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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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섬멸전은 적 군대의 완전한 파괴를 목표로 하는 군사 전략으로, 고대부터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초기에는 칸나이 전투, 자마 전투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사용 빈도가 줄었지만, 나폴레옹 전쟁에서 다시 부각되어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예나 전투 등이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후, 미국 남북 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섬멸전의 개념과 전술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의 기동전이 섬멸전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에서 실패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해군은 미국 해군을 섬멸하려 했으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섬멸전 외에도 퇴각, 소모전, 정치적 고려 등 다양한 이유로 섬멸전을 추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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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멸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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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유형 | 군사 전략 |
목표 | 적의 군사적 역량 완전 파괴 |
관련 개념 | 전멸전, 총력전 |
세부 사항 | |
목표 | 적의 군사력, 산업 기반, 인프라 및 사회 구조를 포함한 모든 자원을 파괴하여 적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제거하는 것 |
특징 | 대규모 파괴, 무제한적인 목표 설정, 민간인과 군인 간의 구별 없는 공격, 전쟁 범죄, 인종 청소 |
추가 정보 | |
관련 용어 | 전면전 초토화 작전 대량 학살 테러 |
2. 전멸전의 역사와 의의
나폴레옹 시대의 전략가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섬멸전을 현대 군사 작전의 적절한 목표로 여겼다. 그러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으며, 군사력만으로 절대적인 해결책을 주장하는 이론에는 무관심했다.[1] 리델 하트는 저서 ''전략''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부적절한 단어 선택이 그의 해석자들로 하여금 섬멸전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
처음에는 적군을 섬멸하는 것이 모든 군사 작전의 명백한 목표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전투는 적군이 단순히 퇴각하거나 소모전을 겪도록 하기 위해 치러졌으며, 많은 작전은 그러한 전투를 추구하기보다는 피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섬멸전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그러한 전투와 관련된 위험 및 비용 회피
- 그러한 전투를 시도할 수단 부족
- 다른 수단을 통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
- 통용되는 관행
- 정치적 우려
- 적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선언할 가능성
- 반격에 대한 두려움
2. 1. 고대 및 고전 시대
고대와 고전 시대에는 많은 전투가 상대 군대 중 하나의 전멸로 끝났으며, 칸나이 전투, 자마 전투 및 아드리아노플 전투가 유명한 예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에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전멸 전략이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가장 큰 예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전투에서 나타나는데, 그는 현대적 의미의 전멸 전투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나폴레옹식 전멸 전투"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종종 현대적 전멸 전투의 전형으로 언급된다.[1]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1805)와 예나(1806)에서의 승리는 종종 전멸 전투의 고전으로 꼽힌다. 나폴레옹 자신은 이러한 결정적인 결과를 다시 달성할 수 없었는데, 부분적으로는 그의 적들이 그의 전술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로디노 전투는 승리했지만, 원하는 대로 러시아 군대를 파괴하지는 못했다.[1]
2. 2. 르네상스 시대 이후
고대와 고전 시대에는 많은 전투가 한쪽 군대의 전멸로 끝났으며, 칸나이 전투, 자마 전투, 아드리아노플 전투가 유명하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전멸 전쟁' 전략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예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전투인데, 그는 현대적 의미의 '전멸전투'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나폴레옹식 전멸 전투"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종종 현대적 전멸 전투의 전형으로 언급된다.[1]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1805)와 예나 (1806)에서의 승리는 종종 전멸 전투의 고전으로 꼽힌다. 그러나 나폴레옹 자신은 이러한 결정적인 결과를 다시 달성할 수 없었는데, 그의 적들이 그의 전술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로디노 전투는 승리했지만, 러시아 군대를 파괴하지는 못했다.[1]
나폴레옹 시대의 전략가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섬멸전을 현대 군사 작전의 적절한 목표로 여겼다. 헬무트 폰 몰트케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인용문을 통해 섬멸 전략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으며, 군사력으로 절대적인 해결책을 주장하는 이론에 무관심했다. 리델 하트는 저서 ''전략''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부적절한 단어 선택이 그의 해석자들이 섬멸전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많은 최고 군사 지휘관들은 섬멸전이 전쟁을 신속하게 종식시킬 것이라고 잘못 예상했다. 그러나 군대의 규모와 화력은 섬멸전을 달성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
