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군국주의는 전쟁 및 군사력 강화에 중점을 두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군사적 가치에 종속시키려는 사상이나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군사비 지출이 국가 예산의 일정 비율을 넘어서는 사회를 군국주의 사회로 지칭하며, 군국주의는 호전적이고 침략적인 성향을 띠게 하여 국가 정책을 군사 행동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고대 스파르타와 같은 사례가 존재하며, 19세기 중반 이후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독일 제국, 나치 독일, 일본 제국 등이 군국주의 국가로 비판받았으며, 현재는 북한과 러시아가 군국주의적 수법을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각 국가별로 군국주의의 특징과 역사가 다르게 나타나며, 특히 독일, 인도, 일본, 필리핀, 러시아, 터키, 미국, 베네수엘라 등에서 군국주의의 다양한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군국주의 - 경찰국가
경찰국가는 경찰이 강력한 권한으로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국가를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나타났고, 현대에는 전자 기술을 활용한 형태로도 존재하며, 개인의 자유와 국가 안보 사이의 균형에 대한 정치적 관점에 따라 정의가 달라진다. - 군국주의 - 일본 군국주의
일본 군국주의는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일본 사회를 지배한 군부의 팽창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부국강병 정책, 서구 열강 경쟁 의식, 대공황 등의 배경 속에서 내셔널리즘 고조, 사상 통제, 군부의 독립적인 권력 행사 등의 특징을 보이며 침략 전쟁을 일으켰으나 태평양 전쟁 패배로 종말을 맞이했다. - 군사사회학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심각한 외상적 사건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정신 의학적 장애로, 사건의 재경험, 회피, 과각성 등의 증상을 보이며 심리적 외상과 회복력이 발병 및 극복에 영향을 미친다. - 군사사회학 - 무단정치
무단정치는 군 복무 경험자가 통치 권한을 가지며 군대의 권한이 사회적으로 뒷받침되는 정치 체제로, 역사적으로 스파르타, 로마, 고려 무신정권 등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 군사 전략 - 무조건 항복
무조건 항복은 적대 행위의 완전한 중단을 의미하며, 항복하는 측이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항복하는 것을 뜻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에 대한 전쟁 목표로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 군사 전략 - 슐리펜 계획
슐리펜 계획은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양면 전쟁 위협에 대비하여 프랑스를 먼저 신속히 제압한 후 러시아에 대처하려던 전략으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범하여 프랑스 북부를 포위 섬멸하려 했으나, 1차 세계대전에서 여러 요인으로 실패하고 서부 전선 교착 상태를 초래하며 현대 전쟁 계획 수립의 교훈으로 남았다.
군국주의 | |
---|---|
군국주의 | |
![]() | |
개요 | |
설명 | 국가가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군사적 가치를 사회의 중심에 두는 이념 또는 정치 체제 |
특징 | 군사력 강화, 군사적 가치 우선, 애국심 강조, 정부의 군사적 영향력 증대 |
관련 개념 | 군사화, 밀러주의, 천년왕국설 |
어원 | |
영어 | militarism |
독일어 | Militarismus |
일본어 | 軍国主義 (군코쿠슈기) |
역사적 배경 | |
발생 시기 |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나타남 |
주요 원인 | 국가주의, 제국주의 경쟁, 기술 발전 |
20세기 영향 | 세계 대전 발발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 냉전 시대 군비 경쟁 심화 |
군국주의의 특징 | |
군사력 강화 | 국가 예산의 큰 부분을 국방비에 할당 |
군사적 가치 우선 | 사회 전반에서 군사적 가치(용기, 충성심, 복종) 중시 |
애국심 강조 |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헌신 강요 |
정부의 군사적 영향력 증대 | 정부 및 국가 기관의 군사적 영향력 증가 |
사회적 통제 강화 | 언론, 교육 등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 강화 |
군국주의의 영향 | |
긍정적 측면 | 국가 안보 강화 기술 발전 촉진 (군사 기술) |
부정적 측면 | 전쟁 위험 증가 인권 침해 사회적 불평등 심화 민주주의 후퇴 |
현대의 군국주의 | |
형태 | 대규모 군사 훈련 및 무기 개발 국가 간 군비 경쟁 지속 특정 국가의 군사적 행동 |
논란 | 군국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증가 |
비판 | |
주요 비판 | 전쟁을 유발하고 강화하는 주요 원인 사회 전반의 가치를 군사적 관점으로 축소 민주주의 및 인권을 위협 |
비판적 시각 | 평화주의, 인권주의 등에서 군국주의 비판 |
2. 의미
군국주의에 대한 절대적인 정의는 내려져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국가 또는 사회에서 전쟁 및 전쟁 준비를 위한 제도 등이 항구적으로 최고의 자리를 점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민 생활의 다른 모든 영역을 군사적 가치에 종속시키려는 사상 내지 행동 양식을 말한다.
