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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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도성은 유송 말기에 군공을 세워 권력을 잡은 인물로,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고 황제를 폐위시킨 뒤 순제를 옹립했다. 이후 심유지마저 제거하고 479년에 순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 고제가 되었다. 그는 권력 장악 과정에서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유송 황족을 대량 학살하여 비판을 받았으며, 내정에서는 호적을 정비하고 사병을 제한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482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소색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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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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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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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소도성 (蕭道成) |
자 | 소백 (紹伯) |
묘호 | 태조 (太祖) |
시호 | 고황제 (高皇帝) |
씨 | 소(蕭) |
봉국 | 낭릉 소씨 (蘭陵 蕭氏) |
출생 | 427년 |
사망 | 482년 4월 11일 |
매장지 | 태안릉 (泰安陵, 현재의 단양, 강소성) |
통치 정보 | |
정치 체제 | 황제 |
재위 기간 | 479년 5월 29일 – 482년 4월 11일 |
연호 | 건원 (建元) |
연호 기간 | 479-482년 |
후계자 | 무제 |
왕조 | 남제 |
가족 관계 | |
부친 | 소승지 (蕭承之) |
모친 | 진도정 (陳道正) |
배우자 | 고조황후 (高肇皇后, 추증) |
배우자 유형 | 비 |
자녀 | 가족 섹션 참조 |
2. 생애
유송에서 군공을 세운 소도성(蕭道成)은 남난릉 출신의 하급병사로 시작하여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며 권력자가 되었다. 474년 유송 후폐제(後廢帝)의 숙부 유휴범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도성은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건강 외곽의 방어 진지를 지키고 유휴범과 적극적으로 교전하지 않아 그를 교착 상태에 빠뜨려 식량 공급이 고갈되도록 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유휴범은 소도성의 부관 황회와 장경아의 계략으로 암살되었고, 그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이후 소도성은 유욱을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한 뒤, 명제의 고명대신 심유지마저 제압했다. 477년, 후폐제는 소도성을 죽이려 했으나, 소도성은 양옥부(楊玉夫)를 시켜 후폐제를 살해했다. 소도성은 순제를 옹립한 후, 심유지·원찬·유병 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조정 정치를 장악했다.
479년 순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한 고제(高帝) 소도성은 검소함을 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3] [4] [5] [6] 같은 해, 고제는 아들 소색과 다른 아들들, 그리고 소색의 장남 소장무를 왕자로 봉했다.
479년 겨울, 북위가 공격을 시작했으나 수양을 포위하는 데 실패한 후 공격을 중단했다. 481년 봄까지 북위와 남제군은 소규모 국경 전투를 계속했지만, 더 이상의 대규모 군사 작전은 없었다. 고제는 내정 면에서 호적을 정비하고 부곡(사병)을 제한하는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
482년 고제 소도성은 재위 3년 만에 사망하고, 태자 소색이 그의 뒤를 이어 무제가 되었다.
2. 1. 유송 시대의 활약
유송 말기, 소도성은 남난릉 출신의 하급 병사 신분으로 서서히 출세하여 유송 왕실의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후 황제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유욱을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하였다. 명제의 고명대신 심유지마저 제압하고 479년 순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하였다.[3] 심유지(沈攸之)의 아들 심문화(沈文和)가 바로 소도성의 사위(부마)였으니, 사돈끼리 전쟁을 벌여 살육을 한 셈이다.명제의 재위 기간 동안 소도성의 이목구비가 특이하고 그가 황제가 될 징조라는 소문이 돌았다. 471년, 이미 아들인 유유 태자가 죽은 후 충성을 다하지 않을까 두려워 형제 대부분과 일부 고위 관료를 숙청한 명제는 소도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명제는 소도성의 친구인 장군 오희()에게 밀봉된 술 항아리를 회음에 보내 소도성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소도성은 그 술이 독주일까 두려워 북위로 도망갈 준비를 했다. 오희는 비밀리에 소도성에게 그 술에 독이 없다고 말하고, 소도성이 감히 마시기 전에 먼저 술을 마셨다.
오희가 수도 건강으로 돌아오자, 그는 명제에게 소도성이 충성심을 보인다고 확신시켰다. 그러나 오희가 소도성에게 정보를 누설했다는 사실이 명제에게 알려지자 명제는 오희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명제는 소도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얼마 후 소도성을 건강으로 소환했다. 소도성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명제가 그를 죽일 것이라고 의심하고 저항할 것을 제안했지만, 소도성은 명제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건강으로 돌아와 태자 유유의 경호대 사령관이 되었다. 472년 명제가 위독해지자 소도성의 친구인 고위 관리 초연의 추천으로 소도성은 수도 방어군 사령관이 되었다. 명제는 곧 사망했고, 태자 유유는 후폐제로 즉위했다.