남부 연합의 로버트 E. 리 장군은 공격 시 섬멸전을 강요하려는 의도로 기동했다.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고전적인 나폴레옹식 측면 기동으로 조셉 후커 휘하의 북부군을 패배시켰지만 파괴할 수는 없었다. 리는 특히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섬멸전을 시도하려 한 것에 대해 비난받을 수 있다. 반면, 북부 연합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은 빅스버그 포위전 동안 존 C. 펨버턴의 군대를 전투 없이 항복해야 하는 포위 위치로 몰아넣었다. 1864년 리에 대한 버지니아 전역에서 그는 리를 계속 기동하여 남쪽으로 후퇴하게 만들었고, 결국 리는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를 포기하거나 포위선으로 후퇴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존 벨 후드의 군대를 파괴하려는 대신 남부 연합 경제에 직접 작전을 펼치기로 선택했다. 그의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은 나폴레옹식 전략의 정반대였다.[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로이센(그리고 나중에는 독일)은 신속한 병력 이동과 적의 포위 공격을 통해 전체 군대를 비교적 빠르게 파괴함으로써 섬멸전의 자체 버전을 만들었다. 메츠 포위전과 세당 전투에서 두 개의 주요 프랑스 군대가 동시에 섬멸되어 프랑스는 독일의 침략에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1]
나폴레옹의 이상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여전히 살아 있었다. 독일군은 전쟁 개시 몇 주 동안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 제2군을 상대로 섬멸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부 전선에서 그러한 결과를 만들려는 시도는 엄청난 학살을 초래했다. 군대는 측면을 돌릴 만큼 너무 컸고, 공격으로 파괴될 수 없을 정도로 화력과 방어력이 강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대가 수백 마일에 걸쳐 비교적 연속적인 선으로 배치되면서 섬멸전은 주로 역사적인 관심사로 간주된다.[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로이센이 실행한 전술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기동전에 영감을 주었고, 고도로 기동적인 부대가 적의 약점을 향해 돌진하여 적 포위망을 포위하고 파괴함으로써 섬멸전을 수행했다. 이 전술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소련 침공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3], 벨로루시, 베를린 전투에서 소련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 제국 해군의 전략은 미국 태평양 함대를 단 하나의 결정적인 섬멸전으로 유인하여 미국이 평화를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진주만 공격과 미드웨이 해전이 이러한 전략의 일부였지만, 일본 해군은 공격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동안 느슨하게 따랐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모든 병력을 단 하나의 전투에 투입하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일본 해군은 단일 대규모 결전에 집중하여 해상 보급선 보호를 소홀히 했다. 산타크루즈 제도 해전과 같은 일본의 승리조차도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했다. 결국 "결정적인 전투"는 오지 않았고, 일본 해군은 소모되었다.
2. 3. 나폴레옹 이후 시대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전멸 전쟁' 전략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전투에서 예외적으로 나타났다. "나폴레옹식 전멸 전투"라는 용어가 사용될 정도로, 나폴레옹은 현대적 의미의 전멸 전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현대 전멸 전투의 모범으로 자주 인용된다.[1]아우스터리츠 (1805)와 예나 (1806)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는 고전적인 전멸 전투의 예시로 꼽힌다. 그러나 나폴레옹 자신도 적들이 그의 전술에 적응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결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보로디노 전투는 승리했지만 러시아 군대를 파괴하지는 못했다.[1]
나폴레옹 시대의 전략가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섬멸전을 현대 군사 작전의 적절한 목표로 여겼다. 그러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으며, 군사력만으로 절대적인 해결책을 주장하는 이론에는 무관심했다.[1] 리델 하트는 클라우제비츠의 부적절한 단어 선택이 그의 해석자들로 하여금 섬멸전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많은 최고 군사 지휘관들은 섬멸전이 전쟁을 신속하게 종식시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군대의 규모와 화력은 섬멸전을 달성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남부 연합의 로버트 E. 리 장군은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고전적인 나폴레옹식 측면 기동으로 북부군을 패배시켰지만 파괴할 수는 없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섬멸전을 시도하려 한 것에 대해 비난받을 수 있다. 반면, 북부 연합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은 빅스버그 포위전에서 존 C. 펨버턴의 군대를 전투 없이 항복하게 만들었고, 1864년 버지니아 전역에서 리를 계속 기동시켜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를 포기하거나 포위선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남부 연합 경제에 직접적으로 작전을 펼치는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통해 나폴레옹식 전략의 정반대 전략을 펼쳤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로이센(이후 독일)은 신속한 병력 이동과 적의 포위 공격을 통해 전체 군대를 비교적 빠르게 파괴하는 섬멸전 전술을 만들었다. 메츠 포위전과 세당 전투에서 두 개의 주요 프랑스 군대가 동시에 섬멸되어 프랑스는 독일의 침략에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군은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 제2군을 상대로 섬멸전을 수행했지만, 서부 전선에서는 군대의 크기와 화력, 깊은 방어력으로 인해 섬멸전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대는 수백 마일에 걸쳐 연속적인 선으로 배치되어 섬멸전은 주로 역사적인 관심사로 간주될 수 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로이센이 실행한 전술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기동전에 영감을 주었다. 고도로 기동적인 부대가 적의 약점을 향해 돌진하여 적 포위망을 포위하고 파괴함으로써 섬멸전을 수행했다. 이 전술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소련 침공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3], 벨로루시, 베를린 전투에서 소련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 제국 해군은 미국 태평양 함대를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섬멸전으로 유인하여 미국이 평화를 추구하도록 강요하려 했다. 진주만 공격과 미드웨이 해전의 동기 중 일부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미국 해군은 모든 병력을 단일 전투에 투입하는 것을 경계했고, 일본 해군은 해상 보급선 보호를 소홀히 했다. 산타크루즈 제도 해전과 같은 일본의 승리조차도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했고, 일본 해군은 서서히 소모되었다.
