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회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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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회황후 유씨는 북송 철종의 후궁으로, 철종의 총애를 받아 황후 맹씨를 폐위시키고 황후가 되었다. 철종 사후에는 황태후가 되었으나, 휘종의 수렴청정을 시도하고 간통을 하는 등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휘종의 미움을 받았다.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했으며, '회'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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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회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유황후 |
별칭 | 소회황후 |
정배 칭호 | 북송의 황후 |
재위 기간 | |
황후 | 1099년 9월 24일 - 1100년 2월 23일 |
원부황후 | 1100년 2월 25일 - 1103년 3월 14일 |
황태후 | 1103년 3월 14일 ~ 1113년 2월 26일 |
생애 | |
출생 | 1079년 |
출생지 | 개봉부 |
사망 | 1113년 2월 26일 |
사망지 | 개봉부, 숭은궁 |
매장지 | 영태릉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유안성 |
어머니 | 강국태부인 왕씨 |
배우자 | 철종 |
자녀 | 덕강공주 (숙신제희) 의녕공주 (순미제희) 조무 |
2. 생애
유씨는 철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으며, 맹황후가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유씨는 철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들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1]
선인태후가 붕어하자 평창군군에 봉해졌다. 1095년 5월 미인으로, 10월에는 첩여로 진봉되었다. 철종은 유씨를 깊이 총애했고, 맹황후와 유씨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생겼다. 유씨는 맹황후를 경멸하며 측실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1096년 액정의 옥이 일어나[6] 맹씨는 저주[7], 미약 사용[8], 병원 투여[9] 죄로 폐위되었다.
이후 유씨는 완의(종1품 빈)로 진봉되었고, 1097년 딸 (순미제희)을 낳아 현비가 되었다. 2년 후 아들 (조무)을 낳아 황후가 되었으나, 두 아이는 잇따라 요절했다. 철종은 슬픔에 잠겨 건강을 해쳤고, 1100년 정월 붕어했다.
철종 붕어 직후, 황태후 향씨는 유씨를 폐위하려 했으나, 휘종의 중재로 면했다. 향씨는 맹씨를 황후로 복위시켜 원우황후로 칭하고, 유씨보다 높은 대우를 받게 했다. 이후 살해된 탁씨가 조무의 생모라는 소문이 돌았다. 같은 해 5월, 유황후는 상소문으로 결백을 주장하며 공개 심판을 청구했다. 1101년 휘종은 유황후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이듬해 맹씨는 다시 폐위되었다. 유씨는 태후로 존칭되었고, "숭은"이라는 휘호가 내려졌다.
1113년 2월, 유씨는 급사했다. 하인에게 강요당해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휘종은 유씨가 외신과 밀통하고 수렴청정을 원했다는 이유로 폐위를 준비했지만, 측근들의 헌책으로 자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사후 "회"라는 시호를 받았고, 철종의 영태릉에 합장되었다.
2. 1. 황후 이전
소회황후 유씨는 유안성(劉安成)의 딸로, 본래 철종의 시녀였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름답고 총명하여 철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 총애를 믿고 당시 황후였던 맹황후를 경멸하고 도발하는 등 무례한 언행을 일삼았다.[1]1095년 5월, 미인(美人)에 진봉되고 같은 해 10월 첩여(婕妤)에 진봉되었다.[6] 철종은 유씨를 깊이 총애했고, 맹황후와 유씨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생겼다. 유씨는 맹황후에게 측실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철종과 맹황후의 관계는 좋지 않았는데, 철종은 섭정 고황후가 맹씨를 황후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녀를 싫어했을 가능성이 있다.[2] 철종은 유씨가 맹황후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용인했고, 심지어 장려했을 수도 있다.
