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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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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종실록》은 조선 성종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으로, 1469년 12월부터 1494년 12월까지 25년간의 기사를 담고 있으며, 1495년 4월부터 1499년 9월까지 편찬되었다. 총 29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1,170만 자에 달한다. 《성종실록》은 성종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제공하며, 특히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각종 문물 제도가 정비된 시대상을 보여준다. 또한, 김일손 등이 사관으로 참여하여 세조의 비행을 기록한 사초가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는 등 역사적 사건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일부 실록이 보존되어 있으며, 밀랍본 7책을 포함하여 총 11책이 상태 불량으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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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기본 정보
성종실록 표지
성종실록 표지
이름성종강정대왕실록(成宗康靖大王實錄)
297
47

2. 편찬 과정

《성종실록》은 1469년(성종 즉위년) 음력 11월부터 1494년(성종 25년) 음력 12월까지 총 25년 1개월에 걸친 성종 시대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총 297권 4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원본은 활자본이다.

1495년(연산군 1년) 음력 4월 19일, 연산군은 영의정 노사신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종실록》 편찬을 명했다.[1] 편찬 작업은 무오사화 발생에도 불구하고 큰 지장 없이 진행되어 1499년(연산군 4년) 음력 5월에 완료되었고, 편찬자들은 포상을 받았다.[2]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이 소실되자, 1603년(선조 36년)부터 1606년(선조 39년) 사이에 모든 실록을 다시 인쇄하였다. 이때 《성종실록》도 3부가 다시 간행되어 전주사고본 및 교정본을 포함하여 총 5부가 있게 되었으나,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춘추관에 보관하던 1부는 소실되었다. 이후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에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3]

2. 1. 편찬 배경

연산군 즉위 후 영의정 노사신, 우의정 정괄 등이 《성종실록》 편찬을 건의하여 1495년(연산군 1년) 음력 4월 19일 연산군이 이를 허락하였다. 무오사화가 발생했으나, 실록 편찬은 1499년(연산군 4년) 음력 5월에 완료되어 편찬자들에게 포상이 내려졌다.[1][2]

편찬에는 총 89명이 참여했으며, 영관사는 신승선, 감관사는 어세겸, 성준 등이었다. 처음에는 신승선이 총재관을 맡았으나, 이후 성준으로 교체되었다.

2. 2. 편찬 참여 인물

《성종실록》 편찬에는 총 89명이 참여하였다. 영관사는 신승선, 감관사는 어세겸성준 등이 담당하였다.[1] 처음에 신승선이 총재관을 맡다가 후에 성준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2. 3. 무오사화의 발생

김일손은 당시 《성종실록》의 사관으로 참여하면서 세조가 아들 덕종의 후궁 귀인 권씨귀인 윤씨를 범하려 했다는 내용을 사초에 기록하였다.[4] 이튿날 김일손이 《조의제문》까지 사초에 실은 것이 밝혀졌다.[5] 특히 유자광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을 초나라 의제에 빗대어 비난하기 위해 실었다고 주장하며,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의 문집에서 《조의제문》이 실린 것을 찾아내었다. 유자광은 이를 발전시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6] 훗날 김일손 등은 참형을 당하였고, 이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등은 파직되었다.[7]

한편 무오사화는 다른 사화들과는 달리 "사화(史禍)"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무오사화의 원인이 《성종실록》의 사초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8]

3. 내용 구성 및 특징

《성종실록》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각종 문물 제도가 정비된 성종 시대의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역사 및 문화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3]

3. 1. 권수 및 체제

《성종실록》은 1472년(성종 3년) 음력 1월 기사부터(제14권에 해당)는 기사량에 상관 없이 1개월분을 1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역대 《조선왕조실록》 중 권수가 가장 많다.[3][9] 보통 실록은 1권을 1책으로 묶지만, 《성종실록》은 2~6권이 1책으로 묶인 경우가 있다.[1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실록이 일부 있는데, 이 중 《성종실록》은 총 7책이며 밀랍본이다. 표지가 바뀐 제63권과 화재로 약간 훼손된 제96~99권 등이 있다.[10] 대한민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성종실록》 밀랍본 중 총 11책을 상태 불량으로 분류했다.[11]

《성종실록》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각종 문물 제도가 정비된 성종 시대의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역사 및 문화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3]