2. 4.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나폴레옹 시대의 전략가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섬멸전을 현대 군사 작전의 목표로 여겼다. 이러한 해석은 헬무트 폰 몰트케 (대)에 의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에게 귀속되었으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을 수 있으며, 군사력을 통한 절대적인 해결책을 주장하는 이론에는 무관심했다.[1] 리델 하트는 클라우제비츠의 단어 선택이 그의 해석자들로 하여금 섬멸전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미국 남북 전쟁 당시 많은 최고 군사 지휘관들은 섬멸전이 전쟁을 신속하게 종식시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군대의 규모와 화력은 섬멸전을 달성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남부 연합의 로버트 E. 리 장군은 섬멸전을 강요하려는 의도로 기동했으나,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조셉 후커 휘하의 북부군을 패배시켰지만 파괴할 수는 없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섬멸전을 시도하려 한 것에 대해 비난받을 수 있다. 반면, 북부 연합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은 빅스버그 포위전 동안 존 C. 펨버턴의 군대를 전투 없이 항복하게 만들었고, 1864년 버지니아 전역에서 리를 계속 기동하여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를 포기하거나 포위선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존 벨 후드의 군대를 파괴하려는 시도보다는 남부 연합 경제에 직접 작전을 펼치는 것을 선택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로이센은 신속한 병력 이동과 적의 포위 공격을 통해 전체 군대를 비교적 빠르게 파괴하는 섬멸전의 자체 버전을 만들었다. 메츠 포위전과 세당 전투에서 두 개의 주요 프랑스 군대가 동시에 섬멸되어 프랑스는 독일의 침략에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독일군은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 제2군을 상대로 섬멸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부 전선에서 그러한 결과를 만들려는 시도는 엄청난 학살을 초래했다. 군대는 이제 측면을 돌릴 만큼 너무 컸고, 공격으로 파괴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화력과 너무 깊은 방어력을 갖추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군대가 수백 마일에 걸쳐 비교적 연속적인 선으로 배치되면서 섬멸전은 주로 역사적인 관심사로 간주될 수 있다.
2. 5. 제2차 세계 대전
나폴레옹 시대의 전략가들은 나폴레옹 시대의 섬멸전을 현대 군사 작전의 적절한 목표로 여겼다. 그러나 군대의 규모와 화력은 섬멸전을 달성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미국 남북 전쟁에서 남부 연합의 로버트 E. 리 장군은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조셉 후커 휘하의 북부군을 패배시켰지만 파괴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북부 연합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은 빅스버그 포위전 동안 존 C. 펨버턴의 군대를 전투 없이 항복하게 만들었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통해 남부 연합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 프로이센은 포위 공격을 통해 메츠 포위전과 세당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섬멸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군은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 제2군을 상대로 섬멸전을 수행했지만, 서부 전선에서는 실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은 기동전 전술을 통해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소련 침공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3], 벨로루시, 베를린 전투에서 소련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 제국 해군은 미국 태평양 함대를 단 하나의 결정적인 섬멸전으로 유인하려 했지만, 미국 해군은 모든 병력을 단 하나의 전투에 투입하는 것을 경계했고, 일본 해군은 해상 보급선 보호를 소홀히 했다. 산타크루즈 제도 해전과 같은 일본의 승리조차도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데 실패했고, 일본 해군은 서서히 소모되었다.
3. 전멸전의 대안
처음에는 적군을 섬멸하는 것이 모든 군사 작전의 명백한 목표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전투는 적군이 단순히 퇴각하거나 소모전을 겪도록 하기 위해 치러졌으며, 많은 작전은 그러한 전투를 추구하기보다는 피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섬멸전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그러한 전투와 관련된 위험 및 비용 회피
- 그러한 전투를 시도할 수단 부족
- 다른 수단을 통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
- 통용되는 관행
- 정치적 우려
- 적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선언할 가능성
- 반격에 대한 두려움
참조
[1]
서적
2005
[2]
서적
1991
[3]
간행물
Block by Block: The Challenges of Urban Combat
https://apps.dtic.mi[...]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Press For Leavenworth, KS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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