군국주의는 고대 스파르타, 중세 카롤링거 왕조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지만,[36] 19세기 중반 이후 자유주의자 등에 의해 그 해악이 심각하다고 비판받기 시작했다.[35][37]
사회주의자나 공화주의자가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을 비판하면서 '군국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며,[38] 제국주의라는 말도 이 시기에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다.[38]
국제적으로는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라는 비판의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39]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나 전후에는 독일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독일과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로 비판받으며 국제사회로부터 전쟁 책임을 추궁당했다.[35][41]
2024년 현재 선군정치를 내세우는 북한이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군국주의적인 수법을 사용한 러시아를 비난하는 움직임이 있다.
2. 1. 군국주의의 특징
정치학에서는 국가 예산의 10분의 1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할 시, 그 사회를 군국주의 사회라고 지칭한다. 군국주의 체제는 일반적으로 국가 또는 사회에서 전쟁 및 전쟁 준비를 위한 배려와 제도가 반항구적(半恒久的)으로 최고의 자리를 점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민 생활의 다른 전 영역을 군사적 가치에 종속시키려는 사상 내지 행동양식을 보인다.군사 행동은 국가 기능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이 과도하게 중요시될 경우 군국주의가 생겨난다. 군국주의의 폐해는 국가가 호전적·침략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 국가에서 실시하는 모든 정책이 군사 행동과 관련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군국주의에서는 국가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군사력이나 군대 정신이 그 자체 목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고, 군사 체제를 통상의 사태로 보는 특징이 있다. 군국주의는 또 군대의 통수권의 자립·확대에의 지향(志向)에 의하여 정치적 지위의 강화를 목표로 하는 이데올로기 및 운동으로서도 나타난다.
군국주의 국가에서는 군이 국가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군인은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다.[34] 또한, 사회 전체가 군사적으로 조직되고, 사회 구석구석에 군대적인 사상이 스며들어 국가 전체가 마치 병영이 되는 것이다.[35] 따라서, 군국주의 국가는 “병영 국가”라고도 불린다.[35]
1973년, 당시 내각관방부장관 오무라 죠지(大村襄治)는 군국주의 사상을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등의 조직을 전쟁을 위해 준비하고, 전쟁을 통해 국가의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그 때문에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의 모든 면을 군사에 종속시키는 사상”이라고 정의했다.[42]
3. 역사 속의 군국주의
군국주의는 고대부터 존재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35], 중세의 카롤링거 왕조 등이 그 예이다.[36] 그러나 군국주의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그 해악이 심각하다고 자유주의자 등에게 비판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보인다.[35][37]
19세기 중반 사회주의자나 공화주의자가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을 비판하면서 처음 사용되었고,[38] “제국주의”라는 말도 이 시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38]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라며 다른 나라를 비판하는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39]
3. 1. 근현대 군국주의
스파르타와 같이 어린이들도 군사훈련을 받았던 국가, 군인들이 정치에도 간섭한 로마 제국, 전 세계를 정복한 몽골 제국, 군인인 절도사들을 바탕으로 정복전쟁을 했던 고대 중국 당나라 등은 군국주의를 택한 국가로 볼 수 있다.[34]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의 동맹국들과,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의 추축국들도 군국주의 체제를 국가의 주된 목표로 삼았다.[34] 일본 제국에서는 군부가, 독일에서는 나치의 입지가 강해졌기 때문이었다.[34] 이들 국가들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연합국들은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를 탈나치화와 탈 군국주의화로 뿌리뽑고자 하였다.[34]군국주의는 고대부터 존재했지만,[36] 19세기 중반 이후 사회주의자나 공화주의자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을 비판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8]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독일과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로 비판받았다.[40][41]