몇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사건 | 내용 |
---|---|
제사 시중[7] | 1097년 9월, 철종이 제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 유씨(당시는 미인)가 철종 곁에서 시중들었다. 원래 황제 외에는 모두 물러나서 바라봐야 하는 자리였는데, 상안민이 간했지만 철종은 그의 말에 화를 냈다. |
경령궁 참배[8] | 1098년, 후비들이 경령궁(선대 황제들의 영위)에 참배했다. 맹황후가 일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다른 비빈들은 곁에 서 있었지만, 유제여는 황후에게 등을 돌리고 어렴풋한 휘장 아래에 서 있었다. 맹황후의 시녀인 진영아가 물러가라고 말했지만, 유제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
신춘첩자[9] | 북송 시대에 한림학사들은 황제, 황후, 비빈에게 "신춘첩자"(연하 시)를 바쳤다. 1099년 신춘, 채경은 유현비를 위해 시를 지어 "삼십육궁인 제일, 옥루심처 몽웅비"라고 읊었다. |
2. 2. 황후 시절
1096년, 철종의 황후였던 소자성헌황후 맹씨가 주술과 미신 행위를 했다는 모함을 받아 폐위되자, 소회황후 유씨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황후가 되었다.[6][7][8][9]1097년, 양국공주를 낳아 현비(賢妃)로 책봉되었으며, 1099년 아들 조무(趙茂)를 낳자 철종은 매우 기뻐하며 유씨를 황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황후가 된 기쁨도 잠시, 양국공주와 헌민태자 조무가 잇달아 요절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에 소회황후는 큰 슬픔에 잠겼고, 철종 또한 상심하여 슬퍼하다 병을 얻어 1100년 세상을 떠났다.
철종과 맹황후의 관계는 좋지 않았는데, 철종은 섭정 고황후가 맹황후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녀를 싫어했을 가능성이 있다.[2] 철종은 유비(劉妃)가 맹황후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용인하고, 심지어 장려했을 수도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철종의 시어머니인 향태후는 맹황후를 더 총애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맹황후와 유비 모두 성격이 좋지 않아 감정 싸움을 벌였고, 이로 인해 조정에서 몇 차례 소란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1096년, 맹황후는 마술 혐의로 고발되는 스캔들에 휘말렸다. 맹황후의 어린 딸이 병에 걸리자, 황후는 언니에게 조언을 구했고, 언니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도교의 부적 물을 가져왔다. 궁궐에서 금지된 행위였지만, 황제는 해롭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술에 대한 소문이 황후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아기의 병세가 악화되자 황후는 아이 옆에서 "지전(紙錢, 종이 돈)"을 발견하고 유비가 자신을 상대로 마술을 썼다고 의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승, 내시, 그리고 맹황후의 양어머니가 황후를 돕기 위해 마술을 사용한 혐의로 고발되어 맹황후도 연루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30명의 궁녀와 내시가 고문을 받았고, 여승과 내시는 유비를 향해 흑마술을 사용한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맹황후의 양어머니는 황제가 황후와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해 마술을 사용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결국 맹황후는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나 도관으로 보내졌다.
1099년, 유씨는 황제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이는 황제가 그녀를 황후로 만들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루게 했다. 1100년 12월 27일, 유비는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향태후와 여러 관리들의 반발을 샀는데, 많은 사람들이 유씨가 맹황후의 마녀 재판과 강등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1100년, 철종의 뒤를 이어 이복 동생인 송휘종이 즉위했고, 법적인 어머니인 향태후를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다. 향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철종이 맹황후를 강등시키고 유씨를 총애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입장을 밀어붙였다. 그녀는 강등이 조작된 것이라 선언하고, 맹씨에게 황후의 지위를 돌려줘야 하며, 유씨는 황후 지위에서 박탈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황제가 죽은 형제의 과부의 지위를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는 조정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타협으로 1100년 6월 23일, 향태후는 맹씨에게 황후의 지위를 되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유씨의 칭호를 박탈하는 데는 실패하여, 철종은 두 명의 태후를 두게 되었다.
2. 3. 황태후 시절
1100년 휘종이 즉위하자 황태후였던 흠성헌숙황후 상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황태후 상씨는 유황후를 폐위시키려 하였으나 휘종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황태후 상씨는 철종이 폐위시킨 소자성헌황후 맹씨를 복위시키고 원우황후(元祐皇后)로 칭하였으며, 유황후는 '''원부황후'''(元符皇后)로 칭하여 맹황후보다 낮은 지위를 부여하였다.[13]1101년 흠성헌숙황후가 붕어하였고, 휘종은 철종의 정후였던 맹황후를 다시 폐위시켰다. 1103년 휘종은 유황후를 ''''숭은궁황태후'''(崇恩宮皇太后)'로 존숭하였다.[11]
유태후는 조정 일에 관여하고, 휘종이 병상에 있는 틈을 타 수렴청정을 시도하려다 실패하는 등 군신들의 불만을 샀다. 또한 외간 남자와 간통하는 등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휘종의 눈 밖에 났다.