474년, 유송의 후폐제(後廢帝)의 숙부인 유휴범(劉休範)()은 자신이 섭정으로 임명되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켜 신속하게 건강(建康)으로 진격했다. 소도성(蕭道成)은 유휴범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건강 외곽의 강력한 방어 진지를 지키고 유휴범과 적극적으로 교전하지 않아 그를 교착 상태에 빠뜨려 식량 공급이 고갈되도록 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유휴범의 군대는 곧 도착했다. 유휴범은 소도성의 방어 진지를 직접 공격했다. 소도성의 승인으로, 그의 부관 황회()와 장경아()는 유휴범에게 거짓으로 항복한 후 소도성이 또한 항복하려 한다는 정보를 유휴범에게 알렸다. 비밀리에 정보를 전달하는 척하면서, 장경아와 황회는 유휴범을 암살했다. 유휴범의 군대는 다양한 방어 진지에 대한 포위를 강화했다. 소도성은 간신히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지만, 유휴범의 장군 정문호(丁文豪|정문호중국어)는 유면()과 왕도륭(王道隆|왕도륭중국어)을 격파하고 죽여 궁궐을 포위할 수 있었다. 곧, 유휴범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점차 알려지면서 정문호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유휴범의 패배 이후, 소도성은 승진했다. 그는 원찬(袁粲), 초원(褚淵), 그리고 후폐제(後廢帝)의 먼 친척인 유병(劉秉)과 함께 국정을 담당했으며, "사귀(四貴)"로 알려졌다. 476년, 후폐제(後廢帝)의 사촌인 유경소()는 건강이 혼란에 빠졌다는 잘못된 정보를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소도성은 유경소(劉景素)에 대한 작전을 조율했고 (비록 그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유경소는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
477년, 당시 14세였던 후폐제(後廢帝)는 점점 더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갔으며, 종종 호위병과 함께 궁궐 밖을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사람이나 동물을 모두 죽였다. 어느 날, 후폐제는 갑자기 소도성의 사령부에 들이닥쳐 소도성이 벌거벗고 자고 있는 것을 보았다. 후폐제는 소도성의 큰 배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소도성을 깨워 소도성의 배에 과녁을 그리고 화살을 쏘려고 했다. 소도성은 목숨을 구걸했고, 후폐제(後廢帝)의 시종 왕천은(王天恩|왕천은중국어)은 그가 화살로 소도성을 죽이면 훌륭한 과녁인 소도성의 배를 잃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왕천은의 제안에 따라 후폐제(後廢帝)는 뼈로 만든 둥근 화살로 소도성을 쏘았고 소도성의 배꼽을 성공적으로 맞히자 기뻐했다. 소도성은 이 사건 이후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처음에는 원찬과 초연에게 황제를 폐위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지만 그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소도성은 결국 혼자 행동하여 후폐제(後廢帝)의 시종들과 어울렸고, 결국 그 중 한 명인 양옥부()로 하여금 후폐제(後廢帝)가 잠든 사이에 그를 죽이게 했다. 소도성은 그 후 원찬과 유병에게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부여하도록 강요했고, 이는 소도성이 다음으로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소도성은 후폐제의 동생인 유준을 안성왕으로 옹립하여 황제로 삼았다(순제). 이에 장군 심유지는 자신의 형주(荊州, 현대 후베이성 중부 및 서부) 군대를 일으켜 소도성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원찬과 유병 또한 그것이 소도성의 의도라고 믿었다. 소도성이 심유지를 상대로 출정을 준비하면서, 그들은 몰래 건강에서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켜 소도성을 전복시키려 했다. 원찬은 초연의 지원 없이는 계획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초연에게 이 음모를 알렸다. 소도성과 친분이 있던 초연은 즉시 소도성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를 알지 못한 원찬은 준비를 계속했고, 많은 장군들과 연합하여 봉기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유병은 준비 단계에서 당황하여 예정된 시간보다 몇 시간 전에 석두성 요새에 있는 원찬의 방어 진지로 도망갔고, 이는 소도성을 경계하게 하여 그가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소도성은 원찬 및 유병과 연합한 여러 장군들을 행동하기 전에 체포하여 처형했다. 소도성의 군대는 석두에서 원찬의 방어를 포위하여 원찬과 유병을 살해했다.
한편, 심유지가 합류를 요청한 각 주 지사들은 모두 거절하고 그를 저항하거나 옹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유지는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황실 군대 장군들은 그와 맞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심유지는 처음에는 건강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그러나 그는 영성(郢城, 현대 후베이성 우한)을 지나면서, 영주 자사이자 무릉왕인 유찬()의 참모인 유세룡(柳世隆|유세룡중국어)의 모욕에 의해 멈춰서 잘 방비된 영성을 포위하게 되었다.