2024년 현재 선군정치를 내세우는 북한이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군국주의적인 수법을 사용한 러시아를 비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3. 2. 한반도와 군국주의
2024년 현재 북한은 선군정치를 내세우며 군사 우선 정책을 펼치고 있어, 국제 사회로부터 군국주의 국가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35]4. 국가별 군국주의
스파르타와 같이 어린이들도 군사훈련을 받았던 고대 국가들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이었던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 여러 국가들이 군국주의를 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도 군국주의 국가였다. 이들 국가는 전쟁에서 패망한 후 연합국에 의해 탈나치화와 탈 군국주의화 과정을 거쳤다.[34]
군국주의 국가에서는 군인이 존경받고, 사회 전체가 군사적으로 조직되어 '병영 국가'라고 불리기도 한다.[35]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정을 비판하며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으로 여겨지며, 제국주의라는 말도 이 시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38]
국제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 제국, 제2차 세계 대전 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군국주의로 비판받아 전쟁 책임을 추궁당했다.[40][41] 2024년 현재 선군정치를 내세우는 북한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군국주의적인 수법을 사용한 러시아 등이 비판받고 있다.
1973년 당시 일본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이나 국무대신이 군국주의자여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43]
4. 1. 독일
독일의 군국주의는 18세기와 19세기 프로이센과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스 로젠베르크는 그 기원을 중세 후기 프로이센을 식민지화한 튜턴 기사단에서 찾기도 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용병들이 기사단에게서 땅을 받아 점차 군국주의적 프로이센 귀족, 즉 훗날 용커 귀족이 되었다.[3]17세기 "대선제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통치 시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군대를 4만 명으로 늘리고 전쟁 총감독청의 감독 아래 효율적인 군사 행정을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1713년 대규모 군사 개혁을 시작, 연간 군사 지출을 프로이센 전체 예산의 73%까지 늘렸다. 1740년 그가 사망할 무렵 프로이센 군대는 8만 3천 명의 상비군으로 성장했는데, 당시 프로이센 인구가 250만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유럽 최대 규모였다. 프로이센 군사 작가 게오르크 하인리히 폰 베렌호르스트는 훗날 프로이센이 "군대를 가진 나라가 아니라 나라를 가진 군대"였다고 회고했다.[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패배한 후, 프로이센은 군대를 4만 2천 명 이하로 줄여야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부터 시행된 크룸퍼 시스템으로 훈련된 병사를 해고하고 신병으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많은 병력을 유지했다.[5] 군 장교는 대부분 토지 소유 귀족 출신이었다. 이는 전문 장교 계급과 다수의 일반 병사 계급을 형성했고, 징집병들은 장교에게 무조건 복종하도록 훈련받아 계층 기반의 순종 문화를 만들었다.

이 시스템으로 군대의 이익은 국가 전체의 이익과 동일시되었다. 또한 지배 계급은 용커 귀족 계급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1차 세계 대전과 1918년-1919년 독일 혁명으로 독일 군주제가 몰락한 후에도 독일의 군국주의는 계속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 군국주의를 분쇄하려 했음에도,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 시대에 카프 폭동이 일어났다. 이후 과격한 군국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에 가담했고, 온건파는 독일 민족 인민당(DNVP)에 남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군국주의적 민족주의의 위협을 받았다. ''강철 투구''와 같은 우익 군국주의 단체와 프라이코어 같은 민병대가 있었다.[6] 1921년, 라이히스베어는 흑색 라이히스베어를 설립했다.[7] 이들은 돌격대(SA)에 가입했고, 피메 살인 등 정치적 폭력과 바이마르 시대의 내전 분위기에 책임이 있었다.