3. 2. 사료적 가치

《성종실록》은 1472년(성종 3년) 음력 1월 기사부터는 기사량에 상관없이 1개월분을 1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역대 《조선왕조실록》 중 권수가 가장 많다.[3][9] 실록은 보통 1권을 1책으로 묶지만, 《성종실록》은 2~6권이 1책으로 묶인 경우가 있다.[1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실록이 일부 있는데, 이 중 《성종실록》은 총 7책이며 밀랍본이다. 표지가 바뀐 제63권과 화재로 약간 훼손된 제96~99권 등이 있다.[10] 대한민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성종실록》의 밀랍본 중 총 11책을 상태 불량으로 분류했다.[11]

《성종실록》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각종 문물 제도가 정비된 성종 시대의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역사 및 문화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3]

3. 3. 현존본 및 훼손 상태


  • 《성종실록》은 제14권에 해당하는 1472년(성종 3년) 음력 1월 기사부터는 기사량에 상관 없이 1개월분을 1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역대 《조선왕조실록》 중 권수가 가장 많다.[3][9]
  • 실록은 1권을 1책으로 묶는 것이 일반적이나, 《성종실록》은 2~6권이 1책으로 묶인 경우가 있다.[10]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실록이 일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중 《성종실록》은 총 7책이며, 밀랍본이다. 표지가 바뀐 제63권과 화재로 약간 훼손된 제96~99권 등이 있다.[10]
  • 《성종실록》의 밀랍본 중 총 11책은 대한민국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상태 불량으로 분류되었다.[11]

4. 무오사화와의 관계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사관 김일손이 세조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을 사초에 기록하고, 특히 《조의제문》을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4][5] 유자광은 이를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김종직의 문집을 증거로 제시하며 무오사화를 일으켰다.[6] 이로 인해 김일손 등은 처형되었고, 관련자들은 파직되었다.[7] 무오사화는 그 원인이 《성종실록》의 사초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화와 달리 '사화(史禍)'로 표기되기도 한다.[8]

4. 1. 김일손의 사초

당시 《성종실록》의 사관으로 참여하던 김일손은 세조가 아들 덕종의 후궁 귀인 권씨귀인 윤씨를 범하려 했다는 내용을 사초에 기록하였다.[4] 이튿날 김일손이 《조의제문》까지 사초에 실은 것이 밝혀졌다.[5] 유자광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의 보위를 찬탈한 것을 초나라 의제에 빗대어 비난하기 위해 실었다고 주장하며,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의 문집에서 《조의제문》이 실린 것을 찾아내어 무오사화를 일으켰다.[6] 후일 김일손 등은 참형을 당하였고, 이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등은 파직되었다.[7]

4. 2. 조의제문

김일손이 세조가 아들 덕종의 후궁 귀인 권씨귀인 윤씨를 범하려 했다는 내용을 사초에 기록한 사실과,[4]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밝혀졌다.[5] 유자광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의 보위를 찬탈한 것을 초나라 의제에 빗대어 비난하기 위해 실었다고 주장하며,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의 문집에서 《조의제문》이 실린 것을 찾아내어 무오사화를 일으켰다.[6]

4. 3. 사화(史禍)

당시 《성종실록》의 사관이었던 김일손은 세조가 아들 덕종의 후궁 귀인 권씨귀인 윤씨를 범하려 했다는 내용을 사초에 기록하였다.[4] 이튿날 김일손이 《조의제문》까지 사초에 실은 것이 밝혀졌다.[5] 유자광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을 초나라 의제에 빗대어 비난하기 위해 실었다고 주장하며,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의 문집에서 《조의제문》을 찾아내 무오사화를 일으켰다.[6] 김일손 등은 참형을 당하였고, 이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등은 파직되었다.[7]

무오사화는 다른 사화들과 달리 "사화(史禍)"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무오사화가 《성종실록》의 사초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8]

참조

[1] 서적 연산군일기 4권, 연산 1년 4월 19일 임신 2번째기사
[2] 서적 연산군일기 32권, 연산 5년 3월 10일 기사 2번째기사
[3]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성종실록〉항목 https://terms.naver.[...]
[4] 서적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2일 병오 2번째기사
[5] 서적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3일 정미 3번째기사
[6] 웹사이트 《네이버캐스트》〈무오사화〉 http://navercast.nav[...]
[7] 서적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7일 신유 1번째기사
[8]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무오사화〉항목 https://terms.naver.[...]
[9]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실록〉항목 https://terms.naver.[...]
[10] 뉴스 "<조선왕조실록> ①국보 지정서 빠진 60여책 더 찾았다" https://news.naver.c[...] 2016-12-20
[11] 뉴스 "<조선왕조실록> ③손상 밀랍본 어쩌나…15년째 제자리걸음" https://news.naver.c[...] 20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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