2. 4. 죽음
1113년, 휘종은 유태후가 외간인과 간통하는 음행을 저지르고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폐위를 추진했고, 비복들로 하여금 유태후에게 모욕을 주게 하였다. 유태후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커튼 고리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사후 '소회(昭懷)'라는 시호를 받고 철종의 영태릉에 합장되었다.[11]2. 5. 맹황후 폐위 사건
1096년, 철종의 황후 맹황후는 주술과 미신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모함을 받아 폐위되었고, 그 자리는 소회황후 유씨가 대신하게 되었다.[6][7][8][9] 철종과 맹황후의 관계는 좋지 않았는데, 철종은 섭정 고황후가 맹황후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녀를 싫어했을 가능성이 있다.[2] 철종은 유씨가 맹황후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용인하고, 심지어 장려했을 수도 있다고 전해진다.맹황후가 마술 혐의로 고발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맹황후의 어린 딸이 병에 걸리자, 황후는 언니에게 조언을 구했고, 언니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도교 부적 물을 가져왔다. 궁궐에서 그러한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황제는 해롭지 않다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술에 대한 소문이 황후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아기의 병세가 악화되자 황후는 아이 옆에서 "지전(紙錢, 종이 돈)"을 발견하고 유씨가 자신을 상대로 마술을 썼다고 의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승, 내시, 그리고 맹황후의 양어머니가 황후를 돕기 위해 마술을 사용한 혐의로 고발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30명의 궁녀와 내시가 고문을 받았고, 여승과 내시는 유비를 향해 흑마술을 사용한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맹황후의 양어머니는 황제가 황후와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해 마술을 사용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결국 맹황후는 황후 자리에서 쫓겨나 도관으로 보내졌다.
이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유씨가 맹황후의 마녀 재판과 강등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2. 6. 수렴청정 시도 및 음행
1101년 흠성헌숙황후가 붕어하자 휘종은 철종의 정후인 맹황후를 다시 폐위시켰다. 1103년 휘종은 유황후를 '''숭은궁황태후(崇恩宮皇太后)'''로 존숭하였다.[11]유태후는 조정 일에 관여하고, 휘종이 병상에 있는 틈을 타 수렴청정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여 군신들의 불만을 샀으며, 휘종의 눈 밖에 났다. 또한 외간 남자와 간통하는 등 음행을 저질러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부친 | 유안성 | ? | ? | |
모친 | 미상 | ? | ? | |
남편 | 철종 | 1077년[14] | 1100년 | 북송 제7대 황제 |
장녀 | 진국대장공주 | 1096년 | 1164년 | |
차녀 | 양국공주 | 1097년 | 1099년 | |
장남 | 헌민태자 조무 | 1099년 | 1099년 |
4. 평가
소회황후 유씨는 미천한 신분에서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권력욕과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로 평가된다. 유씨는 뛰어난 업무 능력과 총명함을 지녔으나, 성격이 급하고 자유분방하여 궁중 내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원우황후 맹씨와의 갈등은 심각했으며, 맹씨가 폐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6][7][8][9]
유씨는 아들 조무를 낳고 황후가 되었으나, 아들과 딸이 잇따라 요절하는 불행을 겪었다. 철종 사후에는 흠성황후에 의해 폐위될 뻔했으나, 휘종의 중재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맹씨와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결국 유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일부에서는 유씨가 외신과 밀통하고 수렴청정을 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씨의 행적은 권력의 덧없음과 도덕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참조
[1]
문서
[2]
서적
Emperor Huizong
https://www.hup.harv[...]
Harvard University Press
2014
[3]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https://www.routledg[...]
Routledge
2014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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