나치 독일은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였다. 1945년 패배 후 독일 문화의 군국주의는 크게 감소했고, 연합국 통제위원회 등은 독일 군국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해 재교육 프로그램을 감독했다.
현재 독일 연방 공화국은 대규모의 현대적인 군대를 유지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국방 예산을 보유하고 있다. 2019년 기준 GDP의 1.3%인 약 500억 달러로, 영국, 프랑스, 일본과 비슷하다.[8]
4. 2. 인도

인도의 군사주의 부상은 영국령 인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이끄는 인도 국민군과 같은 인도 독립 운동 단체들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인도 국민군(INA)은 일본 제국의 도움을 받아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를 점령한 후 영국령 인도에 압력을 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도 국민회의의 지지 부족, 임팔 전투, 보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 운동은 힘을 잃었다.
1947년 독립 이후, 카슈미르 분쟁 및 기타 문제를 둘러싼 이웃 파키스탄과의 긴장으로 인해 인도 정부는 군사적 대비 태세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인도의 정치 통합 참조). 1962년 중-인도 전쟁 이후, 인도는 군사력을 급격히 확장하여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9] 인도는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에서 세 번째 아시아 국가가 되었으며, 1998년 실험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카슈미르 반군과 카르길 전쟁을 포함한 최근 사건들은 인도 정부가 군사력 확장에 계속해서 전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쟁 지역인 자무와카슈미르는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 중 하나로 여겨진다.[10]
최근 몇 년 동안 인도 정부는 14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한 군대 전 부문에 걸쳐 군사비 지출을 증가시켰고, 급속한 현대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11][12]
4. 3. 일본
20세기 독일 군국주의와 병행하여, 일본 군국주의는 군부가 일본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된 일련의 사건들로 시작되었다. 이는 15세기 일본 전국 시대(센고쿠 시대)에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당시 강력한 무장 다이묘들이 일본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일본 근대화 이전 수 세기 동안의 고대 사무라이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쇼군 시대에 군국주의적 철학이 내재되어 있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민족주의적 군국주의가 발전하여 천황의 권력이 회복되고 일본 제국이 시작되었다. 이는 1882년 육군 해군에 대한 칙서에서 모든 군인이 천황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잘 나타난다.[13]
20세기(약 1920년대)에는 두 가지 요인이 군부의 권력과 내부 혼란에 기여했다. 하나는 "현역 장교 군사 장관법"으로, 일본 제국 육군(IJA)과 일본 제국 해군(IJN)이 육군성의 입장에 동의해야만 내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이것은 명목상 의회 국가에서 군부에 어떤 내각 구성에도 거부권을 부여한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게코쿠조" 즉, 하급 장교들의 제도화된 복종 거부였다.[13] 급진적인 하급 장교들이 상관을 암살하는 등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1936년, 이 현상은 2·26 사건으로 이어졌는데, 하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여 일본 정부 주요 인사들을 살해했다. 이 반란에 히로히토 천황은 분노하여 진압을 명령했고, 군부의 충성스러운 구성원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은 일본 경제에 타격을 주었고, 일본 군부 내 급진 세력에게 아시아 전체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실현할 기회를 주었다. 1931년, 관동군(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이는 만주 침략과 일본의 괴뢰 국가 만주국 성립으로 이어졌다. 6년 후, 베이징(북경) 외곽의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은 중일 전쟁(1937~1945)을 촉발했다. 일본군은 중국으로 진격하여 북경, 상하이, 수도 난징을 점령했으며, 난징 점령 이후에는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다. 1940년, 일본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중국을 넘어 동남아시아로 진출했다. 다음 해,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여 중일 전쟁과 프랑스 인도차이나 침공에 대한 대응으로 일본에 대한 석유 판매를 금지했던 미국의 개입을 막으려 했다.
