입이 있으면 吳(오)이다. 백성은 청해(청해)를 마주하고 있으며, 바로 천자의 제국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3. 6. 말년
교주로 피란하여 유희(劉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3] 사섭이 손권에게 복종한 후, 손권의 부름을 받아 오관중랑장이 되었고, 합포·교지태수를 역임했다.[3] 교주자사 여대를 따라 바다를 건너 남정하여 구진군에까지 이르렀다.[3] 일이 끝나자 서울로 돌아와 알자복야가 되었다.[3]
여대가 교주자사를 마치자, 설종은 여대의 뒤를 이을 자가 없음을 걱정하여 상소를 올렸다.[3] 이 상소문은 설종전에 남아 있는데, 후한 말 유표와 오거 등의 움직임, 사섭 일가의 몰락, 지방 풍습과 민심 등을 담고 있다.[3]
황룡 3년(231년), 건창후 손려가 진군대장군이 되어 반주에 주둔하자 설종은 그 장사가 되었다.[3] 가화 원년(232년) 손려가 죽자 적조상서를 지내고 상서복야로 전임되었다.[3] 공손연이 오나라에 항복했다가 배반하여 손권이 분노하여 공손연을 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3]
손권이 명령을 내려 축조문을 짓되 통용되는 문장을 쓰지 말라고 하자, 설종은 조서에 따라 글을 지었는데 그 언사가 찬란했다.[3] 손권이 이를 보고 2편을 더 지어 3편으로 한 묶음을 만들게 하자, 설종은 이를 모두 완전히 새로 써 칭찬받았다.[3]
적오 3년(240년), 그 자신은 고담에게 사양했으나,[5] 선조상서로 승진했다.[3] 동 5년(242년)에는 태자소부가 되었고, 선조상서의 임무는 계속 겸임했다.[3] 동 6년(243년) 봄에 죽었다.[3]
4. 저술
설종은 수만 편의 시, 부, 의론을 남겼으며, 이를 《사재(私載)》라 하였다.[3] 또한 《오종도술(五宗圖述)》을 저술하였고, 장형의 《이경부》를 해석한 《이경해》를 저술하였다.[3]
5. 가계
설종의 가계 | |
---|---|
설종 | 설서 |
설영 | 설겸, 설옹 |
6. 평가
설종은 말과 행동이 민첩하여 다른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하고, 어려운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촉한의 사신 장봉이 손권 앞에서 감택을 놀리자, 설종은 재치 있는 말로 장봉에게 되받아쳤다. 그는 "촉(蜀)이란 글자는 개(犭)가 없으면 蜀이 되는데, 눈을 가로로 하고 몸을 굽힌 채 배에는 벌레가 들어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장봉이 오(吳)나라에 대해서도 묻자, "입이 없으면 天(천)이 되고, 입이 있으면 吳(오)가 되는데, 이는 만방을 군림하고 있는 천자의 도읍"이라고 답하여 좌중을 감탄시켰다.
『강표전』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인물들로 등장한다. 촉의 비의가 오를 방문했을 때, 제갈각과 설전을 벌이다가 오와 촉의 우열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비의가 촉(蜀)의 의미를 묻자, 설종은 "물이 없으면 蜀이고, 눈을 가로로 하고 몸을 굽힌 채 배에 벌레가 들어 있는 모습"이라고 답했다. 비의가 다시 오(吳)의 의미를 묻자, "입이 없으면 天(천)이고, 입이 있으면 吳(오)이며, 백성은 청해(청해)를 마주하고 있는 천자의 제국"이라고 답했다.
참조
[1]
서적
오록
[2]
서적
顧雍伝付顧譚伝
[3]
서적
삼국지
[4]
서적
오록
[5]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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