478년, 영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심유지의 군인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심유지는 탈영병 지휘관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가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고, 이는 ''그들''이 탈영하게 만들었다. 심유지의 부관 유랑병()은 유세룡에게 항복했고, 이로 인해 그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심유지는 강릉 (형주의 수도)으로 퇴각하려 했다. 그가 그렇게 했을 때, 소도성이 심유지를 후방에서 공격하게 할 의도로 옹주(雍州, 현대 허난성 남서부 및 후베이성 남서부) 지사로 임명한 장경이 이미 강릉을 점령하고 심유지가 강릉을 담당하도록 맡겨둔 심원언을 살해했다. 강릉이 함락된 것을 본 심유지의 남은 군대는 붕괴되었고, 심유지는 처음에는 도망치려 했지만 자신의 도주로가 막혔다는 것을 깨닫고 자결했다. 소도성은 이제 실질적인 반대 없이, 특히 황휘가 유경숙 및 원찬과 공모한 혐의로 연루된 후 그해 말에 불복종의 징후를 보이자 그를 처형한 후 더욱 그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아들들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고귀한 신분의 관료인 왕건을 핵심 조력자로 기용했고, 초연의 묵시적 동의하에 황제의 동생들을 몰래 암살하는 등 왕위를 향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479년, 불과 두 달 동안 그는 순제에게 자신을 제나라 공작으로, 그 다음 제나라 왕으로 만들고, 구석을 하사받게 했는데, 이는 모두 왕위를 향한 점진적인 단계였다.
2. 2. 남제 건국과 통치
479년 순제에게서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한 고제(高帝) 소도성은 낭비와 사치를 억제하고 검소함을 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고제는 스스로 검소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러한 정책이 관리들과 귀족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하다.[3] [4] [5] [6]479년, 고제가 전 황제(순제)를 감시하기 위해 배치한 경비병들이 여음왕(전 순제)의 저택 근처에서 말을 타고 있던 사람을 반란 시도로 오인하여 여음왕을 살해했다. 고제는 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포상했으며, 유송 황족들을 대량 학살했다. 같은 해, 고제는 아들 소색(당시 유능한 장군)과 다른 아들들, 그리고 소색의 장남 소장무를 왕자로 봉했다.
한편, 고제는 북위가 465년에 전폐제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북위로 도망친 유창을 앞세워 유송을 재건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고제는 대규모 공격을 예상하고 북쪽 변경을 방어했으며, 479년 겨울 북위가 공격을 시작했으나 수양을 포위하는 데 실패한 후 공격을 중단했다. 진나라와 유송 시대 내내 건강 주변에는 성벽이 건설되지 않았기에, 고제는 건강 주변에 성벽을 건설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481년 봄까지 북위와 남제군은 소규모 국경 전투를 계속했지만, 더 이상의 대규모 군사 작전은 없었다.
고제는 내정 면에서 호적을 정비하고 부곡(사병)을 제한하는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남제는 23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482년 봄, 고제 소도성은 재위 3년 만에 사망하고, 태자 소색이 그의 뒤를 이어 무제가 되었다.
3. 가계
배우자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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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황후 유지용(高昭皇后 劉氏 劉智容) | |
태비 나씨(太妃 羅氏) | 5남: 무릉소왕 소엽(武陵昭王 蕭曄) |
태비 임씨(太妃 任氏) | 6남: 안성공왕 소고(安成恭王 蕭暠) |
태비 하씨(太妃 何氏) | |
귀빈 사씨(貴嬪 謝氏) | |
수의 육씨(修儀 陸氏) | |
수용 원씨(修容 袁氏) | 8남: 계양왕 소삭(桂陽王 蕭鑠) |
귀인 구씨(貴人 區氏) | 11남: 형양왕 소균(衡陽王 蕭鈞) |
숙비 장씨(淑妃 張氏) | |
미인 이씨(美人 李氏) | 15남: 남평왕 소예(南平王 蕭銳) |
생모 미상 |
3. 1. 조상
소도성의 조상은 전한의 승상 소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다. 소도성은 소하의 24대손이라고 주장했다. 서진과 유송 시대에 소씨 가문은 하급 관리로 봉직했다. 아버지 소승지는 송 문제 휘하의 장군으로, 북위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진흥 남작에 봉해졌다.3. 2.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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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황후 유지용(高昭皇后 劉氏 劉智容) | |
태비 나씨(太妃 羅氏) | 5남: 무릉소왕 소엽(武陵昭王 蕭曄) |
태비 임씨(太妃 任氏) | 6남: 안성공왕 소고(安成恭王 蕭暠) |
태비 하씨(太妃 何氏) | |
귀빈 사씨(貴嬪 謝氏) | |
수의 육씨(修儀 陸氏) | |
수용 원씨(修容 袁氏) | 8남: 계양왕 소삭(桂陽王 蕭鑠) |
귀인 구씨(貴人 區氏) | 11남: 형양왕 소균(衡陽王 蕭鈞) |
숙비 장씨(淑妃 張氏) | |
미인 이씨(美人 李氏) | 15남: 남평왕 소예(南平王 蕭銳) |
생모 미상 |
4. 연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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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Nan Qi Shu
[2]
서적
Book of Southern Qi
482-04-11
[3]
서적
資治通鑑
[4]
서적
資治通鑑
[5]
서적
資治通鑑
[6]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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