1945년, 일본은 미국에 항복했고, 일본 점령과 일본 사회 및 정치에서 모든 군국주의적 영향 제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1947년, 새로운 일본 헌법이 메이지 헌법을 대체하여 국가 기본법이 되었고, 천황의 통치가 의회 정부로 대체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 제국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현대 일본국이 건립되었다.
1973년, 당시 내각관방부장관 오무라 죠지는 군국주의 사상을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등의 조직을 전쟁을 위해 준비하고, 전쟁을 통해 국가의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그 때문에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의 모든 면을 군사에 종속시키는 사상”이라고 정의했다.[42] 1973년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이나 국무대신(각료)은 "군국주의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부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었다.[43]
4. 4. 필리핀

식민지 시대 이전 필리핀 사람들은 각 섬마다 통치자가 있었고, 이들 사이에 분열된 자체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산디그'(경비병), '카왈'(기사), '타노드'라고 불렸다. 또한 육지, 해안선 및 바다의 경찰과 감시자 역할도 했다. 1521년 세부 막탄의 비사야 왕인 라푸라푸는 막탄 전투에서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에 대항하여 최초로 기록된 군사 작전을 조직했다.
19세기 필리핀 혁명 기간 동안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푸가드 라윈의 함성에서 스페인에 대항하는 혁명 조직인 카티푸난을 창설했다. 주목할 만한 전투로는 발레르 포위전, 이무스 전투, 카윗 전투, 누에바 에시하 전투, 승리한 알라판 전투, 그리고 유명한 비나카얀과 달라히칸의 쌍둥이 전투가 있다. 독립 당시,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마그달로(Katipunan과 별개의 파벌)를 설립했고, 제1 필리핀 공화국 헌법에서 혁명 정부를 선포했다.
필리핀-미국 전쟁 동안 고위 장군인 안토니오 루나 장군은 모든 시민에게 징병을 명령했는데, 이는 모든 전쟁에서 필리핀군의 밀도와 인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의무적인 국가 봉사의 한 형태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필리핀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미군과 함께 일본군(1942-1945)과 싸웠다. 주목할 만한 전투 중 하나는 "해방"이라고도 불리는 승리한 마닐라 전투이다.
1970년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P.D.1081 또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필리핀을 주둔지 국가로 만들었다. 필리핀 경찰(PC)과 통합 국가 경찰(INP)에 의해 고등학교 또는 중등 및 대학 교육에는 군사 및 민족주의에 관한 필수 과정인 "시민 군사 훈련"(CMT)과 "예비 장교 훈련단"(ROTC)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1986년 헌법이 개정되면서 이러한 형태의 국가 봉사 훈련 프로그램은 필수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기본 교육의 일부로 남아 있다.[17]
4. 5. 러시아


러시아는 서쪽 국경을 보호하려는 욕구에 힘입어 오늘날까지도 오랜 군국주의 역사를 이어왔다. 유럽 대륙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잠재적인 침략자들과 유럽 러시아의 중심지 사이에는 자연적인 완충 지대가 없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 러시아는 정치적, 군사적 힘 측면에서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가 되었다. 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러시아는 시베리아, 코카서스, 동유럽으로의 영토 확장을 계속 추구하여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1917년 제정 러시아의 몰락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일부 영토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폴란드 분할과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의 발트 국가 재정복과 같은 사건들을 통해 소련이 이후 대부분을 신속하게 재정복했다. 소련의 영향력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정점에 달했으며, 이 기간 동안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이라는 군사 동맹 하에 사실상 동유럽 전체를 점령했고, 소련군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모든 것은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사라졌다. 러시아의 두 번째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불렀던 일로 러시아는 크게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지도력 하에서 부활한 현대 러시아는 소련 해체로 생겨난 국가들에서 엄청난 지정학적 영향력을 유지해 왔으며, 현대 러시아는 동유럽의 주요, 아니면 지배적인 강국으로 남아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정부는 학교에 "애국심 교육"을 도입하려는 노력을 강화했다.[18] AP통신은 일부 학부모들이 크렘린이 주도하는 ''중요한 대화'' 수업의 군국주의적 성격에 충격을 받았으며, 일부는 그것을 이전 소련의 "애국심 교육"과 비교했다고 보도했다.[19]
2023년 말까지 블라디미르 푸틴은 정부 지출의 거의 40%를 국방 및 안보에 사용할 계획이었다.[20] 영국 국방참모총장인 토니 라다킨 제독은 "이러한 수준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냉전 종식과 소련 붕괴 시점이었다"고 말했다.[21]
4. 6. 터키
오스만 제국은 수세기 동안 존속했으며 항상 군사력에 의존했지만, 군국주의는 일상생활의 일부는 아니었다. 군국주의는 1923년 오스만 제국이 새로운 국가인 터키 공화국으로 계승되면서 국가 기구의 일부가 된 현대적인 제도, 특히 학교의 출현과 함께 일상생활에 도입되었다. 공화국의 건국자들은 과거와 단절하고 국가를 현대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현대화 비전은 군사적 뿌리에 의해 제한되었다는 내재적인 모순이 있었다. 주요 개혁가들은 모두 군인들이었고, 군사 전통에 따라 모두 국가의 권위와 신성함을 믿었다. 대중 또한 군대를 믿었다. 결국 해방 전쟁(1919~1923)을 통해 국가를 이끌고 조국을 구한 것은 군대였다.[22]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군사 쿠데타는 1960년 5월 27일에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아드난 멘데레스(Adnan Menderes) 총리와 2명의 장관이 처형되었고 새로운 헌법이 도입되어 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을 심사하는 헌법재판소와 소련의 '폴리트뷰로'와 유사하게 정부 업무를 감독하는 군부가 주도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설립되었다.[22] 두 번째 군사 쿠데타는 1971년 3월 12일에 발생했는데, 이번에는 정부가 사임하고 의회를 해산하지 않고 기술관료와 관료로 구성된 내각을 설치하는 것으로 그쳤다. 세 번째 군사 쿠데타는 1980년 9월 12일에 발생하여 의회와 모든 정당이 해산되고 훨씬 더 권위주의적인 헌법이 시행되었다. 1997년 2월 28일에 "포스트모던 쿠데타"라고 불리는 또 다른 군사 개입이 있었는데, 이는 단순히 정부의 사임을 강요했고, 마지막으로 2016년 7월 15일에 실패한 군사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2010년과 2017년의 헌법 국민투표는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구성과 역할을 변경하고, 군대를 민정부의 통제하에 두었다.
4. 7. 미국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미국 정치 및 군 지도자들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에서 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새로운 산업 경제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경제 군국주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연방 정부를 개혁했다.[23] 이러한 개혁은 국가의 적절한 행정과 외교 정책 방향에 대한 신해밀턴주의 공화당원과 제퍼슨주의-잭슨주의 민주당원 간의 갈등 결과였다. 이 갈등은 기업 경영 원칙에 기반한 전문성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평신도와 정치 임명자의 손에 더 많은 지역 통제를 선호하는 사람들 간의 대립이었다. 더 전문적인 연방 공무원 제도와 강화된 대통령직 및 행정부를 포함한 이러한 투쟁 결과는 더욱 확장적인 외교 정책을 가능하게 했다.[23]미국 남북 전쟁 종전 후, 국군은 황폐해졌다. 영국, 독일, 스위스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을 모델로 하여 중앙 정부 통제에 대응하고 미래 분쟁에 대비하며 정교한 지휘 및 지원 체계를 개발할 수 있도록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혁은 전문적인 군사 사상가와 간부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사회 다윈주의 사상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에서 미국의 해외 확장을 추진하는 데 기여했다.[24][25] 이는 추가적인 행정 요구 사항으로 인해 더 효율적인 중앙 정부를 위한 수정을 필요로 했다.
미 육군 확장은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스페인의 패배로 획득한 새로운 영토(괌,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쿠바)의 점령과 통제에 필수적이었다. 이전에 법률로 정해진 2만 4천 명의 병력 제한은 1901년 2월 2일 새로운 군사법에 따라 6만 명의 정규군으로 확대되었으며, 당시 국가 비상 사태 시 대통령 재량에 따라 8만 명의 정규군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미군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위해 다시 한번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조지 S. 패튼과 같은 장교들은 전쟁 시작 당시 상급 대위였고 대령으로 임시 승진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미 해병대는 중남미의 바나나 전쟁에서 의문스러운 활동에 참여했다. 사망 당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해병대 장군인 스메들리 버틀러 예비역 장군은 파시즘과 군국주의로 이어지는 경향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버틀러는 의회에 군사 쿠데타를 위한 비즈니스 음모에 대해 보고했는데, 그가 지도자로 제안되었으며,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 확인되었지만 실제 위협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중남미 원정은 1934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의 좋은 이웃 정책으로 끝났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주요 감축이 있었기 때문에 유엔 권한 하에 한국 전쟁 초기에 대응한 부대(예: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는 준비가 되지 않아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를 해임했을 때, 민간인 통제 전통은 유지되었고 맥아더는 군사 쿠데타 암시 없이 물러났다.
냉전은 심각한 영구적인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졌다. 예비역 최고 군 지휘관 출신 민간 대통령으로 당선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퇴임하면서 군산 복합체 발전에 대해 경고했다.[26] 냉전 시대에는 헨리 키신저와 허먼 칸과 같은 많은 민간 학자와 산업 연구원들이 군사력 사용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핵 전략 복잡성과 그에 대한 논쟁은 랜드 코퍼레이션(칸이 근무했던 곳)과 같은 새로운 '방위 지식인'과 싱크탱크 그룹을 만들어냈다.[27]
미국은 베트남 전쟁 종전 이후 신군국주의 상태로 전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군국주의는 비교적 소수의 자원병에 대한 의존, 복잡한 기술에 대한 강한 의존, 군 복무를 장려하기 위해 설계된 정부 광고 및 모병 프로그램 합리화 및 확장을 특징으로 한다.[28] 조 바이든 대통령은 2023년 12월 22일 8860억달러 규모의 사상 최대 국방 지출 법안에 서명했다.[29][30]
4. 8.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군사주의는 시몬 볼리바르 숭배와 신화를 근간으로 한다.[31] 1800년대 대부분 동안 베네수엘라는 ''카우딜로''로 알려진 강력한 군사 지도자들의 통치를 받았다.[32] 1892년부터 1900년 사이에만 여섯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고, 베네수엘라 통제권을 얻기 위해 437건의 군사 행동이 있었다.[32] 베네수엘라 역사의 대부분 동안 군부가 베네수엘라를 통제하면서, 국가는 "군사적 정신"을 실천했다. 오늘날 시민들은 여전히 정부에 대한 군사 개입이 긍정적이라고 믿고 있으며, 특히 위기 시에는 많은 베네수엘라인들이 군부가 민주적 기회를 차단하는 대신 개방한다고 믿고 있다.[32]
우고 차베스가 수립한 볼리바르 정부는 시몬 볼리바르와 그러한 군사주의적 이상을 따르는 것을 기반으로 베네수엘라 제5공화국 뒤에 있는 현대 정치 운동의 상당 부분을 건설했다.[31]
참조
[1]
서적
New Oxford American Dictionary
2007
[2]
웹사이트
Militaristic - definition of militaristic by The Free Dictionary
http://www.thefreedi[...]
[3]
논문
The Rise of the Junkers in Brandenburg-Prussia, 1410-1653: Part 1
1943
[4]
간행물
''Aus dem Nachlasse'' von Georg Heinrich von Berenhorst
https://books.google[...]
Verlag von Aue in Dessau
1845
[5]
서적
Prussian Reserve, Militia & Irregular Troops 1806–15
https://books.google[...]
Publishing
2012-10-10
[6]
서적
Frontiers of Violence. Conflict and Identity in Ulster and Upper Silesia 1918-1922
Oxford University Press
[7]
서적
The Nemesis of Power
Palgrave Macmillan
[8]
웹사이트
Trends in World Military Expenditure, 2019
https://www.sipri.or[...]
2020-11-20
[9]
서적
1971: A Global History of the Creation of Bangladesh
Harvard Univ. Press
2013
[10]
뉴스
India Is Arming Villagers in One of Earth's Most Militarized Places
https://www.nytimes.[...]
2023-03-08
[11]
뉴스
How India is ramping up military modernization efforts
https://www.dw.com/e[...]
2022-01-05
[12]
뉴스
India's Military Modernization in Doubt With Tiny Budget Rise
https://www.bloomber[...]
2023-02-01
[13]
논문
Strengths and Weaknesses in the Decision-Making Process
http://content.cdlib[...]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4]
웹사이트
North Korea's Military-First Policy: A Curse or a Blessing?
http://www.brookings[...]
Brookings Institution
2006-05-26
[15]
서적
New Challenges of North Korean Foreign Policy
[16]
웹사이트
North Korea since 2000 and prospects for Inter Korean Relations
http://www.korea.net[...]
2006-01-19
[17]
서적
Militarism in the Philippines
http://quod.lib.umic[...]
[18]
뉴스
Putin's war propaganda becomes 'patriotic' lessons in Russian schools
https://www.washingt[...]
Fred Ryan
2022-03-20
[19]
뉴스
Russian students are returning to school, where they face new lessons to boost their patriotism
https://apnews.com/a[...]
Associated Press
2023-09-01
[20]
뉴스
Putin approves big military spending hikes for Russia's budget
https://www.reuters.[...]
2023-11-27
[21]
뉴스
Nearly 40% of Russian public spending on defence – UK defence chief
https://www.army-tec[...]
2023-12-15
[22]
뉴스
MGK değişti ama
https://www.ab.gov.t[...]
2007-07-04
[23]
서적
From Wealth to Power: The Unusual Origins of America's World Role
Princeton Univ. Press
1998
[24]
서적
Social Darwinism in American Thought
https://books.google[...]
Beacon Press
[25]
서적
The Encyclopedia of the Spanish-American and Philippine-American Wars: A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History
https://books.google[...]
ABC-CLIO
[26]
서적
Competing with the Soviets: Science, Technology, and the State in Cold War America
Johns Hopkins Univ. Press
2013
[27]
서적
The Wizards of Armageddon
1983
[28]
서적
The Collapse of Fortress Bush: The Crisis of Authority in American Government
http://www.nyupress.[...]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8
[29]
뉴스
Biden signs record $886 billion defense bill into law
https://www.axios.co[...]
2023-12-23
[30]
뉴스
Biden signs defense policy bill, extending controversial spying program
https://www.politico[...]
2023-12-22
[31]
서적
Venezuela: Revolution as Spectacle
See Sharp Press
2012
[32]
서적
Political Communication and Leadership: Mimetisation, Hugo Chavez and the Construction of Power and Identity
Routledge
2015
[33]
웹사이트
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ミリタリズム」の解説
https://kotobank.jp/[...]
2021-12-27
[34]
웹사이트
軍国主義とは
https://kotobank.jp/[...]
2021-08-28
[35]
백과사전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36]
서적
ファークツ
[37]
서적
ファークツ
[38]
서적
ファークツ
[39]
서적
ファークツ
[40]
서적
ファークツ
[41]
뉴스
2015년 러시아의 대독일 전승 70주년 기념식전
https://www.nikkei.c[...]
니혼게이자이 신문
null
[42]
간행물
1973년 12월 19일 衆議院 건설위원회 회의록
일본 국회
1973-12-19
[43]
법률
일본국헌법 제66조 2항
null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반딧불이의 묘’를 기억한다면 [특파원 칼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